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국 컨텐츠 업계에서 가장 화제가 되는 이야기는 카카오페이지 웹툰 [나 혼자만 레벨업!]이 세계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는 소식일 것이다. [나혼렙]은 본래 웹소설로서 상당한 인기작이었는데, 웹툰화가 절묘하게 이루어지고 해외 플랫폼으로 뻗어나가면서 국내에서도 상상하지 못했던 공전의 성공을 거둔 것이다.
많은 사람이 이 현상을 신기하고 재밌게 생각한다. 사실 케이팝 아이돌들이나 드라마가 세계적으로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오늘날, 한국 컨텐츠의 세계적 성공 그 자체는 새로울 것이 없는 이야기다. 따라서 이제는 조금 다른 이야기가 필요해졌다. 웹툰-웹소설을 비롯한 한국의 기초 컨텐츠들이 국제적 보편성과 세계적 인기를 모두 확보했다는 현상 소개를 넘어선 분석 말이다.
대체 무엇이 이들 컨텐츠의 성공을 이끌어냈을까? 더 나아가 앞서 언급한 아이돌, 드라마를 비롯한 한국 문화 전반의 성공을 가능하게 한 기저의 요인을 찾는 것은 가능할까? 이런 질문들에 관해 좀 더 많은 답이 제기되어 사회에서 토론되는 과정 속에서 한국 사회가 스스로 자신의 정체성을 새롭게 발견하는 것도 가능하리라 생각한다.
이 글에서는 그 중에서도 [나혼렙]의 성공을 기념하며 한국 (남성) 웹소설의 발전 과정을 대략적으로나마 추적해보고자 한다.
한국 판타지 소설을 돌아보며:
가장 하찮던 존재가 혁명의 주역이 되기까지
1. 희미한 여명: 1990년대
판타지 소설을 어느 정도 읽기 시작하여 관련 커뮤니티에 활동하기 시작하면 금세 느낄 수 있는 것이 1990년대에 대한 모종의 향수다. 지금이야 웹소설 시장이 워낙 거대해지고 현재 나오는 작품들의 퀄리티도 상승하여 더이상 그런 정서를 강하게 느낄 수 없지만, 10년 전만 해도 그 정서는 훨씬 더 진했다. 1990년대는 한국 판타지 소설의 문법을 정립한, 진중한 문학성과 장르 소설로서의 재미를 모두 갖춘 명작들이 쏟아지던 황금기라고 여겨지며 당대의 작품군, “양산형 판타지 소설”을 비판하는 것이 당시의 주된 분위기였다.
1990년대는 실제로 대단한 시대이기는 하였다. 이우혁의 [퇴마록] (1994), 이영도의 [드래곤 라자] (1998), 전민희의 [세월의 돌] (1999) 같은 시대를 흔든 굵직한 작품들이 모두 이 시대에 집필된 것은 분명히 사실이었다. 이 시대의 작품 중 특히나 유명한 것들은 2000년대 인터넷 소설 커뮤니티의 대부분 평가처럼 문학적으로도 뛰어나며, 주인공이 겪는 위기와 그에 따른 심리적 성장이 진중하게 묘사되면서도 판타지라는 이세계(異世界: 다른 차원의 세계)를 모험한다는 데서 오는 신선함과 재미까지 주는 명작들이었다. 2004년 한 고교 교과서에서 이영도의 [드래곤 라자]를 수록하기로 한 것은 이것이 장르 소설 커뮤니티 바깥에서도 어느 정도 인정 받았음을 어느 정도는 방증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1990년대를 이토록 독특한 시대로 만든 것일까? 2000년대 장르 문학 커뮤니티에서는 이에 관한 진지한 고찰 없이 “청소년을 비롯한 수준 낮은 독자층의 대거 유입”, “작가에게 제대로 수익을 보장해줄 수 없는 대여점 체제” 등을 거론하며 2000년대를 퇴락의 시기로 묘사하곤 하였다. 하지만 이런 반응들은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90년대에 명작들이 많이 나온 것인가?’라는 질문에는 결코 답을 줄 수 없는 것이었다.
엘리트 문학의 관성
사실 답은 어느 정도 간단하다. 1990년대 장르 문학은 엘리트들이 쓰는 엘리트 문학의 요소가 아주 짙었다. [드래곤 라자]나 [세월의 돌]이 대중 문학이 아니라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의 장르 문학, 특히 오늘 날의 웹소설과 비교하면 출판된 순문학에 더 가깝게 느껴질 정도인 것도 사실이다. 이 시기 장르 문학은 PC 통신을 기반으로 유통되었고, 영화를 비롯한 대중적 기반이 많았던 무협에 비하여 판타지는 훨씬 폭이 협소한 장르였다. 따라서 판타지의 장르 문법과 이야기에 지대한 관심을 갖던 사람들은 이미 어느 정도 문화적 적극성을 갖춘 식자층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맥락에서, 비록 기성 문단과는 전혀 다른 장르 문학의 세계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의 세계를 치밀하게 구성하고 나름의 주제의식을 보여주는 등 완성도에 신경 쓰는 것이 작가군과 독자층 사이에서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1990년대 작품들이 보여준 문학성은 장르 시장이 팽창하고 본격적인 대중 지향 시장으로 재편되면서 결국 상실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지금 이 글에서 회자될 정도로 강렬한 문학적 완성도를 지닌 작품이 대단히 많은 것도 아니었다. “SF의 90%는 쓰레기이며 모든 것의 90% 또한 그렇다”는 스터전의 법칙은 여기서도 유효했다. 따라서 전통적 의미에서 가장 뛰어난 문학성을 보여준 이 시기의 판타지 문학은 지금 세계적 인기를 얻고 있는 한국 웹소설과 직접적인 관계가 매우 희박하다. 몇몇 장르적 클리셰들에서 그 흔적을 희미하게나마 찾을 수는 있으나, 1990년대 한국 판타지 소설이 정립한 장르적 특성은 사실 그 근원을 거의 대부분 일본에서 찾을 수 있다는 점에서 독자성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빛이 바랜다. 물론 독자성이 빛이 바랜다고 하여 그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1990년대 한국 판타지 소설이 일본 판타지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은, 깊게 들여다보면 1990년대 명작들이 갖춘 문학성보다 더 많은 함의를 가지고 있다.
