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네 맘이 바뀌면, 언제라도 전화해. 이메일도 좋고. 행복할 수 있었는데 그 기회를 우리 모두가, 특히 네가 놓친 거야. 넌 이번 기회를 놓친 걸 후회하게 될 거야.” (허핑턴포스트코리아)
“이 아주 중요한 정상회담과 관련해 당신 마음이 바뀐다면 전화하거나 편지를 쓰는 것을 주저하지 말라. 세계는, 특히 북한은 항구적 평화와 번영, 부유함이라는 엄청난 기회를 잃었다. 이 상실된 기회는 역사에서 매우 슬픈 순간이다.” (한겨레)
“귀하께서 이 최고로 중요한 정상회담과 관련해 만약 마음을 바꾸신다면 지체없이 전화나 편지를 주기를 바랍니다. 세계는, 그리고 특히 북한은 영속적 평화와 훌륭한 번영과 부를 이룰 커다란 기회를 놓쳤습니다. 이런 놓쳐버린 기회는 진정 역사에서는 슬픈 순간입니다.” (노컷뉴스)
“만약 당신이 마음을 바꿔 정상회담을 개최하고 싶다면, 주저하지 말고 전화를 걸거나 서한을 보내주길 바랍니다. 전 세계는 그리고 특히 북한은 영구적인 평화와 번영을 누리기 위한 좋은 기회를 놓쳤습니다. 이번에 놓친 기회는 역사에 매우 슬픈 순간으로 남게 될 것입니다.” (조선일보)
– 이정환의 페이스북에서 재인용.
트럼프는 2018년 2월 24일 ‘공개 서한’ 형식으로 6월 12일로 예정된 북미 정상회담을 전격적으로 취소했습니다(이하 ‘트럼프 서한’ 혹은 ‘트럼프 편지’).
트럼프 서한을 소재로 한 뉴욕타임스 팟캐스트[footnote]NYT, The Daily: ‘Dear Mr. Chairman…'(2018. 5. 24.)[/footnote]에 따르면 트럼프 서한은 트럼프 자신이 직접 구술해서 쓴 편지라고 하는군요. 트럼프의 단순하고, 무식하며, 천박하기 짝이 없는 평소 말투와 제한된 어휘 능력을 고려하면, 가장 사실에 근접하는 번역은, 사실은 허핑턴포스트의 것이라고 봅니다. 다른 신문들의 번역은 오히려 ‘억지스런 의역’처럼 읽힙니다. 트럼프의 평소 말투나 이미지가 전혀 드러나지 않는.
한국 언론의 무지와 욕망
문제는 트럼프와 트럼프 행정부, 그 측근들의 행태에 관한 한국 언론의 무지입니다. 무지하면서도, 거기에 억지로 살을 붙이고 치장하고 과장하려는, 참을 수 없는 욕망입니다. 트럼프가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의 대통령이니까 거의 자동으로, 그가 무슨 말 한두 마디만 하면, ‘저 말이 언뜻 단순하지만 그 뒤에는 뭔가 치밀하고 깊은 뜻이 있을거야’라고 이리 가르고, 저리 쪼개며 분석합니다.
그래서 한 마디 툭 던진 말 한 마디를 가지고 논문을 쓰죠. 해설 기사가 나오고 사설이 나옵니다.
- 트럼프의 평소 언행
- 트럼프의 누적된 판단과 결정 습관
- 주변 인물의 정치적 지향
- 트럼프에게 영향력을 미치는 재력가나 로비 그룹
이런 기초적인 사항들을 공부를 했다면 저런 해설 기사나 칼럼, 사설이 나오지 않았을 거로 봅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죠. 트럼프가 자주 쓰는 말 중 하나가 “어떻게 될지 두고 보자”(“We’ll see what happens”)입니다. 트럼프는 이 표현을 습관적으로 자주 씁니다. 며칠 전, 북미회담이 잘 되겠느냐, 북한에서 갑자기 위협성 성명을 냈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 라고 기자들이 물었을 때도 트럼프는 저 말을 여러 번 쏟아냈습니다. “어떻게 될지 두고 보자”, “어떻게 될지 두고 보자” 그랬더니 한국 언론은 트럼프가 ‘말을 아꼈다’, ‘신중하게 반응했다’라고 쓰더군요. 심지어 한국일보는 ‘이례적’이라는 표현까지 썼습니다. ‘트럼프, 이례적으로 “지켜보자” 언급만’이랍니다.
