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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이다.

달력에 적힌 2020이라는 글씨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 먼 미래라고 생각했던 그런 시간을 사는 느낌이다. 최근 코로나19라는 새로운 바이러스로 인해 전 세계가 고통을 받고 있지만, 의학의 발달과 의료기술이 발전해 오면서 인류에 등장했던 대부분 질병은 치료가 가능한 수준이 되었다.

머지않아 코로나19도 치료와 관리 가능한 질병이 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 인류가 노동을 시작하면서 지금까지 극복하지 못한 고질병이 있다. 바로 일하는 일터에서 다치고 죽는 산업재해라는 질병이다. 올해만 하더라도 일터에서 많은 노동자가 목숨을 잃거나 다쳤다.

일터에서 발생한 사고를 살펴보면 기술과 사회발전이 무색할 만큼 너무도 원초적이다. 아직도 노동자들이 일터에서 떨어지고, 기계에 끼이고, 유독 물질에 중독된다. 돌아보면 하나같이 조금만 주의를 기울일 수 있었다면 사전에 막을 수 있었던 사고들이다. 안타까운 죽음에 남겨진 사람들은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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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 vs. 근로자 

용어의 사용과 관련하여 현행 근로기준법을 비롯한 노동관계법에서는 일하는 노동자를 ‘근로자’로 호칭하고 있다. 하지만 ‘근로자(勤勞者)’라는 표현은 ‘근면한 노동자’라는 뜻으로 노동자를 사용자와의 종속 관계에서 기계와 같이 근면하게 일하는 사람으로 개념화하고, ‘근로’라는 용어도 일제강점기 일본이 강제노역에 동원하면서 조직한 ‘근로정신대’에 뿌리를 두고 있어 이 글에서는 객관적인 용어인 ‘노동자’로 서술한다. 다만 판례를 그대로 옮기는 경우에는 ‘근로자’라는 표현을 그대로 유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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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적으로 산업현장에서 노동자의 안전을 위협하는 요소를 줄이고, 안전이 이윤보다 뒷전에 밀려나는 영세한 구조를 개선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질 수는 없는 것이다. 안전한 일터를 만들기 위한 지난한 과정에서 우선 일터에서 발생한 노동자의 재해에 대해서 폭넓은 사회적 보호를 제공하는 것이 필요하다. 다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지만, 안타깝게도 재해를 입었다면 산재보험 제도의 보호 범위에 포함하여 재해 노동자가 최소한의 생계를 유지하면서 치료를 받아 재해로부터 회복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선천성 질병 아동들을 출산한 간호사들 

제주도의 한 병원에서 일하던 간호사 중 일부가 비슷한 시기에 선천성 심장질환을 가진 아이를 출산하였다. 이에 대해 대법원은 원심 법원과 달리 산업재해보상보험법의 해석상 다음과 같이 판단했다:

임신한 여성 근로자에게 그 업무에 기인하여 발생한 ‘태아의 건강손상’은 여성 근로자의 노동 능력에 미치는 영향 정도와 관계없이 산업재해보상보험법에서 정한 ‘업무상 재해’에 포함된다고 봄이 타당하다.”

역학조사를 한 결과 임신 초기에 일터에 유해한 요소가 있었고, 이로 인하여 태아의 심장 형성에 장애가 발생하였음이 확인되었다. 간호사들은 일터의 유해한 요소에 의하여 장애가 있는 아이를 출산한 것이므로 이는 업무상 재해에 해당한다고 산재보험을 신청하였으나, 근로복지공단은 태어난 장애 아동은 노동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지급을 거부했다. 간호사들은 이러한 공단의 처분에 불복해 행정소송을 제기하였다.

한 병원에서 근무한 간호사들이 비슷한 시기에 출산한 아이들에게 선천적인 질병이 있었다면?
한 병원에서 근무한 간호사들이 비슷한 시기에 출산한 아이들에게 공통적인 선천적 질병이 있었다면?

1심과 2심 법원은 원고들의 청구를 기각하고 공단의 손을 들어주었다. 먼저, 여성 노동자인 원고들이 임신 중에 작업환경의 유해요소에 노출되어 선천성 장애가 있는 자녀를 출산하였다고 하더라도 이는 출생한 아이의 질병이지 노동자인 여성 노동자의 질병으로 볼 수 없으므로, 여성 노동자들이 산재보험금을 청구할 권리가 없다는 것이다.

논리적으로는 일응 타당한 설명이지만, 해석하면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신생아에게 산재보험금을 직접 신청하라는 것이라서 법원의 형식적 판결에 대한 비판이 많았다(이에 대해서는 2016. 6. 20. 참여연대 판결비평 “참을 수 없는 판결의 가벼움: 신생아에게 직접 산재보험을 청구하라는 법원”을 참고).

하지만 대법원은 원심(2심)의 판단이 잘못이 있다며, 파기하고 다시 서울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다. 원고들의 청구가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이하 대법원 판결을 자세히 살펴보자.

산업재해보상보험법 기본이념 강조한 대법원

대법원은 대한민국 헌법 제32조 제2항에 따른 국가의 사회보장·사회복지 증진의무, 제6항에 따른 국가의 재해 예방 및 보호 의무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그리고 산업재해보상보험법의 기본 이념은 “산업재해를 당한 근로자와 그 가족의 생존권을 보장”하는 데 있다고 선언했다.

