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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투(#MeToo)는 혁명이다.

이것은 비유가 아니라 현실이다. 미투는 본질에서 ‘어제’와 같은 인식, 삶의 태도를 더는 유지할 수 없도록 ‘강제’한다는 점에서 혁명이고, 미투 운동의 역사적 정당성과 거기에 수반되는 사실 행위로서의 폭력성을 고려하면 더 혁명적이다. 미투 폭로자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자신에게 가해진 부당한 억압과 고통, 강제적인 육체적 수탈을 폭로한다.

사회적 단두대

그 폭로 행위는 대개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의 인격(사회적 명예)을 사실상 공개 처형하는 즉각적인 효과를 가져온다. 그 효과는 대체로 확정적이고, 비가역적이다. 즉, 되돌릴 수 없거나 되돌리기 매우 어렵다. 미투 운동은 가해자의 법적 처벌을 현실적 목표로 삼기보다는 가해자를 폭로하고, 그에게 즉각적인 사회적 응징을 가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이것은 그 정당성이나 방법론에 관한 논쟁 가능성 이전에 ‘대체로 사실’이다.

이런 즉각적인 ‘사회적 단두대’ 효과를 고려하면, 미투 행위를 대중에게 매개하는 언론 보도의 중요성, 특히 보도의 신중함에 관한 요청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미투 보도는 폭로자(#MeToo의 ‘Me’)가 확보한 증거와 가해행위의 양태(가해행위의 횟수, 지속된 기간과 상습성 등), 폭로자와 가해자의 관계 및 폭로자의 현존성(실명성) 등에 따라 다음 다섯 가지로 유형화할 수 있고, 각 유형별로 언론이 미투를 보도하기 위해선 각기 다른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Raul Lieberwirth, "shouting in the storm", CC BY-NC-ND https://flic.kr/p/7Gn1FX
Raul Lieberwirth, “shouting in the storm”, CC BY-NC-ND

미투(보도)의 다섯 가지 유형 

A 유형. 압도적 진실형

  • 예: 안태근 사건

미투 주장자가 성폭력 행위와 그와 관련한 불법 행위에 관한 명확한 증거 혹은 증인을 제시할 수 있는 경우: 언론은 주장자의 증거와 증언을 독자에게 이해하기 쉽게 정리해서 전달하는 역할이면 충분하다. 이를 보도함에 아무런 제약이 없다.

B 유형. 상습적 + 권력형

  • 예: 고은, 이윤택, 조민기, 조재현, 안희정, 김기덕 사건

미투 주장자의 주장을 간접적으로 뒷받침할 동일 가해자의 유사한 사건 피해자와 증인이 존재하는 경우: 비록 주장자가 물적 증거나 증인을 명확하게 제시하지는 못하더라도, 해당 가해자가 ‘일’과 관련한 권력의 상하 관계 속에서 상습적으로 그 위계에 의한 폭력(희롱, 추행, 폭행) 행위를 지속한 경우다.

이 경우에 피해자는 폭로자 한 명에 그치지 않고, 복수로 존재하며, 이를 직간접으로 증명할 증인도 상당수 존재하기 마련이다. 이런 복수의 취재원을 확보할 수 있다면, 해당 폭로를 보도함에 별다른 제약은 없다고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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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유형은 폭로자의 현존성(실명성)을 필연적으로 수반하지만, B 유형은 폭로자가 자신을 드러낼 수도 있고, 익명성을 유지할 수도 있다(예: 피디수첩의 ‘김기덕’ 사례). B 유형에서 폭로자의 익명성은 보도에 장애 요소는 아니지만, 그 폭로의 진실성에 관해서는 차이를 가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이 문제는 아래에서 다시 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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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유형. 일회적 + 비권력형 + 간접증거 + 실명 폭로 (보도는 ‘엄격한 기준’

피해가 일회적이고, 권력관계 바깥에서 발생하여 교차 검증이 어렵지만, 간접증거가 있으며 폭로자가 자신을 드러내는 경우: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도 ‘일’과 관련한 권력의 위계에 속하지 않으며, 현재 남은 직접 물증이나 증인은 없지만, 해당 사건 직후 기록한 일기나 친구 혹은 지인(상담사)와의 대화 기록 등 간접적인 증거들이 존재하는 경우다.

