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셜코리아 칼럼] 경제위기 유럽은 어떻게 미래를 준비하고 있을까요. 유럽위원회 ‘EU 경쟁력의 미래’ 보고서의 의미와 시사점을 분석합니다. 이 글의 필자는 김계환(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입니다. (⌚8분)
전 세계의 관심이 미 대선 결과와 그 영향에 쏠려있는 사이 유럽에서도 조용하지만 중요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연임에 성공한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이 지난 12월 1일(이하 현지 시각) 제2기 집행위원회 업무를 개시했다. 초미의 관심사인 트럼프 2기뿐만 아니라 유럽연합의 새로운 경제정책 방향에도 우리가 관심을 기울여야 할 이유가 있다.
드라기 보고서, ‘EU 경쟁력의 미래’
폰데어라이엔은 취임 연설에서 EU의 침체한 경제를 되살리고, 경쟁력을 강화하며, 투자를 활성화하고, 미국·중국과의 혁신 격차를 축소하겠다는 정책 방향을 발표했다. 여기서 밝힌 정책 우선순위는 ‘EU 경쟁력의 미래’라는 제목의 마리오 드라기 전 유럽중앙은행(ECB) 총재가 작성한 EU 경쟁력 보고서 제안 내용을 대부분 반영하고 있다.
드라기 보고서는 EU 집행위원회가 경제학자 마리오 드라기에게 요청해 나온 것이다. 1년여의 작업 과정을 거쳐 지난 9월 9일 공개됐다. 대런 아세모글루, 올리비에 장 블랑샤르 등 유수의 경제학자들이 자문으로 참여했고, 유럽 싱크탱크, IMF를 비롯한 국제경제기구, 주요 기업들이 직·간접 참여했다는 점에서 집단지성의 결과물이라는 의미가 있다.
또한 보고서라는 이름을 갖고 있지만 유럽연합 집행위의 향후 5년 정책 로드맵이다. 집행위와 긴밀한 소통을 통해 준비되었을 뿐만 아니라, 집행위가 장기적인 청사진을 만들 경우 보고서 형식을 취한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총 170여 개가 넘는 정책 제안 내용은 실행 가능성을 고려한 구체적인 정책과 조치들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의미는 유럽 경제 위기의 진단과 처방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나아가 유럽적 맥락에만 유효한 게 아니라 우리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드라기 보고서는 중요한 함의를 가지고 있다. 보고서의 내용을 유럽 경제위기의 진단과 처방을 중심으로 살펴보고, 보고서가 주는 함의를 새겨보고자 한다.
3대 블록 중 가장 취약한 EU의 신산업 전략
보고서는 총 400여 쪽의 방대한 분량이다. 총론의 성격을 갖는 A와 10대 산업 부문 및 수평적 정책 분야별 심층 분석과 제언을 담은 B, 두 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급변하는 세계에서 유럽연합의 미래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긴박한 상황 인식이 보고서 전체에 깔려있다. 2020년 팬데믹, 2022년의 러-우 전쟁이라는 유럽 대륙 내 전쟁과 여기서 드러나는 유럽의 취약성 등 유럽이 실존적 위협에 직면해 있다는 인식이다.
특히 미, 중 등 글로벌 블록과의 경쟁이 본격화하는 상황에서 높은 무역의존도, 높은 에너지 가격, 신기술에서 경쟁국과 격차 확대, 방위산업의 취약성 등으로 볼 때 세계 3대 블록 중 유럽은 가장 취약하고, 가장 대외 의존적이라고 본다.
본격적인 진단과 제언은 유럽 경쟁력의 미래를 위한 세 가지 핵심 분야와 투자 파이낸싱 및 산업 전략의 거버넌스 등 수평적 정책 분야에 대한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세 가지 핵심 분야는 미·중 대비 혁신 격차의 축소, 탈탄소화와 경쟁력의 통합, 대외적 안보 증진과 의존 축소이다.
1. 첨단 기술에서 미, 중 대비 혁신 격차 축소
1990년대 이후 유럽과 미국의 생산성 격차가 벌어지는 것을 심각한 문제로 보고, 그 원인이 혁신 격차에 있다고 본다. EU 기업이 미국 기업에 비해 연구개발(R&D) 지출이 적은 이유가 정체되어 있는 산업구조에 있다고 본다. 즉, R&D 비중이 높은 신기술 분야 중심으로 산업구조가 변화하지 않고 과거의 산업구조에 고착화된 ‘중간기술 함정’에 빠져있다는 것이다.