특히 대법원은 산재보험제도의 입법 목적과 취지를 다음과 같이 확인하고 있다:

“작업장에서 근로자에게 발생할 수 있는 업무상의 재해라는 산업안전보건상의 위험을 사업주나 근로자 어느 일방에 전가하는 것이 아니라 공적(公的)보험을 통해서 산업과 사회 전체가 이를 분담“하는 목적을 가진다고 하면서, 이는 “간접적으로는 근로자의 열악한 작업환경이 개선되도록 하는 유인으로 작용하고, 궁극적으로는 경제·산업 발전 과정에서 소외될 수 있는 근로자의 안전과 건강을 위한 최소한의 사회적 안전망을 제공”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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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를 보호하는 법률의 구체적 해석에 있어서 그 입법 목적에 주목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 법은 앞으로 발생할 모든 상황을 예측하여 만들 수 없다. 아무리 세밀하게 법을 만들더라도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지의 경계선에 올라서 있는 사례는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이때 그 입법 목적을 차분하게 살펴보는 것은 경계의 확장성을 판단하는데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산재보험이 “업무상 재해라는 필연적 위험”을 사회가 분담하도록 하고, 재해의 결과를 노동자나 사용자 어느 한쪽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이 아니라 공적 보호의 범위로 해석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열악하거나 예측하지 못했던 작업현장의 위험요인을 개선하는 간접적 목적이 있다는 점은 산업재해로 보호받는 영역을 판단하는 데 있어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적어도 개별 노동자가 예측할 수 없었던, 그래서 사전에 이를 예방하거나 피할 수 없었던 노동 조건의 열악함으로 인하여 발생한 재해라면 입법 목적에 따라 공적인 책임 영역에 포함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태아의 건강 손상’도 업무상 재해? 그렇다! 

태아의 건강 손상도 여성 노동자의 업무상 재해에 해당할까?

대법원은 원심법원과 달리 산업재해보상보험법의 해석상 ‘그렇다’고 판단했다:

“임신한 여성 근로자에게 그 업무에 기인하여 발생한 ‘태아의 건강 손상’은 여성 근로자의 노동능력에 미치는 영향 정도와 관계없이 산업재해보상보험법에서 정한 ‘업무상 재해’에 포함된다고 봄이 타당하다.”(대법원)

그 근거로 대법원은 대한민국 헌법 제32조 제4항은 ‘여자의 근로는 특별한 보호를 받으며, 고용·임금 및 근로조건에 있어서 부당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라고 정하고 있고, 제36조 제2항은 ‘국가는 모성의 보호를 위해서 노력하여야 한다’라고 선언하고 있으므로, 국가는 모성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임신, 출산 등의 부담을 지원해야 할 의무가 있으며, 이러한 의무를 노동조건과 관련하여 해석하면 “임신 중인 여성 근로자와 그 태아는 임신과 출산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업무상 유해요소로부터 충분한 보호를 받아야 하고, 국가 역시 이러한 위해요소로부터 여성 근로자에 대한 충분한 보호를 제공할 의무가 있다”고 판단했다.

또한, 우리 민법의 해석상 태아는 모체와 ‘한 몸’으로 취급되므로, “임신한 여성 근로자에게 그 업무에 기인하여 발생한 태아의 건강 손상은 여성 근로자의 노동 능력에 미치는 영향이나 그 정도와 관계없이 여성 근로자의 업무상 재해에 해당된다”라고 판단했다. 특히 그동안 ‘유산’의 경우에만 업무상 재해로 인정해 왔던 근로복지공단의 해석은 부당하다고 지적했다. 모성과 태아의 생명보호라는 측면에서 유산과 태아의 건강손상을 구별할 합리적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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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대법원은 선천성 장애가 있는 태아를 출산한 이후에도 어머니인 여성 노동자가 산재보험에 따른 요양급여 수급권을 상실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산업재해보상보험법상 노동자에게 업무상 재해가 이미 발생하였다면 노동자가 퇴직 등으로 노동자의 지위를 상실하였다고 하더라도 보험급여 수급 관계에는 어떠한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제88조 제1항 규정을 근거로, 태아가 모체에서 분리되어 출산하더라도 이미 임신 중에 성립한 요양급여 청구권은 여성 노동자에게 그대로 존속한다고 판단했다.

결국,  대법원(특별2부, 주심 김상환 대법관)은 2020년 4월 29일 변 모 씨 등 4명이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낸 요양급여 신청 반려처분 취소소송(2016두41071)에서 원고패소 판결한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법의 존재 이유 

이번 판결은 헌법에서 선언하고 있는 국가의 여성과 노동자에 대한 보호 의무와 산업재해보상보험법이 추구하고 있는 보호 목적에 충실한 의미 있는 판결이다. 무엇보다 형식적인 법 논리를 넘어서 법이 존재하는 이유를 인간의 언어로 설명하고 있다.

법은 완결하지 않다.

다만, 우리는 그 부족한 법적 공백을 채우기 위해 공동체의 소중한 원칙을 합의하고 선언했다. 대한민국 헌법은 바로 이러한 원칙의 출발점이다. 헌법이 정한 일터에서 노동자의 안전을 보호할 국가의 의무를 외면하지 않았던 대법원의 판단을 노동자의 건강과 일터의 안전을 최일선에서 담당하는 고용노동부와 근로복지공단은 다시금 진지하게 성찰해야 할 것이다.

개정된 통신비밀법은 헌법재판소가 헌법에 불합치하다고 결정한 내용을 전혀 개선하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헌법은 하위법의 흠결을 채우는 원칙의 출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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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필자는 조영관 민변 사무차장(변호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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