이 경우에는 언론은 사건을 둘러싼 좀 더 다양한 이해당사자와 관계자를 취재해야 한다. 그렇게 확정된 사실과 신뢰할 수 있는 진술, 기억에만 의존한 의견 등을 서로 구별해 신중하게 사안의 실체적 진실에 접근해야 한다. ‘피해자의 목소리’를 충실하게 전하더라도, 그 피해자 진술이 기자의 객관적인 전달과 뒤섞여선 안 된다.

D 유형. 일회적 + 비권력형 + 간접증거 + 익명 폭로 (보도는 ‘매우 엄격한 기준’

  • 예: 프레시안의 ‘정봉주’ 후속 기사

C 유형과 대체로 같지만, 폭로자가 익명인 경우: 이 경우에 언론은 폭로의 진실성을 ‘매우 엄격한 기준’으로 사전 취재해야 한다. 그리고 폭로의 진실성에 관해 확신을 가지기 전까지는 이를 보도해선 안 된다.

E 유형. 일회적 + 비권력형 + 피해 주장자 진술만 존재 + 익명 폭로 (보도는 ‘불가’

  • 예: 뉴스타파의 ‘민병두’ 보도, 프레시안의 ‘정봉주’ 첫 기사

피해가 일회적이고, 폭로자의 소회가 있기는 하지만, 기록 부재 등으로 인해 현재로선 실체적 진실에 관한 검증이 불가능하거나 매우 어렵고, 폭로자가 익명인 경우다. 이 상태로는 결코 보도해선 안 된다.

미디어학자 김낙호(필명 ‘캡콜드’)는 이 다섯 가지 유형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워싱턴포스트가 보도한 와인스타인 성범죄 파문이  D·E 유형을 집요한 취재로 고집스럽게 C 유형으로, 취재 확대를 통해 결국은 B 유형으로까지 올려놓은 사례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언론이  D·E 유형을 대중(독자)에게 ‘던지고’ 분노를 유발하여 도취하는 것은 소위 ‘판춘문예’[footnote]판춘문예 = (네이트) 판 + (신)춘문예. 거짓으로 꾸며 올린 온라인 게시물을 뜻한다. [/footnote]나 ‘트잉여’[footnote]트잉여: 트위터만 하는 잉여라는 뜻.[/footnote]의 영역일 따름이다. 언론이라면 자신의 힘으로 B·C 유형으로 보도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그때까지 거듭 신중할 필요가 있다.”

2017년 타임지가 뽑은 올해의 인물들
2017년 타임지가 뽑은 올해의 인물, “침묵을 깨뜨리는 자들”

평화시 원칙 vs. 혁명시 특칙

물론 언론은 형사재판에서 기소한 혐의를 입증해야 하는 검사가 아니다. 그럼에도 거듭 강조하거니와, 미투는 가해자로 폭로되는 사람의 인격을 사실상 공개 처형하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진행된다. 우리가 이러한 과격한 방식에 적극 찬동하는 이유는 그 역사적 정당성이 압도적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언론은 미투의 단순 전달자가 아니라 신중한 매개(조율)자가 되어야 한다.

여성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육체를 강탈당했고, 침묵을 강요당했다. 게다가 가해자 중심주의의 사법 시스템은 여성에게 ‘합리적 여성’ 대신 ‘합리적 이성적 인간’을 기준으로 한 과도한 입증책임을 요구했고, 언론은 ‘2차 피해’나 ‘2차 가해’를 부추기는 선정주의적 접근이나 가식적인 기계적 중립의 태도로 일관했다(참고: 권김현영의 글)

하지만 미투 운동의 압도적 정당성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만에 하나 가해자가 억울할 수 있다는 가정을 완전히 생략해선 안 된다. 가해자로 폭로된 사람은 그 단 하나의 폭로행위로 거의 지우기 힘든 주홍글씨가 새겨진다. 그리고 거듭 강조하지만, 그 피해는 대체로 확정적이며, 향후 재판 등의 공식 절차를 통해 그의 무죄성이 밝혀지더라도 복구하기 어렵다.

