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판타지 소설을 돌아보며:
가장 하찮던 존재가 혁명의 주역이 되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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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희미한 여명: 1990년대
2. 대중소설로의 이행: 2007년까지
3. [달빛조각사]와 게임의 시대
4. 귀족을 기억하라
5. 웹소설의 진화: 2015-2016
6. 웹소설의 현재: 2017-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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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한국 판타지 소설은 무엇이었는가
완전하지는 않았고 결코 그럴 수도 없지만, 지금까지 세 편에 걸쳐 한국 판타지 소설이 발전하는 과정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영도의 [드래곤 라자]가 출판되어 [나혼렙]이 국제적으로 성공하기까지 20여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이 시기 동안 한국 판타지 소설은, 성취도 겪었고 위기도 겼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형태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특히 그 엄청난 변화 속도야말로 지난 20년 동안 한국 판타지 소설이 보여준 가장 큰 특징이 아닐까 싶다. 개인적 경험으로 말하자면, 한국 판타지의 변화 속도는 중간에 잠시라도 빠져 있다가 다시 진입하는 자들에게는, 아예 달라져버린 새로운 문법에 한 동안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할 정도의 속도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 정신 없는 질주를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를 찾아낼 수 있을까.
물론 이 방대한 역사를 관통하는 주제가 진정으로 있으리라 생각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래도 한 명의 독자로서 그런 주제가 있다면 나는 ‘한국적 요소의 강화 과정’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초창기 한국 판타지는 명백히 외생적 요인으로 시작된 장르였다. 일본 판타지 소설과 애니메이션, 특히 JRPG의 영향은 1990년대 한국 판타지의 주요한 문법이 정리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 글에서 깊이 다루지는 못했지만, 한국의 인접 장르라고 할 수 있는 무협도 유사한 장르적 클리셰들을 제공하여 한국 판타지의 형성에 크게 기여했다. 작가들의 성향은 또한 순문학과도 인연이 어느 정도 있었고, 적어도 순문학을 아예 의식하지 않을 수는 없는 엘리트 성향은 분명 존재했다. 이는 1990년대의 작품들을 상당한 문학성과 깊이를 갖춘 고전적 작품들로 만들어내는 핵심적인 요소였다. 하지만 ‘현대 한국’이라는 시공간적 요소가 장르 문법이나 메시지에 특별히 반영되었다고 보기는 힘든 면이 많았다.
한국 사회의 문화적 특성, 가령 ‘경쟁’ ‘서열화’ ‘갑질’
하지만 그런 독특한 시공간적 맥락, 즉 한국의 사회와 문화적 특성은 21세기에 접어들어 본격적으로 장르 소설에 선명한 색채를 더해갔다. 누군가 [드래곤 라자]에서 [로도스도 전기]와 비교해볼 점을 찾으려면 꽤 많은 점을 발견해낼 수 있겠지만, 이제 [임기 첫날에 게이트가 열렸다]나 [전지적 독자 시점] 같은 작품들에서 외국 컨텐츠의 강한 영향을 짚어내는 건 굉장히 힘들어졌다(‘임기’의 경우 흥미롭게도 라이트노벨의 영향이 보이긴 한다.). 장르 소설들은 이제 다수 한국 대중, 특히 2010년대 기준으로 2030 청년들의 시대적 욕구(=’결핍’)를 반영하는 방향으로 빠르게 진화했다. 그렇다면 다시 질문이 하나 더 생긴다. 그 ‘한국적 요소’라고 함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내용적인 측면에서 한국적 요소는 한국 사회 구성원이 겪는 불만과 욕망이 반영된 대리만족을 효과적으로 제공해주면서 선명해졌다. 계속해서 지적했듯이, 한국 사회는 구성원들이 모두 하나의 사회적 공간 속에 있는 것을 가정하고, 이상으로 두는 하나의 사회적 목표를 향해 그 구성원 모두가 질주하며, 목표로부터의 거리를 기준으로 강력하게 모두를 서열화하는 사회다. 이런 사회에서 구성원은 남들 아래에 놓이지 않기 위해 극도로 경쟁지향적, 상승지향적이 되었다. 특히 이 상승 지향 과정에서 구성원에게 가해지는 압박, 사회적 위계에 따라 발생하는 부당한 대우인 ‘갑질’은 어느 누구의 잘못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구성원 상호 간에 만연하여 한국인들에게 극도의 스트레스를 안겨준다.
이 같은 사회적 환경이 만들어낸 독특한 문화는 한국 사회의 여러 영역에서 다시 확인해볼 수 있다.
특히 MMORPG를 비롯한 온라인 게임에서 이런 경향이 아주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예컨대 플레이어들은 남들 위에 가장 효율적으로 올라갈 수 있는 플레이 방법인 ‘정석’을 찾아내어 모두가 그 방법론에 몰두했다. 오직 스킬 하나를 더 올리고 좋은 아이템 하나를 얻고자 몇 시간씩 단순 반복 클릭만 하는 ‘노가다’도 아주 흔한 한국적 문화로서 한국인들을 사로잡았다. 한국 판타지 소설에 영감을 주는 원천이 기존 JRPG에서 이렇게 한국적 문화가 선명히 드러나는 국산 MMORPG로 옮겨가자, 한국 사회 구성원들이 욕망이 더 직접적으로 반영되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 되었다. 인기 소설 [달빛조각사]는 이런 경향을 선도했다.
이후 여러 장르적 장치들을 통해 강화, 증폭된 한국 사회의 이 같은 경쟁적 요소는 다양한 장르 클리셰와 메시지들을 파생시켰다. ‘노가다’로 대변되는 극도의 노력을 수행하여 남들 위에 올라서려 하는 강한 의지를 가진 주인공은 [달빛조각사]를 한국인에게 매력적인 이야기로 만든 대표적인 작품이었다.
또한, 사회안전망이 흔들리고 전망이 불투명해지면서, 또 주변의 누군가가 나에게 ‘갑질’을 할 수 있다는 불안감이 반영되면서, 사회와 타인을 불신하고 어떻게든 계층 사회의 위로 올라가고자 하는 상승지향성도 소설 속에서 점점 강해졌다. [나는 귀족이다]는 제목부터 이런 정서를 반영하고 있다. 현실에서 독자들이 당할 갑질에 대한 대응물로서 소설 속 주인공들이 높은 지위를 바탕으로 보복성 갑질을 하게 되는 전개 또한 [달빛조각사]에서 핵심적 유행요소로 등장한 뒤 많은 작품에서 상당히 흔해졌다.
‘히전죽’과 ‘사이다패스’, 정석과 변칙: 욕망에 충실한 장르 문법의 진화
그 결과 ‘상승’과 ‘경쟁’, 그를 통한 ‘대리만족’이라는 목표를 위해 여러 장르적 규칙들이 파생되었다. 이는 처음에는 먼치킨물의 형태로 아주 투박하게 등장했다. 퓨전 판타지에서 이세계로 넘어간 고등학생은 갑자기 대단한 초능력을 얻게 됐고, 게임 판타지에서는 특수한 ‘히든 클래스’를 얻게 되는 장치가 대표적이었다.
