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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판타지 소설을 돌아보며: [3] 폭풍의 5년(2015-2019)

한국 판타지 소설을 돌아보며:
가장 하찮던 존재가 혁명의 주역이 되기까지

 

[1] [퇴마록]에서 [달빛조각사]까지

1. 희미한 여명: 1990년대
2. 대중소설로의 이행: 2007년까지
3. [달빛조각사]와 게임의 시대

[2] 2012년, 포탈이 열리다

4. 귀족을 기억하라

5. 웹소설의 진화: 2015-2016

이 글은 2019년 국내에서 거둔 엄청난 성공을 넘어 해외에서까지 그 가치를 인정 받은 웹소설의 생태계가 대체 어떤 경로를 밟아오며 발전했는지 탐색해보고자 하며 시작되었다. 2013년 무렵이 되었을 때, 2020년을 바라보는 지금 상황까지 웹소설 생태계가 발전할 조건은 이미 거의 완성이 되어 있었다. 그 조건은 다음과 같다.

  • 다양한 장르적 실험과 재조합 혁신
  • 성인이 된 주 독자층을 위한 진중한 전개
  • 독자들과 훨씬 가까워진 현실적 배경
  • 게임과의 상호작용을 넘어 현실의 게임화 등

이런 조건으로 2010년대 한국 웹소설의 기초가 쌓였던 것이다. 이는 회당 결제와 플랫폼의 발전, 모바일 기기의 확산이라는 물적 조건과 상호작용하며 빠른 속도로 진화한 결과물이었다.

중대한 혁신: 2015 환생좌, 2016 나혼렙

그리하여 [나귀족]과 [메모라이즈] 이후 약 3년이 지난 2015년이 되었을 때, 이후 웹소설 생태계에 큰 영향을 미칠 중대한 혁신이 발생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 되었다. 사실 2014년부터 2019년까지 매년 웹소설 생태계의 특정 구역을 뒤흔들만한 중대한 혁신이 있었다고 말할 정도로 그 진화 속도는 정말이지 눈이 돌아갈 정도였지만, 2015년과 2016년에는 계보적으로 중대한 두 작품이 나와 이후의 흐름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나는 귀족이다(본편 연재: 2012. 06. 23. ~ 2015. 02. 10. 프리시즌: 2015. 02. 1[2] ~ 연재 중[), MEMORIZE(연재: 2012. 12. 12. ~ 2017. 03. 13.)

나는 귀족이다(본편 연재: 2012. 06. 23. ~ 2015. 02. 10. 프리시즌: 2015. 02. 1[2] ~ 연재 중[), MEMORIZE(연재: 2012. 12. 12. ~ 2017. 03. 13.)

그중 하나는 이 글의 시작을 알린 추공 작가의 [나 혼자만 레벨업!]이고 다른 하나는 ALLA 작가의 [환생좌]이다. 이 두 작품은 각각 [나귀족]의 레이드물과 [메모라이즈]의 회귀 판타지를 계승, 발전시켰고 기존에 병립하던 다른 장르들을 더욱 효과적으로 통합해내 2012년에 발생한 흐름을 정리했다고 평할 수 있다.

나 혼자만 레벨업(왼쪽, 연재: 2016. 7. 25~2018~3. 13), 환생좌(연재: 2015. 12. 02. ~ 2017. 03. 06.)

나 혼자만 레벨업(왼쪽, 연재: 2016. 7. 25~2018~3. 13), 환생좌(연재: 2015. 12. 02. ~ 2017. 03. 06.)

먼저 [나혼렙]은 실탄의 [나귀족]이 만든 레이드물의 클리셰를 보다 체계화하며, 와우의 직접적 영향이 강하던 레이드물을 좀 더 독자적 성격을 강화시킨 장르인 헌터물로 바꾸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게이트에서 몬스터가 튀어나오면 그것을 사냥하는 수동적 대응은 이제 게이트 너머의 다른 세계인 인스턴스 던전(인던)을 공략하는, 더욱 능동적인 대응으로 바뀌었다.

더하여 [나귀족]에서 조금은 엉성하게 움직이던 공대는 [나혼렙]에서 보다 기업적이고 체계적으로 움직이는 길드와 길드에 소속된 헌터로 바뀌었다. 이 과정에서 길드와 헌터는 자본과 권력에 밀접하게 관여하던 기존 레이드물의 공대보다 더 자연스럽고 개연성 있는 방식으로 현실 권력과 상호작용하는 모습이 그려지게 되었다.

[나혼렙]은 이처럼 레이드물을 헌터물로 발전시키는 데도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지만, 사실 장르 생태계에서는 그보다 훨씬 더 폭넓고 깊은 영향을 남기기도 하였다. 바로 이 소설의 제목과 적절하게 어울리는 ‘상태창’의 전면적인 도입이었다. 상태창은 전술하였듯 게임 판타지에서 게임적 요소의 핵심 소재로 도입되었고, 자연스레 게임 소설의 아이콘과도 같은 위상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상태창은 [나귀족] 이후 소설의 배경이 현대로 변하고, 인게임 가상현실이 더이상 소설의 주무대로 등장하지 않게 되자 거의 등장하지 않게 되었다.

물론, [나귀족]과 [메모라이즈]에서 볼 수 있듯이 2012년 이후 현실 자체의 게임화라는 웹소설 창작 경향이 강화되었기에, 게임적 요소는 좀 더 순화된 형태로 가공되어 등장하였다. [나귀족]에서 그것은 와우의 공대 시스템과 탱딜힐의 클래스 시스템, [메모라이즈]에서는 상태창보다 덜 노골적이지만 명백히 게임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는 스탯으로 구현되었다.

나혼렙, 현실의 완전한 게임화 

이는 [나혼렙]이 달성하게 될, 현실의 완전한 게임화로 넘어가는 중요한 징검다리였다. 아마 이 두 작품이 현실의 게임화를 부분적인 형태로나마 실현하지 않았다면, [나혼렙]과 같은 현실의 완전한 게임화는 독자들에게 어느 정도 거부반응을 받았을 개연성이 크다. 하지만 이미 게임적 전개가 현실에 등장하는 것이 그렇게 부담스럽지 않게 된 상황에서, 현실에 등장한 전지전능한 게임 시스템의 개입은 독자들에게 무리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어떤 식으로 제시되었는지는 잠시 [나혼렙]의 대략적 줄거리를 통해 알아보기로 하자.

나혼렙 (줄거리 요약) 

몬스터가 나오고, 그것을 사냥하는 헌터들이 등장하고, 헌터들이 모인 길드가 활약하는 현대 한국에서 헌터들은 S부터 E까지의 등급으로 구분되며 다양한 등급의 던전에서 활약 중이다. 주인공인 성진우는 그 중에서도 가장 약한 E급 헌터로, 동료 헌터들에게도 무시 당하는 약골 중의 약골이다.

하지만 던전 속에 또 다른 던전이 있는 ‘이중 던전’ 레이드에서 죽을뻔한 사건을 겪게 된 뒤, 그에게는 큰 변화가 찾아온다. 사건 이후 매일 체력 단련을 요구하는 1일 퀘스트를 클리어하라는 시스템의 지시가 뜬 것이다. 이 지시를 이행하지 않을 경우, 사람을 죽이기에 충분한 몬스터들이 우글거리는 패널티 존에서 버텨야하는 처벌을 받게 된다. 그와 동시에 성진우는 레벨과 능력치가 부여되었으며, 퀘스트와 던전 레이드, 수련을 통해 그 레벨과 능력치를 올리며 강해지고, 스킬 또한 배울 수 있게 되었다.