장난하십니까? 트위터로 온갖 헛소리, 가짜뉴스, 헛소문을 맞춤법이나 문법조차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되는 대로 질러대는 트럼프의 평소 행태를 조금이라도 고려한다면, 과연 저런 식으로 기사를 쓸 수 있을까요?
“분명히 해두자. 트럼프는 끔찍한 협상가다. 상대가 북한이든, 혹은 무역을 둘러싼 중국이든, 혹은 국경장벽 문제의 멕시코든, 트럼프는 충동에 이끌리며, 준비도 하지 않고, 남의 말을 귀담아들을 능력도 없으며, 큰소리 뻥치며 자존감을 과시하는 잠깐의 쾌감에 굴복해 버린다.” (토니 슈위츠)
타당한 분석, ‘아무 생각 없다’
오히려 타당한 분석은, 트럼프가 ‘아무 생각이 없다’, 뭐가 어떻게 될지 본인은 전혀 무지하다 쪽일 겁니다. 이미 미국의 여러 언론(CNN, NBC,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등)은 트럼프가 남북문제에 관해 완전히 깜깜한 상태고, 더 큰 문제는 트럼프 주변에 남북문제 전문가가 사실상 전무하다는 점이라고 여러 번 지적해왔습니다. 트럼프의 귀와 입이 될 작자들은 ‘매파’라는 표현이 무색할 정도로 무력과 전쟁을 선호하고 부추기는 존 볼턴, 마이크 폼페이오, 스티븐 밀러 같은, 사실상 ‘사이코’들인데, 과연 트럼프가 북한에 관해 얼마나 공부를 할 수 있었을까요?
사실은, 북한 전문가가 있었다고 해도, 트럼프는 기본적으로 ‘공부’에 뜻이 없는 자입니다. 모든 게 ‘애드리브’인 자입니다. 영어에서 보통 아무런 계획이나 준비가 없는데 어떻게든 때워야 할 때, “나는 그냥 땡기는대로 할 거야”(“I’ll just wing it”)이라고 하죠. 트럼프는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땡기는대로(= 대충대충, 즉흥적으로)”(winging) 해온 작자입니다. 관심과 초점은 오직 한 가지밖에 없죠, 자기 자신. 자신이 어떻게 비칠 것인가, 자기가 얼마나 그럴듯한 스타로 중심에 설 것인가. 한국에 좋은 표현이 있더군요, ‘관종'(관심종자)라고.