1987년 이후 한국 사회가 빠르게 자유화되고, 한국 문화는 국제적인 영향에 이전보다 더 많이 노출되었다. 특히 해외 여행이 늘어나고 PC 통신을 비롯한 통신 수단이 빠르게 발전하면서, 해외 문화에 대한 창구가 크게 늘었으며, 그 유통과 확산도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빨라졌다. 이런 시대적 조건은 장르 문학을 비롯하여 서브 컬처의 저변과 역사가 당대 한국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풍부했던 일본의 영향력이 한국에 깊게 침투하도록 만들었다. 소설 [로도스도 전기] (1988)와 애니메이션 [마법소녀 리나] (국내 기준 1996, 1997, 원작: 슬레이어스)는 그 중에서도 일본 판타지의 역량을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작품으로, 90년대와 00년대 한국 판타지에 지울 수 없는 자국들을 남겼다.
JRPG의 영향
하지만 돌이켜보면 장르 소설에 가장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은 소설이나 애니메이션보다도 명백히 게임, 그 중에서도 판타지를 배경으로 하는 JRPG였다. 1994년에 태어난 나조차도 그 게임들을 CD로 접하면서 열광했던 기억이 생생할 정도로, JRPG의 영향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한국 판타지가 PC 통신을 기반으로 태어나고 유통된 것에서 알 수 있듯, 당대 한국은 컴퓨터 붐을 경험하고 있었고, 자연스레 CD를 통해 들어온 JRPG는 그 어떤 매체보다 광범위하게 확산되며 일종의 세대 문화를 형성했던 것이다. 앞서 무협이 홍콩 영화라는 대중적인 기반을 갖추고 있었다고 언급했는데, 초창기 판타지에 있어서 홍콩 영화에 비견될 수 있는 대중적 기반은 바로 게임이었다.
게임이 장르 소설을 형성했다는 것이 과하게 들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파랜드 택틱스] (1993), [랑그릿사] (1991), [드래곤 퀘스트] (1986) 같은 전설적인 JRPG 게임들을 해본 사람들은 이것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알 것이라 믿는다. 이 작품들은 단순히 게임으로서 조작이나 전투가 재미 있어서 선풍적 인기를 끈 것이 아니었다. 매력적인 캐릭터와 흥미진진하고 감동적인 스토리, 중독성 있는 음악 등이 맞물려, ‘서사’를 중심으로 하는 종합적 경험을 선사해주기 때문에 인기 있던 것이었다. 즉, JRPG의 성공에는 이야기가 있었다.
이런 매력적인 이야기가 대거 흘러들어간 것이 국내의 판타지 소설의 발전에 영향을 안 미쳤으리라 생각하는 것이 이상하다. JRPG는 캐릭터의 외형, 성격, ‘판타지 세계’를 구성하는 수많은 설정과 장르적 클리셰, 무엇보다 이야기 구조 면에서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작은 마을에 꿈을 가진 소년이 용사가 되어 동료들을 만나고 마왕으로부터 세계의 위기를 구한다는 일본 판타지의 정석적인 이야기 구조넌 JRPG의 이야기 구조를 형성했고 이는 초창기 한국 정통 판타지의 이야기 구조로 계승되었다.
특히 필드를 이동하여 새로운 세계를 만나고 거기서 사건을 겪고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를 찾는 전개, 주기적 성장을 통해 새로운 능력을 각성하고 위기를 극복하는 JRPG의 전형적 전개는 초창기 판타지 소설에서 수없이 변주되었다. 이 전개는 JRPG에 익숙한 당대 독자들에게 가장 친근하고 재밌는 전개로 받아들여졌기에 살아남아 복제된 것이었다. 게임과의 상호작용은 한국 장르 소설 발전을 설명하는 데 근원적인 요소 가운데 하나로, 이후에도 계속해서 영향을 미치게 된다.
2. 대중소설로의 이행: 2007년까지
[드래곤 라자]와 [세월의 돌]과 같은 작품들은 적어도 2000년대 중반, 늦게는 후반까지도 한국 판타지 소설의 고전이자 모범으로 끝없이 언급되었다. 자연스레 2000년대에도 수많은 작품들이 1990년대 명작의 영향 아래에서 쓰여졌다. 하지만 이 시기에 1990년대의 명작들과 비견할만한 작품들을 찾기는 힘들다.
사실 어쩌면 당연한 게, 1990년대 작가들은 이미 유명한 작가들이 되어 기존에 쓰던 시리즈를 연재하거나 다른 작품을 시작한 데 반해 이들을 대체할 새로운 작가군이 등장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새로운 작가군이 등장하기는커녕, 1990년대의 시대상을 형성한 여러 요소들이 큰 변화를 겪기 시작하면서 한국 판타지는 일본 판타지와도 구별되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발전하기 시작한다. 오늘날 웹소설들과 직접적인 고리가 형성되기까지는 여전히 오랜 시간이 필요했지만, 그럼에도 2010년대에 벌어질 변화들의 여러 맹아가 태동한 시기이기도 했다.
이 시기 판타지 소설에서 벌어진 가장 큰 변화는, 1990년대에 출판된 판타지 소설들이 상업적 성공을 거두면서 장르 소설 시장이 팽창하고, 자연스럽게 작가와 독자층이 양적으로 늘어난 데 있었다. PC 통신에 기반을 둔 장르 소설 커뮤니티는 훨씬 더 광대한 공간인 인터넷으로 옮겨갔다. 오프라인에서도 IMF 이후 우후죽순처럼 늘어나기 시작한 도서 대여점을 바탕으로 판타지 소설은 보다 전국적인 유통 기반을 갖추기 시작했다.
