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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판타지 소설을 돌아보며: [2] 2012년, 포탈이 열리다

한국 판타지 소설을 돌아보며:
가장 하찮던 존재가 혁명의 주역이 되기까지

[1] [퇴마록]에서 [달빛조각사]까지

1. 희미한 여명: 1990년대
2. 대중소설로의 이행: 2007년까지
3. [달빛조각사]와 게임의 시대

[2] 2012년, 포탈이 열리다

 

4. 귀족을 기억하라

2012년 무렵 게임 판타지 소설은 이미 그 짧은 전성기를 지나고 쇠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게임 판타지 자체에 내장된 문제들이 점점 독자들로 하여금 장르 자체를 외면하게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여 소설 시장 자체가 쇠락하고 있던 것이 가장 근본적인 이슈였으나, 게임 판타지를 성공하게 해준 여러 요소들이 2010년대에 들어오며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된 것도 컸다.

먼저, 게임 환경이 바뀌었다. 당시 한국의 게이머들은 스타크래프트를 비롯한 RTS(실시간 전략 게임; Real Time Strategy) 서든어택을 비롯한 FPS(1인칭 슈팅 게임; First-Person Shooter) 등을 주로 하였고, 이들 게임은 MMORPG와 공존하며 2000년대의 게임 생태계를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2011년 한국에 출시된 리그오브레전드(LOL)를 비롯한 AOS(Aeon Of Strife; ‘영원한 투쟁’의 줄임말로 ‘다중접속 진지공략 게임’ 정도의 의미)가 선풍적 인기를 끌기 시작하고, 한국 MMORPG들이 고질적인 운영 문제(현질과 랜덤박스 등)와 진부한 게임성 때문에 점점 인기가 떨어지면서 게임 판타지 소설에 몰입하기 좋은 게임 환경이 오히려 적대적인 쪽으로 변화했던 것이다.

2012 게임판타지의 쇠락

2012 게임판타지의 쇠락

한편 게임 소설의 고질적인 문제, 가벼운 소재와 그로 인해 몰입이 어려워지는 점도 이 시기에 새삼 부각되었다. 원래 게임 판타지의 큰 장점은 게임에서 얼마든지 죽어도 된다는 것이었다. 죽음이 존재의 소멸이 아니라 그저 모험 중에 있는 사고 정도로 의미가 가벼워지면서, 독자는 좀 더 편한 마음으로 주인공의 죽음에 임할 수 있으며, 작가 또한 소설 속에서 보다 자유로운 변칙적인 전개를 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는 양날의 검이었다. 진중한 전개와 몰입을 원하는 독자들 사이에서, 게임의 그런 특성은 실제 사건들의 의미에 집중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어차피 죽으면 다시 부활하는데 무엇 때문에 소설에 그렇게 몰입해야 하겠는가? 하지만 이를 극복하고자 게임 소설에서 진중한 서술을 시작하면 ‘어차피 게임이잖아?’라는 반문을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 예컨대, ‘기껏해야 NPC(non-player character; 게임에서 사람이 직접 조작하지 않는 캐릭터) 에 지나지 않는 소설 속 캐릭터들을 플레이어들이 마치 진짜 왕이나 귀족을 만난 것처럼 대한다’는 고전적인 지적이 있겠다.

따라서 2010년대 초엽 한국 판타지 소설은 두 가지 난제에 부딪히게 된 셈이었다. 쇠락해가는 대여점 체제의 뒤에 어떤 방식으로 생태계를 유지시킬 것인지, 그리고 게임 판타지라는 기존의 유행이 지나고 대안이 나타나지 않은 시점에서 어떤 새로운 혁신을 도모할 수 있을지. 이 시기 제기된 유통 플랫폼과 장르 혁신이라는 두 가지 문제는 아주 흥미롭게도 2010년대에 정말 극적으로 해결되고, 또 두 문제가 서로 강렬한 화학작용을 일으켜 가히 웹소설 혁명을 만들어냈다. 드디어 [나혼렙]의 국제적 성공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시대에 도달한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한국 판타지 소설은 이 난제를 극복했을까.

플랫폼 혁신: 프리미엄 결제 + 모바일 혁명

가장 먼저 언급할 것은 웹이 연재 공간으로서 본격적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2000년대 당시 웹연재 공간은 판타지가 주가 되던 조아라와 무협이 주가 되던 문피아가 있었는데, 당대 이들의 역할은 사실 새로운 작가 지망생들과 출판사를 매개해주는 수준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유통의 중심은 여전히 대여점이 맡고 있었고, 사람들이 글을 읽는 주요한 매체는 인쇄된 종이와 잉크였다. 실제 신인 작가가 판타지 소설을 출간하게 되면, 대략 앞의 10화 가량 연재분을 제외하고 나머지 분량은 그대로 비공개 처리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인터넷 웹

웹(인터넷)은 본격적인 연재 공간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2000년대 후반에 들어 점점 웹 연재 환경은 변화하고 있었다. 웹이 단순히 출판 시장에 진입하기 전에 신인을 발굴하는 모집소가 아니라, 독자적인 기반을 갖고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신대륙으로 부상하기 시작한 것이다. 조아라에서는 2008년 유료로 구매할 수 있는 기간권을 두고 성인 소설을 볼 수 있게 해주는 ‘노블레스’를, 2011년에는 회당 50원이나 100원을 내고 소설을 볼 수 있게 만든 ‘프리미엄’ 시스템을 도입했는데, 이는 훗날 웹소설 시장을 형성하는 데 거대한 초석을 다진 혁신이었다. 수많은 한국 컨텐츠들이 그러했듯, 이러한 유료화의 반응은 처음에는 상당히 부정적이었는데, 여전히 많은 독자들이 소설에 돈을 낸다는 것은 대여점에서 물리적으로 출판된 책을 볼 때나 해당되는 것이고, 인터넷은 확고부동한 무료 공간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불법이든 아니든 말이다).

당시 조아라에서 내건 공지사항을 한 번 살펴보자.

‘프리미엄 운영에 대한 안내말씀’ 

“안녕하세요 조아라입니다.

저희 조아라는 지난 11일 프리미엄 서비스를 오픈하였습니다. 프리미엄이 신규 서비스이다 보니 논란이 많았습니다. 이에 정중하게 프리미엄에 대해 다시 안내해드리고자 합 니다.