마치 현실 세계에 혼자만 가상현실 게임의 캐릭터가 받을 수 있는 온갖 지원을 등에 얻게 된 셈이었다. 이를 계기로 성진우는 나약한 E급 헌터에서, 최강의 헌터로 향하는 성장의 길을 걷게 되고, 어리숙하던 과거의 그는 날카롭고 냉혹한 성격의 지도자로 변하기 시작한다.”

이것이 이 소설의 이름이 [나 혼자만 레벨업]인 이유이다. 작중에서 성진우는 노골적인 가상현실 게임 시스템의 지원을 ‘현실 속에서’ 받게 되며, 이는 그가 자신의 능력치와 현 상황을 현실 세계 속에서도 명확하게 파악하여 최적의 성장법을 택할 수 있게 도와준다. 남들은 누릴 수 없는 이런 지원을 통해 그는 빠른 성장을 이룩하게 되며, 독자들은 이를 통해 강렬한 대리만족 체험을 하게 된다. [나혼렙]에서 성진우가 처한 현실은 이제 그 자체로 살아남기 위해 즐겨야만 하는 게임이 된 것이다.

현실 속에 온전히 등장한 게임 시스템은 이후 수많은 장르와 결합하며 ‘현실의 게임화’를 끝까지 밀고 나갔다. 웹소설 생태계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이것이 대체 어느 정도까지일지 잘 상상하기 힘들 수도 있다. 우선 [나혼렙]을 모방한 각종 헌터물에서 이를 차용한 것은 국내 웹소설 생태계의 생리상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그뒤 상태창은 주인공과 주인공을 둘러싼 세계의 정보를 간명하게 제시해주고 주인공에게 최적의 행동을 알려준다는 그 특성 덕분에 무수히 많은 장르, 이를테면 현대 직업물에도 응용되며 웹소설의 필수적 요소 중 하나로 자리매김 했다. 예컨대 캘리버 작가의 [기적의 분식집]이라는 작품에서는, 고등학교 앞 분식집을 운영하는 데 상태창을 도입하여 소설적 재미를 보여주기도 하였다.

기적의 분식집, 소설(왼쪽, 연재 조아라 기준: 2018. 3. 9. ~2018.12.10 ), 게임(출시일 스팀: 2018. 12, 모바일: 2019. 5.)

기적의 분식집, 소설(왼쪽, 연재 조아라 기준: 2018. 3. 9. ~2018.12.10 ), 소설을 원작으로 한 게임(오른쪽, 출시일 스팀 기준: 2018. 12, 모바일 기준: 2019. 5.)

하지만 상태창 혁명은 온전히 [나혼렙]만의 것은 아니고, 2010년대 들어 강화된 ‘현실의 게임화’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 있던 것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이미 스포츠물에서는 스포츠 게임 [풋볼 매니저], [피파 온라인] 등의 여러 스포츠 게임적 요소가 도입되어 상당한 인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따라서 [나혼렙]이 그 자체로 상태창 혁명을 일으킬 정도로 독자적인 작품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 작품의 인기, 그리고 현대 판타지에서 헌터물이 갖는 위상 덕택에 이 작품은 상태창 혁명의 확산에 상당한 지분을 갖고 있는 작품으로 평할 수 있을 것이다.

환생좌, 회귀물의 진화

한편 [나혼렙]보다 1년 앞서 문피아에서 연재된 [환생좌]는 [메모라이즈]가 본격적으로 유행시킨 회귀물을 한 단계 끌어올려 이후 회귀 설정의 대유행을 불러일으키는 데 혁혁한 기여를 하였다. 말초적이고 현실적 대리만족이 각광 받은 2010년대의 흐름에서, 기존의 회귀물은 미래의 정보를 가지고 개인의 영달을 추구하는 데 집중한 면이 컸다. 하지만 [환생좌]는 [메모라이즈]처럼 더 진중한 방식으로 인류적 위협에 대처하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회귀가 강조되었고, 이는 2015년 이후 비슷한 소재를 다룬 회귀물들의 직접적 원형을 제공했다.

또한 [환생좌]는 여러 게임적 요소를 활용하여 이야기를 전개하는 데 능숙했다. 먼저 [메모라이즈]와 마찬가지로 스탯이 등장한다는 점은 말할 것도 없이 게임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환생좌]는 그 이야기 구조에 있어서도 게임적 요소, 특히 필드를 마치 아케이드처럼 단계적으로 클리어해야하는 복잡한 1인칭 게임의 요소를 대거 차용했다.

[환생좌]에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존재인 신은, 폭력적이고 가혹한 이면 세계인 ‘어비스’에서 인류를 단련시키기 위해 ‘여행자’들을 차출하고 소환하며, 그들이 어비스에서 활약하는 모습을 보여 즐긴다. 7개의 단계로 구성된 어비스에서 주인공을 비롯한 여행자들은 각 세계가 제시하는 도전과제들을 하나씩 클리어하면서 인류의 생존을 위해 사투를 벌여야한다. 첫 도전에서 실패하였던 주인공은 여기서 회귀를 선택하여, 공략법을 아는 상태에서 두 번째 도전을 하게 되는 셈이다. 이런 점에서 [메모라이즈]가 정립한 여러 요소를 계승한 면이 많다고 하겠다.

환생좌(연재: 2015. 12. 02. ~ 2017. 03. 06.) 는 MEMORIZE(연재: 2012. 12. 12. ~ 2017. 03. 13.)를 계승하면서 동시에 스스로 더욱 진화했다.

환생좌(2015)는 MEMORIZE(2012)를 계승하면서 동시에 스스로 진화했다.

특히 그 중에서도 인류를 직접적으로 관리하는 초월적 존재, 복수로 존재하는 세계 간의 여러 위계, 상위 세계가 하위 세계에서 도전자들을 차출하여 과제를 제시하는 시스템은 이전보다 확연히 강해진 게임적 요소였다. 아마 이 같은 복잡한 전개 방식은 독자들이 여러 게임 경험을 통해 그 인터페이스에 익숙해지지 않았다면, 또 징검다리 역할을 한 선행 소설들이 나오지 않았다면 시도조차 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시대 변화를 딛고 나타난 [환생좌]는 이후 회귀물에 상당한 영향을 주게 되었으며, 특히 상하위 위계가 존재하는 복수의 세계와 도전과제 개념은 이후 인터넷 방송이라는 매체와 결합하여 ‘성좌물’이라는 한국만의 특징적 장르를 만들어내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다.