폭로성 언론 보도 대부분이 그 자체로 즉각적인 사회적 응징 효과를 가져오긴 한다. 하지만 미투 운동은 가해자의 ‘죄인성’을 좀 더 확정적으로 신뢰하는 집단적 분위기 속에서 진행된다. 여기에 작동하는 심리적 작동원리는 죄형법정주의나 무죄추정의 원칙과 같은 ‘평화시 원칙’이 아니라, 시대정신, 그 압도적 정의감(정)에 이끌려 한 인간의 죄인성을 좀 더 쉽게 단정하는 ‘혁명시 특칙’이다. 그것은 파괴적이고, 그래서 창건적이며, 때때로 위험하지만, 역사의 긴 흐름으로 보건대 대체로 정당하다. 하지만 혁명이 정당하더라도 여기에는 ‘전투의 사상자들’이 생겨나기 마련이다.

본질과 방법론: 연대와 드러냄 

한편, 미투가 사회 운동으로서 실체적인 ‘힘’를 얻게 된 사실적이고, 실체적인 상호작용을 관찰할 필요가 있다. 미투는 폭로자가 그 모든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나'(Me)를 드러냄으로써, ‘또 다른 나'(MeToo)를 불러온 운동이다. 미투 운동의 본질이 ‘연대’(네 잘못이 아니야, 여기 나도 있어)라면, 그 구체적인 방법론은 ‘드러냄’이다. 한국 미투 운동의 실질적인 출발점으로 역사에 기록될 서지현 검사는 JTBC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YouTube 동영상

“제가 이렇게 인터뷰를 하는 것은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주위에서 “피해자가 직접 나가서 이야기를 해야만 너의 진실성에 무게를 줄 수 있다”라고 이야기를 해서요. 용기를 내서 이렇게 나오게 되었고요.

그리고 사실은 제가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나왔습니다.

사실은 제가 범죄 피해를 입었고, 성폭력의 피해를 입었음에도 거의 8년이라는 시간 동안 ‘내가 무슨 잘못을 했기 때문에 이런 일을 당한 것은 아닌가’, ‘굉장히 내가 불명예스러운 일을 당했구나’라는 자책감이 주는 괴로움이 컸습니다. 그래서 이 자리에 나와서 범죄 피해자분들께 그리고 성폭력 피해자분들께 ‘결코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라는 것을 얘기해주고 싶어서 나왔습니다. 제가 그것을 깨닫는데 8년이 걸렸습니다.” (서지현 검사, JTBC 뉴스룸 인터뷰 중에서) 

폭로자가 구체적인 인간의 모습으로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 자신의 언어로 자신에게 가해진 부당한 폭력과 억압을 이야기하는 모습은 감동적이다. 그 모습(‘폭로자의 현존성’)은 나에게 ‘저 표정, 저 눈동자가 거짓이기는 정말 어렵겠구나’ 하는 자연스러운 공감을 이끌어낸다. 이것은 내가 서지현 검사에게, 무엇보다 김지은 비서에게 느낀 사실적 감정이다(이것은 무슨 분석이나 이성적 판단은 아니다. 이 부분은 후술). 이것은 그런 의미에서 단순히 그 법적 이름을 드러내는 실명성과는 구별된다.

익명 미투의 자유와 언론 보도의 한계 

다만 “피해자가 직접 나가서 이야기를 해야만 너의 진실성에 무게를 줄 수 있다”는 서지현 검사의 말이 넉넉하게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이렇게 직접 피해자가 자신을 드러내야만 미투 운동으로서 의미가 있고, 익명 폭로는 전혀 가치가 없다거나 익명 폭로는 무책임하다는 이분법적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 왜냐하면 여전히 많은 여성이 자신을 드러내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억압 속에 갇혀 있고, 그것은 여성 잘못이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미투 운동은 궁극적으로 그들까지 끌어 안아야 한다.

