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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 지엘론카가 쓴 [유럽연합의 종말]은 2014년에 나온 책이다. 하지만 4년 지난 지금도 설명력은 떨어지지 않는다. 지엘론카는 유럽연합의 구조적 문제를 논한 뒤 향후 전망과 해결책을 제시한다.

구조적 문제는 늘 뻔하다. 구성국 사이의 결속력과 신뢰가 없고,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창의성은 점점 메말라간다. 채권국은 채무국들이 구조개혁을 하는 척만 하고 돈을 탕진해 또 위기를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의심한다. 채무국들은 채권국에 주권이 흔들리는 것도 원치 않으며 사회적 재앙을 초래할 것이 뻔한 구조개혁이라는 목줄을 달기를 원치 않는다.

물론 범유럽적 해결책이 입안되었으면 좋았겠으나, 유럽연합은 그 정당성과 대표성이 너무 없다. 정확히 말하자면 유럽연합의 정당성은 오직 유럽의 번영을 이끄는 효율성을 담보할 때에만 나온다.즉, 대표성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EU 유럽연합

유럽연합의 돈은 몇몇 부유한 회원국이 부담하는 분담금에서 나온다. 유럽의회는 결정권이 많지 않으며, 어차피 그들도 일국적 맥락에서 선출되는 이들이다. 대신 유럽연합의 진짜 권력자들은 독일 헌법재판소나 유럽중앙은행의 관료들이다. 하지만 유럽연합 각국이 민주주의를 유지하는 전제 하에서라면 대표성이 없는 이들 기술관료들이 마구잡이로 통합을 밀어붙이면서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대표성이 없다보니 정책의 선택지는 제약되고, 그러다보니 유럽연합은 유로존 위기를 맞이해서 정당성의 유일한 근간이던 효율성도 실종되었다. 정당성과 대표성을 모두 결여한 유럽연합은 둔중하고 비효율적인 낭비의 온상으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시장, 국민국가, 유럽연합끼리 이상하게 물려버린, 그러나 어떻게든 굴러가는 현재의 시스템이 출현하게 되었다.

두 가지 해결책? 

1. 유럽합중국

이러다보니 유럽인들 사이에서 유럽연합의 신뢰성은 갈수록 추락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유럽연합의 위기가 나올 때마다 나오는 단골 해결책은 역시 ‘유럽합중국’이다. 하지만 지엘론카는 유럽합중국이 출현할 가능성도 낮으며 그것이 해결책이 될 수 있을지도 의심한다.

첫째, 실현가능성이다. 유럽연합 국가들이 공유하는 불신의 장벽을 넘는 건 그야마로 고양이 목에 방울달기다. 아마 유럽합중국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뗄 때면 그 계획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국가들이 집단적 반발의 목소리를 낼 것이다. 리더십이 극도로 약화된 상황에서 이런 어설픈 구제책을 냈다가는 고르바초프의 전철을 밟는 수가 있다. 즉, 살려보려고 했다가 오히려 죽여버리고 카오스를 불러올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둘째, 통합의 효용성이다. 유럽합중국이 제대로 기능만 한다면 모두에게 좋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루마니아와 라트비아, 이탈리아와 포르투갈, 독일과 프랑스를 하나로 묶고 단일한 정책을 추진하는 게 제대로 기능할 수 있을까? 유럽합중국으로 가는 길에는 먼저 유로존 국가들의 통합이 전제될 텐데 이 과정에서 원하지 않든 능력이 없든 간에 비유로존 국가들과의 불화를 해결할 수 있을까? 브뤼셀이 범유럽 정신의 기치 하에 충분한 공감과 대표성을 획득하는 일은 가능할까?

유럽합중국은 가능할까?
유럽합중국은 가능할까?

2. 분데스-리푸블릭 유로파 

유럽합중국 대신 몇몇 논자들은 ‘분데스-리푸블릭 유로파’를 이야기한다. 즉, 독일이 주도권을 지니는 사실상의 제4제국이다. 유로존 위기를 맞이하여 경제적, 정치적 리더십을 보여줄 수 있는 유럽 유일한 나라가 독일이라는 점은 너무나 명백해졌다.

그러나 지엘론카는 독일은 리더십을 발휘하고 싶지 않은 상태에서 그런 역할을 떠맡게 되었다고 지적한다. 독일인의 태도는 “문제는 타국에만 있고, 자국의 정책은 합리적이고 상식적이라는 선비질” 그 자체다. 그러다보니 리더십을 획득하기 위해 자기 것을 기꺼이 내줄 생각이 없다. 애초에 리더십을 맡을 의사가 없는 나라가 제국을 건설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EU 유럽연합

‘신(新)중세’의 도래  

그렇다면 유럽연합은 이대로 해체되는 게 답일까? 이조차 답이 될 수 없다는 건 브렉시트가 발생시킨 엄청난 혼란에서 잘 드러났다(참고로, 이 책은 브렉시트가 발생하기 전에 쓰인 책이다). 통합은 어쨌든 유럽 국민국가들에게 안정과 번영을 가져다준 기관차였다. 그리고 환경, 이주, 교역, 에너지 등 수많은 문제에 있어서 유럽연합의 존재는 러시아, 중국, 미국과 같은 대국에 맞서 대항할 수 있는 가장 큰 무기 중 하나였다.