10대의 시장 진입
이 같은 변화는 최소 ‘글에 친숙한 대학생’ 이상이 집필하고 보던 판타지 소설 업계에서 엄청난 변화를 만들어냈는데, 가장 특징적인 것은 10대 청소년들이 시장에 대거 진입하였다는 것이겠다. 과거 7천 원, 8천 원을 주면서 구매해야 했던 판타지 소설은 이제 500원 정도로 대여가 가능해지면서 접근성 면에서 큰 개선을 보였다. 얼마 안 되는 용돈으로 살아야 했던 청소년들에게 이 변화는 큰 것이었다.
또한, 인터넷을 통해 작품의 정보 내지는 작품 자체를 접하기가 훨씬 쉬워졌고, 그 덕택에 장르 소설 작가를 희망하는 청소년들이 자신들의 작품을 올리고 평가 받는 일이 빈번해졌다. 사실 이는 세기 전환기인 2000년 당시 시점에서 이미 그 자체로 존재하던 현상이었다. 예컨대 1999년 소설 [가즈나이트]는 고등학생 작가가 쓴 작품으로서 대단한 성공을 거두기도 했었고, 2001년 귀여니도 역시 고등학생 때 [그놈은 멋있었다]를 쓰면서 그 잠재력을 입증했다. 마침내 60년대생과 70년대생이 아닌 80년대생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footnote]다만, 가즈나이트의 작가 이경영은 1978년생입니다. 가즈나이트가 예시된 것은 ’10대의 등장, 성취’라는 관점에서 쓰인 문단이므로, 이 점 독자께서는 착오가 없으시길 바랍니다. (2020. 1. 7. 17:04 추가.) [/footnote]
대중, 특히 저연령층에게 작가 및 독자 기반이 확대된 것은 당대에 그렇게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히트작 [가즈나이트]부터 이미 고등학생 작가의 한계가 크게 지적되기도 했었다. 나름의 문학성과 주제의식을 고심하던 경향이 약화되었다. 이야기는 더 단순해졌고, 말초적인 대리만족에 초점을 둔 서사가 흥행했고, 캐릭터는 평면적이 되었으며, 내면 묘사는 훨씬 줄었다. 능력 면에 있어서도 새로운 참신함이 더해지기 보다는 장르적 클리셰에 의존하는 경향이 커졌다.
차원이동, 이고깽, 퓨전 판타지
이런 흐름 속에서 한국 판타지 소설의 발전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혁신이 도입되었다. 바로 ‘차원이동’이다. 차원이동은 1999년 연재가 시작된 [묵향]에서 본격적으로 도입된 혁신이다. [묵향]은 중원 무림의 주인공이 판타지 세계로 넘어가 모험을 이어가는 설정을 통해 큰 인기를 끌었다. 판타지와 무협의 결합, 소위 ‘판협지’ 혹은 ‘판무협’은 그간 홍콩을 통해 수입되어 한국에서 나름 독자적 발전을 거듭한, 당시로서는 대중 소설의 왕좌를 차지하던 무협이 일본의 영향을 받아 게임과 상호작용하며 빠르게 성장하던 판타지와 합쳐진, 한국 장르 소설 역사에 기념비적인 혁신이라고 할 수 있다.
기를 마나와 대치시키고, 판타지 세계보다 훨씬 강한 무림인의 검술과, 다양하고 변칙적이어서 무림인이 대처하기 힘든 판타지 세계의 마법 등 요소가 마주치면서 펼쳐지는 이야기는 장르가 적절히 통합되었을 때 얼마나 매력적인 이야기가 나올 수 있는지 보여주는 생생한 사례였다. 독자는 알지만 주인공은 모르는, 서로 다른 규칙과 문화를 가진 두 세계가 만나서 겪는 상호작용은 영미 SF에서 외계인과 인간의 ‘최초의 접촉’을 다루는 하위 장르를 볼 때 느낄 수 있는 재미를 독자들에게 선사해주었다.
차원이동은 단순히 판타지와 무협의 만남으로 끝나지 않았다. 작가와 독자들이 살아가는 현실 세계, 특히 2000년대 한국과 판타지 세계가 접촉하는 설정 또한 ‘차원이동’의 틀에서 다뤄졌다. 2000년에 나온 작품인 [사이케델리아]를 시작으로, 새롭게 확충되기 시작한 독자층인 10대 남성 청소년들이 이입하기 쉬운 또래의 주인공이 판타지 세계로 갑자기 떨어져서 겪는 모험을 다룬 소설들이 우후죽순처럼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는 ‘이세계로 고딩이 가서 깽판 부리는’ 장르, ‘이고깽’이라는 장르로 정립되었는데, 사실 이고깽이라는 용어 자체는 비난을 위한 멸칭에 가까웠다. 과거 황금기를 대표하는 판타지 ‘문학’과 대비되는, 똑같은 클리셰와 얄팍한 캐릭터들로 만들어지는 판에 박힌 대리만족의 양산이라는 맥락에서 가장 대표적인 비난이 바로 ‘이고깽’이었던 것이다. 유사한 맥락에서, 시골 마을의 평범한 소년에서 시작하여 모험을 겪으며 점차 성장하는 기존의 이야기 구조와 달리, 시작부터 세계에서 가장 강한 존재로 초월적인 힘을 갖고 시작하는 식의 ‘먼치킨’도 이 무렵에 본격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판타지와 무협의 결합, 판타지와 현실 세계의 결합이라는 차원이동물은 ‘퓨전 판타지’라는 이름으로 2000년대 초반 한국 대여점에 엄청난 속도로 확대되었으며, ‘판타지’는 이후 이들과 구분하기 위해 ‘정통 판타지’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 이는 ‘정통 판타지’가 위협을 겪고 있다는 신호이기도 했다. 시장이 대여점 중심으로 재편되고, 청소년 독자가 유입되며, 인터넷이 소설의 불법 복제와 유통의 첨병에 서면서 과거와 같이 공을 많이 들인 정통 문학 작품들이 과거처럼 큰 상업적 성공을 거두기 힘들어진 것이다. 어떻게든 출간되어 대여점에 풀리고 돈을 만지려면, 전민희와 이영도의 소설을 아무리 감명 깊게 읽었어도 다소 간의 타협이 필요했다.
