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공유하기

이른바 날치기, 직권상정은 다수를 확보한 집권여당의 ‘궁극의 무기’였다.

2012년 국회선진화법(별칭 ‘몸싸움 방지법’) 통과 이후 직권상정이 크게 제한되었지만, 개정 이전의 국회법 85조는 국회의장이 안건의 심사기간을 지정하고 기간 내에 심사가 끝나지 않으면 바로 본회의에 부의[footnote]”부의”란 안건을 본회의에서 심의할 수 있는 상태로 놓는다는 뜻이다. 본회의에 부의한다는 의미는 본회의에 안건을 직접 회부하거나 위원회에 회부되어 심의가 끝난 안건을 본회의에서 심의할 수 있도록 하는 상태로 한다는 뜻이다. 위원회의 심사결과 의안을 본회의에 부의하지 아니하기로 의결하면 안건을 본회의에 상정하지 않는다.[/footnote]할 수 있도록 했고, 여당은 이 조항을 자신이 미는 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적극 활용’했다.

[box type=”info”]

국회선진화법이란? (개요)

국회선진화법은 ‘날치기’, ‘몸싸움’으로 상징되는 국회의 후진적인 행태를 개선하기 위해 2012년 개정한 국회법을 일컫는 말이다. 특히 2010년 12월 4대강 관련 법안과 새해 예산안 날치기 처리와 국회 유혈사태를 직접적인 배경이 됐다. 새누리당은 국회선진화법을 2012년 4.11 총선 공약으로 제시했고, 법은 그해 5월에 본회의를 통과했으며, 19대 국회 임시개시일에 맞춰 시행됐다.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편집자)

  • 국회의장의 직권상정 제한
  • 쟁점 법안은 재적 5분의 3이상 동의해야 신속처리안건 상정 가능
  • 의장석 점거 금지
  • 본회의에서 무제한 토론 도입

[/box]

날치기의 추억

새벽 5시 50분, 여당 국회의원들이 관광버스를 타고 국회 본회의장에 잠입해 노동법과 안기부법 등 11개 법안을 일사분란하게 날치기 처리했던 1996년 12월 ‘노동법 날치기 파동’도 있었지만, 가장 가까운 과거, 직권상정이 가장 빈번하고도 강렬했던 때는 이명박 정부에서의 18대 국회다.

18대 국회는 ‘일방, 단독, 강행, 날치기’의 일상이었다. 굵직한 날치기 처리 법안만 짚어봐도 한미FTA비준동의안, 미디어법, 한국토지주택공사법, 금산분리완화법, 예산안, 친수구역특별법, UAE파병동의안 등이다.

심지어 일부 법안은 상임위 논의조차 없이 통과되기도 했다. FTA비준안이나 미디어법, 4대강 관련 법안 날치기 처리를 보건대 여야 대립, 국회 파행, 직권상정으로 이어진 법안은 처리된 이후에도 사회적 갈등, 그 중심에 선다.

“나 찾아올 시간 있으면…”

국회의장 직권상정 권한이 크게 제한된 상황에서, 최근 양당 지도부 못지않게 많이 거론되는 정치인이 정의화 국회의장이다. 선거구, 테러방지법, 노동5법, 서비스산업발전법 등 첨예하게 대립되는 갈등 법안 중심에 정의화 의장이 있는 모양새다. 따지자면 국회의장은 대통령, 대법원장과 함께 3부 요인(要人)이고 대한민국 공식 의전서열 2번이며 국회는 행정부와 사법부를 견제, 감독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

제공: 민중의소리
제공: 민중의소리

대통령이 하루가 멀다 하고 국회를 겁박하고, 국회의원이 스스로 제 권위와 권한을 내팽개치는 우리 정치 현실에서 체감하기 어렵지만, 사실이 그렇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것은 ‘교과서용’이고 우리 정치현실은, 자신들이 요건을 엄격히 제한한 직권상정을 결단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자당의 5선 중진 국회의원이자 자신들이 선출한 국회의장을 상대로 정치적 갈등을 노골화하는 수준이다.

“나를 찾아올 시간이 있으면 각자가 상대당에 한 사람이라도 더 만나서 설득하면 좋겠다.”

– 정의화 국회의장, 연일 자신을 찾아오는 새누리당 지도부에 대해

정의화 국회의장의 이 말 한마디로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에 대한 평가가 가능하다.

급기야 ‘셀프 부결’

이쯤 되면, 국회가 법안처리도 못 하고 선거구가 실종되는 상황 모두 직권상정을 막아둔 (그놈의) 국회선진화법 때문인 것만 같다. 정말 그런가. ‘국회선진화법 때문에 19대 임기 내내 야당에게 끌려 다녔다’라고 주장하는 새누리당은 2016년 1월 18일, 급기야 선진화법 개정을 위해 선진화법 개정안을 ‘셀프 부결하는 꼼수’를 감행했다.

[box type=”info”]
국회법 제87조(위원회에서 폐기된 의안)

①위원회에서 본회의에 부의할 필요가 없다고 결정된 의안은 본회의에 부의하지 아니한다. 그러나 위원회의 결정이 본회의에 보고된 날로부터 폐회 또는 휴회중의 기간을 제외한 7일이내에 의원 30인이상의 요구가 있을 때에는 그 의안을 본회의에 부의하여야 한다.
[/box]

현재 우리 국회는 상임위 중심제로, 개정해야 하는 법조항을 조목조목 해석하고 따지는 축조심사를 상임위에서 한다. 국회법 87조는 본회의 중심제로 국회가 운영되던 때, 혹시라도 발생할 수 있는 안건누락 혹은 고의적인 미(未) 부의를 막기 위한 취지에서 도입된 것인데 새누리당이 이를 악용하여 위원회에서 부결시키고, 다시 의원 30인 이상의 서명을 받아 본회의에 부의하려 한 것이다.