하지만 현대 한국이 주된 배경으로 떠오르는 가운데, 게임적 요소가 현실에 대거 투입되면서 장르 문법은 상승의 수단으로서 정보비대칭을 해소 혹은 극대화시켜주는 발전했다. 그 수단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게임 시스템을 통해 수치화된 자료를 제공해주는 상태창, 그리고 미래의 정보를 과거에서 활용하게 할 수 있게 해주는 회귀였다. 극도의 경쟁, 상승지향적 문화가 아니었다면 이 둘이 한국 웹소설에서 지금의 형태로 활용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대신 대리만족을 방해하는 다른 요소들은 영향력이 줄어들었고, 심한 경우 적극적으로 배격되었다. 다른 의미에서 한국적 요소라고 평가 받는 ‘신파’가 그 대표적 예였다. 주인공을 포함하여 캐릭터들이 자신들의 감정을 과하게 표출하고, 그로 인해 주인공의 상승 지향적 행동이 방해받는다면, 독자들이 격렬한 반발을 표출하곤 했던 것이다. 디씨인사이드 장르소설 갤러리에서 사용되는 ‘히로인이 되기 전에 죽입시다’, 줄여서 ‘히전죽’이라는 표현은 이런 의견을 자주 표하는 독자들을 아주 간명하게 한 줄로 요약하여 상당한 인기를 끈 유행어가 되기도 했다. 이는 히로인이 감정적으로 흔들리면서 주인공을 둘러싼 전체 이야기가 급정거하는 경향이 강한 일본의 경향과 아주 잘 대조되는 한국적 요소라고 평할 수 있다.
유사한 맥락에서, 대리만족이 즉각 돌아오지 않고 주인공에게 답답함을 안겨주는 도전만 계속 주어지면 ‘고구마’라는 이름으로 작가에게 항의를 표출하는 경향도 잦아졌다. 이는 주인공의 빠른 성장과, 성장을 통한 보복성 갑질을 통해 그동안 쌓인 고구마를 풀어주는 ‘사이다’에 대한 독자들의 열망이 만들어낸 동전의 양면이었다. 그로 인해 사이다만 찾는 독자들을 ‘사이다패스’라는 식으로 비판하는 경향이 늘었는데, 사실 1990년대 JRPG의 색채가 짙은 작품 기준으로 보자면 현재 한국 웹소설은 대부분이 사이다패스라고 보아도 무방할만큼 속도감이 빨라졌다.
한편, 모두가 공유하는 하나의 목표와 가장 효율적인 방법론을 모두가 추종하는 ‘정석’과 그러한 정석을 한 번에 우회하는 ‘변칙’도 한국 웹소설의 또 다른 주요 테마가 되었다. 본래 JRPG에 영향을 받은 90년대의 작품들은 어떠한 ‘왕도적 전개’를 추구하는 정석적인 면모가 강했다. 작은 마을의 소년이 모험을 거쳐 성장을 해 마왕을 물리쳐 세계를 구해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00년대 이후 발전한 먼치킨물이나 게임 판타지의 히든 클래스는 이런 경향과 완전히 상반되는 변칙적인 요소를 대거 도입했다. 이는 정석이 이미 한국에서 주류적 방법론으로 사회 구성원들에게 상당한 스트레스를 주고 있었기에 대리만족으로서 차용된 것이었다.
그 결과, 막대한 시간 투자와 노력을 해야 하는 정석적 방법론을 우회하여 훨씬 빠른 성장을 거둘 수 있는 방법론인 변칙 플레이는, 주인공의 번뜩이는 기지와 어울려 한국 독자들에게 상당한 카타르시스를 제공해주는 기초적 소재로 부상했다. 하지만 독자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문화를 내면화한 한국인이었다. 따라서 초반의 변칙적 조건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난 뒤에는, ‘변칙 안에서도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따라 지위를 상승시키고 위기를 해결하여 대리만족을 얻기를 원했다. 히든 클래스를 얻고 여러 변칙적 플레이와 기지로 다른 플레이어들을 눌렀지만, 그와 동시에 강인한 의지를 보여주며 계속해서 노력하고 정진하는 [달빛조각사]와 [템빨]의 주인공들은 변칙과 정석 사이에서 능숙한 줄타기를 보인 훌륭한 사례들이다.
위에서 살펴본 요소들이 한국적 요소들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과거 한국인들에게 인기 있던 작품들을 살펴볼 때 더욱 선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대표적으로 80년대에 유행했던 만화가 고행석의 [불청객 시리즈]가 있겠는데, 독자들이 이입하기 좋은 어리숙한 캐릭터가 여러 변칙과 초능력을 통해 작품의 주된 배경이 되는 영역에서 대성공을 거두고 사랑을 쟁취하는 일관된 이야기는 일찍부터 한국 독자들에게 크게 인기를 끌었었다.
그런 의미에서, 비록 장르는 다를지라도 어쩌면 변칙을 활용한 먼치킨물과 빠른 성장과 지위 상승이 가미된 옛 이야기들이 다른 정석적 판타지 소설보다도 현대 한국의 장르 소설과 더 직접적 연관이 있을 것이다. 바로 한국 사회에서 부대끼는 한국인들의 정서에 최적화된 이야기라는 점에서 말이다.
매체적 접근: 게임과의 상호작용
이야기 구조에서 벗어나면, 게임과의 상호작용이라는 매체적 특성이 있다. 그 중에서 게임과의 활발한 상호작용은 한국 판타지 소설의 처음부터 가장 면밀히 이어져오는 한국적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PC통신을 근거지로 삼아 시작부터 IT문명과 함께 태동한 한국 판타지 소설은 당대 지배적인 게임 장르였던 JRPG의 영향을 깊이 받아 그 모티브를 소설의 캐릭터, 이야기, 배경 등 다양한 영역에 차용하였다.
이것은 단지 일본이라는 당대 장르 문화의 선진국의 영향을 후발국이 한국이 받아들인 것보다 더 깊은 의미가 있는 현상이었다. 한국 판타지는 ‘일본 판타지’를 차용함과 동시에 그 핵심적 기반으로서 ‘게임’도 택한 것이었다. 따라서 주류적 경험을 형성하는 게임이 바뀐다면 한국 판타지의 문법 자체는 흔들릴 것이 이미 예고가 되어 있던 셈이다.
실제 JRPG가 점차 한국 게이머들 사이에서 경쟁력을 잃어가고, 한국의 특징적인 온라인 게임 문화와 맞물려 리니지로 대변되는 국산 MMORPG가 부상하자 게임 판타지라는 새로운 장르가 곧바로 태동하는 등 급진적 변화가 이어졌다. 국산 MMORPG가 전성기를 거친 뒤 내리막을 걷게 되는 2010년을 전후로는 게임 판타지 또한 침체를 걷게 되는 것이 자연스런 수순이었다. [나는 귀족이다]의 실탄 작가는 이런 흐름에서 대신 블리자드의 [월드오브워크래프트] 시스템을 도입해 장르상의 일대 혁신을 일으켰는데, 게임 와우를 구성하는 핵심적인 문법들의 상당수는 레이드물과 이후 헌터물을 만드는 데 기초적인 재료가 되어주었다.