2015년의 또 다른 혁신, ‘전문가물’의 본격 등장 

더하여 2015년에는 또다른 중대한 혁신이 있었는데, 바로 ‘전문가물’이 본격적으로 한국 장르 소설에서 등장했다는 것이다. 이는 기존 한국의 장르 소설 환경과는 차별화되는 발전을 나타내는 흐름이었다. 그동안 한국 장르 소설의 중요한 흐름은 무협과 JRPG에서 시작된 ‘무력’을 통한 모험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현실 속의 여러 직업, 특히 전문직을 상세히 다룬 장르가 인기를 끌고 또 하나의 중요한 생태계를 형성한 것은 어찌보면 굉장히 생소한 일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 어떤 문화적 혁신이 진공에서 일어나지 않듯이, 직업물도 마찬가지로 나름의 계보를 확인해볼 수 있다. 먼저, 00년대를 기준으로 한국 장르 소설 독자층에서 30대 혹은 그 이상의 독자층들은 당시부터 현실적인 배경의 장르 소설을 선호하였다. 이는 주로 갑질기업물에서 잘 드러났는데, 이미 직장에서 자리 잡은 중년 이상의 독자들에게 대리만족을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영역은 이후 현대를 배경으로 하는 전문가물이 발전하게 될 뿌리이자 기반이 된다. 하지만 이 장르는 장르 소설 시장의 주류였던 젊은 독자층을 사로잡기에는 여전히 고루한 면이 많았다.

젊은 독자층이 대거 열광한 [달빛조각사]의 성공은 상황을 바꾸어놓았다. 앞서 한국 장르 소설 역사에서 중대한 변곡점으로 평가하였던 [달빛조각사]는 전문가물과 직업물이 만개하기 이전의 중요한 과도기로서도 다루어질 필요가 있다. 상술하였듯이 ‘조각사’라는 생소한 예술직을 소재로 한 [달빛조각사]는 수많은 생산과 예술 등 전투와는 상관 없는 영역에서 주인공의 능력을 보여주며 독자들에게 대리만족을 선사하였으며, 이후 유사한 게임 판타지 생산직 모방작들의 원형이 되어주었다. 이 흐름에서 가상현실 게임이라는 배경이 현대로만 바뀐다면, 현대 배경 전문가물이 만개하게 될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마침내 2012년 이후 [나귀족]이 현대 판타지를 대거 유행시키면서, 2015년 무렵 현대 전문가물이 탄생할 모든 조건이 갖춰지게 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달빛조각사(연재: 2007. 01. 15. ~ 2019. 07. 03.)는 직업물의 본격적인 등장을 예정하는 중대한 과도기를 상징하는 작품이다.

달빛조각사(연재: 2007. 01. 15. ~ 2019. 07. 03.)는 직업물의 본격적인 등장을 예정하는 중대한 과도기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2015년은 전문가물의 기초를 닦은 핵심적인 세 작품이 연달아 등장한 중요한 해였다. 공전의 인기를 얻은 조석호 작가는 [닥터 최태수]를 연재하여 본격적인 메디컬물(의학물)의 유행을 열었다. 이 뒤를 이어 자카예프 작가의 [이것이 법이다]는 법조물을 태동시켰으며, 양치기자리 작가는 [요리의 신]을 만들어 쉐프물에서 같은 역할을 수행했다. 장르 소설의 문법을 활용하여 빠른 전개와 대리만족을 제공해야 했기에, 이 세 소설에서는 기억전이, 사이코메트리, 회귀와 같은 초현실적인 장치들이 개입하여 소설적 재미를 극대화시켰다. 더하여, 이전의 게임 판타지 직업물이나 갑질기업물과는 다르게, 이 작품들은 명백히 현실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기에 독자들에게 납득시켜야할 개연성의 역치가 상당히 올라갔다. 따라서 이들 전문가물은 기존에 비해 작품을 쓰기 위한 취재의 필요성을 크게 늘렸으며, 양질의 전문가물들이 등장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닥터 최태수(연재: 2015. 04. 08. ~ 2019. 04. 01, 외전: 2020.01.01 ~ 연재 중), 이것이 법이다(연재: 2015. 09. 08. ~ 연재 중), 요리의 신(2015. 10. 12. ~ 2017.12. 08.)

닥터 최태수(연재: 2015. 04. 08. ~ 2019. 04. 01, 외전: 2020.01.01 ~ 연재 중), 이것이 법이다(연재: 2015. 09. 08. ~ 연재 중), 요리의 신(2015. 10. 12. ~ 2017.12. 08.)

2015년 전후, 웹소설의 세 가지 진화 요소 

2015년을 전후로 한 시점에서 발생한 웹소설의 진화는 다음 세 가지 요소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현대 한국이 지배적 배경으로 등장하였다. 이는 현대 한국과 판타지 세계를 연결하는 게이트를 연 헌터물, 혹은 현대 한국 그 자체를 배경으로 하는 전문가물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헌터물이나 전문가물이 아닐지라도, [환생좌] 등의 사례에서 드러나듯 주인공은 현대 한국에 뿌리 박고 활약하는 경우가 대세가 되었다. 이제 더는 과거와 같이 가상현실 게임이나 판타지 세계를 직접 여행하는 것은 독자에게 그리 선호되지 못했다(유의미한 반례는 2015년에 연재가 시작된 박새날 작가의 [템빨]인데, [달빛조각사]로 대표되는 가상현실 게임 장르로서 카카오페이지의 최상위 웹소설로 오랜 기간 왕좌를 차지했다).

이제 '현대 한국'은 지배적인 배경으로 등장한다.

이제 ‘현대 한국’은 지배적인 배경으로 등장한다.

둘째, 회귀와 상태창을 비롯한 게임 시스템의 전면적 활용이 장르 간 경계를 넘나들며 장르 문법 내에서 필수적 요소로 등극했다. 이 두 요소를 관통하는 중대한 공통점을 여기서 지적할 필요가 있다. 바로 ‘정보’다. 더 정확히는, 회귀와 상태창은 주인공에게는 유리한 방식으로 정보비대칭을 해소해주고, 주인공의 상대편에게는 불리한 방식으로 정보비대칭을 생성시켜준다.

회귀 장치를 통해 주인공과 독자는 다른 인물들은 알지 못하는 미래의 사건 전개 양상을 알 수 있고, 이와 같은 압도적 이점을 지켜보는 주변 인물들은 주인공에 의해 무력하게 당하거나, 혹은 주인공을 선망하게 됨으로써 강한 대리만족을 독자들에게 선사한다. 상태창도 마찬가지다. 주인공과 다른 인물, 또 이들을 둘러싼 세계의 정보들을 객관화하고 명료하게 수치화해서 제공 받는 것은 이 같은 지원을 받지 못하는 다른 이들에 비해 압도적인 유리함을 선사한다.

예컨대 입시에서 혼자만 모의고사 결과지를 받아보고 다른 이들은 결과지를 볼 수 없는 상황을 가정하면 상태창이 주는 정보비대칭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체감할 수 있을 것이다. 회귀와 상태창은 독자들이 소설의 시작부터 주인공의 성장과 사건의 속도감 있는 전개를 느낄 수 있게 하여 초반부의 불확실성에서 오는 지루함을 효과적으로 제거했다.

시간 시계

 

셋째, 현실의 게임화다. 상태창은 두 말할 것도 없이 그 모티브가 게임에 있는 것이고, 회귀도 클리어가 어려운 도전 과제를 여러번에 걸친 반복 시행을 통해 얻은 정보로 돌파한다는 점에서 게임의 요소가 매우 강하다. ‘켠 김에 왕까지’로 대변되는 클리어를 위해 반복 시행과 노가다로 어떻게든 도전과제를 수행하고야 마는 한국 게이머들의 경쟁적 문화는 여기서도 적용된다고 할 수 있다. 게임 인터페이스는 이제 단순히 서사나 캐릭터의 모티브를 넘어, 세계의 규칙으로서 현대 판타지의 배경이 되는 21세기 한국과 단단히 얽히게 되었다.