1)
작가님들은 종이책을 출판하는 대신 eBook 출판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프리미엄은 독자님들이 연재물을 꾸준히 보실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공간입니다. 현재 프리미엄에 서비스되고 있는 9작품은 모두 eBook으로 만들어집니다. 만들어진 이북은 우선적으로 올레이북, Yes24, 리브로, 영풍문고 등 국내 대형 유통사에 제공됩니다. 단순히 컨텐츠 제공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작가님들의 성공적인 데뷔를 위한 별도의 프로모션과 광고가 제공됩니다. 조아라 eBook은 작가님과 편집자의 1:1 교류를 통해 좋은 작품을 만들고, 쇠퇴하는 장르문학 시장에 완성도 있고 재미있는 신작을 공급하고자 합니다.

(중략)

4)
프리미엄의 모든 작품은 완결을 전제조건으로 계약되었습니다. 프리미엄 계약은 작품 전체의 완성을 기본으로 합니다. 작가님께서 개인적인 사정이 없는 한, 주 1회 이상 업로드 될 예정입니다.

프리미엄 작가님들의 시작부터 함께 해주신 많은 독자님, 그리고 지켜보는 조아라 모든 회원님.
프리미엄은 장르문학의 새로운 길을 제시하기 위한 첫걸음입니다. 작가님들 역시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입니다.

작가님들이 한 걸음 나아가기도 전에 상처를 입을까 두렵습니다. 신인 작가님들의 성공적인 작품활동을 위해 응원해주십시오. 저희 조아라는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항상 노력하는 조아라가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조아라, 프리미엄 운영에 대한 안내말씀 (출처: 조아라) http://www.joara.com/customer/notice/noticeView.html?idx=143743&bbsid=customer_notice&sub_bbsid=&sl_search=&sl_keyword=&PageNo=4&age=&kind=

조아라, 프리미엄 운영에 대한 안내말씀 (출처: 조아라)

본문에 쓰여 있는 “논란이 많았습니다”라든지, “쇠퇴하는 장르문학 시장”이라는 언급이라든지, 여러모로 지금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표현들이 많이 보인다. 그 정도로 당시 장르 문학 시장은 상당한 위기에 처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논란과 여러 회의론에도 불구하고, 유료 연재 환경은 점차 정착해가기 시작했다. 유료화에 반발한 작가들이 ‘판도라의 상자’라는 대피소를 세우는 일도 있었고, 불법 스캔본과 텍스트본이 넘쳐나는데 누가 과연 결제까지 할까 하는 의문도 상당했다. 사이트가 ‘돈독이 올랐다’는 반응도 많았다.

그러나 프리미엄 결제 방식은 기존 노블레스 결제 방식의 단점을 뛰어넘어 2010년대 웹소설의 거대한 혁신을 만들어내는 가장 결정적인 주역으로 떠오르게 된다. 노블레스의 기간권 방식이 하루 종일 소설을 보는 것을 상정했다면, 프리미엄의 편당 결제 방식은 원하는 시간 원하는 작품을 원하는만큼 볼 수 있게 해주는, 현대인들의 생활 패턴에 훨씬 적합한 방식인 것으로 증명되었다. 무엇보다도, 2011년은 이후 인류의 생활방식 자체를 바꾸어버릴 거대한 흐름인 ‘모바일 혁명’의 한 가운데 있던 시기였다. 출퇴근 지하철에서 100원을 내고 스마트폰에 뜨는 텍스트를 보는 요즈음의 문화는 바로 이 시기, 정말 희미한 불꽃으로 시작했던 것이다.

프리미엄 방식은 혁신의 가장 강력한 도구가 됐다.

프리미엄 결제 방식은 2010년대 웹소설의 거대한 혁신을 만들어내는 결정적 ‘물적 토대’를 제공한다.

장르 혁신: [나는 귀족이다], [MEMORIZE] 

스마트폰 보급과 유료 연재의 등장으로 2011년이 플랫폼 혁신을 일으키며 ‘웹소설’을 가능하게 한 해였다면, 장르의 내용적 측면에서는 2012년이 그런 혁신을 일으킨 해가 되었다. 이 시기는 기존의 판타지/퓨전판타지/게임판타지/무협/퓨전무협 등의 장르들이 전반적인 위축을 겪고 새로운 장르가 탄생하지 못하고 있던 과도기였다. 하지만 웹 연재 환경은 기존의 틀에 박힌 장르적 클리셰를 일정 부분 계승하고 일정 부분은 혁명적으로 뒤집는 다양한 실험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이는 PC통신 기반이던 90년대 판타지가 2000년대에 대여점과 인터넷으로 공간을 옮기면서 여러 혁신을 맞이했던 것과 비슷했다. 다만 이번 혁신은 그 양과 질에 있어서 그 이전과는 한 층위 더 높은 수준에서 전개되었다는 중요한 차이가 있었다.

유료 웹 연재는 기존 출판사를 우회할 수 있게 해주었다. 위 공지사항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기본적으로 유료로 조아라에 연재되는 작품들은 조아라가 선정하는 것이었다. 이는 과거와 다른 출판 환경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기존 시스템은 더 경직적이었는데, 대여점에 얼마나 유통시킬 수 있을지를 기준으로 판단하는 출판사는 물리적인 출판물을 냈을 때 지출하게 될 매몰비용과 그 회수를 생각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웹 연재는 유통 비용이 거의 0에 가까웠기에, 작가 입장에서도, 또 배급사 입장에서도 여러 실험적 시도가 갖는 위험성은 훨씬 낮을 수 있었다. 이런 이유로, 2012년 무렵 이미 양적 팽창과 빠른 속도로 전개되는 혁신이 장르의 새로운 변화를 만들 태세를 갖추었으며, 더욱 빠른 대리만족과 더 강한 현실성을 원하는 트렌드에 발 맞춘 작품이 나오면 언제든지 시장을 재편할 상황이 조성되었다고 볼 수 있었다(지금 와서 보면 그렇다는 이야기다. 여러 역사적 사건들이 그렇듯 당대는 많은 것이 불확실했었다.).

