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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르게 흘러가는 현대사회, 어떻게 삶의 여유를 지켜낼 것인가?

과거 비둘기호와 통일호, 무궁화호 등 이제는 기억에서 흐릿해져 가는 이름의 열차에 올라탈 때면, 많은 사람들이 묘한 설렘의 감정을 내보이곤 했었다. 느릿느릿 움직이는 기차에서 바라보는 창 밖의 풍경은 날씨와 상관없이 언제나 운치 있고, 아름다우며, 그 자체만으로 충분한 여유를 가져다주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빠른 속도로 내딛는 지금의 KTX 열차에서 바라보는 창 밖 풍경은 그저 스쳐 지나가는 잔상으로만 기억된다. 어쩌면 KTX의 등장은 낭만과 여유 대신에 편리성과 속도를 선택한 현대사회의 단면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지금은 ‘시간’이 금처럼 귀하고, ‘속도’가 곧 경쟁력인 시대로, 이러한 사회변화를 외면하기가 힘든 것이 사실이다. 이미 패스트푸드와 패스트패션 등 의식주 생활 전반에 걸쳐 ‘빨리빨리’를 원하는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산업들이 큰 성공을 거뒀으며,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바쁘고 정신없는 삶을 살아가는데 익숙해져 있는 모습이다.

교통 자동차 트래픽 미래 과거 시간 속도

슬로시티

그러다 보니 응당 누려야 할 ‘삶의 여유’는 하나의 이상이자, 인생의 목표가 되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삶의 여유를 얻기 위해서는 개인의 노력과 의지가 필요한 상황이 된 것이다. 실제 최근 들어 여유 있는 삶을 쟁취하기 위한 개인들의 노력이 조금씩 커져가는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가령 일과 일상생활을 완전하게 구분하려는 태도가 강해졌으며, 디지털기기와 분리된 삶을 살고자 ‘디지털 디톡스’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내 경우 의도치 않게 3일 동안 낯선 곳에서 스마트폰과 인터넷 없이 생활해본 경험이 있는데, 하루가 그렇게 길다는 것을 생전 처음 느꼈다. 도시 자체가 ‘느림’과 ‘여유’를 기치로 내세우는 곳도 존재한다. 여유로운 생활을 통해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자 하는 취지를 갖고 있고, 속도와 효율이 강조되는 빠른 사회와는 대비되는 개념의 공간으로 인정받은 도시를 뜻하는 ‘슬로시티(Slow City)’가 그것이다.

이름에서부터 자연 친화적이고, 조용하며, 여유로운 분위기가 연상되는 ‘슬로시티’는 지친 일상에서 벗어나 온전한 휴식을 취하고, 여유를 되찾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의미가 있다는 평가다. 엠브레인 트렌드모니터가 조사한 결과를 살펴보면, 대부분 슬로시티가 바쁜 현대인의 삶과는 대비되는 이미지라서 호감이 가며(70%), 일상을 벗어나고 싶은 현대인들에게 좋은 대안이 될 수 있다(76.1%)고 본다. 슬로시티에 가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될 것 같다는 의견도 10명 중 6명(59.8%)에 달했다.

물론 절반 가량(51.4%)이 국내 슬로시티들은 본래 취지를 잘 살리지 못한다고 생각을 하고, 슬로시티가 다른 여행지와 별 차이가 없는 것 같다고 느끼는 사람들(14년 33.9%→18년 46.6%)이 많아지는 등 비판적인 태도도 적지 않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슬로시티의 의미와 개념에 공감을 하고, 호감을 드러내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이 시사하는 바가 커 보인다. 바쁘게 흘러가는 일상에 지쳐 있는 현대인들에게 슬로시티가 휴식과 위로의 공간으로서 좋은 역할을 할 것이라는 기대감이 존재하는 것이다.