세계의 규칙으로서 게임 인터페이스의 도입은 장르 소설의 본질인 대리만족을 달성시켜주는 데 아주 탁월한 선택이었다. 자신의 선택으로 가시적인 성과를 확인하고 다음을 준비할 수 있는 체계적인 대리만족 구조를 갖춘 게임이 마침내 소설이라는 텍스트 매체와 온전히 통합되게 된 것이다. 내 지인은 이에 대하여 최근의 장르 소설 경향이 “더는 소설이 아니라 온라인 게임 스트리밍 실황을 지켜보는 것 같은 경험”을 독자에게 제공해준다고 평하였다.

‘오아시스’는 혁신적인 VR 게임이지만, 역설적으로 그 게임을 즐기기 위해서는 ‘혼자만의’ 공간이 필요하다. [레디 플레이어 원]은 게임이 지니는 ‘외로움’의 역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레디 플레이어 원] (2018, 스티븐 스필버그)의 한 장면

이 세 요소들이 2015년을 전후로 동시다발적으로 유행한 것은, 가깝게는 [달빛조각사], 멀게는 ‘이고깽’ 장르에서 볼 수 있는 한국적 요소가 갈수록 선명한 색채를 드러낸 현상으로 해석할 수 있다. 물론 더 직접적으로는 2008년 이후 한국의 사회 변화가 큰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경제 전망은 불투명해지고, 사회 안전망은 흔들려 불안이 시대정신이 된 현대 한국에서, 특히 청년들은 갈수록 더 직접적이고 강렬한 대리만족의 서사를 원하게 되었다. 그것이 고단한 현실을 잊게 해주고 스트레스를 해소해주는 최선의 수단이 되었기 때문이다.

정보비대칭의 해소 혹은 확보를 통한 확고한 기반 구축은 현실에서 확실히 불투명해진 미래 전망과 완전히 대척점에 있는 것이었다. 능력치와 퀘스트 등을 통해 체계적이고 가시적인 성장을 단계적으로 꾸준히 밟을 수 있게 해주는 상태창과 시스템은, 노력은 하지만 스스로의 성장을 체감할 수 없게 된 청년층에게 더할 나위 없는 대리만족 경험을 제공해줬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 두 요소는, 가장 적절하고 효율적인 공략법, 소위 ‘정석’을 찾아내어 빠르게 남들 위에 올라서고자 했던 경쟁적인 한국 문화 전반에 가장 최적화된 방식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금수저, 금수저 청년과 흙수저 청년은 같은 청년인가. 2015년 이후 웹소설의 진화는 당연하고도 명백하게 당대의 현실을 반영한다. 거기엔 '너무도 다른 경쟁의 조건'에 분노하고, '아프니까 청춘이다' 식의 기성세대의 도덕적 위선에 지친 청년 세대의 깊은 좌절감이 자리한다.

돈과 권력은 어떻게 이어지는가. 금수저 청년과 흙수저 청년은 같은 청년인가. 2015년 이후 웹소설의 진화는 당연하고도 명백하게 당대의 현실을 반영한다. 거기엔 ‘너무도 다른 경쟁의 조건’에 분노하고, ‘아프니까 청춘이다’ 식의 기성세대의 도덕적 위선에 지친 청년 세대의 깊은 좌절감이 자리한다.

과거의 경향을 계승하고 새로운 시대정신을 흡수하면서, 2015년 이후 웹소설을 이끌어나갈 삼두마차가 비로소 정립되었다. 새로운 배경으로서 21세기 한국, 정보비대칭을 해소, 증폭시켜주는 회귀와 상태창의 도입, 체계적이고 가시적인 성장 경험으로 대변되는 게임 시스템이 그것이었다. 이 요소들은 2015년 이후 한국 장르 소설에서 갈수록 가속화된 재조합 혁신 경향의 주역이었다. 이 요소들의 가장 큰 장점이 바로 높은 범용성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무협, 판타지라는 이전의 장르 규칙들과 비교하였을 때 아주 명확하게 드러난다. 무협과 판타지라는 장르 규칙은 문파, 내공, 비급, 검기, 마법, 마나, 중세 유럽적 배경과 몬스터, 이종족 등 하나의 세계를 구성하는 패키지로서 제공된다. 즉, 이는 하나의 완결된 세계감을 제공해주고, 그 장르 규칙이 축적된다는 점에서 높은 가치를 지니지만, 장르 규칙의 구성 요소들을 미시적으로 세분화하고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재조합해서 혁신적 장르를 새로 탄생시키는 2015년 이후의 경향과는 다소 맞지 않았다. 통합된 세계감을 제공하는 제반 규칙들이 너무 무거웠던 것이다.

반면 회귀, 상태창, 현대 한국은 아주 독립적이고 미시적 요소로서, 끝없는 재조합 혁신을 가능하게 하는 기초 자원으로서 탁월한 장점이 있었다. 누군가 생각지 못한 직업 소재에 회귀나 상태창을 도입하면 그것은 또다른 장르가 되었다. 상태창을 둘러싼 규칙에 변칙을 주면 이전과 차별화되는 헌터물을 쓸 수 있었다. 회귀자를 복수로 두어서 그들 간의 치열한 전략 싸움을 소재로 이야기를 전개해나가면 작가의 역량에 따라 얼마든지 차별화된 이야기가 나올 수 있었다. 이 같은 창의적 요소가 이전 장르 소설에 없었다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장르 자체를 얼마든지 새롭게 창조해내기에 적합한 놀라운 유연성은 2015년 이후 한국 장르 소설의 폭발에 결정적인 요소였다고 할 수 있다.

제목과 표지의 변화 

한편 재조합 혁신과 창의적 소재 활용,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작품의 갯수 등 이 시기 웹소설 시장이 보여준 엄청난 역동성은 소설의 가장 가시적인 부분에서도 큰 변화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그 부분은 바로 제목과 표지다. 90년대만 하더라도, 마치 판타지라는 이공간이 주는 신비로움을 보여주는 시적이고 은유적 제목들이 많았다. 이런 트렌드는 대략 00년대 퓨전 판타지까지도 이어졌다. [세월의 돌] (1999), [엘야시온 스토리] (1990년대 후반), [묵향] (1999), [옥스타칼니스의 아이들] (1999) 등이 대표적이다.

[세월의 돌] (1999), [엘야시온 스토리] (1990년대 후반), [묵향] (1999), [옥스타칼니스의 아이들] (1999)

[세월의 돌] (1999), [엘야시온 스토리] (1990년대 후반), [묵향] (1999), [옥스타칼니스의 아이들] (1999)

하지만 시장이 팽창하고 직접적 대리만족이 중요해지면서, 소설의 제목은 더욱 직접적으로 소설의 핵심 소재를 드러내줄 필요가 생겼다. [달빛조각사]는 그런 면에서 여전히 은유적 느낌이 있지만, 내용을 이전에 비해서는 상당히 직관적으로 드러내준다는 점에서 과도기적 요소가 있었다. 이후 일부 게임 판타지는 [달빛조각사]처럼 직업 이름을 명시하면서 독자들에게 호소하기 시작했다.