그 주역을 맡은 작품들은 2012년에 등장한 실탄 작가의 [나는 귀족이다]로유진 작가의 [MEMORIZE]였다. 이 소설들은 시대적 요구사항을 만족시킨 소설로 시장을 평정했다. [나귀족]과 [메모라이즈]는 유료로 연재되었다는 점, 이전 시대와는 확연히 다른 설정과 클리셰를 보여주었다는 점, 퓨전 판타지부터 게임 판타지까지 이어져오던 한국 장르소설의 핵심적 트렌드는 확실히 계승했다는 점에서, 진정으로 한국형 웹소설의 시초라고 볼만한 작품들이었다. 이 두 작품은 각각 ‘레이드물’과 ‘회귀물’이라는, 2010년대 웹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장르적 문법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면서 그 과업을 수행했다(참고로, 이 두 작품은 앞서 언급한 프리미엄 시스템은 아니고, 노블레스 시스템으로 연재되기는 하였다).

나는 귀족이다(본편 연재: 2012. 06. 23. ~ 2015. 02. 10. 프리시즌: 2015. 02. 1[2] ~ 연재 중[), MEMORIZE(연재: 2012. 12. 12. ~ 2017. 03. 13.)

나는 귀족이다(본편 연재: 2012. 06. 23. ~ 2015. 02. 10.), MEMORIZE(연재: 2012. 12. 12. ~ 2017. 03. 13.)

나귀족, 레이드물의 등장 

실탄 작가의 [나귀족]을 먼저 살펴보자. 이 작품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칠 것이 없으며, 2007년 [달빛조각사]가 장르 시장에 가한 충격에 비견될 영향력을 훨씬 직접적으로 이후 소설들에 남겨주었다(이 같은 대형 혁신이 겨우 5년의 시간차로 발생한다는 점은 한국 장르 소설 시장의 문법이 변하는 속도를 실감나게 한다).

[나귀족]은 표지에 ‘퓨전 판타지’라고 쓰여 있었는데, 이는 이 작품이 차원이동을 소재로 한 작품이라는 느낌을 독자들에게 주었다. 하지만 사실 이는 [나귀족]이 새롭게 만들어낸 ‘레이드물’이라는 장르를 당시로서 도저히 담아낼 수 없었기에 궁여지책으로 선택한 이름에 가까웠다. 우선 [나귀족]이 정립한 레이드물의 기본적 요소는 다음과 같다.

  1. 포탈/게이트가 열러 판타지 세계의 괴수들이 현실 세계로 쏟아져 들어온다. 이 괴수들에게는 과학기술에 기반한 현대 무기가 통하지 않고, 각국은 괴수들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면서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되었다.
  2. 하지만 포털이 열림과 동시에 초능력을 얻은 ‘각성자’들이 생겨나게 된다. 이들은 탱커, 딜러, 힐러라는 서로 다른 역할의 초능력을 갖고 있으며, 각 클래스의 협동으로 포탈에 풀려나온 괴수들을 사냥한다.
  3. 괴수들이 남긴 사체는 경제적으로 엄청난 가치가 있으며, 특히 과학기술을 통해 막대한 에너지원으로 활용될 잠재력이 있어, 사실상 헌터가 현대 경제의 주역으로 부상하게 된다.

이런 설정의 모든 원형을 [나귀족]이 제시한 것은 아니다. 먼저, 판타지 세계가 현실로 넘어온다는 설정은 2000년대 초반 인기 퓨전 판타지 소설인 [이드]에서 처음으로 확인해볼 수 있다(멀게는 전민희의 아룬드나얀 연대기에서도 그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드] 5권에서 주인공이 활약하던 판타지 세계의 괴수들이 현대 세계로 쏟아져 들어오고, 현대 무기가 통하지 않아 막대한 혼란을 겪게되는 것이 소설의 주요한 테마로 부상한다.

이는 당대 장르소설에서 어느 정도 지분을 갖고 있던 밀리터리 팬덤을 비롯하여 많은 이들에게 비판 받았으나,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시대를 앞서간 혁신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이드] 자체의 설정이 주는 한계, 여전히 현대적 배경보다는 중세 판타지 배경을 압도적으로 선호하는 독자의 성향, 전통적인 모험물이 여전히 갖고 있던 매력 등으로 [이드] 현대편은 그렇게 좋은 평을 얻지 못한, 그저 독특한 변칙 정도로만 기억되게 된다.

이드

그러나 [나귀족]이 나왔을 2012년에 이런 상황은 크게 바뀌어 있게 되었다. 먼저, [달빛조각사]가 열어놓은 게임 소설은 현실과 게임이라는 두 세계를 병행시키면서, 현대 배경 판타지가 갖는 거부감을 크게 줄여주었다. 이미 독자들은 현대에서도 얼마든지 판타지와 연결된 매력적인 이야기가 존재할 수 있음을 인지하게 된 것이다.

또한, 현실에서 한국의 사회 분위기 변화 또한 큰 영향을 미쳤다. 1997년 IMF 위기가 있긴 했어도, 2000년대 초반은 한국과 세계를 막론하고 긍정적인 분위기가 지배적인 시대였다. 세계화가 순항하고 후진타오 시대 중국이 역사상 가장 거대한 경제 성장을 단시간에 이룩하면서 한국 사회는 어쨌든 사회 대부분 영역에서 발전을 체감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 더불어 2002년 월드컵 등을 계기로 한국이 이제 국제적으로 인정 받기 시작한 국가라는 것을 자각했으며, 더욱 앞서나가 과거의 힘든 시절을 이제 끊어낼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사회와 문화의 많은 영역에서 발견할 수 있던 시대였다. 이런 시대에는 JRPG식 낭만과 모험은 매력적인 서사로 각광받을 수 있었다. 마지막 모험 소설로 평가할 수도 있는 [달빛조각사]가 그 시대의 끝물인 2007년에 나온 것은 그런 면에서 상징적이다.

하지만 2008년 금융위기는 많은 것을 변화시켰다. 세계 경제 성장은 일거에 멈춰섰다. 한국은 탄탄한 제조업 기반을 통해 비교적 위기를 잘 헤쳐나갈 수 있었지만, 사회가 과거의 낙관적 분위기로 돌아갈 수 없음은 점점 자명해졌다. 이명박 정권 초기는 각종 정치, 경제, 사회 이슈들과 세계 경제위기 등을 거치면서 상당히 음울한 분위기에 시작되었다. 2010년대 초반이 되었을 때 이미 한국 사회에서 2000년 즈음의 낭만을 찾아보기는 힘들었고, 한국이라는 사회에 스트레스를 느끼기 시작하며 피로를 느끼는 분위기가 특히 청년층을 중심으로 지배적인 정서로 떠올랐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현실과 밀접하게 연결되며 보다 직접적이고 강렬한 대리만족을 추구할 수 있는 새로운 서사가 각광받을 시대적 환경이 조성된 것이다. [나귀족]의 현대 대한민국은 그런 당대의 시대적 요구와 놀랍도록 잘 부응하는 배경이었다.