이후 게임적 요소는 점점 늘어나는 현대 한국 배경과 최종적으로 통합되면서, 한국 판타지 소설은 마침내 ‘현실의 게임화’라는 장르 내 규칙을 정립하기에 이르렀다. 상태창과 같은 직접적 게임 요소가 설령 등장하지 않는다 치더라도, 현실을 배경으로 직업 클래스나 ‘세이브 로드’의 대응물인 회귀 설정이 보편화되었다. 이는 현대 한국이라는 독자들에게 가장 밀접하게 다가올 공간을 게임 플레이처럼 즐길 수 있게 해주었고, 게임 경험이 이미 익숙해진 독자들은 눈으로 확인 가능한 빠른 성장이라는 게임적 요소를 통해 그들이 원하는 대리만족을 더 진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이런 경향성 자체는 게임이 직접적으로 웹소설에 영향을 끼치지 못하게 된 2010년대 후반에도 이어졌다. 게임 시장 자체는 팽창하였지만, 모바일 게임의 확산과 스팀의 도입으로 게임 시장은 파편화되었고, 그나마 존재하는 ‘주류적 게임’은 판타지 소설과는 다소 궁합이 좋을 수 없는 AOS(Aeon Of Strife; ‘영원한 투쟁’의 줄임말로 ‘다중접속 진지공략 게임’ 정도의 의미)나 FPS(1인칭 슈팅 게임; First-Person Shooter)로 넘어가면서 이전처럼 특정 게임이 장르 소설에 직접 다대한 영향을 주는 상황은 끝났다.
하지만 게임을 포괄하는 온라인 경험 전반은 여전히 한국 판타지의 장르 혁신이 결정적 기여를 하고 있다. 특히 새로이 부상한 인터넷 방송과 스트리밍은, 청년층의 경험에 적지 않게 영향을 미쳤으며, 이를 반영하여 현실 자체를 게임을 넘어 ‘게임 스트리밍’처럼 구성하는 작품들이 크게 늘게 된 것이다. ‘성좌물’이라는 장르는 이런 경향의 첨단에 있는 작품으로서, 2018년 한국 장르 소설의 최고 인기작인 [전지적 독자 시점]에 이르러서 정립되었다.
게임과의 상호작용 내지는 소설 자체의 게임화는 한편으로 한국 장르소설의 가장 큰 장점인 강렬한 대리만족을 이끄는 매우 강력한 동인이 되어주었다. 소설이라는 매체 자체가 기본적으로 주인공의 시점을 독자가 내면화시켜 인물의 경험을 추체험하게 해주지만, 한국 웹소설은 대리만족에 초점을 맞춰 그 기능을 극대화시킨 특징을 보여준다. 이는 자신이 하나의 플레이어가 직접 움직일 수 있도록 자유도를 주는 게임의 방법론이 소설에 대거 들어간 결과물이었다.
물론 90년대 판타지 소설이 근거한 JRPG도 게임으로서 이런 요소가 분명 있기에, 이를 온전히 한국적 요소라고 보는 것이 무리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MMORPG를 비롯하여 폭넓은 자유도가 부여되는 이후 한국의 주류 게임과는 달리 JRPG는 개발사가 제공하는 이야기를 관찰하는 면이 조금 더 강했다.
그렇기에, 1인칭 캐릭터를 움직이면서 스탯을 확인하고 주체적으로 최적의 방법론을 탐색한 뒤 전략적으로 플레이에 임하는 한국의 주류적 플레이 양식은 JRPG보다 훨씬 직접적으로 깊은 수준의 1인칭 대리만족을 독자들에게 제공할 잠재력이 있었다. 그렇게 [나 혼자만 레벨업] 이후 현실의 게임화가 완전한 궤도 위에 오르면서, 한국 장르 소설은 적어도 대리만족이라는 영역에 있어서는 매체를 뛰어넘어 마치 전통적 구비문학을 암송하는 듯한 수준의 추체험을 독자들에게 가능하게 해주었다.
창작 역량의 제고: 무체계성과 탈중심성
창작이라는 면에서도 한국 판타지 소설은 독자적인 면모를 보여주며 놀라운 발전을 이루었다. 여기서 한국적인 특성은, 한국 문화의 대중성과 자생성이 극대화되어 발현된 그 무체계성과 탈중심성에 있다. 한국 판타지 소설은 확고부동한 엘리트가 통제하고 이끌며 이루어진 발전보다는 작가와 독자가 완전경쟁시장에 가까운 혼란한 환경에서 오로지 재미와 수익을 최적의 형태로 맞교환하면서 진화했기 때문이다. 문학성에 중점을 두었던 1990년대의 흐름은 그런 맥락에서 2000년대의 대여점을 통해 더 폭넓은 유통망과 독자층을 확보하면서 더욱 대중적 형태로 이행했다.
이는 대중의 자생적 문화 영역에서 특별히 강세를 보이는 한국 문화의 특성을 생각했을 때, ‘한국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자격이 충분한 변화였다. 결과적으로 2000년대 대여점 체제로의 변화는 무료 서비스나 대여를 선호하는 한국인들의 소비 특성이 강하게 발현되어, 그 저변을 넓히는 데는 기여하였다. 더 폭넓은 기반 위에서 작가들은 장르 통합, 새로운 시스템의 도입, 몇몇 새로운 장르의 개발을 시도하면서 제한된 형태로나마 혁신을 시도했다. 그리하여 이 시기 혁신은 2010년대까지 계승되거나 이후 재발굴되어 한국 판타지 소설의 발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대여점 체제는 장르 생태계의 근본적 다양성과 수익에는 큰 기여를 하지 못했다는 한계가 있었다. 대여점 체제는 대여점의 갯수 이상으로 판매고가 확장되기 힘든, 확장성이 떨어지는 시스템이었다. 그래서 시장을 흔들 독창적 작품들은 상대적으로 덜 부각되고, 대신 ‘평균적으로 팔리는’ 작품들과 별 다른 특징 없는 모방작들도 안정적으로 판매가 이루어졌기에 대여점 체제 하에서 장르 다양성은 근본적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비판자들 이를 두고 ‘양판소’라고 비판한 것은 타당한 면이 분명 많았다. 한국 판타지 소설의 주요한 특징은 무체계성과 탈중심성은 이미 대여점 시대부터 확인될 수 있었지만, 아직은 그 특성이 온전히 발현되는 것을 방해하는 시스템적 제약이 있던 셈이다.
2010년대 들어 조아라가 시작한 회당 결제 시스템은 위기에 처한 대여점 체제를 성공적으로 대체하는 것을 넘어 전혀 다른 시장을 창출했다. 이는 한국 판타지 소설 시장 전체를 바꾼 대혁명이나 다름 없었다. 웹 연재 환경은 물리적 유통비용과 출판에 따른 매몰비용을 없는 것이나 다름 없게 만들었다. 그 결과 적은 비용으로 파격적인 시도를 선보이는 것이 가능해져 웹소설 생태계의 다양성은 크게 증가할 수 있었다. 거기에 웹연재 환경과 회당 결제 시스템 덕분에 10권 이상의 장기 연재의 부담을 파격적으로 줄어들었고, 네트워크 효과로 인기 작품은 더 큰 인기를 누리게 되면서 작가는 막대한 수익을 보장받을 수 있게 되었다. 반면 시장의 트렌드를 읽지 못하는 작품은 범람하는 컨텐츠의 시대에 독자들에게 가차 없이 외면받아 퇴출되었다.
진입, 변화, 퇴출은 이전에도 당연히 존재하던 사이클이었다. 하지만 중앙 통제 없이 복수의 중심을 가진 채 약진하는, 완전경쟁시장에 가까워진 웹 연재 환경은 이 속도와 진폭을 엄청난 수준으로 극대화시켰다. 그 결과 정신 없는 속도로 고속 진화하고 발산하는 지금의 ‘웹소설 은하계’가 탄생했다.