[나귀족]은 제목의 변화에 있어서도 큰 역할을 했다. 나는 아직 웹소설 혁명이 이렇게 가시적이지 않던 시절, 친구로부터 [나는 귀족이다]라는 제목을 듣자마자 그 노골성에 파안대소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이것은 절대 비웃을 일이 아니었다. 이는 독자들이 원하는 것을, 어떠한 숨김이나 치장 없이 드러냄으로써 시장에서 선택받으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웹 연재 환경이 확대되고, 시장이 더욱 커지면서 이 경향도 더욱 강화되었다. 직업물 같은 경우는 그 직업을 떠올릴 수 있는 단어를 넣는다든지, 회귀물의 경우 회귀 상황을 제목에서부터 직관적으로 드러낸다든지 하는 참신한 방법들이 도입되었다. [회귀했더니 입대 전날] (2019), [기적의 분식집] (2018), [템빨] (2014), [소설 속 엑스트라] (2018) 등을 앞서 언급한 [엘야시온 전기], [드래곤 라자] 등과 비교하면 20년 동안 있던 변화를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회귀했더니 입대 전날] (2019), [기적의 분식집] (2018), [템빨] (2014), [소설 속 엑스트라] (2018)

[회귀했더니 입대 전날] (2019), [기적의 분식집] (2018), [템빨] (2014), [소설 속 엑스트라] (2018)

표지도 큰 변화를 겪었다. 대여점 시절 판타지 소설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당시 소설은 대부분 정체를 알 수 없는 기하학적 패턴(예컨대 마법진) 같은 것을 그려넣고 제목과 작가 이름, 권 수만 담아서 출간하는 경우가 흔했다. 이런 경향은 이미 웹소설 시대가 열린 시점에서 연재된 박새날 작가의 [템빨]에서조차 확인해볼 수 있다. 하지만 최근 [템빨]의 변경된 표지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표지 디자인의 양식은 몇년 사이에 엄청나게 급변했다.

물론 이 또한 여러 계보를 추적할 수 있는 것이긴 하다. [달빛조각사]는 주인공 위드가 절벽에 메달려 조각을 하고 있는 모습을 그려낸 표지로 유명한데, 출판사 로크미디어는 이후 자사가 출판하는 게임 판타지에 이처럼 소설의 주인공을 멋지게 그려낸 표지를 제공하여 독자들에게 어필했다. 이 같은 표지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독자가 해당 소설을 선택하는 데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웹소설 시대에 이 경향은 훨씬 강화되었다. 이제 표지에서 주인공의 모습을 그려넣는 것은 절대 빼놓을 수 없는 필수적인 일이 되었다. 대신 과거 로크미디어 시대의 표지처럼 사실적인 인물보다는 한국에서 자생적으로 발전한 웹툰 그림체, 즉 ‘커뮤체’로 표현되는 만화적인 인물이 그 자리에 들어갔다. 흥미로운 점은 장기 연재 작품의 경우 표지는 해당 소설의 위상과 나아가 배급사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 지표로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프리랜서 일러스트레이터를 외주 작업에 고용하여 표지를 충당하는 현 시스템 상, 표지에 들인 돈이 곧바로 퀄리티에 반영되는 구조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즉, 해당 소설이 인기를 끌게 되면 적당히 그려넣은 표지는 보다 공을 들인 표지로 변하게 되는 것이고, 회사가 자금력을 통해 신작을 밀어주기로 결정하면 표지에 보다 많은 돈을 지출하는 의지를 보여주기도 하는 것이다. 이처럼 2015년 즈음 만개한 웹소설 혁명은, 그야말로 이 분야를 둘러싼 모든 곳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6. 웹소설의 현재: 2017-2019

상기한 흐름들은 대략 4년 간 이어지며 현재 진행형인 웹소설의 거대한 파고를 만들고 있는 중이다. 앞서 잠깐 언급하였듯, 2015년부터는 가히 매년마다 새로운 혁신이 생겼다가 유행을 끌고 때로는 사라지는, 관찰자가 현재라는 순간을 포착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빠르게 시장이 변하였다. 현재 웹소설 시장에 대해 알아간다는 것은, 사실상 무지를 더 늘려간다는 것과 다름이 없을 정도이다. 탐험을 통해 새로운 지역을 알게 되는 속도보다 새로 알게 된 지역을 둘러싼 모르는 지역이 훨씬 더 넓어지기 때문이다.

이 글 또한, 내가 문제작 [전지적 독자 시점] (2018)에 관해 탐구하면서 계속해서 새로 알게된 사실을 정리하며 쓴 글이기도 하다. 따라서 다시 강조하자면 개인이 현재의 웹소설 트렌드를 온전히 분석하여 지금의 시장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오만이라 하겠다. 때문에, 여기서는 최근의 작품 중 내가 개인적으로 주목하는 현상 두 가지를 언급하고자 한다.

전지적 독자시점 (2018)

전지적 독자시점 (2018)

‘성좌물’의 등장 

첫 번째는 장르의 재조합 혁신의 첨단을 달리는 사례로서 ‘성좌물’이라는 장르가 등장했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여러 장르를 나타내는 “XX물”은 듣자마자 직관적으로 그 뜻을 바로 짐작할 수 있는 것이었다면, “성좌물”은 들었을 때 도저히 그 의미를 가늠할 수 없다는 점이 특징이다. 이는 장르의 핵심적 내용을 모르는 이들에게 직관적으로 설명하기 힘들어졌을 정도로, 재조합한 산물을 재조합하여 복잡한 장르 문법을 갖추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성좌물은 성좌라는 것이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장르라는 건데 대체 그 성좌라는 게 뭐란 말인가?

성좌물을 우선 정의하자면 이렇다.

  1. 상하위 위계를 갖춘 복수의 세계가 있고,
  2. 상위 세계의 존재(성좌)들이 하위 세계의 인간들이 도전과제를 수행하는 것을 보고 즐기면서,
  3. SNS나 인터넷 방송 등에서 볼 수 있는 ‘좋아요’나 후원 등의 간접적 의사표시를 한다면 그 장르는 성좌물로 분류할 수 있다.

상하위 세계의 존재와 상위 존재의 개입은 [메모라이즈]와 [환생좌]에서 일찍이 등장한 장르적 문법이었는데, 2015년 [(주)판테온]이 이를 SNS적 요소와 결합하며 성좌물의 원형을 최초로 만들었다. [(주)판테온]에서 신들은 자신들의 목적 달성을 위해 인간을 사도로 고용하고, 그들에게 SNS에서 나오는 알림창(XX가 좋아요를 눌렀습니다) 형태의 메시지를 주면서 주인공과 상호작용하는 이야기를 시도했다. 이 또한 2015년 무렵 만개하기 시작한 수많은 실험과, 웹소설이 동시대의 미디어와 얼마나 활발한 상호작용을 하면서 진화하는지 알려주는 훌륭한 사례였다.

판테온

[(주)판테온]에서 시도된 혁신은 2016년 [튜토리얼이 너무 어렵다]에서 본격적으로 정립되었다. [튜토리얼이 너무 어렵다]는 헌터물과 상태창, 인터넷 방송을 결합한 전개 방식으로 큰 인기를 끈 작품이다. 작품의 기본적인 배경은 헌터물의 배경과 같다. 하지만 여기서 각성자들의 능력은 그냥 각성하지 않는다. 대신 초월적 존재가 마련한 튜토리얼 존인 ‘탑’에서 일정한 시련을 통과해야지만 능력을 얻을 수 있다. 이 시련에서 인간들을 도와주고자 제공되는 것이 바로 상태창 시스템과 초월적 존재들의 인터넷 방송을 연상케 하는 메시지와 후원이다. 이미 당대 인터넷 공간에서 빼놓을 수 없는 매체로 등장한 인터넷 방송이 직접적으로 다뤄지는 ‘인방물’이 아니라, 재조합 혁신을 위한 하나의 도구로서 헌터물에 결합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이를 매개한 것은 현실의 게임화를 이끄는 가장 중요한 요소인 상태창이었다.