이 문제와 관련해 생각해봐야 할 것이 ‘사실적시 명예훼손’‘임시조치’의 문제다. 오픈넷은 언론의 관심을 끌 수 없는 대다수 ‘평범한’ 피해자들, 그러니 우리와 같은 피해자에게는 특히 ‘사실적시 명예훼손'(형법)과 ‘임시조치'(정보통신망법)이라는 이중의 제도적 장애가 도사리고 있다고 지적한다.

“(…….) 언론의 주목을 끌 수 없는, 사회의 크고 작은 곳곳에 이와 유사한 많은 사건들과 피해자들이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진실한 사실을 말해도 명예훼손죄로 처벌받을 수 있는 법제와 임시조치 제도로 인하여, 우리 사회에서 성폭력 문제를 비롯한 모든 사회적 약자들의 내부 고발은 크게 위축되거나 방해받을 수밖에 없으며, 이를 통한 사회의 진보적 변화도 기대할 수 없다.”

– 오픈넷, “우리나라에서 미투운동이 어려운 이유” (2018년 2월 5일) 중에서

한국적 상황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폭로 행위에 수반되는 폭력성과 그 폭력성에 의해 즉각적으로 박탈되는 가해자의 법익 간 등가적 가치 교환(‘무기 평등’)을 고려했을 때 ‘피해자의 현존성'(“피해자가 직접 나가서 이야기하는 것”)은 미투 폭로자가 자신의 진실성을 대중에게 좀 더 강하게 설득하기 위해서는 진지하게 고민해야  하는 (가혹한) ‘선택 조건’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표현의 자유’ 영역에서 ‘익명성의 가치’를 원론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이론적으로는 정당하지만, 미투 운동이라는 특정 시공간에서 벌어지는 역사적 사건의 맥락 속에서 그것이 대다수 뉴스 수용자에게 어떻게 매개되고, 어떻게 설득력을 가지는지를 이해함에 있어선 큰 설득력이 없다.

이렇게 미투 운동에서 폭로자의 ‘현존성'(혹은 실명성)은 미투 운동이 오늘날 중대한 사회적 변혁 운동으로서의 위상을 가지는 데 아주 큰 역할을 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다만, 이것은 ‘미투 담론은 어떻게 힘이 세지는가’에 관한 관찰일 뿐, 이 관찰의 결과가 곧바로 익명 폭로가 폄하되고, 비난받아야 하는 근거로 제시되어선 안 된다.

'비식별 조치'는 쉽게 말해 '익명화'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른바 ‘익명 미투’를 언론이 (적극적으로) 보도하는 건 또 다른 문제다.

익명 미투도 얼마든지 허용해야 하지만, 그것을 (협의의) 언론이 보도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왜냐하면, 익명의 네티즌이 게시판에서 민병두 의원의 10년 전 노래방 ‘강제 키스’를 폭로하는 것과 뉴스타파가 이를 보도하는 것은 그 무게감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이것은 부연할 필요조차 없는 사실이다. 따라서 ‘익명 미투’의 언론 보도는,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아주 엄격한 기준에서, 그 조건을 충족할 때만 허용해야 한다.

반면, 어떤 폭로자가 블로그에서 혹은 커뮤니티 게시판에서 SNS에서 익명으로 자신의 성폭력 가해자를 폭로하는 것은 당연히 허용되고, 누구도 그 행위 자체를 금지할 수는 없다. 다만, 그렇게 할 때 그 익명 폭로의 사회적 영향력은 자연스럽게 축소하고, 지목된 가해자가 받은(을) 피해의 비가역성도 상대적으로 낮아져, 지목된 가해자가 오히려 억울한 피해자라면, 그 피해의 복구 가능성도 커진다.

증후와 발병: 프레시안과 뉴스타파

하지만 언론이 ‘익명 미투’를 남발하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그리고 그 차원에서 [프레시안]의 정봉주 폭로가 ‘증후’였다면, [뉴스타파]의 민병두 보도는 ‘발병이다. 이것은 폭로한 내용이 ‘결과적으로’ 진실한가 진실하지 않은가와는 상관 없이 그 보도의 품질 자체가 문제라는 뜻이다.