양판소의 그림자 그리고 빛
21세기를 맞이하여, 어찌되었든 마침내 한국 판타지 소설은 훨씬 더 자생적인 발전을 시작했고 폭넓은 생태계를 갖추게 되었다. 90년대의 유산, 특히 JRPG의 영향을 일정부분 계승한 가운데 무협과 판타지, 현실 세계라는 서로 다른 세계들을 결합시키는 장르 통합, 청소년 독자들을 빠르게 만족시키기 위한 가볍고 시원하고 말초적인 전개가 이 시기의 가장 큰 특징이었다. 물론 모두가 이 흐름에 만족하는 것은 아니었다. 점점 낮아지는 문학성, 편의적이고 경박한 전개, 대여점과 불법복제에 의해 위협받는 시장의 건전성 등 수많은 요소가 시대의 쇠퇴를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그런 배경에서, 이고깽과 더불어 쓰이던 ‘양산형 판타지 소설’, 소위 ‘양판소’는 한국의 ‘수준 낮은’ 장르 문학의 실태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말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정말 역설적으로, 2000년대 초반 ‘양판소’, 90년대 황금기의 안티테제이자 시대의 쇠퇴를 보여주는 증거들로 여겨지던 이 작품들은 대략 10여년의 세월을 건너뛰어 한국 웹소설의 놀라운 성공을 만드는 디딤돌이 되어준다. 이를 가능하게 해준 가장 큰 요인은 역시 참여자들의 양적 팽창이다. 시장이 팽창한 데 반해 유통 플랫폼과 독자층의 변화로 실질적 다양성이 줄어들었다고는 하지만, 이는 피상적 관찰에 지나지 않았다. “양은 곧 질이다”라는 말이 있듯, 시장 참여자가 절대적으로 많아진 것은 분명히 변화를 이끌어낼 동력이 되었다. 장르적 클리셰를 유지하며 ‘양산’되던 그 수많은 작품들 사이에서도 인기를 조금이라도 더 얻으려면 무언가라도 더 참신한 점을 찾아야 했다. 그런 이유로 이 시기 잦은 장르적 실험이 시도되었고, 차원이동 또한 그 중에서 가장 성공한 실험의 일부였다.
00년대 초반에 시작되어 성공한 하위 장르로서 ‘영지물’은 특별히 따로 언급할 필요가 있다. 이 장르도 한국 장르 소설의 여러 핵심적인 요소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영지물은 중세 판타지 세계에서 가난하고 몬스터의 침입이 잦은 봉건 영지를 주인공이 발전시켜서 대륙의 패자로 거듭나는 서사 구조를 가진 하위 장르이다. 삼국지를 비롯한 코에이 시뮬레이션 게임의 지대한 영향을 받은 이 장르는, 판타지 세계를 주유천하 방랑하면서 모험을 겪던 JRPG와는 또 다른 맥락에서 발전하였다. 즉, 게임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에서 한국 판타지의 보편적 맥락을 공유하지만, 동시에 장르의 보편적 규칙에서는 좀 변칙적인 면이 많았던 장르였다.
영지물은 얼마 안 가 상당한 인기 장르로 부상하였고, 특히 고등학생 등이 판타지 세계로 넘어가 현대의 지식을 갖고 영지를 발전시키는 등의 작품들이 굉장히 많이 만들어졌다. 지금에 와서는 웃음이 나는 그런 설정이지만, 영지물이 담고 있는 권력지향적 요소와 발전에 대한 강박 등은 2010년대 한국 판타지의 발전을 예시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에 대해서는 이후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보도록 하겠고, 일단 지금까지는 00년대의 여러 작품들이 일본과 다른 한국만의 생태계와 정서를 담기 시작하며 여러 실험을 시작했다는 것만 기억하기로 하자.
3. [달빛조각사]와 게임의 시대
이처럼 시장에서 놀라운 성공을 거둔 동시에 좋지 못한 평가를 받던 ‘이고깽’은 2007년 즈음 갑작스럽게 쇠퇴일로를 걸으며 시장에서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그 이유는 이고깽이 채워주던 대리만족의 욕구를 당대 독자층에게 훨씬 더 직접적으로 채워주는 새로운 장르가 시대의 유행으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장르는 바로 가상현실 게임을 주요한 소재로 차용한 ‘게임 판타지’였으며, 이제 대여점에서 찾아볼 수 있는 판타지는 정통 판타지, 퓨전 판타지에 이어 게임 판타지까지 크게 세 개가 되었다. 하지만 게임 판타지는 앞의 두 장르를 집어삼킬 기세로 성장하여, 2010년대 초까지도 사실상 왕좌의 자리를 거머쥐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2007년에 등장한 남희성의 소설 [달빛조각사]가 있었다.
본격 게임판타지, 달빛조각사
가상현실 게임을 소재로 한 판타지 소설의 시초가 [달빛조각사]는 아니었다. 이미 일찍이 1999년 김민영 작가가 [옥스타칼니스의 아이들]이라는 가상현실 게임을 소재로 한 판타지 소설을 집필한 바가 있었다. 거기에 JRPG의 영향을 받아 [마스터스쿨 올림프스] 등 판타지 만화를 그리던 손희준 작가가 그린 가상현실 게임 만화 [유레카] (2002)도 장르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즉 게임 소설 자체도 차원이동물처럼 2000년을 전후로 한 시점에 탄생하여 발전한 장르였다.