튜토리얼이 너무 어렵다 *2018)

튜토리얼이 너무 어렵다 (2016)

2018년 연재가 시작되어 2019년 최고 인기작으로 등극한 싱숑 작가의 [전지적 독자 시점]은 이런 재조합 혁신, 즉 장르 통합을 더욱 심화시켜 지금까지 소개한 이 두서없는 장르를 ‘성좌물’이라는 별도 장르로 독립시키기에 이르렀다. [전지적 독자 시점] (이하 ‘전독시’)에서 본격적으로 인간들을 후원하는 상위 세계의 존재들에게 “성좌”라는 이름이 붙었고, 이 작품이 인터넷 방송 요소를 훨씬 적극적으로 차용하면서, 무엇보다 결정적으로 [전독시]가 엄청난 흥행몰이를 하게 되면서 해당 장르의 이름이 성좌물로 굳어지게 된 것이다.

단순히 성좌물이라는 이름과 규칙을 만들어냈다고 해서 [전독시]가 장르 통합과 재조합 혁신의 사례라는 것은 아니다. 이 소설은, 분량이 3천회가 넘는 초장편 소설을 유일하게 읽은 주인공 김독자가 소설 속 세계로 들어가면서(정확히는 세계가 그 소설 내용처럼 변하면서) 겪게 되는 이야기를 핵심 서사로 삼는다. 여기서 김독자는 작중 소설인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멸살법)”의 주인공인 ‘회귀자’ 유중혁과 경쟁, 반목하고 때로는 협력하며 성좌들이 주는 시련을 하나씩 극복한다.

작중 유중혁은 이미 여러 번의 회귀를 겪은 상태로, 미래의 정보를 바탕으로 시련을 이겨내기 위해 사이코패스와 같은 냉혈한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미 여기까지만 보았는데도 책빙의물과 회귀물의 요소를 확인할 수 있다. [전독시]는 거기에 포스트 아포칼립스물, 인방물, 무협과 판타지의 각종 클리셰, 차원유랑물, 이세계 귀환물 등의 온갖 장르를 하나의 이야기에 통합해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전독시]를 싫어하는 독자들은 이 작품이 ‘누더기’라고 비판하지만, 사실 이 같은 재조합 혁신이 한국 장르 소설의 가장 특징적인 면모라는 점은 [전독시]를 평가할 때 생각해볼만 한 점이다.

전독시

더하여, 이 수많은 장르들을 이어붙이고, 상하위 위계의 세계와 과거와 미래, 여러 회차를 오가는 복잡한 서술 방식은 [달빛조각사]를 위시한 게임 판타지에서 등장한 게임과 현실의 병행 세계가 어느 정도로 진화했는지를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이기도 했다. 아마 정보들을 직관적으로 제공해주는 상태칭이라는 도구가 없었다면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다. 특히 성좌물은 그 특성상 상위 존재들이 시스템과 스트리머를 통해 주기적으로 개입하면서 독자들에게 친절히 정보를 알려주는 경향이 있는데, 이를 통해 절감한 인지자원을 독자들은 복잡한 상하위 병행 세계와 시간대의 사건들을 이해하는 데 할애할 수 있게 되었다. 주류 온라인 미디어와의 상호작용은 이처럼 생각지도 못하는 파급 효과를 낳은 것이다.

정치물과 재벌물 

한편으로 흥미로운 흐름은 2017년부터 상당히 진중한 정치물과 재벌물이 등장했다는 것이다. 이전에 설명하였듯, 갑질기업물이라는 장르는 이미 중년 이상 남성 독자들이 어느 정도 즐기던 장르이긴 하였다. 하지만 그것이 단지 사회인 중년 독자들의 말초적 대리만족을 넘어 보다 권력, 자본, 국가 등의 문제를 깊이 있게 그려내면서도 충실한 대리만족을 제공하는 장르로 진화한 것은 명백히 최근의 사례이다. 이는 상당히 권력지향적, 경쟁지향적인 한국인들의 정서에 아주 잘 맞았다.

무엇보다 이는 한국 독자들의 상대적으로 높은 시사 상식 수준의 덕을 본 면이 컸다. 정치, 경제 소재를 이전보다 훨씬 깊은 수준에서 다루어도, 진짜 과하게 어렵지만 않으면 독자들이 충실히 따라올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회귀와 상태창 등의 여러 게임적 요소들이 개입하여 이야기를 이해하기 쉽고 재밌게 만들어주는 것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2017년에 연재된 산경 작가의 [재벌집 막내아들]은 이런 흐름을 만들어낸 상당히 중요한 작품이었다. 재벌 회장 일가에 대한 원한을 품고 죽게 된 주인공이 그 재벌집의 막내아들로 환생하여, 전생의 원한을 풀고 현생에서 조부의 유지를 잇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 이 소설의 중심적인 이야기다. 이 작품은 이미 2년여 동안 크게 발전한 전문가물과 회귀물의 클리셰들을 활용함과 동시에, 한국인들이 선망하고 경멸하는 재벌이라는 소재를 능수능란하게 사용하면서 엄청난 인기를 구가하였다. 문피아에서 전성기 월매출 1억원을 달성하면서, 이 시장이 엄청나게 성장했음을 널리 입증한 작품이기도 했다(참고로 2013년 100억원이던 웹소설 시장 규모는 5년만에 4천억원으로 40배 가까이 폭증했다). 이로써 과거의 흐름과 구별되는 진중한 기업물과 재벌물은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잡게 된다.

재벌집 막내아들(연재: 2017. 02. 20. ~ 2018. 01. 11.)

재벌집 막내아들(연재: 2017. 02. 20. ~ 2018. 01. 11.)

이처럼 전면에 등장한 자본, 국가, 권력 등의 요소는 판타지 배경이 현실과 합쳐지면서 다양한 판타지 장르에도 흡수되었다. 나민채 작가의 [전생자]는 이런 경향을 선도한 작품이었다. 이 작품은 포탈이 열리고 괴수들이 출현한 세계에서 고난을 겪은 주인공이 미래를 안 채 과거로 돌아가는, 헌터물과 회귀물을 조합한 전형적인 설정으로 쓰여졌다. 하지만 나민채 작가는 다른 차별화 요소를 통해 작품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심하게 말하면 그저 돈이 숫자와 다를 바가 없는 다른 헌터물보다 훨씬 더 권력과 경제 문제를 심도하게 조명한 것이다.

[전생자]에서 주인공은 현대 경제 시스템 전체가 괴수의 출현과 동시에 붕괴하고 그로 인해 세계가 재앙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되는 것을 이미 본 상태다. 따라서 회귀한 뒤 그가 가장 먼저 착수하는 일은 세계의 경제권력을 자기 발 아래 두어 다가올 재난에 인류가 침착하게 대응할 수 있도록 대비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주인공이 아시아 금융위기나 러시아 모라토리엄 같은 90년대 자본시장의 중차대한 사건에 중요 플레이어로 활약하는 모습은 이전의 헌터물과는 확실히 차별화되는 모습으로 독자에게 다가갈 수 있었다.