정봉주의 성추행을 폭로한 [프레시안] 첫 기사는 객관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기초 사실관계에 오류가 있고(날짜와 성추행 행위), 기사 본문 문장은 기자의 주관적이고, 감정적인 표현과 피해자의 언어가 뒤섞여 있다. 이런 첫 기사에 이어지는 후속 기사들은 마치 정봉주와의 ‘진실 게임 공방’ 같은 관극틀을 독자에게 부여한다.

프레시안의 정봉주 폭로 기사. 독자들께선 직접 일독하길 권한다. 길지 않은 기사다.
프레시안의 정봉주 폭로 기사. 여러 후속 기사들이 이어지지만, 가장 중요한 첫 기사.
  • 6일에 인터뷰해서 7일 오전 9시에 발행? 그 하루도 안 되는 시간 동안 필요한 기초 사실관계 확인은 모두 마쳤을까. 정봉주 출마 기자회견이 7일 11시라서? 일단 발행하자? 그런 건가?
  • 가장 중요한 간접증거인 ‘이메일’의 존재를 9일 오후 2시에야 후속 기사로 공개한 이유는 뭘까. 일부러 첫 기사에선 공개하지 않은 걸까?
  • ‘A 씨의 이메일’은 첫 기사 발행 전에 필수적으로 확인했어야 마땅한 ‘기초 사실’인데, 이메일 속 ‘크리스마스 이브'(후속 기사)와 첫 기사의 ’23일’이라는 차이는 왜 생긴 걸까. 기사 작성자인 서어리 기자와 프레시안 편집팀이 모두 첫 기사 발행 시에 이메일도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폭로자의 기억과 진술에만 의존해 첫 기사를 발행했다는 건가.

김낙호 교수는 프레시안 기사의 낮은 ‘품질’과 ‘핑퐁 게임’식 공방전에 관해 “서울시장 출마 회견 전에 기사를 터트리고 단계적으로 대응하여 임팩트를 키우려는 주관적 정의감이 앞섰”기 때문은 아닌가 의심한다. 나는 그 의심을 합리적이라고 평가한다.[footnote]서어리 기자에게는 ‘익명 미투’의 문제를 비롯해 여러 궁금증을 이메일로 길게 문의하고, 시차를 두고 핸드폰 문자로 비교적 짧게 재문의했지만, 해당 질문에 대한 구체적인 대답은 없었고, 대신 문자로 프레시안 후속 기사를 알려주는 두 번의 답 문자만 왔다.[/footnote] 프레시안의 경우 후속 기사들로 이전 기사들의 의문이 부분적으로 해소된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프레시안과 정봉주의 소모적인 핑퐁 게임은 계속 중이다.

뉴스타파의 민병두 보도는 더 문제다. 민병두 보도는 페미니즘이나 미투 운동의 기준 이전에 그저 상식의 기준으로 보건대, 이런 정도로 부실하게 취재된 사실을 그저 ‘미투 운동’에 편승(?)하기 위해 발행할 수 있는가라는 근본적인 의문을 불러일으킨다(모쪼록 아래 짧은 동영상을 직접 다 본 뒤에 스스로 평가하기 바란다).

YouTube 동영상

그것은 뉴스타파라는 ‘탐사저널리즘’에 기대하는 평균보다 높은 수준이 아니라 그저 언론 일반에 기대하는 평범한 수준을 적용하더라도 너무도 느슨하다. 민병두는 의원직을 사퇴했지만, 뉴스타파가 폭로한 ‘진실’에 굴복해 항복 선언한 것은 전혀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민병두는 A 씨의 폭로가 ‘미투’와는 상관 없다며, 자신은 진실을 위해 싸우겠다고 하고, 그 아들도 아버지의 진실을 믿는다고 말한다. 뉴스타파의 민병두 보도에 관해서는, 적어도 현저히 눈에 보이는 댓글 표시 독자의 반응을 기준으로 보면, 대체로 격하게 뉴스타파의 보도상 문제를 비판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언론을 통한 ‘익명 미투’가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다뤄지면, 미투가 ‘정치적 가십에 관한 공방’, 더 나아가 ‘정치 공작의 수단’에 불과한 것으로 왜곡되고, 오염된 채 비칠 수 있다. 언론 보도가 이런 일차원적인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김어준이 주장한 바 있는 ‘공작설’은 필연적으로 득세한다(공작설의 비윤리성은 언급할 가치가 없는 수준이지만, 그것이 가지는 현실적인 설득력은 충분히 심각하게 고민할만 하다).