하지만 [달빛조각사] 이전까지 이런 게임 장르가 주류적 위치를 차지하기는 힘들었다. 아직 독자들이 가상현실 게임을 소재로 한 작품에 크게 익숙하지 않았다. 정통 판타지와 퓨전 판타지만 해도, 주로 청소년 대중의 주류적 유행을 만족시켜주기에는 충분했다. [옥스타칼니스의 아이들]의 경우, 게임 판타지도 얼마든지 훌륭한 문학성을 갖출 수 있는 사례로 이후 종종 거론되곤 하였지만, 이는 반대로 [옥스타칼니스의 아이들]이 2000년대 이후 주류가 된 대중적 감성과 맞지 않는 면이 많다는 의미기도 했다. 게임 소설이 시장의 왕좌에 오르기 위해서는 아직 몇 년의 시간을 더 기다려야만 했다. 2007년에 [달빛조각사]가 나오기까지 말이다. 그렇다면 [달빛조각사]는 무엇이 특별했길래 게임 판타지 소설을 시장의 왕좌에 올려놓을 수 있었을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달빛조각사]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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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조각사 (줄거리 개요)
부모님이 남긴 사채빚에 시달리는 이현은 노모와 여동생을 위해 뼈빠지게 일을 하며 사는 빈곤 청년이다. 그는 ‘마법의 대륙’이라는 옛날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게임에서 랭킹 1위를 하고 있는 것이 인생의 유일한 낙이었는데, 생각 없이 아이디를 판매하니 30억 9천만 원이라는 거금이 그의 손에 들어오게 된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알아차린 사채업자에 의해 30억 9천만원 중 30억을 갈취당한다. 그래도 게임에서 돈을 벌 수 있음을 깨달은 이현은 당시 최고로 인기 있던 가상현실 게임인 ‘로열로드’를 통해 부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9천만 원으로 거금의 가상현실 게임 캡슐을 구매해 ‘로열로드’를 시작한다.
이현은 아이디 ‘위드’라는 이름으로 로열로드에서 활동하기 시작하는데, 그는 최대한 빠르게 게임을 통해 많은 돈을 버는 것이 목적이었기에, 전략적 계산을 통해 게임에 임한다. 가상현실 게임의 특성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게임 시작 전부터 검도를 엄청난 의지로 배우고, 저레벨 때 최대한 많은 스탯을 수련으로 얻는 것이 유리하다는 것을 감안하여 사냥도 가지 않고 오직 시작 도시에서 수련만 수백 시간 하는 초월적 의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하지만 정석적인 검사가 되어 ‘마법의 대륙’ 때처럼 세계 최강의 플레이어가 되고자 하는 위드는 퀘스트가 이상하게 꼬여 전혀 예상하지 못한 직업 ‘달빛조각사’를 얻게 된다. 전투 직업도 아니고, 생산 직업도 아니고, 가장 쓸모 없다고 여겨지는 예술가 직업을 히든 클래스라고 얻게 된 위드는 황당해하며 절망하나, 얻은 직업을 불굴의 의지로 최대한 활용하고자 하는 위드는 곧이어 이곳저곳 모험을 시작한다. 그 ‘노가다’ 정신 덕택에 위드는 검술을 비롯한 전투, 요리, 재봉, 채광, 야금술을 비롯한 생산, 그리고 주된 직업인 조각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에 통달한 캐릭터가 되며, 이 능력들을 적재적소에 활용하며 게임 로열로드의 광대한 배경인 ‘베르사 대륙’의 역사를 바꾸는 모험을 한다.
이 과정에서 위드는 대륙의 북부를 뱀파이어로부터 구하고, 자신의 기반을 구축하게 된다. 위드의 영지는 위드의 능력과 여러 기연 덕택에 빠른 발전을 거듭한다. 한편 그가 주도하여 여러 퀘스트들이 마치 영화를 방불케 하는 스펙타클을 보여주며 클리어 되는데, 이 과정에서 현실 세계의 이현도 엄청난 유명인이 되며 큰 부를 거머쥐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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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조각사의 세 가지 특징
수십 권이 넘는 분량의 소설에서 많은 걸 생략할 수밖에 없는 요약이지만, 여기서 확인해볼 수 있는 달빛조각사의 특징은 이렇다.
- MMORPG의 강한 영향
- 확연히 색채를 드러낸 한국적 정서
- 현실 세계와 게임 세계의 병행
(1) MMORPG의 강한 영향
앞서 한국 판타지에서 계속해서 드러나게 될 특징으로 게임과의 상호작용을 들었었다. 90년대와 2000년대 초반에 판타지 소설에서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게임은 단연코 JRPG였다. 하지만 JRPG는 시장을 영원히 지배할 수 없었고, 그 기억이 희미한 세대가 계속해서 유입될수록 그 영향력은 옅어졌다. 물론 JRPG의 쇠퇴는 게임의 쇠퇴는 아니었다. 이제 청소년 문화에서 게임을 빼놓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할 정도로, 널리 보급된 인터넷과 컴퓨터, PC방은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문화를 이 땅에 창출해내었다. 한국에서 가장 직접적이고 거대한 흐름은 RTS 게임인 [스타크래프트]에서 등장했지만, 판타지 소설과 관련된 변화는 다른 분야에서 일어났다. 바로 MMORPG다.
JRPG는 게임으로서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바로 온라인 게임이 아니라는 것이다. 게임은 그 자체로 또래 문화를 형성하고, 또 현실의 또래 집단에 잘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일종의 대피처가 되어주기도 했었다. 그런 이유로 개발사가 만들어낸 스토리를 따라가며 플레이하고 이야기를 수용하는 싱글 RPG 게임보다는, 더 능동적으로 세계를 탐험하는 자유도를 갖고, 무엇보다 다른 플레이어들과 상호작용하는 온라인 게임이 각광받을 수밖에 없었다. JRPG는 이러한 적응에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하였고, 반대로 여러 사람 간의 ‘대결’을 가능하게 해준 스타크래프트는 그 정점을 보여주면서 게임 문화를 평정했다.