전 세계적 경제 위기의 상징이 된 리먼 브라더스의 파산. (출처: Helge V. Keitel, Lehman Brothers, CC BY) https://flic.kr/p/apdfwv

전 세계적 경제 위기의 상징이 된 2008년 9월 14일 리먼 브라더스의 파산. (출처: Helge V. Keitel, Lehman Brothers, CC BY)

나귀족의 혁신 요소: 와우, 한국적 현실의 극적 반영 

이런 구조적 요인에 더하여, 실탄 작가가 택한 혁신적 요소도 레이드물의 성공에 결정적이었다. 이 글에서 계속해서 강조하는 것은, 한국 판타지가 게임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발전하였다는 것이다. JRPG, MMORPG 등은 모두 당대의 유행으로서 시대의 주류를 형성했고, 판타지 문법을 만드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문제는 이제 리니지로 대표되는 국산 MMORPG가 판타지 클리셰로서 점점 식상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실탄 작가는 여기서 확실한 인기 게임이기는 하였으나, 한국 게임 판타지에서조차 그렇게 크게 주목받지 못한 게임을 모티브로 선택해 자신의 소설에 대거 차용하였다. 그 게임은 바로 블리자드의 명작 RPG,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즉 ‘와우(WOW)‘였다.

한국형 MMORPG가 기본적으로 필드 사냥과 모험, 퀘스트, 더 나아가서 길드전 정도에 치중되어 있고, [달빛조각사]를 위시한 수많은 게임 판타지가 이런 요소들에 집중했다면, ‘와우’는 그와는 상당히 다른 시스템적 특징을 갖고 있었다. 바로 ‘레이드’였다. 이는 [나귀족]의 장르가 레이드물인 이유와도 정확히 일맥상통한다. 레이드는 최소 5인에서 많게는 40인까지 수많은 플레이어들이 파티를 맺고, 클리어가 엄청나게 어려운 던전과 끔찍하게도 강한 보스를 조직적인 협동과 전략의 운용, 탄탄한 지휘와 함께 돌파하는 플레이 양식을 뜻한다.

‘와우’는 이 같은 레이드를 게임의 가장 중요한 컨텐츠로 삼았으며, 게임 속 레이드와 관련된 수많은 문화와 은어들을 파생시키면서 한국 게임 문화에서 중요한 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다만 게임 판타지에서 그 모티브가 본격적으로 차용되기에는 국산 MMORPG와 이질적인 면이 상당히 강했기에, [나귀족]이 와우를 차용한 것은 큰 혁신으로 간주될만한 것이었다.

와우

 

[나귀족]에서 차용한 와우의 레이드 요소는 소설의 배경인 현대 한국과 맞물려 훨씬 더 현실적인 느낌을 독자들에게 선사했다. 이는 와우의 레이드 특성이 한국 유저들의 경쟁적 게임 문화와 상당히 잘 맞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레이드를 이끄는 기본 주체는 ‘공대(공격대)’인데, 이 공대 안에서 탱커, 딜러, 힐러(소위 탱딜힐)라는 클래스를 어떻게 구성하고, 그 기여도에 따라 어떻게 아이템을 분배할지의 문제가 던전을 효과적으로 공략하고 안정적으로 공대를 이끄는 데 핵심적인 문제였다.

이 두 요소는 기존 MMORPG의 파티 플레이에서 아예 없던 것은 아니지만, 와우에서 상당히 성공적으로 정착시킨 것이기도 했다. 공대 구성을 치밀하게 맞추어 블리자드가 제시한 던전이라는 난제를 전략적으로 뚫어낸다는 와우 레이드의 컨셉은, 목표를 향해 우직하게 돌진하는 경쟁지향적 한국 게이머들에게 최적화된 플레이 양식이었던 것이다.

한편, 클래스의 역할 배분에 따라 기여도를 나누고 아이템을 그에 맞춰 분배하는 것은 공대 안에서 여러 정치적인 문제를 만들어냈다. 던전 클리어에 결정적인 클래스가 자신이 원하는 보상을 받지 못하는 이유로 다음 공대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을 때, 그 공대의 향후 생존 자체가 문제가 될 수도 있는 것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그런 클래스에게 모든 보상을 몰아줬을 때, 다른 공대원들의 반발이 발생하는 것도 문제로 부상하게 된다. 공대라는 협동 플레이가 주는 이런 정치적인 문제는 와우 레이드를 무척이나 현실과 밀접한 것으로 만들어주었다.

실제 [나귀족]은 이 문제를 소설 초반부의 핵심적 갈등으로 배치한다. 주인공인 유지웅은 공대에서 가장 넘쳐나는 쓸모없는 클래스인 딜러로, 돈도 별로 없고 여자친구에게도 차인 그저그런 소시민에 불과하다(첫 챕터 이름부터 ‘나는 천민이다’이다). 약한 힘 때문에 여러 레이드에서 애물단지 취급만 받으면서 고생하고 현실과 몬스터에게 치이고 사는 신세다. 하지만 어느순간 보호막을 칠 수 있는 새로운 능력을 각성한 그는 공대에서 핵심적인 클래스로 부상하게 되었고, 자신의 보호막 능력을 통해 새로운 공대를 만들어 기존의 최강 공대들도 공략하기 어려워 했던 몬스터들을 사냥한다. 그와 동시에 그는 막대한 부와 권력을 거머쥐게 된다.

와우의 레이드를 대거 차용한 [나귀족] 이 같은 이야기 구조는 [달빛조각사]를 비롯한 기존 게임 판타지와 비교했을 때 보다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즉, 독자들이 [달빛조각사]에 열광했던 많은 요소들은 상당히 계승되었고, 독자들이 게임 판타지의 단점으로 지목하던 요소들은 와우의 현실적 요소를 도입하면서 거의 대부분 개선시켰다. 먼저 [달빛조각사]의 장점인, 한국의 소시민 캐릭터가 현실에서 크게 출세한다는 기본적인 이야기 구조, 한국 MMORPG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권력 지향적이고 정치적인 요소 등은 [나귀족]에서 더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한편 게임 판타지의 고질적인 문제인, 인게임이라는 점 때문에 떨어지는 긴장감은 소설의 배경을 아예 현실로 가져오면서 완벽히 해결해버렸다. 퓨전 판타지가 이세계로의 이동을 통해 복수 세계를 처음 제시했고, 게임 판타지는 병행 세계를 정립함과 동시에 게임적 요소를 노골화시켰다면, 레이드물은 현실 자체를 게임으로 만들어버렸던 것이다. 와우에서 던전을 공략할 때 사용하는 여러 지휘 대사들과 아이템 분배를 둘러싼 현실적 갈등을 21세기 서울에서 재현하는 것은, 더욱 현실적 대리만족을 갈망했던 독자들에게는 가뭄의 단비와 같은 것이었다.