전생자 (2017. 02. 29. ~ 2019. 08. 07)

전생자 (2017. 02. 29. ~ 2019. 08. 07)

2019년 이런 흐름을 이어 받은 작품은 피아조아 작가의 [임기 첫날에 게이트가 열렸다]가 있다. 흥미롭게도 이 작품은 그 현실성을 높이기 위해 웹소설 장르 문법의 가장 핵심적 자산이 된 상태창과 회귀를 일절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 레이드물과 헌터물에서 “포탈이 열리고 괴수가 나와 각국은 위기에 몰렸으며, 그 상황에서 각성자가 등장하여 혼란을 수습했다”라는 식으로 짤막하게 언급하고 마는 사태 초기를 20대의 초선 국회의원이 어떻게 대처하는지 세심하게 추적한다.

[임기 첫날]에서는 초능력을 다루는 헌터들의 힘, 괴수에 의해 존재를 위협 받게 된 국가와 사회, 그 와중에서 새로운 세계에서 자신들의 이권을 어떻게든 더 확보하려는 정치적 수싸움이 얽혀 정말 매력적인 서사를 만들어나간다. 즉, 이 작품에서 피아조아 작가는 헌터물이 흔히 사용하는 회귀물과 게임 판타지적 요소 대신 재벌물과 정치물의 요소를 대폭 차용하여 새로운 장르 통합과 재조합 혁신을 이뤄낸 것이다.

임기 첫날에 게이트가 열렸다 (2019. 02. 19. ~ 연재 중)

임기 첫날에 게이트가 열렸다 (2019. 02. 19. ~ 연재 중)

또 한 가지 독특한 맥락에서 짚어볼 작품은 김경록 작가의 [더 퍼거토리]다. 이 작품의 장르는 지금까지 한 번도 언급된 적이 없던 대체역사다. 사실 대체역사 장르 자체는 2000년대 초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작게나마 활성화 되었던, 유서 깊은 장르 중 하나다. 하지만 이 장르는 대중성을 확보하기 극히 힘들었던 밀리터리 매니아들의 과도한 영향력 행사와, 2000년대 초반에 유행했던 민족주의적 ‘국뽕’ 장르가 과하게 흥행하면서 실질적으로 장르 시장의 변방 중의 변방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대체역사는 자연스레 민족주의 분위기가 가라앉고, 밀리터리 커뮤니티가 쇠퇴한 2000년대 후반에 큰 침체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2010년, 김경록 작가가 조아라에서 [대한제국 연대기]를 연재하면서 죽어가던 대체역사 시장에 다시 활기가 돌게 된다. [대한제국 연대기]는 밀리터리, 민족주의와 철저하게 거리를 둔 채, 작가의 치밀한 자료조사를 통해 대체역사의 핵심적 재미인 역사 개변을 수백년에 걸쳐 굉장히 설득력 있게 묘사하면서 대체역사의 본질적 재미를 독자들에게 다시금 깨닫게 해준 혁신이었다.

이 또한 역사 게임에서 상당히 유명한 게임 시리즈인 패러독스 인터랙티브의 작품에 영향을 받았다는 점에서, 대체역사 또한 게임과 상호작용하는 한국 장르 소설의 일반적 경향에서 결코 예외는 아니었다. 그 뒤 부활한 대체역사 시장에는 여전히 밀리터리와 민족주의 색체가 짙었고, 그런 이유로 임진왜란이나 구한말 같은 다소 진부한 소재가 반복되는 경향이 지속되었으나, 김경록 작가를 위시한 여러 작가들이 위의 두 요소에 구애받지 않는 색다른 작품들을 계속해서 써내면서 대체역사 장르 자체의 다양성도 크게 늘어났다.

더 퍼거토리(연재: 2018. 01. 12. ~ 2019. 05. 24. (1부), 2019. 08. 20 ~ 현재 (2부))

더 퍼거토리(연재: 2018. 01. 12. ~ 2019. 05. 24. (1부), 2019. 08. 20 ~ 현재 (2부))

[더 퍼거토리]는 그런 맥락에서, 다른 장르들과 비교하였을 때 고립되었다고나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는 대체역사를 인접 장르와 본격적으로 통합하여 대체역사 또한 한국 장르 소설의 보편적 문법에 속할 수 있음을 보여준 작품이다. 이 소설은 뇌사 상태에 빠져 연구용으로 기증된 주인공의 의식 데이터가 온전한 가상세계 구동을 위한 시뮬레이션을 위해 14세기 몽골제국 말기를 구현한 가상현실로 덧씌워지는 것으로 시작된다(이 도입부에서 주인공과 동료 과학자의 대화는 심리철학과 뇌과학의 고전적인 문제를 아주 흥미롭게 상기시킨다).

자연스레 ‘시스템’의 지원을 받으며 상태창을 확인할 수 있게 된 주인공은 그 지원을 통해 본래 역사에서라면 그 어떤 개인도 이루어낼 수 없는 위대한 업적을 달성하게 된다. 이는 게임적 요소의 도입은 그 어떤 장르라도 소설적 재미를 극대화시킬 수 있음을 보여주는 생생한 사례였다. 최근 연재가 이어지고 있는 [더 퍼거토리] 2부는, 왕가의 망나니 몸에 들어가 새 삶을 시작하는 ‘망나니 빙의물’의 요소를 도입하였고, 기존 재벌물과 정치물의 요소를 ‘동양이 산업화에 성공하고 고려가 세계적 패권국이 된’ 완전히 다른 역사를 지닌 작가만의 세계와 통합하면서 대체역사 장르를 혁신시키는 데 계속해서 기여하고 있다.

2차 컨텐츠의 문제 

한편, 이 시기는 웹소설이 웹툰과 드라마를 비롯한 2차 컨텐츠를 파생시키면서 기초 컨텐츠로서의 위상을 다진 시기이기도 하였다. 이 면에 있어서는 컨텐츠 소비 성향이 높은 여성들의 역할이 주효했으므로, 자연스레 여성향 장르들이 빠른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대표적인 작품인 [구르미 그린 달빛]은 드라마로, [김비서가 왜 그럴까]는 웹툰과 드라마로 미디어 믹스 되면서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이는 웹소설이 갖는 기초 컨텐츠로서의 잠재력이 확인되는 순간이기도 하였다. 특히 작가 개인의 상상력에 온전히 의존하고, 웹툰보다 노동집약도가 낮은 웹소설이 다양한 혁신과 상상을 해낼 수 있다는 웹소설의 특성은 이후 여러 미디어 믹스 시도를 낳으면서 한국 컨텐츠 생태계 전반이 통합되는 흐름을 낳았다.