미국 SF 소설의 황금기가 여러 작가들을 발탁하고 지도하였던 걸출한 편집장인 존 캠벨의 영향 아래에서 펼쳐진 것과 비교하면 이 과정에서 드러난 무체계성과 탈중심성은 더 명확해진다. 한국의 경우, 대형 기업이 만든 플랫폼과 극도로 단순한 규칙 위에서 작가들과 독자들만이 존재하며 거래하고 발전하는 한국 웹 소설 생태계의 환경은 무정부 상태나 다름 없었다. 이는 분명 누구도 트렌드를 온전히 파악할 수 없게 만든 혼란스러운 환경이었으나, 그 점에 힘입어 한국 웹소설의 장르는 끝이 없을 정도로 뻗어나가 엄청난 다양성을 꽃피워낼 수 있었다.
장르의 분화와 다양성의 폭발적 확대는 한국 장르 소설의 도다른 특성인, 가성비 좋은 재조합 혁신에 힘입은 바가 컸다. 웹소설 시대가 열리자, 판타지 대륙, 무림 등 통합된 세계로서 제공되던 기존 설정들은 수많은 미시적 설정들로 세분화되어 공급되었다. 여기에 이야기를 속도감 있게 전개시켜주고 한국인들에게 최적화된 대리만족을 제공해주는 수단인 회귀와 상태창 또한 범용성이 엄청나게 높은 설정으로서 한국 웹소설 특유의 재조합 혁신의 주역으로 부상했다. 이처럼 세분화된 설정들을 미시적으로 조정하는 경향은 인지적으로 훨씬 적은 비용을 들여 색다르고 참신한 이야기를 만들 수 있게 해주는, 높은 ‘가성비’를 지닌 요소였다.
특히 저렴한 비용의 미시적 혁신은 앞서 언급한 무체계성, 탈중심성이라는 한국 웹소설의 특징과 만났을 때 엄청난 폭발력을 보여줄 수 있었다. 수많은 작가들이 단순하게 조정하기 시작한 설정들이 즉각즉각 독자들에 의해 시장에서 평가되고, 그것이 새로운 미시적 혁신으로 빠르게 누적되면서 일종의 되먹임 고리가 형성된 것이다. 이런 자기조직화와 창발의 결과로, 5년 만에 성좌물과 같은 최초의 원형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복잡한 장르들이 자생적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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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년 동안의 ‘한국적 요소’
지금까지 20여년 동안 강하게 드러난 ‘한국적 요소’는 대략 다음과 같다.
- 상승지향성과 경쟁지향성이 강하게 반영된 이야기
- 주요한 테마로서 ‘갑질’
- 상승을 위한 전략적 사고와 감정 배제
- 빠르고 직접적인 대리만족과 ‘사이다’
- 정석과 변칙 사이의 줄타기
- 게임과의 상호작용과 현실 자체의 게임화
- 무체계성과 탈중심성을 구현한 완전경쟁시장
- 가성비 높은 미시적 조정
이런 요소들을 ‘한국적 요소’라고 내가 칭한 것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 같은 요소들은 비단 웹소설만의 것은 아니고, 공간적으로 현대 남한 사회의 전반에서 발견할 수 있는 한국인들의 행동양식과 지향점이라고도 볼 수 있다. 따라서 웹소설의 역사는 외생적 요소에 의해 자극 받아 탄생한 산물이, 그 외생적 요소는 적절히 수용함과 동시에 자신이 품고 있는 내생적 장점을 극대화시켜 발전해온 역사라고도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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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판소’를 위한 변명
그런 의미에서, 2000년대 말엽 한국 판타지 소설 대부분이 그저 그런 싸구려 복제품인 ‘양산형 판타지 소설'(‘양판소’)에 지나지 않다는 당대의 비판은 10년이 지난 지금에서 다시금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2000년대만 해도 한국인들은 자신들의 문화가 타국의 문화에 비해 그 수준이 떨어진다는 사대주의를, 정도 차이가 있을 뿐이지, 상당수가 품고 있었다. 갖지 못한 엘리트 문화에 대한 선망도 강했으며, 대중 문화는 역시 그런 엘리트 문화에 비해 떨어지는 문화라고 여겨지기도 했다. 그렇기에, 일본에 기원을 둔 외생적 요소와 PC통신 시절의 유산인 엘리트적 경향이 대여점 체제에 들어와서 한국적 요소로 대체되고 대중적으로 변하면서, ‘수준이 낮아진다’, ‘퇴보했다’는 비판이 제기되는 것은 당대 맥락에서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양판소’에 관한 이 같은 비판은 단순히 대중소설 비평에서 끝나지 않고, 훨씬 넓고 깊은 의미를 가진다. 양판소는 한국적, 대중적 요소가 강화되며 비판 받았지만, 역설적으로 세계를 뒤흔든 한국 문화는 한국인들이 부끄러워했던 바로 그런 요소들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한국인들이 스스로에 대한 문화적 자신감을 의심하던 2000년대에 이미 한국 문화는 유사한 정서를 가진 비서구권 각지로 침투하여 영향력을 넓히고 있었다.
비서구권에 대한 관심이 애초부터 많지 않았던 한국은 그런 신호들의 진정한 의미를 아직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2010년대 들어 마침내 세계 문화를 선도한다는 서구권에서도 한국 문화가 단순히 특이한 취향을 넘어 주류에 합류할 자격이 있는 문화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을 때, 이 현상을 외면할 수 있는 한국인은 아무도 없었다.
2010년대 한국 문화가 거둔 거대한 성공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의아하게 생각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왜 자신들이 선망하던, 고상하고 세련된 문화를 갖춘 서양인들이 이런 문화를 좋아할까? 한국인들은 자신들이 선망하던 서구인들에게 자신이 보여지기를 원하는 모습을 통해 인정 받고 싶어했으나, 서구인들은 한국인들이 감추고자 했던 것에 열광했다.
세계인들은 한국이 배출한 최고의 소프라노 가수보다 음악성이 없고 공장에서 찍어낸 것 같다는 아이돌을 원했다. 전통과 품격이 살아있는 고급 한식보다는 CJ의 비비고 만두를 즐겼다. 한국인들은 노벨문학상을 받아 자신들의 문학성을 증명받고 싶어했지만, 세계인들이 선망한 것은 모두에게 무시 당하는 ‘막장’ 드라마였다. 결국 한국인들은 자신들이 무시했던 ‘한국적’ 그리고 ‘대중적’인 요소의 가치를, 그토록 선망했던 서구인들이 인정하고나서야 어리둥절해하며 새삼스럽게 재발견하고 있는 셈이다.
다시 첫 질문으로: 나혼렙의 세계적인 성공 이유는 뭘까?