한편 [나귀족]의 현실적 성향과 점점 어두워지던 한국 청년들의 사회, 경제적 현실은 이 소설에 담긴 염세적 성격과 계급의식을 상당히 일깨우기도 했다. 사실 이 또한 한국 판타지의 고전적인 요소 중 하나였고, [달빛조각사]에서 상당히 노골적으로 드러난 문제였다. [달빛조각사]에서 남희성 작가는 사채에 시달리며 온갖 일을 마다하지 않던 빈곤 청년인 이현을, 힘과 돈을 얻으면서 점차 성장하게 되고, 자신을 무시하던 사람들에게 통쾌한 복수를 안겨주는 위드로 만들었다.

이 역시 세계적으로 보편성이 있는 서사이긴 했으나, 한국이라는 공간에서 더욱 활발히 만개한 서사라는 특수성이 있었다. 앞서 언급하였듯, 모두가 하나의 목표를 설정하고, 사회적으로 극히 균질적인 공간에서, 그 목표에 얼마나 멀고 가까운지를 두고 서로가 서로의 머리 위로 올라가려고 하는, 엄청나게 서열적이면서도 유동적인 면이 강한 한국의 계층 사회는 구성원들에게 막대한 스트레스를 주는 면이 있다. 이런 피곤한 현실에 대한 대리만족으로 한국 판타지 소설들은 힘 없는 소시민인 주인공이 막대한 힘을 얻게 된 뒤 자신을 무시하던 악역들에게 통쾌한 복수를 해주는 욕구를 소설 속에 자주 등장시켰던 것이다.

재미 즐거운 도전 청소년 시작

[나귀족]은 한국 독자들의 이런 경향을 노골적으로 보여준 [달빛조각사]에서 한층위 더 나아간다. 이 소설이 ‘레이드물’로 불리기도 하지만 동시에 ‘갑질물’로 불린다는 것에서 이 요소를 확연히 알 수 있다. [나귀족]에서 실탄이 그려내는 현대 한국은, 재벌과 국가로 대변되는 권력자들이 신의성실을 지키지 않으며, 목숨을 걸고 레이드를 뛴 소시민 공대들을 언제나 수탈해가려는 존재들로 묘사된다. 주인공인 유지웅도, 자신이 죽을 뻔하면서 얻은 초능력으로 얻어낸 부를 재벌과 국가가 어떻게든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는 ‘갑질’에 분노하다가, 자신의 능력을 활용해 역으로 권력자들을 상대로 ‘갑질’하는 식으로 독자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준다.

이는 와우 레이드의 요소와 현실의 게임화를 통해 한층 끌어올린 현실성과 맞물려서 독자들에게 굉장한 몰입감을 제공해주었다. 챕터 1에서 “나는 천민이다”로 시작한 주인공이 마침내 제목에 걸맞게 “나는 귀족이다”라고 할 수 있게 된 상황에서, 현실 속의 갑질에 시달리는 독자들이 완벽한 대리만족을 느낄 수 있게 된 것이다(물론 그들 또한 상황이 주어지면 갑질을 한다는 것 또한, 늘 보복성 갑질을 하고 사는 주인공과 굉장히 흡사하다).

레이드의 차용을 통한 현실의 게임화, 믿을 수 없는 국가와 권력자에 대한 소시민적 반발과 계급의식, 그를 충족시켜주는 보복성 ‘갑질’의 카타르시스. 이 세 요소는 [달빛조각사] 이래로 점점 선명해지기 시작한 한국 청년층 내지는 한국의 정서를 더욱 더 강하게 표출하면서 2010년대 한국 웹소설 혁명의 주축으로 떠오르게 된다. 그런 점에서, [나귀족]은 진정으로 한국 웹소설 혁명을 촉발시킨 작품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MEMORIZE], ‘회귀’라는 장르의 문법  

[나귀족]과 함께 당시 조아라 노블레스에서 웹소설의 새로운 트렌드를 이끈 작품은 로유진 작가의 [MEMORIZE]였다. 이 작품도 [나귀족]처럼 퓨전 판타지를 표방했었는데, 역시 00년대 초반의 흔한 이고깽물과는 상당히 다른 접근법을 보여주었기에 단순 퓨전 판타지로 보기에는 힘들다. 우선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성인 지향성이 굉장히 커졌다는 것에 있다.

2012년은 90년대 초반생도 이미 20대에 접어들기 시작한 해였고, 이고깽 시대의 독자 주류였던 80년대생들은 대다수가 군대까지 다녀온 시점이었다. 오히려 당시 90년대생들은 판타지 소설과 거리를 두기 시작하면서 다른 컨텐츠들을 더 많이 즐겼기에, 시장의 주류는 점차 당시의 20대였던 성인들이 주도하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고등학생이 깽판을 치고 가상현실 게임에서 랭커를 노리던 과거보다는, 90년대 정통 판타지 소설의 정서와 어떤 면에서는 통하는 진중한 분위기의 작품들이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이런 면은 2012년 [나귀족]의 흥행 요인과 상통하는 면이기도 하다.

장르 문법에서 [메모라이즈]의 가장 큰 기여는 회귀 설정을 본격적으로 차용하여 대성공을 거둔 소설이라는 점이었다. 이미 산전수전을 다 겪은 주인공이, 앞으로 벌어질 일을 모두 아는 상태에서 과거로 돌아가 모험을 다시 겪는 회귀물은 이미 인터넷 소설과 팬픽에서 주로 볼 수 있던 전개 방식 중 하나로, 2012년 경에는 어느 정도 유행을 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메모라이즈]는 팬픽이 아닌 독자 소설로서, 판타지 세계로 소환되어 10년 간 엄청난 고생을 겪은 주인공이 그 기억을 갖고 다시 2회차를 시작하는 전개를 보여주며, 이후 회귀물에서 보여질 장르의 문법을 정립했다(이는 2019년 최대 히트작 [전지적 독자 시점]의 핵심 소재 중 하나인데, 이 문제작에 대해서는 글의 끝무렵에 더 자세히 소개할 것이다.).