구르미 그린 달빛 (원작 소설: 2013, 드라마: 2016)

구르미 그린 달빛 (원작 소설: 2013, 드라마: 2016)

김비서가 왜 그럴까(원작 소설: 2016, 드라마: 2018)

김비서가 왜 그럴까(원작 소설: 2016, 드라마: 2018)

남성향 웹소설도 이러한 흐름에 합류했다. 영상 매체, 특히 드라마는 이미 여성들이 주로 시장지배력을 행사하는 공간이었기에, 이 분야에서 남성향 웹소설이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했다(최근 영화화 판권이 판매된 [전독시]도 소설 중반부부터 여성 독자들이 대거 유입된 작품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후술할 것이다). 대신 남성향 웹소설은 상대적으로 낮은 비용이 드는 웹툰으로 옮겨지는 일이 잦아졌다. 웹소설의 여러 모티브들을 따온 웹툰들 또한 정식 플랫폼에서 연재되기 시작한 사례가 많아졌다.

최초로 웹툰화가 시도된 작품은 멸망 직전의 카카오페이지를 혼자서 구원해내기도 하였던 강력한 컨텐츠인 [달빛조각사]였다. 하지만 처음부터 웹툰화가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었다. 2015년 연재가 시작된 [달빛조각사] 웹툰은 흥행에 실패했다고까지 말할 수는 없었으나, 원작이 갖고 있던 막대한 파급력에 비하면 여러모로 아쉬운 성적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여성향 웹소설 기반 웹툰이 상당한 성공을 거둔 것에 비하면 꽤나 의외의 일이었다. 이런 어려움은 2017년 연재가 시작된 [템빨] 웹툰에서도 반복되었는데, [템빨] 웹툰은 [달빛조각사] 웹툰보다 훨씬 더 심하게 저조한 성적을 거두었다는 점에서 결과는 더 안 좋았다.

[템빨] 웹툰의 경우 만화 작가가 원작에 대한 이해도 자체가 낮은 점이 중요한 문제로 지적되었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웹소설과 웹툰이 매체 인지 차원에서 많은 차이를 보였기 때문이었다. 웹소설은 텍스트를 통한 감정이입과 깊은 대리만족, 즉 자아감을 느끼는 데 최적화된 매체다. 반면 웹툰은 그림이라는 이미지를 통해 작가가 구현해낸 세계의 이미지를 제시해주는 것이기 떄문에, 자아감보다는 세계감에 더 초점을 둔 매체다. 이 점 때문에, 웹소설을 단순히 웹툰화 했을 경우, 웹소설이 가진 강렬한 대리만족 효과는 독자들이 눈으로 그림을 보기 시작하는 순간, 특히 독자인 ‘나’와는 다른 존재인 주인공 캐릭터의 얼굴이 보이는 순간 급격히 반감될 수밖에 없었다. 기반한 정서가 한국적 정서라고 하여 웹소설 기반 웹툰이 다소 독립적인 경로로 발전한 오리지널 웹툰에 비해 확고한 경쟁력을 보여주기는 힘들었던 셈이다.

하지만 상황은 또다시 급격하게 바뀌었다. 2018년부터 연재되기 시작한 [나혼렙] 웹툰이 매체 인지 상의 한계를 성공적으로 극복하며 웹소설의 웹툰화 가능성을 다시 소생시킨 기념비적 작품으로 올라섰기 때문이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달빛조각사]나 [템빨]보다 훨씬 현대적인 [나혼렙]의 이야기 구조, [나혼렙] 웹툰 특유의 압도적인 퀄리티의 그림과 엄청난 분량 자체가 이미 차별화된 점을 만들었다고 평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만화는 매체 인지 상에서도 상당한 혁신적 요소를 담고 있다.

주인공 성진우에게 독자가 최대한 자아감을 느끼며 이입할 수 있도록, 성진우의 시선 방향과 독자의 시선 방향을 일치시키는 연출이 의식적으로 자주 나오는 것이 중요한 예시다. 이런 인지 상의 이유로 성진우가 독자에게 뒷모습을 내보인 채 적을 응시하는 장면은 작중에서 많은 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다. 디스플레이를 넘어 성진우가 보는 시선 방향을 독자와 공유함으로써, ‘대리만족’이라는 핵심적인 감정을 느낄 기반을 만들어낸 것이다. 아직 [나혼렙]만한 웹소설 기반 웹툰이 결코 흔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이 같은 혁신이 보다 광범위하게 공유되고, 수많은 웹소설의 인기작들을 어떤 식으로 더 잘 시각 이미지로 잘 구현해낼 수 있을지 그 방법론이 경쟁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하면, 웹소설과 웹툰의 연결은 2020년대를 상징하는 컨텐츠로 부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음 글(마지막)에선 25년에 가까운 한국 판타지 소설 역사를 돌아보고, 과연 무엇이 이 발전에 핵심적인 요소였는지, 장르 소설에 있어서 ‘한국적 요소’란 무엇인지, 그것이 왜 지금 시점에서 세계적인 유행을 선도하게 되었는지, 끝으로 2020년대와 그 이후 웹소설의 미래 도전은 무엇이 될지 논해보고자 한다. 드디어 첫 질문인, [나혼렙] 웹툰의 국제적 성공에 대해서 나름의 답을 내릴 시간이다.

판타지소설

(계속)

[4] 정체성, 과제 그리고 나

독자께 드리는 말씀:

이 글은 제가 애정을 가진 장르소설, 특히 판타지 소설에 갖던 나름의 관심을 발전시켜, 한국 판타지 소설의 태동기부터 오늘날까지 발전사를 부족하나마 훑어본 글입니다. 그런 이유로 이 글에는 몇 가지 부족한 점이 존재합니다.

첫째는 제가 본격적으로 판타지 소설에 입문한 시기가 다소 늦다보니, 1세대 소설과 그 시대에 대한 이해가 다소 부족할 수 있습니다. 둘째는 판타지 소설 및 웹소설의 트렌드가 너무 광범위하고 빠르게 변화하여, 놓친 게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계보상 중요한 작품이나 사건이 누락되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셋째는 남성향과 여성향 문제인데, 제가 이 글에서 감히 ‘한국 판타지 소설’을 훑어본다고 하였으나, 사실 저는 여성향 소설, 특히 로맨스 판타지 등이 갖는 위상에 대해서는 거의 막연한 감만을 갖고 있습니다. 많은 부족함이 있는 글이겠으나 위 세 사항에 대해서는 특히 더 그러하리라 생각됩니다.

하지만 저는 또한 장르를 애정하고 여러 작품을 애독하는 한 독자로서, 비록 부족함이 있음에도 관련 논의가 사회적으로 더 활발하게 이루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 글을 쓴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따라서 건설적인 논의를 위한 코멘트와 비판은 언제든지 좋습니다. 다만, 부족한 점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비판하시더라도 너무 날을 세우시기보다는 다소 너그러운 시선으로 봐주신다면 정말 감사할 것 같습니다.

덧붙여 본 글에서는 장르소설, 판타지소설, 웹소설 등이 다소 혼용되고 있습니다. 이 글은 엄밀히 말하자면 한국 남성향 판타지 소설-웹소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문맥을 고려하여 넓은 맥락이 필요하다 싶을 때는 장르 소설을, 판타지라는 장르에 집중하고자 할 땐 판타지 소설을, 2010년대 웹연재환경 이후 등장한 소설을 언급할 땐 주로 웹소설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2010년대 이후에는 판타지로 포괄하긴 더이상 어려워진 웹소설 장르(대표적으로 직업물) 또한 다루고 있는데, 이는 이들 장르가 직간접적으로 남성향 판타지의 영향을 다대하게 받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모쪼록 부족한 글, 관대한 독해와 건설적 비판을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임명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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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명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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