자, 이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어떻게 [나 혼자만 레벨업]은 세계적으로 그런 인상 깊은 성공을 거둘 수 있던 것일까? 이 점은 2010년대 한국의 대중문화가 세계적으로 인정 받기 시작했다는 폭넓은 맥락에서 이해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하자면, [나 혼자만 레벨업]과 2010년대 한국 웹소설이 저변에 깔고 있는 한국적 요소가 세계인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왔다는 말이기도 하다. 앞서 언급한 한국적 요소들을 다시 살펴보자. 현실의 게임화, 강한 대리만족 성향, 상승과 경쟁 지향, 전략적 사고와 감정의 배제, 계층 사다리에 대한 인식과 ‘갑질’ 무체계성과 탈중심성, 가성비 높은 미시적 조정 등을 나는 ‘한국적 요소’로서 제시하였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요소들은 시간적으로는 1980년대 이후 미국에서 등장하여 세계 각지에서 지역적 변형을 거친 채 안착한 ‘메인스트림’ 대중문화와 높은 호환성을 지닌다는 것이다. 최근 대중적으로 인기를 끈 컨텐츠들, 할리우드나 넷플릭스를 넘어 유튜브와 트위치까지 포괄하는 컨텐츠 생태계를 살펴보면 어느 곳에서든 위에서 언급한 특징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2010년대 한국 문화의 국제적 성공은 다시 말해 한국이 갖는 공간적 특수성과 당대 시대가 갖는 세계적 보편성이 적절하게 교차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한국적 요소’는 그러니까 일종의 시대정신이다.
이 메인스트림 문화는 한국을 포함하여 세계 각국이 전반적으로 경험한 변화가 누적되어 탄생한 결과물이었다. 무체계성과 탈중심성은 1980년대 이후 미디어 생태계가 훨씬 넓어지고, 대량의 자본이 들어오며, 무엇보다 인터넷이 등장하게 되며 강화된 특성이었다. 현실의 게임화는 인류 문명이 IT문명으로 재편되고 게임이 인류의 보편적 경험으로 자리잡게 되면서 자연스레 따라올 일이었다. 한국의 미디어 환경은 분야를 막론하고 이런 흐름에 아주 잘 적응하여 자체적인 혁신을 거듭했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한류는 어딜 가나 젊은 세대의 취향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왜냐면 젊은 세대에 익숙한 온라인과 모바일 미디어에 최적화된 형태로 한국의 대중문화가 생산되니 말이다.
내용적 측면이 세계적 보편성을 확보한 것도 유사한 접근법으로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한국 웹소설 특유의 서사와 대리만족은 그 밑에 깔린 한국 문화가 만들어냈다. 그리고 한국 문화란 구성원들 모두가 단일한 목표를 공유하고, 그 목표를 향해 전력으로 달려가며, 목표와의 거리를 기준으로 수직적 위계를 메기는 고도로 경쟁적이고 상승지향적인 문화다. 남의 머리 위에 올라서지 못하면 남의 발 밑에 서야하고, 그런 참사를 피하기 위해서는 죽어라 달려야 했다.
다시 말해 한국 문화, 특히 서사가 세계적으로 인기를 끈다는 것은 세계인들이 처한 상황이 한국인들이 느끼는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게 됐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에스파냐 출신의 사회학자 마누엘 카스텔의 이론은 이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그는 [네트워크 사회의 도래] (1996, 한글 번역: 2014)에서 정보기술의 확산과 세계 경제의 변화로 이미 ‘네트워크 사회’가 도래했다고 주장했다. 네트워크 사회에서 노동은 파편화되고, 안정적 사회관계는 유동적으로 변하며, 네트워크에 속한 자는 큰 상승을, 버려진 자는 가차 없는 하강을 경험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 속도는 정보기술의 발전과 맞물려 계속해서 가속화될 것이고, 정보, 자본, 기술, 인력 등이 끝없이 흘러들어갔다가 나오는, 무형의 흐름이 사람들을 둘러싼 모호한 권력으로 작용하게 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그는 후속작인 [정체성 권력] (1997, 한글 번역: 2008)에서 이에 대한 대응으로 개인이 의지하는 기초적 정체성에 의존하는 반발 작용이 등장할 것이라고 보았다. 2010년대의 세계를 둘러보면 그의 통찰이 분명 정확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카스텔의 분석과는 별론으로, 사회 구성원들을 계속 불안하게 만들고, 상승을 향한 스트레스를 심어주는, 경쟁 성향이 계속해서 강해지는 현대 사회는 ‘한국적 이야기’가 통할 최고의 환경을 만들어주었다고 하겠다. 왜냐면 그것이 1945년 이후 남한 사회가 경험해온 한국 문화나 별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한국적 요소’는 2008년 금융위기와 더불어 한국에서 그 색채를 더욱 진하게 했지만, 말 그대로 2008년의 위기는 세계적 위기였기에, 세계인들이 한국적 서사에 느끼는 매력 또한 커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바로 이것이, 한국이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고속으로 발전한 미디어 혁신의 결과물인 [나 혼자만 레벨업!]이 해외에서도 인기를 끌게 된 이유다. 거기에는 지난 20여년 동안 한국 대중 컨텐츠가, 그리고 현대 세계가 겪은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기술적 변화가 고스란히 응축되어 있다.
8. 남겨진 과제들
[나 혼자만 레벨업]의 세계적 성공은 2010년대 한국 문화가 거두기 시작한 성공의 연장선상에서, 웹소설과 웹툰이라는 현대 한국 청년층 특유의 서사가 세계적 보편성이 있음을 확인 받은 사건이었다. 웹소설은 다소 지역적, 언어적 장벽이 있기에 그 자체로 세계적 성공을 이어나가기에는 여전히 난점이 있지만, 이미지를 통해 직관적으로 메시지를 전할 수 있는 웹툰은 웹소설과 함께 계속해서 진화할 것이고, 세계적 성공작을 더욱 많이 만들어낼 잠재력이 있다. 나는 2020년대에 [나혼렙]의 성공에 자극 받은 웹소설 기반 웹툰들이 더 많이 제작되어 세계 시장의 문을 두드릴 것으로 생각한다. 마치 ‘한국식 아이돌’이 그러했듯이 말이다.
여전히 한국 웹소설과 웹툰은 급속도로 성장하는 시장이고, 관련 인력들의 창조력도 왕성하게 유지되고 있기 때문에 단기적으로 긍정적 전망을 유지하는 것이 크게 비합리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가장 빠른 속도로 뻗어나가는 바로 그 때, 수면 아래 잠자고 있는, 어쩌면 흐르고 있을 수도 있는 위험을 생각해볼 필요도 있다. 그래야 빠른 속도를 유지하면서도 넘어지지 않은 채 계속해서 건전한 성장을 해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한 번 세계를 뒤흔들어 보았던 일본의 망가가 과거의 전성기에 비하면 그 역량이 예전 같지 않은 것은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는 것을 알려준다. 거기에, 빠른 성장이 보편화된 시대는 그만큼 빠른 퇴출도 보편화시킨다. 국내에서 명멸하였던 수많은 장르 소설 트렌드가 그러했듯이 말이다. 따라서 끝으로는 2020년 벽두에서 한국 웹소설 시장의 잠재적 위험 요소를 짧게나마 살펴보면서, 이 여정을 마치고자 한다.
[dropcap font=”arial” fontsize=”22″]1.[/dropcap]먼저 가장 가시적인 위협은 인구풀 축소다. ‘웹소설 은하계’를 태동시키고 떠받치는 것은 이 시장의 주력 세대라고 할 수 있는 80년대생과 90년대생의 막대한 인구수다. 이는 2010년대에 성공한 여타 컨텐츠와도 유사하다. 1980년대와 1990년대의 20년 동안, 아무리 못 해도 연 평균 60만명의 인력이 매년 꾸준히 추가되었다.