이미 앞으로 벌어질 정보를 확보하고 있고, 과거의 모험을 통해 이전 경쟁자들에 비해 압도적 힘을 축적한 주인공이 벌이는 시원한 전개와, 그 뒤 더 강해진 적들을 마주치며 새로운 상황에 대처해야하는 고난 등은 회귀물만이 보여줄 수 있는 매력적인 스토리를 형성했다. 사실 그런 면에서, 초창기 회귀물은 시작부터 절대강자가 다른 곳에서 활약하며 압도적인 힘을 보여주는 일부 먼치킨물의 장르적 클리셰를 계승한 장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메모라이즈]에서 나타난 회귀 테마는 동시대에 발전하고 있던 여러 유사 테마의 일환 중에서 가장 성공한 장르 문법으로 자리매김했다. 이는 [메모라이즈]의 성공 이후 여타 유사 테마들 또한 폭발적 발전을 거듭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전생과 환생(윤회의 의미 혹은 회귀의 의미와 혼용되기도 함), 책, 게임과 같은 컨텐츠로의 빙의가 그러한 테마들이었다. 이 중 전생과 회귀는 주로 남성 소설에서, 책빙의는 여성 로맨스 소설에서 주로 발전된 장르 문법이었는데, 젠더 간 장르의 간극을 넘어 여러 군데에서 차용되며 계속해서 혁신을 거듭했다. 이 같은 장르들의 공통점과 흥행 이유에 대해서는, 좀 더 뒤에 한국 웹소설의 특징들을 정리하면서 보다 더 자세히 살명할 것이다.

이 작품의 세번째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본격적으로 스탯 개념을 활용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스탯 자체는 사실 오래된 개념이긴 했다. 멀리 기원을 찾자면 드래곤볼의 전투력 측정기인 ‘스카우터’을 들 수 있을 것이고, 조금 더 가깝게는 마법의 힘을 측정하는 ‘서클’ 개념도 능력치를 수치화한다는 틀에서 같은 계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현대적 의미에서 스탯은, 직접적으로 캐릭터가 가진 여러 능력들을 수치화하여 일목요연하게 보여주는 게임 스탯을 뜻한다. 즉, 스탯 자체는 명백히 게임 판타지의 요소로서, 가상현실과 컴퓨터 시스템을 빌리지 않은 정통 판타지나 퓨전 판타지에서는 사용되지 않는 개념이었다.

하지만 [메모라이즈]는 ‘퓨전 판타지’라는 이름을 붙이고 연재되었음에도, 이런 스탯 개념을 잘 사용하였다. 사실 이는 [나귀족]에서도 보여졌던 바처럼, 현실의 게임화라는 맥락에서 장르적 문법의 통합과 진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실례였다. 몬스터를 현실에 소환하여 게임의 클래스와 레이드 개념을 현실에서 능수능란하게 보여준 [나귀족]처럼, [메모라이즈]는 능력치와 능력치 간 상성을 절묘하게 활용하여 이야기를 복잡하게 전개시켜나간다. 이는 현대의 지식을 갖고 있던 일종의 ‘플레이어’가 주인공 혼자 밖에 없던 기존의 이고깽, 이군깽 등의 퓨전 판타지와 달리 복수의 현대인들을 판타지 세계로 소환하여 서로 경쟁시키는 [메모라이즈]의 이야기 전개를 풍성하게 만드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마치 실제 MMORPG를 비롯한 여러 게임에서, 상대방의 능력치를 파악한 뒤 그에 맞춘 전략을 수립하고 시행하며 복잡한 상호작용을 펼쳐나가는 것처럼, [메모라이즈]에서도 스탯은 판타지 세계 ‘홀 플레인’의 이용자들이 서로 경쟁하는 데 활용되는 공통의 규칙을 만들어주며 ‘홀 플레인’을 현실의 진중함은 살아있는 게임 세계로 만들어내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고 하겠다. 2000년대에 축적된 퓨전 판타지와 게임 판타지의 장르 클리셰는 이처럼 전방위적으로 합쳐지고 있었고, [나귀족]과 [메모라이즈]는 서로 다른 요소들을 색다르게 조합하여 2012년의 격변을 이끌었다. 그에 부응하듯이, 레이드물과 회귀물, 이 두 작품은 2013년 이후 본격적으로 펼쳐질 웹소설 대혁명의 주역을 맡게 된다.

로맨스 판타지의 등장과 ‘책 빙의물’의 유행

한편 이 글의 맥락에서는 조금 주변적인 이야기가 되겠지만, 그 중요성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다른 변화 또한 2012년과 2013년에 일어났다. 남성 장르 문학 시장과 독자적인 생태계를 갖고 있던 여성 장르 문학도 이 시기 중요한 변화를 겪었기 때문이다.

먼저 2012년, 조아라에서 ‘로맨스 판타지’가 독립된 카테고리로 분리되어 나갔다. ‘로맨스 판타지’는 판타지를 배경으로 한 로맨스 서사를 의미한다. 이 같은 서사를 소비하는 이들은 당연히 여성층이 압도적이었고, 이들이 주로 모험 서사를 즐기는 남성들이 주류인 조아라 판타지 카테고리에서 소설을 연재하면서 갈등이 늘 있던 것이 당시 조아라의 상황이었다.

따라서 중세 유럽풍의 판타지 세계를 배경으로 한 남성향 소설과 여성향 소설을 나눠야 한다는 여론이 지배적이 되었고, 여성들도 자신들이 즐기는 해당 장르를 ‘로맨스 판타지’, 즉 ‘로판’으로 부르면서 소비하고 있었다. 조아라는 이를 반영하여 ‘로맨스 판타지’를 독립 카테고리로 분리시킨 것이었다. 로맨스 판타지의 독립은 그동안 남성만 독식한다고 여겼던 판타지의 세계에서 명백히 여성들도 지분과 수요를 확보하고 있다는 것을 최초로 알린 사건이었으며, 훗날 조아라 플랫폼 독자 구성마저 바꿀 정도의 파괴력을 보여주게 된다.

