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협이 지난 25일, 새 정부의 ‘지속 성장 가능한 농업’과 ‘살기 좋은 농촌 만들기’ 정책에 동참하겠다는 명목으로 ‘범 농협 일자리위원회’를 설치했다고 밝혔다. 또 농협은 이와 관련하여 각 계열사 비정규직 노동자 중 상시·지속 업무를 하는 5,245명에 대한 정규직 전환을 검토한다고 밝혔다. 전환 대상자 대부분은 일반 계약직 창구 직원과 농협 하나로마트 직원이다.
인천공항공사 비정규직 노동자의 정규직 전환 이후 연이어 들리는 기업들의 정규직 전환 소식은 언뜻 보면 환영할 이야기지만, 실체를 들여다보면 달갑지는 않다. 현직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정규직 전환이 “기존 정규직과 같은 대우를 받는 건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정규직 전환? 눈 가리고 아웅일 뿐
실제로 농협 비정규직의 고용형태는 형태만 놓고 보면 계속 나아지는 상황이었다. 지난 2007년 기간제 및 단시간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약칭 ‘기간제법’, 이하 ‘비정규직법’)이 시행되자 농협중앙회는 이듬해인 2008년 3월까지 2,100명의 비정규직을 무기계약직으로 전환했다. 300명가량은 업무직이라는 이름의 별정직에 채용되었다. 업무직이 기존 정규직과 별도의 운영된다는 비판이 일자 기존에 6개급으로 구성된 채용직급에 7급을 신설, 정규직 채용형태를 일원화시켰다.
그러나 내용을 살펴보면 이는 법망을 피하기 위한 꼼수에 가깝다. 비정규직의 무기계약직 전환은 2년을 초과하여 업무를 수행한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법이 강제하는 내용이었기 때문에 농협 입장에서는 피할 수 없었다. 업무직 신설의 경우, 비정규직법 제2조에서 비정규직에 대해 ‘합리적인 이유 없이는 차별대우할 수 없’게끔 정하고 있기 때문에 비정규직과 정규직의 임금차별을 시정하라는 요청을 피하려고 기존 직원들과는 다른 ‘별도의 정규직’을 신설한 것이다.
‘어쨌든 고용 안정성은 더 강화된 것 아니냐’는 질문은 반만 맞고 반은 틀렸다. 농협은 업무직 직원들에 대해 인사평가를 통해 저성과자를 해고하는 이른바 ‘퇴출 프로그램’을 가동했다. 그래서 업무직 정규직들은 다른 정규직과는 달리 해마다 해고의 위험과 맞닥뜨려야 했다.
노동조합은 업무직 운영에 반발했고 이후 업무직에도 호봉제가 도입되고 임금도 최저임금 수준에서 조금 나은 정도로 인상되게 되자, 농협은 업무직 채용을 중단하고 일반직 7급을 신설했다. 이미 최저임금 수준을 받는 6급 직원보다 더 낮은 직급을 신설하다 보니 임금 테이블에 문제가 생겼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농협은 6급 임금과 7급 임금을 같이 최저임금으로 책정, 7급 직원이 6급에 도달할 때까지 임금인상이 되지 않도록 했다.
최저임금 오른 만큼 해당 직원 상여금과 후생비 삭감
농협 내 6, 7급 직원들과 계약직, 무기계약직, 업무직 직원들은 최저임금에 가까운 임금을 받는다. 그나마 위안인 것은 최저임금이 매년 5~7% 상승하는 점이다. 그러나 실제로 해당 직원들은 최저임금 인상의 혜택을 전혀 받지 못했다.
지난해인 ’16년 전국사무금융서비스노동조합과 더불어민주당 김현권 의원실이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농협은 최저임금 인상분을 보전하기 위해 대상 직원에게 지급했던 정기상여금과 복리후생비를 삭감했고, 이 액수는 815억 원이 넘었다.
문제는 또 있다. 농협중앙회는 비용 부담을 이유로 2004년 11월부터 ‘비정규직 경력 가급’ 조항을 폐지했는데, 이 조항이 사라진 탓에 무기계약직에서 업무직으로, 업무직에서 7급 직원으로 이동한 직원은 이전에 책정된 호봉상승분 임금을 모두 포기해야 했다. 어떤 직원은 이동할 때마다 월급이 깎여서 15년 간 임금이 동결된 상태였다고 한다. 채용 형태는 변했는데 그 내용은 더 악화된 셈이다.
이 같은 내용은 지난 해 국정감사에 공개되었고 국회는 농협중앙회에 해당 내용을 지적하며 시정을 요청했다. 하지만 농협 측은 이에 대해 어떠한 답변이나 이행도 하지 않았다.
새 정부의 정규직 전환 정책을 ‘반쪽짜리’로 만들 꼼수들
문재인 대통령은 대선 후보 당시 81만 개의 공공 일자리를 약속했다. 이 중 41%인 33만 개의 일자리는 공공기관 비정규직이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부분이다. 인천공항공사는 최근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예고했다. 그 구체적인 형태를 묻자 인천공사 측은 “자회사를 세워 채용하는 방식도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사실상의 간접고용이자 무늬만 정규직이며 다른 노동조건들은 개선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는 비판에 직면한다.
문재인 정부의 노동정책에 보조를 맞추기 위해 기타 기업들도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외치고 있다. 그 내용에 대한 확실한 합의가 없이 그저 ‘정규직 전환’과 ‘전환 숫자’에만 주목한다면 앞서 농협 사례처럼 비정규직이라는 차별과 낙인이 정규직이 되어서도 따라다니는, ‘정규직인 비정규직’이 양산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현 정부의 정규직 전환 정책 방향이 잘못되었다는 지적은 아니다. 다만 정부의 정책 방향과 기업의 실제 움직임은 다르게 나타날 수 있고, 실제로 지금까지 비정규직 정책은 기업들이 우회로를 찾아 ‘흉내 내기’에 그친 경우가 많았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지금 비정규직 문제의 핵심은 비정규직의 고용불안만이 아니다. 위험의 외주화, 동일노동 차별임금, 만성적인 저임금 등도 비정규직과 관련한 중요한 문제다. 이 같은 문제가 함께 해결되지 않으면, 이전에도 그랬듯, 문재인 대통령의 정규직 전환 약속도 ‘반쪽짜리’ 정책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