이런 맥락에서 MMORPG는 기존의 싱글 RPG와 다른 방향의 재미를 주었고, 90년대 말부터 또래 문화의 큰 지분을 차지하기 시작했다. [바람의 나라] (1996), [어둠의 전설] (1998), [리니지] (1998) 등이 열어젖힌 초창기 한국 MMORPG는 2000년대에 더욱 큰 발전을 이룩하였다. 많은 학생들은 학교가 끝난 뒤 PC방에 가서 같은 서버에 접속해 파티를 맺고 사냥을 했다. 친구가 없는 이들은 혼자라도 게임에 들어가 ‘게임 친구’를 만나며 놀았다. 이런 배경이 없었더라면 [달빛조각사] 이전에 원형을 제공해준 여러 게임 판타지 소설들이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즉 다시 말해 [달빛조각사]는 한국인의 MMORPG 플레이 경험이 누적되고 독특한 문화들이 자리잡으면서 형성된 관습들을 흡수하여 만든 작품이라는 것이다.
(2) 노가다: 경쟁지향성이 강한 한국적 정서
바로 이 점에서 [달빛조각사]의 두 번째 특성까지 설명할 수 있다. JRPG는 일본의 게임 개발사가 만든 스토리를 수동적으로 플레이하는 것 외에는 별 다른 자유도가 없었다. 하지만 MMORPG는 본질상 복수의 플레이어들이 상호작용하면서 나름의 문화를 발전시키는 플랫폼이었다. 즉, 게이머들의 성향이 게임에 점차 반영되고, 독자적 문화가 창발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는 뜻이다. MMORPG가 이미 한국의 거대 산업으로 자리 잡은 2000년대 중반에는, 게이머, 특히 한국인 게이머라면 누구나 웃고 즐길 수 있는 일상적인 상황(클리셰), 인상적인 에피소드 등이 축적되어 있던 상황이었다. 따라서 MMORPG를 모티프로 소설을 쓰게 된다면, MMORPG 문화에 이미 반영된 한국인들의 정서가 짙게 드러날 수밖에 없던 것이다. 이는 게임 판타지 소설이 갑작스럽게 성장한 이유를 상당히 잘 설명해준다. JRPG에서 모티브를 따온 탁월한 이야기 구조를 지닌 정통 판타지보다, 당장 내가 하는 게임에서 익숙하게 접하는 상황들을 실감나게 풀어내는 게임 판타지는 더욱 강렬한 대리만족을 제공했다. 한국적 정서가 확연히 색채를 드러낸 것이다.
위에서 요약해서 소개한 [달빛조각사]만 해도 한국 MMORPG 문화의 많은 요소를 이미 확인할 수 있다. 한국 MMORPG 문화의 가장 큰 특징이라 함은 역시 ‘남보다 위에 올라서는 것’으로 대표되는 경쟁 지향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현실의 한국 문화를 강하게 반영한 것이다. 입시가 되었든, 직장이 되었든, 투자가 되었든, 친척과의 만남이 되었든, 한국인들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사회적 성공의 기준을 정하고 구성원 모두가 그 목표를 달성할 것을 상당히 강하게 압박하는 사회다. 이를 정당화하는 말은 ‘남들만큼은 하고 살아야지’인데, 사실 저 말에서 ‘남들’은 이미 상위 10% 내지는 5%에는 거뜬하게 들 정도의 높은 위치인 것이 대부분이다. 스스로의 위치가 어떠하든 한국인들은 어느 정도 위를 보고 살며 그곳에 도달하기 위한 가혹한 경쟁과 규율을 강요하는 문화를 내면화하며 살아왔다.
게임 문화에서도 이런 문화적 성향을 강하게 볼 수 있다. 스타크래프트가 이 같은 승부, 경쟁 지향성과 잘 부합한 것은 이 게임이 한국에서 엄청난 인기를 끈 것을 상당 부분 설명해준다. RPG 게임의 경우, 가장 효율적인 플레이 방식을 알아내어 제일 빠른 속도로 레벨업하고 다른 플레이어들보다 더 강해지기 위한 전략들을 수립한다. 아바타의 능력치를 나타내는 스탯을 성장시키는 데서도 이런 문화는 아주 잘 드러나는데, 플레이어가 자신만의 독특한 아바타를 만들라는 차원에서 자유도를 제공해주는 스탯 분배 시스템은 한국에서 ‘가장 효율적인 스탯 분배를 하지 않으면 망캐, 잡캐’라고 인식되면서 쓸모 없는 시스템으로 전락했다. 상황이 이러다보니, 스스로 게임 세계의 여러 곳을 모험하며 자유를 만끽하라는 온라인 게임의 세계는 서버의 모든 플레이어들끼리 최고의 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거대한 경기장으로 변했다. 하다못해 게임을 같이 플레이하는 또래 사이에서도 게임의 레벨과 직업, 스탯 등을 두고 치열한 서열짓기가 벌어졌다. ‘게임은 즐기려고 만든 것이지만,한국인은 이기려고 플레이한다’는 비판은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이었다.
따라서 ‘위드’라는 캐릭터가 많은 청소년 독자에게 강하게 각인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어떻게든 더 게임을 효율적으로 잘 플레이하고자 시작 전부터 게임에 대해 공부하고, 저레벨에서 스탯을 최대한 많이 올리기 위해 엄청난 반복작업을 해내는 것,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한국에서 MMORPG를 한 누구나 경험해보았을 일화이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메이플 스토리]만 하더라도, 처음에 주사위를 던져서 랜덤하게 스탯을 얻어내는 시스템에서 플레이어들은 최고의 스탯을 얻고자 30분 넘게 주사위만 굴리는 일이 허다했었다. 가장 최적의 직업인 검사가 아니라 쓸모 없는 직업인 조각사를 얻은 것에 절망하는 장면에서도, ‘망한 직업’을 극도로 기피하는 한국 게임 문화를 볼 수 있다. 작중에서 위드는 팔아봤자 푼돈만 주는 잡다한 아이템도 모두 긁어모아서 알뜰하게 모으는 ‘수전노’ 캐릭터이기도 한데, 모두가 그러는 것은 아니지만, 이 또한 한국 게임 문화에서 흔히 볼수 있는 행동이기도 하였다.