2010년 신행정수도후속대책 특별법(세종시법)도 87조를 활용해 본회의에 부의되었지만, 이번 선진화법 경우와는 다르다. 당시 신행정수도특별법은 소관 상임위인 국토해양위원회에 여야 의원이 출석해 치열한 찬반토론 끝에 기립표결로 부결된 법안이 30인 이상의 요구로 부의된 경우다. 반면 새누리당은 야당 의원들이 상임위에 불참한 상황에서 고의적으로 국회법 개정안을 부결시켜 위원회 심의를 무력화시켰다.

새누리당 스스로 날치기 방지를 위해 만든 법을 "국회 무력화법"이라고 지칭하는 권선동 새누리당 의원 (사진 제공: 민중의소리)
새누리당 스스로 날치기 방지를 위해 만든 법을 “국회 무력화법”이라고 지칭하는 권선동 새누리당 의원 (사진 제공: 민중의소리)

상식적으로도 새누리당의 이번 꼼수는 ‘무리수’였다. 그럼에도 강행한 목적이 ‘19대 국회 내 노동5법과 경제활성화 법안 처리’라는 것이 그 후에 새누리당 지도부의 발언에서 확인되었다. 되짚어보면 새누리당은 국회선진화법을 고치기 위해 부단히 애썼다. 법개정을 위한 당내 TF를 구성했고, 선진화법이 국회의원의 법률 심사권을 침해한다며 국회의장 등을 상대로 권한쟁의심판도 청구했으며, 때마다 여론전을 지속했다.

박근혜 정부의 정부조직법, 공무원연금법, 서비스산업발전법 등 새누리당이 원하는 법안이 야당의 반대로 막힐 때마다 새누리당과 보수 언론은 국회를 마비시키는 악의 근원으로 국회선진화법을 활용해왔다. 집권당 입장에서 직권상정을 뜻대로 하지 못해 답답했을지 몰라도 오히려 선진화법 덕분에 정치적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셀프 부결 꼼수를 부리려고 하는 새누리당의 시도에 대해 정의화 국회의장의 발언도 새겨 들을만 하다.

“잘못된 법을 고치는 데 있어서 또 다른 잘못을 저질러서는 안된다.”

‘폐기’ 법안보다 무서운 ‘날림’ 법안

물론 현재의 국회법은 개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새누리당과 다른 이유로 개정이 필요하다. 국회선진화법은 직권상정을 엄격하게 한 조항도 있지만, 사실 국회 운영에 실질적으로 영향을 미칠 제도는 의안 신속처리제도(fast track)다.

의안심의의 질보다 양을 중시하는 풍토 하에서 일정 요건을 갖춘 의안은 자동으로 상정되고, 기간이 지나면 본회의에 부의되는 절차다. 컨베이어벨트 위에 법안을 올려두고 국회는 법안을 찍어내는 공장이 되는 셈이다. 그런 점에서 정의화 의장이 새누리당 요구를 거부하면서 ‘신속처리를 더 쉽게 하자’고 한 선진화법 중재안은 오히려 더 민감하고 논쟁적인 부분이다.

빨리, 많이 법안을 만들어내기보다 심의를 제대로 내실 있게 할 수 있는 국회운영 체계가 필요하다. 통과되지 못하고 폐기되는 법안보다 날림으로 처리된 1개 법안이 더 크게 우리 삶을 해칠 수 있다.

[box type=”error” head=”새누리당과 국회선진화법 개정안 현황”]

상황 요약

  • 새누리당은 노동5법과 경제활성화 법안 처리가 19대 국회 임기 내에 이루어지길 원한다. 야당은 이에 반대한다.
  • 하지만 현재의 국회선진화법과 국회법을 잘 지키는 국회의장 때문에 날치기가 불가능하다.
  • 따라서 새누리당은 국회선진화법을 개정(무력화)해서 노동5법과 경제활성화 법안을 날치기하고 싶어 한다.

새누리당의 국회선진화법 개정안 내용과 이유

  • 개정안의 내용은 ‘국회의장 직권상정 요건을 완화’하는 것이다.
  • 즉, 왠만하면 여야 합의 없이도 국회의장이 단독으로 법안을 본회의에 올릴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 일단 본회의에 올라가면 새누리당이 다수당이니 합의 없이 다수당 홀로 날치기가 가능해진다.

새누리당이 국회선진화법 개정안을 통과시키려는 방법

  • 원래는 국회선진화법 개정안도 여야의 합의가 있어야 한다. 따라서 정상 통과는 힘들다.
  • 따라서, 국회선진화법 개정안을 일단 상임위에서 부결시킨다.
  • 본회의에 올리지 않은 법안을 다시 본회의에 올릴 수 있는 국회법의 헛점(제87조)를 이용해서 본회의 상정한다.

보다 못한 정의화 국회의장의 중재안 핵심

  • 정의화 국회의장의 중재안 핵심: 법안 통과를 위해 개정안을 낸다면 ‘신속처리안건’의 정족수 60%를 50%로 다운시키고, 법안 신속처리기간을 최대 330일에서 75일로 줄여라.

새누리당이 정의화 국회의장의 중재안을 반대하는 이유

  • 정의화 국회의장의 중재안으로도 노동5법, 경제활성화 법안은 날치기할 수 있다. 단, 19대 국회 임기내에는 불가능해진다.
  • 꼭 19대 국회 임기 내에 노동5법, 경제활성화 법안을 통과시키고 싶은 새누리당의 원유철 원내대표는 정의화 국회의장의 중재안을 “미봉책”이라고 비판한다.

[/box]

관련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