또한 [메모라이즈]의 회귀물에 대응된다고까지 할 수 있는, ‘책 빙의물’ 장르가 여성들 사이에서 본격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한 것도 2013년 무렵이었다. 바로 이 해 [인소의 법칙]이 조아라에서 연재되기 시작한 것이 그 계기였다. [인소의 법칙]은 ‘인터넷 소설(인소)’ 속 엑스트라로 빙의하여, 그 소설의 전개를 아는 상태에서(혹은 모를 수도 있다) 로맨스를 전개하는 일종의 메타픽션이라고 할 수 있다. 이미 귀여니를 시작으로 00년대를 거쳐 장르적 클리셰를 충분히 축적한 ‘인소’의 세계에서, 그 클리셰를 실제 현실의 인간이 마주치면 어떻게 반응할지, 빙의한 세계와 원래 세계의 관계와 귀환 등의 여러 테마를 다룬 이 작품은 이후 유사한 빙의물의 원형으로 자리잡았다(네이버 웹툰에서는 [만찢남녀]가 이 같은 빙의물을 다루고 있는 웹툰이다).

이런 빙의물은 가장 대표적인 빙의물이라고 할 수 있는 ‘엑스트라 빙의물’로 시작하여 당시 선풍적 인기를 끌기 시작하던 로맨스 판타지와 또 결합해, 귀족가나 왕가의 영애로 빙의하는 ‘영애빙의물’, 일본의 악역영애물과 결합하여 소설 속의 악역 영애로 빙의한 ‘악역영애물’로 재조합되어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이 두 장르는 인터넷 장르 소설 생태계에서 여성 독자들만의 독자적 영역으로 떠오르게 되었고, 남성과 여성들이 이 시장에 동시에 참여한 것은 이후 유료 결제 플랫폼들 폭넓은 이용자 기반을 확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하여튼, 2011년의 조아라가 닦아놓은 결제 시스템의 혁신과 2012년 [나귀족]과 [메모라이즈], ‘로맨스 판타지’와 [인소의 법칙] 등이 닦은 장르 문법의 혁신은 2013년 여러 다른 플랫폼으로 확산되었다. 이 해 무협 분야의 경쟁 회사인 문피아가 플래티넘을 출시하며 유료 시장에 들어왔고, 무엇보다 거대 IT 기업인 카카오가 ‘카카오페이지’를, 네이버가 ‘네이버 북스’를 런칭하면서 판도가 급변했음을 입증해주었다.

인소의 법칙

특히 카카오페이지는 당대 장르 소설 독자들에게 전설적인 작품으로 여전히 회자되고 있던 [달빛조각사]를 핵심 컨텐츠로 플랫폼에 정착시켜 많은 유저를 끌어들였으며, 이 유저들은 이후 카카오페이지에 안착하여 플랫폼에서 연재되는 수많은 웹툰과 웹소설을 소비하게 되었다. 웹툰에서 전통의 강호 다음을 꺾고 소설 분야까지 통합하려고 하던 네이버는 반면 이 시장에서 그렇게 성공적으로 안착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네이버 북스(이후 네이버 시리즈)는 자사의 대표 컨텐츠인 ‘웹툰’을 소설에 적용시킨 ‘웹소설’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냈으며, 이 용어는 2010년대 한국 장르 소설의 주류가 온라인으로 옮겨왔음을 보여주는 신호탄 같은 소식이었다.

본격 모바일 시대와 혁신/실패의 비용 

온라인 시대가 본격적으로 개막하면서 가장 먼저 등장한 변화는 장르가 수없이 재조합 혁신을 거듭하며 다양한 방식으로 뻗어나가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앞서 언급했듯, 물리적 출판물을 만들어야 하고 유통비를 감당해야 했던 기존의 출판 시장에서는 장르 소설이라고 할지라도 과하게 다양한 실험을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인터넷은 전혀 달랐다. 작가들이 원하는 이야기를 그저 타이핑해 편집한 뒤 올리면 그만이 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과거의 편집부처럼 중간에 개입하여 변칙적 전개를 가로막을 수 있는 데스크의 역할은 상당히 축소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유료 결제 시스템이 본격적으로 자리하면서, 시장에서 거의 완전경쟁시장 수준의 신대륙이 열려버렸기 때문이다.

그 어떤 소설이 되었든, 무엇이 얼마나 성공할지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따라서 그 어떤 시도를 하든지, 독자의 선택을 받아 이윤을 남겨줄 수 있는 작품은 무엇이든 환영 받았다. 어차피 유통비용도 없다시피하니, 실험이 실패하였을 때 출판사가 떠안아야할 리스크도 극적으로 낮아졌다. 반면 스마트폰이 2013년 이후에도 무서운 속도로 보급되기 시작하고, 사회 전반에서 컨텐츠에 쓰는 돈이 늘어났으며, 모바일 결제의 편의성이 놀라울 정도로 개선되면서 웹소설 시장 자체가 극적으로 팽창했다. 한국 장르 소설에서 하드웨어와 플랫폼, 작품들은 90년대 PC통신과 00년대 인터넷 시대부터 그래왔듯이 2010년대에도 활발히 상호작용하며 고속 진화하고 있었다.

독자 모바일 스마트폰 패블릿

이런 온라인 결제 환경독자의 선호를 시장에 거의 즉각적으로 반영하면서 이 진화의 속도를 엄청나게 끌어올렸다. 과거 권 단위, 혹은 작품 단위 수준에서나 확인할 수 있던 독자의 선호는 당연히 시차를 거쳐 시장에 반영될 수밖에 없었다. 그 과정에서 독자의 선호 일부가 묻힐 수밖에 없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웹소설 시대의 회당 결제 시스템은 소설의 내용을 아주 미시적인 수준으로 나눠서, 한 작품 안에서도 독자들의 반응을 실시간으로 추적할 수 있게 해주었다.