20대와 30대가 지금 정치, 경제적 영역에서 소외받고 있다고 불만이 많아도, 아이돌, 음악, 만화, 소설, 음식, 방송 등 수많은 영역에서 현재 20대와 30대가 압도적 지배력을 행사하는 것은 전적으로 그들의 머리수 덕택이다. 풍부한 인력풀 덕분에 양질의 인적자원이 공급되는 것은 물론이고, 세대 감성을 공유하는 이들이 구매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때문이다. [달빛천사] 녹음을 위한 크라우드 펀딩에서 90년대생들이 26억 원이나 되는 거금을 모을 수 있던 원동력은, 아주 단순하게 말하자면 물리력에서 나왔다.
2020년대에는 1년에 40만명씩 태어난 세대가 성인이 되어 사회에 진입한다. 이런 인구학적 측면은 한국 컨텐츠의 미래 전반에 있어서 흥미로운, 그러나 다소 우려스러운 질문을 제기한다. 한국 사회가 이러한 인구 충격을 처음 맞이할 것이기에 그 파급효과도 예측하기 힘들다.
예컨대 인구수가 대폭 줄어든 컨텐츠 업계는 세대 교체에 성공하고 새로운 젊은 트렌드를 유행시킬 수 있을까? 아니면 그들이 생산력과 구매력 면에서 뒤쳐져 여전히 강고한 80년대생과 90년대생의 지배력이 계속해서 유지될까? 만약 후자일 경우, 점차 40대가 되어 생물학적으로 노화하기 시작한 이들 세대가 자신들이 갖고 있던 왕성한 창의력과 혁신 역량을 여전히 유지할 수 있을까? 2020년대에도 컨텐츠 창작과 소비의 기반으로서 인간과 그 숫자는 계속해서 중요한 질문을 던질 것이다.
[dropcap font=”arial” fontsize=”22″]2.[/dropcap]다음은 국제화가 제기하는 도전이 있다. 한국 컨텐츠들이 갑작스럽게 세계의 중심 무대로 소환된 데 반해, 한국인들이 자체적으로 국제적 감각을 축적한 역사는 짧다보니, 그 시차에서 오는 미묘한 문제들이 2010년대에 자주 제기되었다. 세계적으로 성공한 한국 대중문화 중 현재 소비층이 가장 국제화된 영역이라고 할 수 있는 아이돌에서 이런 논란이 다소 잘 드러난다.
대만인과 일본인 멤버들이 포함된 세계적 아이돌 그룹 트와이스(TWICE)가 각각 중국과 대만의 양안관계와 최근 악화된 한일관계 문제로 인해 논란의 주역이 되었던 것이다. 한국인들은 어찌되었든 ‘식민지 없는 제국’을 건설하였고, 이는 과거 숱한 제국 정부들이 겪었던, 서로 다른 민족과 문화 간의 복잡한 감수성과 이해관계 충돌을 다루어야 하는 새로운 도전을 한국인들에게 제기하고 있다.
웹소설과 웹툰에서도 이미 그런 문제는 가시화되고 있다. 한국 웹소설은 권력지향적인 면모가 강하고, 자본, 권력, 국가 등의 요소를 적극 활용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은 앞서 설명한 바가 있다. 여기에 한국인의 국제관계에 대한 관념이 투영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일본과 중국 등 한국과 민감한 관계에 있는 주변국이 한국인 주인공들이 상대해야할 적으로 등장하는 것도 굉장히 자주 있는 일이다. 여기서 문제는 국제적 갈등 자체보다도, 그런 갈등이 그려지는 방식에 있다. 특히 일본의 경우 관련 인물들이 아주 비열하게 그려지고 주인공에 의해 철저한 보복을 당하는 특징이 있다.
웹소설과 웹툰을 한국인들만 소비한다면 큰 문제는 안 될 것이다. 하지만 [나 혼자만 레벨업]과 같이 국제적으로 인기를 끈 작품들이 늘어날 경우, 이런 묘사들은 문제가 될 소지가 있다. 대표적으로 [나혼렙] 자체에서도, 괴수들이 지배하는 땅인 제주도를 한일 양국이 공략하는 과정에서 일본이 한국을 배신했다가 주인공에게 응징당하는 묘사가 있다. [나혼렙]의 경우 웹툰판에서 이 부분은 소설 원작보다 조금 더 일본에 우호적인 묘사를 추가하면서 조율되었다.
하지만 앞으로 한국 컨텐츠 수출이 활발해질수록 한국인 독자들의 세계 인식을 맞추면서 해외 독자들을 배려해야만 하는 문제를 보다 진지하게 생각해야 될 것이다. 예컨대, [전지적 독자 시점]만 하더라도 한국의 시나리오 수행자들과 일본의 시나리오 수행자들 사이에서 유사한 갈등이 벌어지는 이야기가 있는데, 만약 이 이야기를 일본에 수출할 경우 원작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어느 정도로 수정해야할까?
[dropcap font=”arial” fontsize=”22″]3.[/dropcap]마지막으로 현재 진행형이라고 할 수 있는 가장 민감한 문제는 바로 젠더 갈등이다. 2010년대를 거쳐가면서 한국 청년층 사이에서 남성과 여성의 갈등은 전방위적으로 심화되었고, 특히 두 성별이 향유하는 문화 컨텐츠 영역이 주요 전장으로 부상했다. 이미 웹툰계에서는 레진코믹스에서 ‘메갈리아’ 문제를 두고 내홍을 겪은 적도 있었다. 예능을 비롯한 방송, 아이돌 또한 남녀 시청자와 팬덤이 갈등을 빚는 주요 격전지가 되었다.
웹소설은 이런 갈등이 다소 늦게 시작된 곳이었는데, 모든 문화 컨텐츠 영역에서 가장 남녀가 향유하는 컨텐츠가 분리되었던 곳이기 때문이다. 이 글이 감히 ‘한국 판타지를 돌아보며’라는 제목을 달고 있음에도 여성들의 판타지 소설이나 장르 소설이 거의 다뤄지지 않은 것은 내가 ‘그쪽 영역’을 정말 단 하나도 읽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도저히 쓸 수가 없어서였다.
그래서 종종 언급되는 여성향 소설의 동향은 시장 전체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크거나, 남성향 소설과 다대한 영향을 주고 받았다고 생각되는 경우로만 한정되었다. 당초 판타지와 무협에서 발전한 남성향 소설의 세계와 달리, 여성향 소설의 세계는 로맨스를 주력으로 로맨스 판타지와 빙의물, 여성향 직업물, BL물(Boy’s love, 남성 동성애를 소재로 한 여성향 장르) 등의 전혀 다른 생태계를 구성하고 있어 사실상 공유하고 있는 것이 전혀 없다고 봐도 무방했던 것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이런 경향이 크게 바뀌고 있다. 여성 독자층이 남성향 소설로 대거 움직이는 방향으로 말이다. 2019년에 대흥행한 [전지적 독자 시점]이 이 흐름을 연 작품으로 보통 평가받는다. 책빙의물의 요소가 강한 [전지적 독자 시점]에서는 소설 자체의 주인공인 김독자와 빙의 대상이 되는 ‘멸살법’의 주인공 유중혁 간의 관계가 굉장히 중요한 소재로 다뤄지는데, 이것이 캐릭터 간의 관계에 민감한 여성 독자들의 유입을 불러온 것이다.