슬로시티 관련 전반적인 인식 평가

귀촌, 귀농, 귀어 

여유와 휴식을 쫓는 현대인의 시선은 농어촌 지역으로도 향하고 있다. ‘귀촌’과 ‘귀농’, ‘귀어’ 생활에 관심을 보이고, 구체적으로 계획하는 사람들이 결코 적지 않은 모습이다. 실제 수도권 거주자의 절반 이상(54.2%)이 귀촌, 귀농, 귀어 등 농어촌 지역에서의 삶에 어느 정도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응답했는데, 그 중에서도 ‘귀촌 생활’에 가장 많은 관심이 쏠리고 있었다. 도시인들이 농어촌 생활에 관심을 기울이는 배경에는 전원생활을 하고 싶고(45.4%, 중복응답), 공기 좋은 곳에서 살고 싶다(43.5%)는 바람이 크게 작용을 하고 있었다.

이와 더불어 바쁜 도시생활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40.2%)도 농어촌 지역에서의 생활을 고민하게 만드는 중요한 이유로, 그만큼 도시생활을 답답해 하고(24.9%), 도시생활에 회의감을 느끼는(20.8%) 수도권 거주자가 적지 않다는 것을 확인시켜준다. 복잡한 도시를 벗어나 전원생활을 통해 ‘삶의 여유’를 찾고 싶은 마음 때문에 귀촌과 귀농, 귀어 생활에 대한 고민을 하는 수도권 사람들이 많은 것이다.

귀촌, 귀농, 귀어 생활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

물론 낯선 여행지와 슬로시티 등 잠시 머무르는 장소에서도 여유로움을 느낄 수는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시적일 수밖에 없다. 농어촌 지역에서의 삶을 고민하는 배경에서 ‘삶의 여유’가 오래 지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엿볼 수 있다. 더욱이 서울 및 수도권 지역은 그 복잡함과 여유 없음이 지방 도시에 비해 한결 더 강한 편이다. 비싼 집값과 물가로 인해 더 높은 수준의 경제력이 필요한 부분도 도시에서의 삶에 부담감을 느끼게 만드는 요소이다.

하지만 농어촌 생활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고, 중앙정부 및 지방자치단체의 지원정책도 많아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농어촌 지역에서의 삶을 결심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10명 중 9명(91.2%)이 도시생활을 하다가 귀농과 귀촌, 귀어 생활을 하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라고 바라볼 정도로, 대부분 농어촌 지역에서의 삶이 녹록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가장 주목해볼 부분은 농어촌 생활이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적다는 사실이다. 4명 중 1명만이 도시보다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바라봤을 뿐이다. 이러한 인식은 수입원이 마땅치 않다는 생각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아무래도 안정적이고 충분한 소득을 기대할 수 없다 보니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생활이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농어촌 생활의 이미지와 현실적인 부분의 간극이 크다는 것을 보여주는 결과이기도 하다. 정신적, 신체적으로 여유 있는 삶을 바라는 마음에 농어촌 생활에 관심을 갖지만, 어느 정도 경제적 여유가 있어야만 가능하다는 생각에 포기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다.

중국 농촌

삶의 여유는 가능할까 

지금 우리는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만이 ‘삶의 여유’를 누릴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사람들은 느릿느릿하게 삶의 여유를 즐기는 반면 빈곤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천천히 일상을 돌이켜 볼 시간도 없이 빠듯하게 살아야 하는 아이러니한 세상이다. 그렇기에 정원이 딸린 집에서 즐기는 여유로운 귀촌 생활은 소수의 사람들에게나 가능하다는 씁쓸한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다만 삶의 속도를 늦추고자 하는 바람이 점점 더 강해지고 있고, 베이비부머 세대를 중심으로 고령인구가 급증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향후 농어촌 생활을 결심하는 사람들이 증가할 것이라는 예상은 충분히 합리적으로 보인다. 물론 그와 별개로 일상에서 삶의 여유를 찾기 위한 노력은 계속될 것이다.

낯선 곳으로 여행을 떠나고, 디지털기기와 분리된 시간을 갖으려 하고, 오프라인에서 취향에 따라 다양한 활동과 모임을 갖는 것도 결국은 지나치게 빠른 삶의 속도를 바로잡기 위한 본능적인 노력이라고 볼 수 있다. 너무나 빠르게 흘러가는 현대사회에서 어떻게 삶의 여유를 지켜낼 것인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우리나라에서 슬로시티로 지정된 11곳
우리나라에서 슬로시티로 지정된 11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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