‘어? 김어준 말이 맞는 거 아니야?’

그리고 뉴스 독자에게 남은 일은 그런 공작적 마인드에 기반해 그저 과거처럼 편 나누어 ‘우리 편 이겨라’ 응원하는 일 뿐이다. 그 과정에서 미투 운동의 본래적 취지가 오염될 것은 뻔한 노릇이다.

쇼아 그리고 김지은의 얼굴 

[쇼아] (Shoah, 1985, 끌로드 란쯔만)는 나치의 유태인 학살에 관한 556분짜리 다큐멘터리다. 다음 영화는 쇼아를 이렇게 설명한다.

“쇼아(히브리어로 ‘절멸’을 의미)란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나치가 유럽 전역에 있는 유대인을 비롯한 특정 부류의 사람들을 집단 학살 한 것을 지칭한다. 감독 란쯔만은 8년간의 촬영과 350시간 분의 인터뷰를 9시간이 넘는 장편 다큐멘터리로 완성시켰다.

란쯔만은 나치 집단수용소도 아니고 하나의 전체로서의 나치체제도 아니며 하나의 과정으로서의 반유대주의도 아닌 죽음이 만연했던 구체적인 장소이며 지옥의 중추인 홀로코스트(나치 집단처형장)에 관해 논하기 위해 거의 10년 동안이나 세계를 돌아다녔다.

또한 란쯔만은 뉴스 필름이나 당시의 기록 필름을 단 한 커트도 사용하지 않고 등장 인물들의 말을 통해서만 유대인 학살을 이야기한다. 강제수용소의 생존자들, 나치 협력자들, 그리고 학살 작업에 동원되었던 사람들은 고통스럽게 그들의 과거를 카메라 앞에 드러낸다.” (다음 영화, ‘쇼아’ 중에서)

쇼아 (1985, 끌로드 란쯔만)
쇼아 (1985, 끌로드 란쯔만)
쇼아 (1985, 끌로드 란쯔만)
쇼아 (1985, 끌로드 란쯔만)
쇼아 (1985, 끌로드 란쯔만)
쇼아 (1985, 끌로드 란쯔만)

란쯔만이 [쇼아]를 찍기로 결심한 일화는 유명하다. 일부 실증주의 역사학자들은 ‘홀로코스트’가 유태인의 집단적 공포가 만들어낸 환상일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나치가 지워버린 학살 증거 속에서 죽은 자는 영원히 침묵했고, 시간은 흘러갔다. 어쩌면 일부 실증주의 역사학자의 가설이 먼 미래에는 그저 가설이 아니라 정설로 둔갑할 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란쯔만은 8년 동안 350시간을 인터뷰해서 9시간짜리 다큐멘터리를 완성했다. 아우슈비츠를 직접 경험한 생존자의 얼굴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고통스럽게 그 지옥의 기억을 꺼내 떨리는 입술로 말한다. 때로 얼굴은 목소리는 표정은 세상에서 가장 확실한 진실의 증거이기도 하다. 그것은 ‘실증’을 넘어서는 실체적 진실을 관객에게 전한다.

[쇼아]에는 어떤 뉴스 필름이나 기록 필름도 나오지 않지만, 그저 인간의 목소리, 그 얼굴과 표정만으로도 홀로코스트의 역사적 진실을 증명해낸다. [쇼아]를 본 관객은 홀로코스트가 역사적 실체임을 저절로 알게 된다. 더불어 홀로코스트를 집단적 공포가 만들어낸 환상일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무책임하고, 야만적인 ‘2차 가해’인지를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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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가장 깊게 감동한 미투는 김지은 씨의 미투였다. 슬로우뉴스에 ‘미투 폭로’를 문의해 온, 하지만 아직 제3자에게 ‘보도’할 만한 근거를 마련하지 못해 함께 안타까워하는 한 분과 종종 전화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한다. 그 분과의 대화 덕분에 오래전 [쇼아]가 생각났고, [쇼아]는 김지은 씨의 얼굴을 불러왔다. 증거 없는 피해자를 도와 언론이 추구해야 하는 진실 추구의 이상적 예시를 [쇼아]는 보여준다.