남성 독자가 크게 이탈하지 않은 상태에서 여성 독자가 대거 유입된 것은 실질적으로 작가 입장에서 수입의 상당한 증가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여성 독자의 유입은 [전독시]의 이야기 흐름 전체를 뒤바꿀 정도의 충격이었다. 이 같은 변화를 남성 독자들은 그리 달갑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예컨대 [전독시]의 여성 팬덤은 구매력과 조직력으로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묘사하는 [전독시]의 세계에서 나오는 여성에 대한 성적 폭력 묘사에 문제제기를 하였는데, 남성 독자들은 새로 유입된 독자들에 의해 자신들이 즐기던 작품이 훼손되었다고 여겨 반발하기도 하였다.
더하여, 남성 주인공과 여성 히로인으로 이루어진 일반적 남성향 소설의 서사를 중간부터 뒤집고, 히로인을 사실상 없앤 뒤 남성 캐릭터 간의 관계를 조명하기 시작한 중반부 이후의 전개도 문제가 되었다. 이 시도는 여성 독자들에게 열렬한 환호를 얻어냈지만, 일부 남성 독자들은 자신들이 극히 싫어하는 BL 장르를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전독시]를 격렬하게 비판하게 되었다(디씨인사이드 장르소설 갤러리가 이 선봉에 서있다).
남성향 소설의 이야기 구조에 여성들이 선호할 캐릭터 관계를 도입한 [전독시]가 두 독자층 모두에게 계속해서 팔리면서 엄청난 성공을 이루자, 이 조합을 모방한 다른 소설들이 속속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디씨인사이드 장르소설 갤러리를 필두로 한 남성 독자들은 이런 소설들이 정석적인 남성향 소설인 것처럼 가다가 급격히 여성향의 분위기가 짙어지는 ‘낚시 소설’이라고 간주하며 거부 반응을 보이고 있다. 남성향 소설이라고 판단하기에는 너무나 이질적인 요소들로 가득한 [내가 키운 S급] (2019)이 이런 작품 중 가장 대표격이라 할 수 있다.
시장의 이 같은 변화는 한국 웹소설의 강한 특징은 무체계성과 독자 선호에 반응하는 빠른 혁신, 장르 간 혼합이란 맥락에서 해석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이 남성향과 여성향이라는, 장르 문법과 지향점이 상당히 다른 두 장르의 혼종의 경우에 어떻게 그 의미를 규정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필자는 여전히 물음표를 남기고 싶다. 그 정도로 두 세계가 구축해온 생태계는 무척이나 달랐고, 서로 간의 교류도 없었으며, 따라서 이는 과거보다 더 큰 간격을 통합하려는 전례 없는 전인미답의 실험이기 때문이다.
다만 남성 독자와 여성 독자가 점점 웹소설 생태계에서 같은 공간을 두고 접촉하는 일이 많아지면서, 독자 간의 성별 갈등도 점점 잦아지고 있는 실정이다. 이 역시 한국의 문화 컨텐츠 영역 전반에서 벌어지고 있는 갈등이고, 아직 그 누구도 해답을 찾지 못한 문제라는 점에서 상술한 문제와 여러 공통점을 공유한다. 하지만 다소 시차를 두고 전개될 앞의 두 문제와 달리 젠더 갈등 문제는 현재진행형이며, 독자들 간의 갈등이 장르 생태계 전반의 건전성을 해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역시 한국 웹소설이 주의 깊게 지켜봐야 하는 문제다.
나가며. 판타지 소설과 나
내가 ‘판타지’라는 것을 접한 것은 초등학교 1학년이던 2001년이었다. 이 때 태어나서 최초로 영화관에 가서 당시 개봉한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을 보았고, 형이 얻어온 CD로 [파랜드 택틱스] 게임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진정으로 판타지에 입문한 것은 중학교 1학년인 2007년 때였다.
당시 우리 집은 여느 집이 그랬듯 컴퓨터가 한 대 밖에 없었는데, 그 때문에 나는 형이 컴퓨터를 독점하고 있으면 만화책을 비롯해서 여타 다른 혼자 놀 거리를 찾아야만 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형이 대여점에서 빌려온 게임 판타지 [데빌메이지]가 집에 굴러다니는 게 눈에 띄었고, 그 이야기에 빠져든 나는 그 자리에서 소설을 결말까지 다 읽어버렸다.
[데빌메이지] 자체는 당시 [달빛조각사]의 성공으로 범람하기 시작한 그저 그런 양산형 게임 판타지 소설에 불과했다. 마왕의 명으로 세계를 하나 파괴해야한다는 임무를 부여받은 주인공이, 자신이 과거 세계 1위 랭커로 플레이했던 캐릭터를 들고 가상현실 게임에 들어가 그 게임 세계를 파괴하면 된다는 줄거리를 가진 소설이었다. 하지만 한국 MMORPG에 이미 익숙해있던 나는 게임 소재를 풀어내면서 속도감 있는 전개와 먼치킨이 주는 시원한 ‘사이다’에 빠져들었다. 그 이후 약 3년간 대여점에서 많은 소설들을 읽었다.
고등학생이 된 이후에는 판타지 소설과 다소 거리를 두게 되었다. 여러 이유가 있었다. 입시 공부에 치중해서 판타지 소설을 빌려 보는 것이 아무래도 눈치 보일 수밖에 없었다. 또 ‘양산형 판타지 소설’은 결국 수준 낮은 문학이라는 내면의 선입견도 작용했다. 당시 내가 즐길 거리로 택한 것은 대신 영미권의 SF 소설들이었다. 무엇보다 내가 고등학생이던 2010년부터 2012년까지는 한국 판타지 소설이 시장성에서나 내용에서나 여러모로 침체를 겪던 시절이기도 했다. 새로운 시도가 활발히 이루어지고는 있었지만, 그런 작품들을 보기에는 여러모로 부담스러웠다.
대학에 올라가서도 판타지 소설과는 별다른 인연을 쌓지 않았었다. 그러다가 2015년, 한 친구와의 대화에서 최근 판타지 소설의 변화를 처음으로 접했었다. 그 친구도 판타지 소설을 자주 보지는 않았지만, 다른 친구가 판타지 소설 작가여서 트렌드를 종종 전해 듣는다고 하였다. 그는 최근 몇 년 사이 가장 인기 있는 작품이라면서 내게 [나는 귀족이다]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기존 판타지와는 전혀 호환되는 것처럼 보이지 않던 레이드물의 여러 설정들과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갑질 테마’를 접한 나는 엄청난 이질감을 느끼면서 ‘요즘 참 이상한 것들이 유행하네’ 하고 일축했었다. 무엇보다 그 제목에 한 번 크게 웃어주었고 말이다.