어떤 혁신이 좀 더 효과적으로 독자들의 감성과 대리만족을 충족시켜줄 수 있을지, 즉각적 피드백이 나타나기 시작하자 다른 작가들도 그 같은 혁신을 빠르게 모방하거나 거기에 무언가를 추가한 새로운 혁신을 시도해볼 수 있었다. 이 같은 컨텐츠 범람의 시대에, 과거 게임 판타지나 퓨전 판타지 수준의 이야기로 승부하는 것은 정식 연재조차 되기 힘들어지는 자살 행위에 가까워졌다. 아이디어는 과거 대여점 시절에 유행을 따라 수렴되었다면, 이제는 끝을 모를 정도로 발산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2013년 이후 웹소설 세계에서 수많은 장르를 탄생시키면서 가히 혁명이라고 할만한 폭발성을 보여주었다. [나귀족]의 레이드물, [메모라이즈]의 회귀물, [인소의 법칙]의 책빙의물이 만들어낸 흐름은 수만 가지 새로운 장르 규칙들을 만들어냈다. 물론 그럼에도 시대를 관통하는 정신은 있었다. 한국 장르 소설의 가장 강점인 대리만족은 모든 장르를 가리지 않고 강화되었다. 주인공이 난관을 빠르게 극복하고, 특히 자신을 억압(갑질)하는 적대인물에게 시원하게 복수하는 ‘사이다’ 정신이 회당 연재 시스템과 맞물려 주류적 문법으로 부상했다. 또한, 게임적 요소가 보편화되면서 상태창과 스탯 등이 각광받았고(메모라이즈), 배경이 현대로 조성되며 기존의 퓨전, 게임과는 구분되는 ‘현대 판타지’라는 구분법이 마침내 등장하였다. 이제 과거 판타지와 무협을 넘어선 새로운 장르적 실험들이, ‘실험’이 아니라 그저 단순한 상식으로 여겨지는 시대가 부상한 것이다.

예컨대 레이드물은 이후 장르의 정비를 거쳐 ‘헌터물’로 바뀌었다. 좀비 컨텐츠가 다른 미디어를 통해 공급되면서 한국형 좀비물 또한 새롭게 발전했다. 책빙의물 및 게임빙의물은 여성과 남성들 사이에서 간접적이나마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발전해나갔다. 인터넷 방송이 청소년과 청년층에서 주류적 미디어로 부상하면서, 인터넷 방송을 소재로 한 ‘인방물’ 또한 생겨났다. 지금은 다소 퇴색되었지만 영지물의 변형으로서 던전을 기획하고 운영하는 ‘던전물’ 또한 일본 판타지와의 교류 과정에서 잠시 각광받기도 했다. 가장 인상적이라 할 것은 판타지적 요소를 상당히 배제한, 현실 배경 소설들이 크게 늘었다는 것이다.

특히 정치물, 재벌물, 각종 직업물(전문가물), 연예게물과 같이 현실 세계의 다양한 직업과 사건을 배경으로 하는 작품들도 크게 부상했다. 이 작품들에서는 대신 회귀와 상태창과 같이 2010년대 한국 장르 소설의 핵심 문법이 사용되어 독자들에게 충분한 대리만족을 제공해주었다. 여기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장르들은 각기 수많은 구성요소들로 쪼개져서 변형되고 새로이 조합되면서 전혀 새로운 장르를 탄생시키는, 끝을 모르는 진화 과정을 보여주었다. 특히 이런 경향이 잘 드러난 장르는 ‘성좌물’이라는 장르인데, 이는 이후 2010년대의 장르 소설 경향을 자세히 설명하면서 후술할 것이다.

이 모든 장르의 분화는, 앞서 중요한 변곡점으로 제시한 2012년으로부터 따져도 대략 5년 남짓한 기간에 일어난 일이다. 말 그대로, [나는 귀족이다]에서 묘사한 것처럼, 거대한 포탈이 열려 괴수들이 쏟아져나와 사람들이 혼란해하기 시작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현재 이 흐름을 상세히, 모두 추적하는 것은 극히 어려워졌다. 그 흐름이 너무나 방대하고 다양하여 일개인이 추적하기에 버거워질 정도가 된 것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도 그런 시도를 하는 오만함을 보이지는 않으려고 한다. 다만, 2010년대 한국 웹소설의 중요한 특징을 해설하고, 개인적으로 인상 깊게 보았던 작품 몇 가지를 소개하면서, 끝으로 2007년부터 한국 판타지를 읽어온 한 명의 독자로서, 2020년대 한국 웹소설의 미래에 대해 논해보며 글을 끝내고자 한다.

(계속) 

[3] 폭풍의 5년(2015-2019) 

[4] 정체성, 과제 그리고 나

독자께 드리는 말씀:

이 글은 제가 애정을 가진 장르소설, 특히 판타지 소설에 갖던 나름의 관심을 발전시켜, 한국 판타지 소설의 태동기부터 오늘날까지 발전사를 부족하나마 훑어본 글입니다. 그런 이유로 이 글에는 몇 가지 부족한 점이 존재합니다.

첫째는 제가 본격적으로 판타지 소설에 입문한 시기가 다소 늦다보니, 1세대 소설과 그 시대에 대한 이해가 다소 부족할 수 있습니다. 둘째는 판타지 소설 및 웹소설의 트렌드가 너무 광범위하고 빠르게 변화하여, 놓친 게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계보상 중요한 작품이나 사건이 누락되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셋째는 남성향과 여성향 문제인데, 제가 이 글에서 감히 ‘한국 판타지 소설’을 훑어본다고 하였으나, 사실 저는 여성향 소설, 특히 로맨스 판타지 등이 갖는 위상에 대해서는 거의 막연한 감만을 갖고 있습니다. 많은 부족함이 있는 글이겠으나 위 세 사항에 대해서는 특히 더 그러하리라 생각됩니다.

하지만 저는 또한 장르를 애정하고 여러 작품을 애독하는 한 독자로서, 비록 부족함이 있음에도 관련 논의가 사회적으로 더 활발하게 이루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 글을 쓴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따라서 건설적인 논의를 위한 코멘트와 비판은 언제든지 좋습니다. 다만, 부족한 점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비판하시더라도 너무 날을 세우시기보다는 다소 너그러운 시선으로 봐주신다면 정말 감사할 것 같습니다.

덧붙여 본 글에서는 장르소설, 판타지소설, 웹소설 등이 다소 혼용되고 있습니다. 이 글은 엄밀히 말하자면 한국 남성향 판타지 소설-웹소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문맥을 고려하여 넓은 맥락이 필요하다 싶을 때는 장르 소설을, 판타지라는 장르에 집중하고자 할 땐 판타지 소설을, 2010년대 웹연재환경 이후 등장한 소설을 언급할 땐 주로 웹소설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2010년대 이후에는 판타지로 포괄하긴 더이상 어려워진 웹소설 장르(대표적으로 직업물) 또한 다루고 있는데, 이는 이들 장르가 직간접적으로 남성향 판타지의 영향을 다대하게 받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모쪼록 부족한 글, 관대한 독해와 건설적 비판을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임명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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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명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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