누구는 김지은 씨 인터뷰를 보면서, 손석희의 질문이 너무 무례하고 거칠었다고 말하고, 또 누군가는 김지은 씨의 표정이 기이하고도, 말투가 답답하다고, 왜 그렇게 순응했느냐고 말한다. 일그러진 표정과 낮게 터지는 탄식, 메마른 입술을 누르며 고통스럽게 답하는 모습에 나는 깊은 슬픔을 느꼈다. 나도 거의 고통에 전염된 채 힘들게 인터뷰를 지켜봤다.

누군가는 그런다. 그 얼굴 표정, 십몇 분 동안 이야기만으로? 물론 이미지는 때때로 우리를 속인다. 하지만 때로 이미지는 사물의 본질을 드러낸다. 나는 김지은 씨가 한 세기에 나올까 말까 한 천재 연기자가 아니라면, 도저히 그런 표정으로 그런 목소리와 떨림으로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한 존재가 자신의 존재를 온전히 걸고 진실을 이야기하는 순간. 언론은 그 순간, 그 표정과 목소리를 있는 그대로 전하면 된다. 그것이 가장 기본적이고, 동시에 가장 본질적인 언론의 역할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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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의 심연 

언론이 아무런 문제 의식 없이 취재원 보호라는 추상적인 가치만을 정답처럼 내새워 ‘익명 미투’ 보도를 남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PD수첩의 김기덕 보도처럼, 10분만 봐도 김기덕은 천하의 개XX인 걸 뻔히 알겠는데, 그걸 약간씩 다르지만 비슷하게 얼마나 더 개XX인지를 자극적으로 반복해서 보여주는 방송을 나는 좋은 방송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왜 김기덕은 ‘개XX’가 되었는지, 왜 여배우들은 침묵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좀 더 입체적으로 보여주기를 바랐다. 그저 1분만 봐도 뻔히 아는 권선징악이 아니라 왜 이 위대한 감독은 이토록 저열하고 추잡한 호색한이 되었는지, 왜 괴물이 되었는지, 그를 둘러싼 구체적인 관계들 속에서 보여줘야 한다. 그래야 그저 ‘김기덕 이 개XX’ 한마디 내뱉는 얄팍한 사회적 알리바이로 때우지 않고, 그 김기덕을 통해 자기 자신과 자기를 둘러싼 세계를 돌아보고, 직시할 수 있다.

미투 운동이 반가우면서도 무서울 때가 있다. 이 운동은 연대와 평등의 운동인데, 남자와 여자가 아니라 권력과 돈이 아니라 그저 인간으로서 당당한 시민으로서 그런 평등한 공동체를 꿈꾸는 희망의 운동인데, 한 가해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자, 누군가는, 아마도 미투 운동을 열렬하게 지지할 것이 분명해 보이는 누군가는, “OOO 유서 토 나온다”라고 그 죽음을 조롱하고, 그 조롱에 또 다른 조롱이 끝없이 이어진다. 나는 그 조롱의 행렬이 무섭다.

죽음은 모든 것을 허용하고, 그래서 죽음은 죽음에 대한 조롱조차도 허용하지만, 우리는 죽음에 관해 경건하지 않으면 안 되고, 어느 위선적인 삶을 살았던 인간의 죽음조차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그 죽음을 슬퍼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무덤에 침을 뱉는 건 자유지만, 그 비겁한, 그래서 인간적인 죽음을 조롱하는 풍경은 무섭다. 쓸쓸하다. 그건 마치 누군가를 추행하고 싶어하는 짐승의 시선 같다. 그런 의미에서 한 광기어린 철인의 경고처럼, 심연을 바라보는 자는 항상 경계해야 한다. 그 심연이 자신을 삼키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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