이러던 내가 판타지 소설을 다시 찾게 된 것은 2018년이 되어서였다. 여전히 장르 소설을 놓고 있지 않던 친구가 나에게 한 번 읽어보라면서 박새날 작가의 [템빨]을 권했다. 나는 반신반의하면서 카카오페이지를 설치했고, 역시 그 제목에 한 번 더 웃으면서 [템빨]을 읽기 시작했다. 결국 나는 약 일주일 동안 [템빨]을 30권까지 읽느라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템빨]은 사실 기존 [달빛조각사]와 내용과 양식에서 아주 흡사한 작품이고, 2018년 작품에서는 오히려 고전적인 느낌마저 주는 작품이었지만, 그 소설이 풀어내는 평범한 한국인의 욕망과 성취는 오히려 [달빛조각사]의 수준을 한참 뛰어넘은 것이었다. 어떻게 봐도 답이 없는 ‘찌질이’ 주인공 그리드가 특수한 대장장이 직업을 얻은 뒤 대영웅으로 올라서며 인격적 성장을 이루어내는 그 과정, 작중 최강의 캐릭터를 농부로 활용하는 파격적인 전개는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그렇게 한국 판타지 소설에 대한 내 평가는 크게 수정되었지만, 다른 여러 소설들을 읽을 생각까지는 들지 않았던 것 같다. [템빨] 정도면, 한국 판타지 소설에 대한 내 인식이 2009년 정도에 머물러 있음을 고려했을 때, 읽기 큰 부담이 없는 작품이었다. 하지만 이미 그 시점에서 범람한 수많은 혁신적 작품들은 도저히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감도 안 잡히는 수준이었던 것이다. 그래도 역사는 좋아하였기에, 고려와 몽골제국이라는 배경을 정말 매력적으로 풀어낸 김경록 작가의 [더 퍼거토리] 정도만 꾸준히 보았었다. 여전히 나는 이 세계가 어떻게 흘러왔는지 감을 잡지 못했던 것이다. 한국 판타지 소설은 10여년의 세월을 지나 나에게 다시 미지의 세계가 되었다.
이 세계에 다시 내가 발을 들이게 된 것은 다소 우연적인 계기가 있었다. 9월 즈음에, 소설 [전지적 독자 시점]의 영화 판권이 매각되었다는 소식을 인터넷 뉴스로 접했었다. [전독시]는 이미 문피아 1위를 차지하고 있는 인기 작품이었기 때문에, 다소 궁금증이 동했다. 대체 이게 무슨 소설이길래 영화화 판권까지 판매된 걸까? 이 궁금증을 풀고자 나는 [더 퍼거토리]를 볼 때 빼고는 거의 키는 일이 없어진 카카오페이지 앱에 다시 접속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소설을 5권까지 읽고 상당한 혼란에 빠졌다. 앞서 설명하였듯 이 작품의 장르인 성좌물은 2010년대 발생한 장르 통합을 이중 삼중으로 이루어낸 아주 복잡한 문법을 갖고 있었다. 흥미진진한 전개와 치밀한 스토리 덕택에 몰입감을 갖고 소설을 읽을 수는 있었다. 하지만 [전독시]에 겹겹이 겹쳐진 수많은 장르 문법을 다 짚어내기엔 역시 무리였다. 나는 이 소설을 좀 더 폭넓게 이해하고자, 서브컬처 공부에 있어서 최고의 길잡이인 나무위키에서 [전지적 독자 시점] 항목을 검색해 읽기 시작했다.
관련된 문서들을 계속 읽으면서, 나는 2010년대 웹소설이 이 정도로 다양하고 복잡하게 분화되었다는 사실을 마침내 깨달을 수 있었다. 이것은 단순히 내가 중학생 때 빌려보던 대여점 시대의 그것이 아니구나. 웹소설은 하나의 거대한 산업이자 수많은 사람들이 관여하고 실시간으로 발전시키고 있는 독자적 세계였다. [전독시]에 겹쳐져 있는 모든 장르적 문법을 파악하다보면, 빙의물, 레이드물, 포스트아포칼립스물, 차원유랑물, 회귀물, 게임 판타지 등을 비롯한 온갖 장르로 이어지는 길을 발견하게 되는데, 각 장르는 또 나름의 역사를 담은 생태계들을 구성하고 있었다. 이건 정말이지 너무나 거대했다.
그 뒤 또 다른 지인의 추천을 받아서 읽기 시작한 [임기 첫날에 게이트가 열렸다]도 나에게 비슷한 충격을 주었다. [더 퍼거토리] 덕분에 재벌물을 비롯한 진중한 정치 소재가 장르 소설에서 상당히 깊이 있게 다루어지고 있다는 것은 알았다. 하지만 레이드물과 헌터물을 이렇게까지 현실 정치와 적절하게 녹여내면서 흡인력 있는 이야기를 보여줄 수 있다니? 그렇게 연달아 두 개의 작품에서 감탄하게 되면서 나는 틈틈이 웹소설에 대해 나름 공부하고, 지인과 이야기 하면서 생각을 발전시켜나갔다.
그러던 와중, 웹소설은 물론이고 장르 소설 전반에 대해 관심이 전혀 없는 지인에게 우연찮게 [전지적 독자 시점]의 줄거리를 소개한 일이 있었다. 3천편까지 나온 소설을 혼자 읽은 주인공이 그 소설에 빙의해서 신들이 그걸 지켜보며 인터넷 방송 식으로 후원을…. 으로 이어지는 [전독시]의 서사를 쉽게 설명할 수도 없었고, 그 지인이 알아듣기도 힘들어했다. 하지만 같은 자리에서 라이트 노벨을 보는 다른 친구가 최근 참신한 라이트 노벨 같다고 소개한 작품의 경우는 달랐다. 모두가 그 줄거리를 이해하는 데 아무런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몇 겹으로 복잡해지고 다양한 소재를 품은 한국 웹소설과 달리, 일본 라이트 노벨은 10년 전에 들은 줄거리와 캐릭터들이 그대로 연상될 정도였다. 그 때 나는 한국 웹소설이 국제적 기준에서도 무언가 다른 경지를 성취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리고 얼마 뒤에, [나 혼자만 레벨업] 웹툰이 실제로 국제적인 성공을 거두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고 마음을 굳혔다. 한국 판타지 소설의 장엄한 연대기를 내 기준에서 한 번 정리해봐야겠구나. 그게 지금의 글이다.
10년 전만 해도 판타지 소설은 무언가 모자란 학생들이 보는 것이고, 심지어 장르를 즐기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당대에 연재되던 작품들은 작품성라곤 찾아볼 수 없는 무가치한 것이라고 여겼다. 90년대 작품들에 비해 모든 것이 퇴보한 소설들이 대여점의 양판소들이었다. 그러나 이 글에서 누차 강조하였듯, 그 개별 작품들이 문학성이 없고 얄팍한 이야기로 쓰여졌다 하더라도 전적으로 무가치한 것은 아니었다. 무가치한 것으로 보이는 실험들은 한국 판타지 소설의 대중성과 유연성을 보여주는 지표이기도 했다.
재미를 갈구하는 독자와 이야기를 보여주고자 하는 작가, 시장의 가능성을 믿고 투자한 기업과 편의성 높은 시스템을 만들고자 한 개발자들의 노력이 화학반응을 일으키면서, 2010년대 한국 웹소설은 양적, 질적 혁신을 거듭하여 지금의 단계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 이야기들은 불안한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한국인들의 고단한 삶을 위로해주는 민중 문학으로서 앞으로도 우리를 계속 위로해줄 ‘사이다’를 선사할 것이다.
결국 이것이야말로 말로 가장 하찮은 것이 세계를 뒤흔드는 혁명의 주역이 되는 장엄한 이야기 아니겠는가. 마치 모두가 무시하던 하찮은 인물이던 주인공이 모종의 계기로 각성하여 세계를 발 아래 두게 되는 웹소설의 이야기처럼 말이다. 지금 연재되고 읽히는 바로 그 이야기들 자체가 한국 판타지 소설이 걸어온 길이었던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