이를 상징하는 단어이자, [달빛조각사]를 관통하는 단어가 바로 ‘노가다’다. 본 뜻은 건설업이지만 게임에서는 지루하게 진행되는 반복 작업을 의미하는 말인 ‘노가다’는 경쟁지향적인 한국 MMORPG에서 남들의 위에 올라서기 위해 안 하면 안 되는 필수적인 과업이 되었다. 이 위드가 로열로드의 모험을 돌파하는 방식은 ‘조각사’라는 직업을 통해 참신한 기지를 보여주는 방식도 있었지만, 근본은 ‘노가다’에 있었고, 그 때문에 이 작품의 키워드 단 하나를 꼽으라면 단연코 ‘노가다’가 될 수밖에 없다. 즉, 위드는 한국의 온라인 게임 플레이 문화를 그대로 투영하여 그려낸 캐릭터였고, 그 현실 밀착성이 한국 독자, 특히 MMORPG에 익숙한 청소년 독자들에게 강렬한 끌림을 선사한 것이다.
(3) 현실과 게임의 병행
이런 한국적 요소는 [달빛조각사]의 폭발적 인기를 이끌어낸 세 번째 요소인, 현실과 게임의 병행과도 이어진다. [달빛조각사]는 로열로드라는 가상현실 게임에서 활약하는 ‘위드’와 현실의 한국에서 삶을 살아가는 ‘이현’이라는, 하나의 자아를 가진 두 개의 캐릭터가 병행해서 서술된다. 가상현실이나 ‘싱크’가 제기하는 자아의 문제는 과거 사이버펑크 SF에서 이후 영화 [아바타]까지 여러 테마로 변주되었는데, 최초의 게임 판타지 소설인 [옥스타칼니스의 아이들]도 이 계보에 있는 작품이었다.
하지만 [달빛조각사]는 이와 전혀 다른 접근법을 취했다. 가상현실 게임이지만, 현실에서 게이머들이 MMORPG를 플레이하는 그 모습을 반영해 그려냈던 것이다. 게임 외에는 일상 생활이라고는 없는 ‘폐인’ 같은 이현의 삶, 게임은 게임이고 현실은 현실이라는 정확한 분리, 그럼에도 게임 속에서 성장한 결과 차츰 영향 받기 시작하는 현실의 삶 등을 재미나게 그려낸 것 또한 독자들에게 친숙하게 다가오며 빠른 대리만족을 가져다주는 요소였다.
[달빛조각사]에서 절묘하게 이루어낸 현실 세계와 게임 세계의 병행은 이후 일어날 판타지 소설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복수의 세계를 등장시키는 것은 차원이동물부터 시작된 것이 맞았다. 하지만 그 이전 차원이동물은, 몇몇 예외를 제외하면 기본적으로 차원이동이 소설 시작할 때쯤 한 번 일어나고 끝인 것이 대부분이었다. 혹은 소설 막바지에 주인공이 원래 살던 세계로 돌아가며 끝났다. 즉, 작중에서 이야기가 전개되는 세계는 기본적으로 하나다. 하지만 [달빛조각사]에서는 현실과 게임의 세계가 연결은 되어 있지만, 합쳐지지 않은 채 ‘병행’한다. 현실 세계와 모험 세계가 병행하며 시점을 끊임없이 교차하는 이런 서술은, 현실의 대리만족이라는 기능 외에도 현실과 게임을 오가는 장치를 서사에 적절히 활용하면서 전개하는 방법론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달빛조각사]는 이 같은 요소들을 아주 절묘하게 버무려 게임 판타지의 틀을 정립했고, 한국 장르 문학 역사에 있어서 가장 거대한 흥행작으로 우뚝 자리잡을 수 있었다. 이후 [아크] (2008), [대장장이 지그] (2009)를 비롯한 수많은 가상현실 게임 소설들이 만들어지면서 게임 판타지는 2010년대 초반까지 장르 소설계의 유행을 선도했다. 2010년 즈음이 되었을 때, 이미 한국 판타지 소설에서 1990년대 명작들의 흔적을 찾기는 힘들 정도로 장르 문법은 빠르게 변화하였다. 마법의 힘을 재는 단위로서 ‘서클’, 무협에서 빌려온 ‘검기’, 오크가 내는 소리인 ‘취익취익’ 같은 몇몇 장르적 규칙은 공고히 명맥을 이어갔지만, 이미 작은 시골 마을의 용사가 슬라임부터 잡으면서 용사를 잡는 JRPG의 서사구조는 완전히 사라졌다.
게임판타지가 남긴 두 가지 유산
마지막으로, 게임 판타지 소설은 이후 2010년대 웹소설 혁명을 논할 때 특히 중요한 두 가지 유산을 더 남겼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후에 더 설명하기 위해 여기서는 간략히만 짚고 넘어갈 것이다.
[dropcap font=”arial” fontsize=”22″]첫째[/dropcap], 소재의 다양화다. 게임 판타지 또한 전형적인 ‘양판소’로 분류되었던 걸 생각하면 여기서 의아하게 여길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게임 판타지는 이전의 차원이동 퓨전 판타지와 다른 점이 있었다. 바로 MMORPG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클래스’, 즉 직업 요소다. “조각사”라는 직업에서 잘 나타나듯, [달빛조각사]는 기존에 검사와 마법사가 무력으로 상황을 극복하는 왕도적 전개에서 크게 벗어난 변칙적인 직업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달빛조각사]에서 위드는 음식, 무기제작, 약초 채집, 조각 등 온갖 잡다한 ‘생산 스킬’을 통해서 사건을 이끌어나간다.
물론 여전히 위드가 최고 수준의 검사라는 점에서 무력이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긴 하지만, 다양한 방식으로 주인공을 성장시켜 이야기를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을 최초로 입증하였다는 점에서 이후 게임 판타지의 소재를 엄청나게 분화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한다. 대장장이, 재봉사, 요리사, 건축가를 비롯한 온갖 직업들이 서사의 중심에 서게 되었는데, ‘가상현실 게임’이라는 특성상 작가가 큰 조사를 하지 않고도 해당 직업의 이야기를 그려낼 수 있다는 점이 이런 작품들의 창작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이는 당시에는 그저그런 흔한 양산 소설이라고 비난 받았으나, 2010년대 이후 웹소설이 만개하면서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꽃 피우게 된다.