산업구조 전환의 실패는 신기술 분야의 기업이 성장하지 못하게 하는 ‘혁신 시스템’의 미작동에 근본 원인이 있다. 야심 있는 기업가는 많지만, 이것을 산업적, 상업적 성공으로 전환하지 못하고 스케일업을 위해 미국으로 떠나는 현상이 문제라는 것이다. 이것은 다시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는 데 필요한 거대 통합 제품 시장, 자본시장을 갖춰야 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혁신 격차를 줄이기 위해서 유럽 혁신 생태계 전반을 어떻게 개혁할 것인가? 대학, 연구소가 아이디어를 쉽게 산업화할 수 있도록 하고, 기술 스타트업의 스케일업을 촉진하기 위해 규제 개혁을 추진하며, EU 차원의 법적 지위를 갖는 ‘유럽혁신기업(Innovative European Company)’을 도입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또한 공공 혁신 투자의 근본적 재검토를 통해 파괴적 혁신 중심으로 소수의 우선순위 부문에 집중해야 한다고 제언한다.
보고서는 또 혁신 생태계 개혁의 성공을 위해서는 유럽 자본시장 통합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제안한다. 혁신 사이클 전반에 걸친 개혁의 성공은 두 가지 조건에 의존하는 데, 하나는 유럽 차원에서 통합된 제품 시장, 다른 하나는 역시 유럽 차원에서 통합된 자본시장이기 때문이다. 시장 통합을 진전시킴으로써 혁신 생태계 전반에 규모의 경제가 작동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보고서는 신기술을 산업 부문의 혁신 동력으로 만들기 위해 AI 기술에 대한 산업계, 스타트업의 접근성을 높여야 하며, 특히 고성능 컴퓨터 네트워크에 대한 산업계, 스타트업의 접근성 개선을 주문한다. 마지막으로 보고서는 포용성 어젠다를 제시한다. 기술에 대한 투자와 사람에 대한 투자가 함께한다고 역설한다.
2. 탈탄소화와 경쟁력의 통합 계획
이 정책 분야에서 드러나는 것은 유럽의 기후 정책을 과거와 같이 정책 간 조정 없이 추진할 경우 경쟁력 상실로 이어지고, 결국 역풍을 맞아 거부될 수 있다는 문제의식이다. 따라서 탈탄소화를 성장의 원천, 경쟁력의 원천으로 만들기 위한 최우선 과제는 에너지 가격의 하락이다. 탈탄소화 정책의 혜택이 에너지 가격의 전반적 하락으로 빨리 이어지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보고서는 에너지 시장의 개혁과 함께 청정에너지 정책의 기술 중립성을 원칙으로 재생 가능 에너지, 원자력, 수소, 바이오에너지, CCUS(탄소 포집, 저장, 사용)를 모두 포함하는 접근법을 제언하고 있다. 또 그리드 투자 확대와 가속을 청정에너지 확산의 열쇠로 본다.
탈탄소 산업의 발전을 위한 분야별 맞춤형 접근도 제안한다. 특히 중국과의 경쟁에 대한 대응이 관건이다. 기후 목표 달성을 위해 중국에 의존할 것인가, 유럽 산업과 좋은 일자리를 지킬 것인가 선택의 기로에 있다는 것이다.
탈탄소 산업에 대한 정책은 산업 부문, 기술별로 3가지 그룹으로 나눠 차별화된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유럽의 상대적 경쟁력, 전략적 중요도, 미래 경쟁력과 성장 잠재력 등을 기준으로 기술과 산업을 구분하여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첫째, 태양광 패널 등 이미 중국의 경쟁력이 확고한 경우 중국 기업이 유럽에 투자하도록 유도한다. 둘째, 배터리 등 전략적인 이유로 유럽 토착 기술의 육성이 필요한 분야도 있다. 셋째, 유럽이 기술력이 있고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고 판단하는 부문은 유치 산업으로 보고 육성 정책을 편다.
3. 대외 안보 증진, 대외 의존 축소
유럽은 디지털, 그린 전환이라는 이중의 전환과 성장모델의 전환에 필요한 광물자원, 핵심 기술은 물론 군수산업 역량에서도 미, 중 등 경쟁 블록에 비해 가장 취약하다고 보고, 이러한 대외적 취약성을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보고서는 강조한다.
구체적으로는 핵심 광물 및 기술의 안전한 공급망을 확보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중요한 부문의 역내 생산을 확대해야 하고 방위, 우주 부문의 산업 역량을 키워야 한다. 유럽 내 첨단 반도체 역량 확대도 추진한다. EU 차원의 대외 경제정책을 도입하여, 자원 부국과 무역협정 및 직접투자 조정, 자원 비축 확대, 핵심기술에서 역외 국가와 산업 파트너십 확대 등을 추진해야 한다. 방위산업, 우주산업이 스케일업할 수 있도록 수요를 통합하고 방산 조달에서 협력을 강화하며, 공동 R&D 지출도 확대해야 한다.
