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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진정(眞正)하지 않다는 이유로 감옥에 간 사람이 있습니다. ‘진정한 무엇’이라는 말에서 읽을 수 있는 건 무엇일까요? 재판장에서 그것은 ‘진정함’을 판단할 수 있는 기준과 그 기준을 만들어낸 여러 근거들을 선택하고 인정하는 자의 힘, 그리고 그것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양심적 병역거부의 헌법상 권리 인정, 대체복무제 도입 등 법적·제도적 진전이 있었지만, 여전히 재판 받는 병역거부자들이 있고 유죄를 선고 받아 감옥에 간 이들이 있습니다. 2021년 3월 ‘진정한 병역거부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1년 6개월의 형을 확정받고 감옥에 있는 홍정훈 활동가의 판결에 대해 참여연대 이조은 간사가 비평했습니다.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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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6월, 환호했다. 헌법재판소가 양심적 병역거부를 헌법상 권리로 인정하고, 대체복무제 도입을 촉구했다. 평화활동가 오태양이 평화주의 신념으로 병역을 거부하면서 병역거부가 사회적 논의로 떠오른 지 17년 만이었다. 병역거부 운동이 거둔 결실이었고, 80년 동안 2만여 명의 청년이 군대 대신 감옥을 선택한 끝에 바뀐 변화였다. 양심이 이겼고, 평화가 이겼다고 자축했다. 병역거부자가 감옥에 가지 않는 세상이 오다니 꿈만 같았다.
꿈은 금방 깨졌다. 2021년 3월, 병역거부자 홍정훈이 수감 됐다. “상고를 기각한다.” 대법관의 어투는 담담했다. 대법원은 홍정훈의 병역거부 재판에 대한 상고를 기각하고, 실형 1년 6개월을 확정했다. 홍정훈과 그를 응원하기 위해 모인 십여 명의 동료들이 재판장 밖으로 나왔다. 아무도 말을 쉽게 꺼내지 못했다. 참여연대 동료활동가였던 홍정훈은 대법원 판결 10일 뒤 서울구치소에 갇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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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판결
- 대법원 2019도15120
- 2017노1528
- 2017고단4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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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출 거라 믿었던 병역거부자의 감옥행이 계속되고 있다. 2019년 12월 국회에서 대체복무 관련 법안들이 통과됐고, 작년 10월부터 대체복무 심사를 통과한 병역거부자들이 교정기관에서 대체복무를 시작됐다. 하지만, 2018년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의 판례 변경 이전에 병역거부로 기소된 사람들은 재판을 받아야 한다. 그렇게 이어진 재판에서 여호와의 증인 신자들이 잇따라 무죄판결을 받고, 대체복무제에 지원했다. 기대했다. 홍정훈에 대한 2심 유죄판결도 대법원에서 파기환송될 거라는 기대, 평화주의 신념에 따른 병역거부자도 대체복무를 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는, 불과 몇 년 만에 무너졌다.
돌잔치 때부터 평화를 주장했어야 하나
재판부는 홍정훈의 양심이 진정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홍정훈이 병역을 거부한 사유가 비폭력·평화주의보다는 주로 권위주의에 대한 거부감이고, 입영영장을 받았을 때 바로 병역거부하지 않고 징집을 연기했으며, 병역거부 이전에 적극적으로 병역거부나 반전·평화운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홍정훈의 신념은 “깊고, 확고하며, 진실한 것으로 인정하기 어렵다”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일생을 살면서 순간의 흔들림 없이 반전·평화를 외쳐왔다는 것을 증명하길 원했다.
재판부의 기준을 통과하는 ‘진정한 병역거부자’는 얼마나 될까. 재판부는 유동적이고 가변적이지 않은 양심, 모든 생각과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양심이 진정한 양심이라고 판시한다. 하지만, 삶의 모든 순간에 특정한 양심을 발현할 수는 없다. 돌잡이 때부터 비둘기나 올리브 가지를 잡고, 평생 반전·평화를 외쳐야만 평화주의자는 아니다.
또한, 아무리 강력한 양심을 가진 사람도 흔들리는 순간이 있고, 뒤늦게 양심이 발현될 때도 있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을 위해 나가 싸우라고 인도 청년의 징집을 권유했던 간디의 비폭력 운동을 진정성 없다고 얘기할 수 있을까. 소속집단의 부조리에 가담했다가 뒤늦게 양심의 가책이 느껴져 내부고발하는 사람들의 양심은 깊고 확고하며 진실하지 않은 것일까. 지금처럼 재판부가 인생을 잘게 쪼개서 단면만을 보고 판단하면, 예수나 석가모니도 병역거부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을 거라는 농담에 웃을 수만도 없다.
양심의 진정성은 삶의 단면이 아닌 맥락에서 나온다
그런 맥락에서 홍정훈 재판으로 확인된 재판부의 판단 기준은 헌법상 양심의 자유를 침해할 정도로 지나치다. 권위주의에 대한 거부감과 반전·평화주의는 다르다고 판단할 것이 아니라, 홍정훈의 반전·평화주의는 권위주의에 대한 거부감으로부터 형성됐다고 봐야 한다. 입영영장을 연기한 것은 군대에 가겠다는 전제가 아니라, 군대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할 시간이 필요해 선택을 유예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병역거부 이전에 ‘적극적으로’ 병역거부나 반전·평화운동을 하지 않은 것은 계기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게 적절하다. 평생 권투만 했던 무하마드 알리는 미국의 베트남전 참전이라는 계기를 통해 병역거부자가 됐다. 하나하나의 흔들림, 인생의 단면을 근거로 “당신의 양심은 가짜”라고 판단할 수 없다. 양심의 진정성은 삶의 맥락에서 나온다.
병역거부자의 양심을 판단하기 위해 생애 전반을 살펴볼 수는 있다. 다만, 그 전제는 양심의 형성 과정과 맥락을 살피기 위한 것이어야만 한다. 과거를 잘게 쪼개 뒤지면서 현재의 양심과 모순 지점은 없는지 과도하게 감별하는 것은 ‘양심의 자유’라는 기본권 행사를 위축시킨다. 앞으로의 재판 방향은 심각한 결격사유가 없다면 병역거부자의 양심을 인정하고, 병역거부자들이 대체복무제 심사위원회에서 심사받을 기회를 보장하는 쪽으로 나아가야 한다.
홍정훈의 법원 판결을 반추하며 10여 년 전, 어느 병역거부 재판에서 판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피고인이 아무도 걷지 않는 눈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피고인의 발자국이 언젠가는 길이 되길 바랍니다.” 이제 길은 만들어졌고, 홍정훈의 발자국과 다른 병역거부자들의 발자국들이 길을 넓히고 있다. 병역거부자들이 더는 살이 에이는 눈길 위를 걷지 않도록 재판부의 전향적인 판결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