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팔’이 끝났다. 1988년과의 성공적 교신을 마치고. 서운했다. 까맣게 잊고 산 그 시절이 반가웠던 만큼. 극중 인물 각각이 나, 내 가족, 이웃 같았고, 그 사람들이 나이를 먹고 그 정겹던 ‘쌍문동’이 텅 비어 초라해진 모습에서 내 마음도 텅 빈 듯했다.
하지만 잠시뿐. 드라마 속 쌍문동이 아닌 2016년 현실에 내 이웃들을 떠올리며. 덕선·정환·선우·택이·동룡네가 그러했듯, 평범한 일상에서 기쁨과 슬픔을 나누며 지금을 함께 사는 나의 ‘이웃 사촌’을 소개한다.
1. ‘치타 여사’ 안 부러운 맘 좋은 임대인
집주인 할머니다. 아담한 체구에 귀여운 얼굴, 인자하고 유쾌한 성격. 여든이 넘었지만 높은 계단도 척척 오르시고 부지런히 폐지도 모으신다. 할머니께는 지난 3년간 변함없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가 뽀글뽀글 파마머리, 그리고 얼굴 가득 푸근한 미소다.
이사 직전 집 앞에서 만난 할머니는 “반갑데이, 어쨌거나 오래오래 사이좋게 살재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초보 사업가’인 내 벌이가 시원찮아 월세가 늦을 때면 당신께서 되레 “미안하데이. 다 어렵다. 열심히 해래이.” 하며 응원을 해주신다. ‘치타 여사’ 안 부러운 맘 좋은 임대인이다.
2. 곰돌이 청과 주인
삼거리 모퉁이에 이름도 소박한 ‘곰돌이 청과’ 여주인이다. 사계절 바깥에서 일하는 탓에 하얀 얼굴이 늘 발그레하지만 그 모습이 꼭 소녀처럼 곱다. 지금 자리에서 청과상을 한 지는 무려 28년. 장성한 자식에 손주도 둘이나 있음을 최근에 알았다.
며칠 전엔 다듬고 있는 채소를 “쑥?”이냐고 물으며 쳐다보니 “냉이!” 하며 웃으셨다. 소싯적에 냉이를 ‘달래’라 이름 써 붙였다 단골손님에 놀림당한 일화를 전하며. 아줌마는 이웃 어르신들이 세를 놓는다 하면 무료로 중개인 노릇도 하고 근처로 배달되는 우편물을 보관했다 주인에게 전해주는 일도 마다하지 않으신다.
3. 맥가이버 아저씨
일명 ‘맥가이버 아저씨’. 바로 옆 건물에서 건축업을 하신다. 별명은 도움을 청할 때마다 척척 해결해주는 능력자라서 붙었다. 창가에 나무 선반을 댈 때도, 간판을 만들 때도, 대문을 칠할 때도. 언제나 성가신 일들을 뚝딱 처리해주시고 필요한 재료도 전부 공짜로 주셨다.
아저씨는 사시사철 해도 안 뜬 시각에 일 나갈 채비를 하신다. 요즘처럼 추운 날도 예외가 없다. 어쩌다 일찍 일어나 창문으로 그 모습을 뵐 때면 존경심과 안타까움이 교차한다. ‘내 아버지도 같은 모습이겠지’ 하고 생각하는 반성뿐인 내 불효를 또 반성하며.
4. 이불집 할아버지
‘이불집’ 할아버지. 지금은 이불을 팔지 않는다. 할아버지는 이른 새벽 집 앞을 홀로 산책하시곤 한다. 할아버지와 친해진 계기는 고양이들 때문. 내 집 사는 녀석들뿐 아니라 동네 길고양이들이 할아버지네 건물 계단을 통해 뒤쪽 숲도 가고 또 그 안에서 놀고 자기도 한다.
“할아버지, 요놈들 여기서 놀아도 되요?” 하고 물으니 “그럼 되지, 안 될 게 뭐 있어. 그냥 노는 건데.”라고 하셨다. 젊은 날 군대에서 정을 많이 나눈 개 이야기도 들려주셨다. 그래도 건물 계단에 길고양이 밥과 물을 놔두는 건 눈치가 보였는데 한날 할아버지께서 땅에 엎어진 사료를 부러 모아 다시 놔주고 계셨다.
5. 맞은편 중국집
창가에 서서도 대화가 가능한 맞은편 중국집. 웃음 많은 부부와 시동생 셋이 운영하는 작지만 내실 있는 가게다. 정 많은 아주머니는 이따금 귀가하는 날 불러 삶은 달걀을 주기도 하고, 아저씨는 오토바이로 배달 중에 “야 타!” 하며 장난을 걸기도 한다.
석 달 전 함께 살던(친동생과 다름없던) 고양이가 집 앞에서 교통사고를 당했다. 녀석을 안고 엉엉 울고 있는 내 뒤로 어느새 아주머니가 서서 눈물짓고 있었다. 다음 날엔 “너무 슬퍼 말고. 내가 좋은 데 가라 기도했어.” 하며 직접 전화를 걸어주셨다. 그 후로도 볼 때마다 위로를 전하셨다.
6. 동물병원 식구들
끝으로 가장 최근 알게 된 동물병원 수의사. 두 달여 전 크게 다친 꼬마 길고양이를 데리고 찾아갔는데 의사의 눈빛, 행동에서 진심 동물을 사랑함이 느껴졌다. 의사는 길고양이나 다른 유기 동물을 위해 의료비 할인도 해주었는데 내가 데려간 녀석을 위해선 두 번의 수술비를 아예 받지 않았다.
뼈가 살을 뚫고 나올 만큼 크게 다친 고양이를 의사는 최대한 시간을 두고 녀석의 치료 후 삶까지 생각하자 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두 다리 모두 절제가 필요한 상황에 이르렀고 두 번째 수술을 마쳤을 때 의사는 “어린 강호(고양이 이름)가 너무 가엾고 미안하다”며 수술비를 안 받겠다 했다. 그 돈으로 녀석을 더 챙겨달라며.
굿바이 쌍문동, 헬로 동광동!
어떤가. 나의 이웃 사촌들이? 인터넷에서 누군가 ‘응팔의 이웃들은 현실감이 없다’고 적었던데 아니, 현실이다. 한동안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을 보면서 행복했다. 하지만 더불어 얻은 깨달음 하나.
‘모든 기억의 시작은 현실이고 그 어떤 아름다운 기억보다 현실이 좋다.’
몇 년이 흘러도 바로 옆집 사람 얼굴을 모르고, 그 많은 이웃 가운데 잔혹한 범죄자가 있기도 한 요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리고 당신은 누군가의 정다운 이웃 사촌이 될 수 있다. 수도가 언 아침, 간밤에 본 아기 고양이가 걱정돼 나가니 ‘맥가이버 아저씨’가 서 계신다.
“아저씨,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곧 봄 옵니다!”
여기는 2016년 부산 동광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