트럼프는 또 귀가 엄청나게 얇기로 악명이 높습니다. 맨 마지막에 그의 귀에 대고 속삭인 참모 의견이 그의 입으로 나간다고 하죠. 회담 취소 바로 직전까지만 해도 아무 일 없을 것처럼 “무슨 일이 있을진 두고 보면 알 거야”(“We’ll see what happens”)를 뇌까리다가 그 직후에 외교적으로 도저히 용납할 수 없을 내용의 편지를 김정은에게 날렸죠.[footnote]뉴스에 보니 백악관에서 헬기로 가면서 기자들의 질문에 저 소리(두고 보면 알 거야)를 대여섯 번은 하더군요.[/footnote]
그 편지 내용은, 트럼프가 직접 구술했다고 합니다. 부사를 남발하는 글투를 봐도, 사용된 ‘어휘’의 수준을 봐도, 문법적으로 잘못된 대목이 여럿인 점을 봐도, 트럼프가 구술한 게 분명합니다. 그 한 페이지짜리 편지에서조차 트럼프는 오락가락입니다. 속마음이 읽히는 것 같죠. 참모(아마 볼턴이겠죠?)가 북미정상회담은 취소하는 게 낫다네… 일단은 그렇게 하는 게 좋을 것 같기는 해, 무엇으로 어떻게 ‘딜’을 할지 아무 생각도 없는 상황이니… 그래도 완전히 취소하지는 말고, 가능하면 만나서 악수하고, 평화 협정 하나 맺어서 노벨상 받아야지, 그래서 오바마한테 엿 먹으라고 한 마디 해주고…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쿨하고 냉정하게
한국 언론에서 또 한 가지 크게 잘못 짚고 있는 전제는 트럼프가 성공한 사업가이자 재산이 1조 원대인 억만장자라는 것입니다. 트럼프가 얼마나 자주 파산신청을 냈고, 얼마나 많은 사기를 쳤으며, 트럼프가 죽어라 세금신고서 공개를 거부하는 이유도 자신이 억만장자 수준에서 한참 멀다는 사실이 들통날까 봐 그런다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트럼프가 부자가 아니라는 얘기는 결코 아닙니다. 요는 그의 부 축적 과정이 한국 재벌의 악취나는 속내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어쩌면 더 악질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는 것이죠. 대통령이 되고 나서도 여전히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하는 부도덕한 행위들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죠.
그렇다고 해서, 트럼프의 말은 다 헛소리로 무시해야 한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하지만 그가 이전 대통령들과 어떤 점들에서 확연히 구별되는지, 그가 결정하고 발언하는 내용의 배경은 무엇인지, 조금만 더 비판적이고 냉철한 시각으로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령 5월 24일 자 이코노미스트 보도는 그런 모범적인 기사입니다. 트럼프가 마치 ‘협상의 달인’인양 허세를 부리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고, 이번 북미 회담 취소 건만 해도, 그런 결정을 발표하기 전에 한국과 다른 우방국들에 미리 언질을 주었어야 하는데 그런 과정 없이 깜짝쇼를 벌임으로써 외교 관계에 흠집을 냈다고 쿨하게 평가합니다.
지금도 기억합니다. 트럼프가 ‘김정은이 정상회담 하자고 했어? 그럼 하지 뭐’라고 덜컥 받아서 문재인 정부조차 깜짝 놀랐던 시점. 이후 놀라울 만큼 많은 이들이 ‘트럼프, 그렇게 안봤는데 알고보니 치밀한 인물 같다’는 둥, ‘오히려 오바마보다 낫다’는 둥, ‘힐러리가 대통령이 됐다면 지금쯤 한반도에 전쟁이 났을텐데 트럼프여서 다행’이라는 둥, 실로 믿기 어려운 ‘트럼프 예찬론’이 소셜미디어에 횡행했습니다. 그들에게 정색을 하고 묻고 싶은 적이 많았습니다. 도대체 무슨 근거로, 어떤 객관적 자료를 바탕으로 그럴 수 있느냐고.
흔히 우리는 심장이 뜨거운 민족이라고 합니다. 요즘 같은 정국, 특히 미국과 중국, 러시아의 틈바구니에서 국익을 챙기고 평화를 보장받기 위해서는, 뜨거운 심장(감정)만으로는 결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냉철한 논리와 이성이 필요한 거죠. 언론이 그런 역할을 해줘야 한다고 봅니다. 다른 무엇보다, 눈앞의 그럴듯해 보이는 결과만을 놓고 소급해서, 어쩌면 불순하고 심지어 위험할 수도 있는 동기와 의도까지 정당화하고 합리화하려는 유혹은 버려야 한다고 봅니다. 트럼프의 일거수일투족에 일희일비하지 않으려면, 흔들리지 않고 가려면, 꼭 그래야 한다고 봅니다.
[divide style=”2″]
[box type=”note”]
트럼프 환상 3부작
[/box]
첫 댓글
댓글이 닫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