보고서는 위 세 가지 분야에 대한 제안에 이어 투자 파이낸싱과 산업 전략 거버넌스 체계의 개혁이라는 수평적 산업정책의 제언으로 보완하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매년 7500억~8000억 유로의 추가 투자가 필요한데, 1960~70년대의 높은 투자율(총투자액/GDP 비율)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할 정도로 큰 증가이다. 문제는 여기에 필요한 투자를 어떻게 파이낸싱 할 것인가, 민간과 공공부문은 어떻게 역할을 분담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드라기는 민간 자본의 투자를 유도하기 위해 자본시장 통합을 진전시켜야 한다고 제안한다. 돌파형 연구, 그리드, 방위 조달 등 핵심 프로젝트에는 공공-민간 공동투자가 필요하다. 이 경우 유럽 차원의 공동 채권 발행으로 자금을 조달해야 한다.
앞서 제시한 분야별 정책은 모두 개별 회원국 수준을 넘어 유럽연합 전체 수준에서 통합하고 조정한 산업 전략을 요구한다. 회원국 수준에서 관련 정책이 없는 게 아니지만 EU 차원에서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또 지금까지 산업 혁신, 탈탄소화, 공급망 안보를 별도의 어젠다로 추진했다면, 이번 집행위는 이것을 하나로 묶는 포괄적 성장전략으로 추진한다.
이 통합은 당연하게도 정책 추진의 거버넌스 개편이 필요하지만, 중요한 거버넌스 개편은 조약을 변경해야 하므로 실행 가능성이 떨어져 조약 변경이 필요하지 않은 수준의 거버넌스 개혁, 정책 간 조정의 강화를 제안하고 있다.
유럽판 ‘공급 측 경제학’···가능할까?
드라기 보고서의 성격을 한마디로 규정하면 새로운 산업 전략이다. 수요 촉진 정책으로는 정체에 빠진 유럽 경제의 성장을 회복할 수 없다는 진단에서 나온 유럽판 ‘공급자 측 경제학’으로 볼 수 있다.
2000년 유럽의 혁신 전략인 리스본 전략은 유럽을 ‘세계에서 가장 경쟁력 있고, 역동적인 지식기반 경제’로 만들겠다는 비전을 제시했다. 당시 개혁 어젠다는 노동시장 유연화, 규제 완화, 자유화를 축으로 하는 신자유주의 개혁이었다. 반면 드라기 보고서는 국가 개입을 동반하는 산업정책 어젠다이며, 혁신 목표와 충돌할 경우 반독점 규제의 완화도 제안하고 있다.
따라서 거시적 성장모델에서 섹터별 경쟁력에 초점을 맞춘 산업 전략으로 이행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0대 섹터 혁신을 성장의 동력으로, 탈탄소화와 경제적·군사적 회복력(Resilience)을 성장의 기회로 삼아 세 가지 정책분야를 산업 수준에서 구체화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글로벌 블록 간 경쟁은 거시경제적 차원의 이슈라기보다는 기술 혁신이 특정 섹터를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는 현실을 반영한다. 이러한 현상은 다수의 범용 기반 기술이 동시에 발전하여 산업혁명이 일어나는 시기에 일반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다.
또 한 가지 이슈는 정책의 실행 가능성이다. 보고서는 미국과 같은 연방국도 중국과 같은 단일국가도 아닌 주권 국가 연합이라는 제약 속에서, 더 깊은 통합으로 일 보 전진인가 해체의 가속화인가 하는 갈림길에서 유럽이 제안한 성장전략으로 이해된다.
미, 중 등 글로벌 블록과의 경쟁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어느 때보다 통합이 요구되는 시점에 EU는 통합의 동력이 떨어질 뿐만 아니라 이해관계의 차이로 원심력이 강화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더욱이 제2기 트럼프 정부의 대유럽, 대러시아 정책이 유럽연합 회원국 간 원심력을 더 키울 가능성도 높다. 통합을 주도해 온 독일, 프랑스가 내부 정치 위기로 주도력을 발휘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이렇게 유럽연합을 둘러싼 환경이 구심력보다는 원심력을 확대하는 상황에서 더 깊은 통합을 요구하는 야심 찬 산업 전략을 실행에 옮길 수 있을까 의문이 제기된다. 하지만 과거에도 위기를 통해 더 깊은 통합으로 진전한 경험이 있듯이 이번의 위기도 통합으로 일 보 전진하는 이정표가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