[dropcap font=”arial” fontsize=”22″]둘째[/dropcap], 상태창의 도입이다. 게임 소설의 가장 특징적인 요소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상태창은 자신이 키우는 캐릭터의 스탯과 스킬을 비롯한 전반적인 상태를 알려준다. 또한 주기적으로 뜨는 알림은 아주 명약관화한 방식으로 게이머가 겪고 있는 상황을 알려준다. 사실 이 같은 상태창도 처음에는 ‘양판소’의 상징으로 상당한 비판을 받던 요소 중 하나였다. 가장 악명이 높은 것은 당시 양판소 작가로 최고로 악명 높았던 김원호 작가의 [다크 프리스트]에서 몇 페이지를 “레벨이 올랐습니다”로 도배하여 분량을 잡아먹은 일화였다.
그 다음 비판점은 상태창의 과도한 편의성이었다. 작가가 묘사를 통해서 독자들에게 자연스럽게 납득시켜야 할 여러 서술들이 말 그대로 시스템이 제시해주는 상태창 하나로 직설적으로 제시되는 것은 양판소의 가장 대표적인 편의적 전개로 여겨졌다. 거기에, ‘세계를 관리하는 시스템’이 제시하는 상태창은 주인공이 모험을 겪는 세계가 현실이 아닌 가상의 세계라는 점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며 몰입을 방해한다는 평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평은 당대적 평에 불과했다. 상태창은 2010년대 웹소설 혁명기의 주역으로 등장하며, 한국 웹소설만의 독특한 문화를 만들어내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에 대해서도 이후 살펴볼 것이다.
하지만 당시로서 이런 요소들이 이후 등장할 웹소설에서 어떻게 활용될지 짐작하는 사람은 전혀 없었다. 그저 그런 재미만을 위한 양판소라는 평은 게임 판타지에 관해서도 지배적이었다. 실제로 게임 판타지 소설은 그 장르적 한계에 부딪혀 쇠퇴하기 시작했고, 자연스레 게임 판타지 자체의 패권도 오래가지 못했다. 사실 당시는 판타지 소설 시장 자체가 큰 위협에 직면한 상황이었다. 스캔본, 텍스트본과 같은 불법 복제는 판타지 소설 유통의 근간이던 도서 대여점의 존립을 위협했다. 동시에 양산형 소설들의 난립은 전반적인 작품의 질을 계속 떨어트렸고, 구매력이 높은 성인 독자들일 수록 점차 판타지 소설에 발길을 끊게 되었다.
2006년 런칭한 ‘네이버 웹툰’, 2010년 무렵부터 크게 인기를 끈 페이스북 등 무료로 접근할 수 있는 수많은 볼거리와 즐길거리들이 인터넷 세상에서 큰 인기를 구가하며 판타지, 무협은 경쟁 매체에 의해 시장을 잠식당하고 있었다. 더하여 DVD, PMP와 스마트폰의 보급으로 비디오 대여 시장 또한 큰 위축을 겪었고, 비디오 대여점을 겸업하던 도서 대여점들의 이익은 큰 손실을 볼 수밖에 없었다. 도서 대여점이 몰락하면서 한국 장르 소설 시장은 최초의 상업적 위기를 겪게 되었으며, 인터넷을 통해 신인 작가를 발굴하고 군소 출판사가 저렴한 비용으로 책을 출판하여 대여점에 공급하여 평균적 수익을 거두던 기존의 배급 시스템은 완전히 무너지게 된다.
변화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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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께 드리는 말씀:
이 글은 제가 애정을 가진 장르소설, 특히 판타지 소설에 갖던 나름의 관심을 발전시켜, 한국 판타지 소설의 태동기부터 오늘날까지 발전사를 부족하나마 훑어본 글입니다. 그런 이유로 이 글에는 몇 가지 부족한 점이 존재합니다.
첫째는 제가 본격적으로 판타지 소설에 입문한 시기가 다소 늦다보니, 1세대 소설과 그 시대에 대한 이해가 다소 부족할 수 있습니다. 둘째는 판타지 소설 및 웹소설의 트렌드가 너무 광범위하고 빠르게 변화하여, 놓친 게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계보상 중요한 작품이나 사건이 누락되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셋째는 남성향과 여성향 문제인데, 제가 이 글에서 감히 ‘한국 판타지 소설’을 훑어본다고 하였으나, 사실 저는 여성향 소설, 특히 로맨스 판타지 등이 갖는 위상에 대해서는 거의 막연한 감만을 갖고 있습니다. 많은 부족함이 있는 글이겠으나 위 세 사항에 대해서는 특히 더 그러하리라 생각됩니다.
하지만 저는 또한 장르를 애정하고 여러 작품을 애독하는 한 독자로서, 비록 부족함이 있음에도 관련 논의가 사회적으로 더 활발하게 이루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 글을 쓴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따라서 건설적인 논의를 위한 코멘트와 비판은 언제든지 좋습니다. 다만, 부족한 점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비판하시더라도 너무 날을 세우시기보다는 다소 너그러운 시선으로 봐주신다면 정말 감사할 것 같습니다.
덧붙여 본 글에서는 장르소설, 판타지소설, 웹소설 등이 다소 혼용되고 있습니다. 이 글은 엄밀히 말하자면 한국 남성향 판타지 소설-웹소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문맥을 고려하여 넓은 맥락이 필요하다 싶을 때는 장르 소설을, 판타지라는 장르에 집중하고자 할 땐 판타지 소설을, 2010년대 웹연재환경 이후 등장한 소설을 언급할 땐 주로 웹소설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2010년대 이후에는 판타지로 포괄하긴 더이상 어려워진 웹소설 장르(대표적으로 직업물) 또한 다루고 있는데, 이는 이들 장르가 직간접적으로 남성향 판타지의 영향을 다대하게 받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모쪼록 부족한 글, 관대한 독해와 건설적 비판을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임명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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