유럽연합이 사라진다고 유럽이 갑자기 전쟁과 무질서의 시대로 돌아갈 일은 없겠지만, 통합의 기반 위에 쌓은 많은 것을 잃게 될 것이다. 그리고 누구도 유럽연합이라는 불안한 주춧돌을 제거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지 못한다는 점도 유럽연합의 붕괴를 가로막는다. ‘알 수 없는 미지의 것’을 폭발시키기보다 그냥 찝찝한 현상유지를 선택하고자 하는 것이다.

문제는 사회는 정지해있을 수 없어서 이런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이 물밑에서 새로운 변화를 만들어낸다는 점이다. 지엘론카는 그래서 유럽연합에 의해 자율적 정책역량이 제약되는 국가, 대표성의 결여로 국민국가에 가로막히는 유럽연합이 만들어내는 공백을 메꾸는 무언가가 등장할 것으로 전망한다. 이 행위자들은 법적 관할권, 정치적 국경을 초월한 기능적 연결망이다.

예컨대 유럽연합 중앙기구는 아니지만, 현장의 여러 문제에 관여하는 1차 집행기관들, 국경을 넘어서 경제권의 범위를 확보하는 거대도시들, 초국적 시민단체, 기업들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국가의 소멸이나 유럽연합의 붕괴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유럽연합 체제를 우회한 유럽통합의 심화를 뜻한다. 이 통합은 여전히 국가와 유럽연합과 상호작용하면서 진행될 것이다.

국가가 권력을 점차 초국적, 기능적 연결망과 공유한다면 유럽의 모습은 달라질 것이다. 다시 말해 유럽이 오랜 기간 쌓아오고 심화시켜온 베스트팔렌 체제의 역전, 즉 ‘신(新)중세’로 나아가는 걸 의미한다. 중세 시대는 국가 권력의 기반은 약했으나 국경을 넘어 활동하는 도시, 기사단, 교회, 길드가 서로서로 복잡하게 얽혀가며 권력을 공유했었다. NGO, 도시 및 지방정부, 다국적 기업, 유럽연합의 수많은 하위기관이 권력을 공유할 유럽의 모습도 그와 비슷해질지도 모른다고 저자는 전망한다.

EU 유럽연합

‘신중세’와 아그라리아 

유럽연합의 해체를 막을 해법으로 지엘론카는 실현가능성 없는 ‘유럽합중국’ 대신 ‘제3의 길'(신중세)을 제시한다. 하지만 지엘론카가 인정하는 것처럼  유럽이 현재 직면하고 있는 대표성의 위기를 해결하기보다 오히려 더 심화할 수도 있다. 발트 3국 시민단체나 밀라노 지방정부가 물론 브뤼셀의 유럽이사회보다는 더 직접적으로 시민에게 다가갈 수 있다. 그러나 본질에서 이 시민단체와 지방정부의 운영도 관료적이다.

그렇다면 신중세라는 말은 다른 의미로도 쓰일 수 있지 않을까? 마치 어네스트 겔너(Ernest Gellner)가 말했던 ‘아그라리아’(Agraria; 겔너가 구성한 소수의 지배층과 다수의 농민으로 구별된 농경 사회의 이념형) [footnote]겔너는 자신의 농경 사회 이념형을 ‘아그라리아’로 명명했다. 아그라리아는 농경 사회를 극도로 단순화·일반화한 것이기 때문에 현실에 없는 가상의 사회인 동시에 모든 농경 공동체를 대표한다. 아그라리아의 “지배층은 전체 인구에서 소수를 점하며, 인구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실질 농업 생산자, 즉 농민과 엄격히 분리되어 있다.”  – 이언 모리스, [가치관의 탄생] 중에서[/footnote]의 재현처럼 말이다. 요컨대 영어·프랑스어·독일어를 구사하는, 프랑크푸르트, 파리, 밀라노 기반의 범유럽 엘리트와 지역 사회에 더 깊이 뿌리박힌 나머지의 분화가 사실상 고착될 가능성이 있다. 결국, 유럽 극우세력의 발호도 이 분리를 깨버리고 다시 ‘좋았던 옛날’, ‘포스트워’의 세계로 돌아가자는 것이기도 하고.

이언 모리스, [가치관의 탄생] 중에서
이언 모리스, [가치관의 탄생] 중에서
이동성이 제약되는 지역민과 이동성이 넘치는 세계인 사이의 불화, 소도시와 세계도시의 분리, 초국적 엘리트의 출현과 함께 가는 초국적 포퓰리즘 운동….. 동아시아 국가들은 그래도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서로를 믿지 못하는 바람에 국제기구에 권력을 이양하지도 않았고, 내부의 소수자도 적고, 세계화에 노출된 것도 느리고 더 폐쇄적이라서 이런 위기에서 훨씬 자유롭다. 하지만 유럽의 ‘신중세’주의가 세계적인 ‘유행’인 것은 부정할 수 없을 듯하다. 나부터도 포퓰리즘 선동에 이제 크게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유럽에서 진행 중인 변화에 관심을 가져야할 이유는 여전히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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