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승희 혹은 신철.
‘신철’이라 불린 인물이 있었다.
그는 일제강점기 형사였다고 하며 본명은 신철이 아니란 이야기도 있었다. 그는 지나가는 사람의 낯빛만 보고도 그가 독립운동가인지 아닌지를 알아내 체포할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보다 더 믿기 어려운 이야기는 그가 3.1 독립운동 며칠 전에 인쇄 중이던 독립선언문을 미리 확보하고 당시 천도교와 협상을 하다 거금 5천원을 받고 입을 다물었고 그게 문제가 되어 보름 후 체포당한 뒤 청산가리를 마시고 자결했다는 이야기이다.
위와 같은 내용은 1970년대 지상파 TV를 통해 [34인]이라는 제목의 특집극으로 제작되기도 한 일화였다. 과연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까?
신승희 혹은 신철의 실제 행적
실제 윤치호 등이 남긴 일기(윤치호는 당시 영문으로 60년간의 일기를 남겼으며 필기체로 남긴 방대한 기록이라 아직도 번역작업이 이뤄지고 있다.)의 기록이나 한민족독립운동사 자료에 의하면 그의 본명은 신승희, ‘순사보’라는 직책으로 1909년 종로경찰서에 소속된 뒤 적지 않은 독립운동가 체포 및 감시에 공을 세운 인물이었다.
그는 1919년 당시 독립운동에 깊이 관여하던 종교조직 천도교에 대한 수사를 담당하며 천도교로부터 어느 정도 뇌물을 받고 있었는데, 재미있는 것은 그 사실을 종로경찰서 윗사람들 또한 알고 있던 정황이다.
1919년 3월 1일 독립 만세 운동이 벌어졌을 당시 신승희는 열심히 그 조직을 본격 수사한다며 뛰어다니다 급기야 일본인 동료 형사와 함께 신의주로 출장을 떠났고, 5월에 돌아온 그는 천도교 조직을 도운 혐의가 드러나 체포되어 수사를 받던 중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가장 중요한 순간에 입을 다문 신승희
그가 1919년 5월에 체포되어 수사받던 중 자결한 사건은 당시 매일신보 5월 22일 자 신문을 통해 알려졌으나 조서에 남겨진 뇌물 기록이자 그가 받았다고 인정한 금전 150원은 이후 그가 숨진 이후 불어나고 또 불어나 급기야 5천 원이라는 거금이 된 것이다.
신승희는 천도교로부터 뇌물을 받으면서도 그 인사들과 금액을 자신의 윗사람에게 공개해 양쪽의 신뢰를 얻었고, 그렇게 부를 축적한 전형적인 부패공무원이었다.
그러나 거물급 독립운동인사의 체포 직전에는 그 작전을 일부러 흘려 도움을 주는 행보를 보이는가 하면, 3월 1일 독립 만세 운동 일에 이르러서는 아예 독립선언서나 만세 운동에 대한 정보를 일절 모른 체 해버리고 만 것이다.
그가 왜 가장 중요한 순간에 입을 다물었는지는 정확한 기록도 없을뿐더러 그 당사자가 아닌 이상 그 솔직한 심정을 알아낼 수 없다.
단, 하나 쉽게 추정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저 일제강점기 종로경찰서의 고등계 형사 또한 결국은 같은 나라 사람이었으며, 가장 큰 민족행사가 비밀리에 펼쳐지던 순간만큼은 못 본 체하지 않았을까.
그러지 않고는 이미 축적한 부(헌병대에 체포될 당시 그의 재산은 이미 부동산만 1천 원을 넘고 있었다)와 탄탄한 직업을 포기하고 체포된 끝에 자결을 택한 그 끝을 이해하기 어렵다.
신승희보다 부끄러운 삶을 살아간 사람들, 그리고 광복
이상현 작가의 1970년대 드라마를 통해서 각색된 부분, 소설가 이원규의 매끄러운 문장으로 윤색된 부분, 신복룡 교수나 산하 PD 등의 의미 부여가 신철이라는 인물에 대한 해설을 전설로 메워나간 것은 어찌 보면 팩트 이전에 우리가 얻고 싶은 인간의 방향이었을 것이다.
그에 비견되는 것은, 그의 이름을 팔며 목숨을 부지한 저명인사들과 운동가들이 그 대부분 일신의 안정을 도모한 끝에 친일파로 변절해 오늘의 친일파인명사전에 오르는 부끄러운 삶을 기록하고 만 것이 역사의 아이러니다.
이 역시 이 땅이 광복을 맞기 전 마주해야 했던 수많은 비극 중 하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