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x type=”note”]새정치민주연합(이하 ‘새정연’)이 극심한 내홍에 빠졌습니다. 문재인 대표는 2015년 9월에 통과한 혁신안 실천의 방법론으로 ‘문안박 연대’(문재인·안철수·박원순 3인 임시지도 체제)를 안철수 전 대표에게 제안했습니다. 하지만 안 전 대표는 이를 거부하고 ‘혁신 전당대회를 열자’고 역제안했지만, 문재인 대표는 10대 혁신안만 수용한다고 함으로써, 사실상 혁신 전당대회를 거부했습니다.
위기의 새정연은 과연 어떤 해법을 마련할 수 있을까요. 슬로우뉴스는 다양한 기고와 의견을 환영합니다. (편집자)[/box]
정조 시대. 남인의 천주교 신앙을 처음 공격한 세력은 노론이 아닌 남인 자신들이었다. 정약용, 이가환을 질시한 동료 이기경을 중심으로 남인이 남인을 정략적으로 공격했다.
‘우리 남인 중에 천주교를 믿는 사악한 무리가 있다!’
이후 이 문제는 노론의 대표적인 공세 거리가 되었다. 결국 ‘진산사건’(珍山事件, 1791)[footnote] 진산사건(珍山事件)은 1791년 신해(辛亥)박해의 계기가 된 사건으로 전라도 진산(珍山)에서 천주교인 윤지충(尹持忠)과 권상연(權尙然)이 제사를 폐하고 신주(神主)를 불태워 버린 폐제분주(廢祭焚主)사건을 말한다. – 가톨릭정보 ‘진산사건’ 참고. [/footnote]등에서 남인은 피해를 받았고 정조는 ‘문체반정’(文體反正)[footnote] 조선 정조가 당대에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와 같이 참신한 문장들을 패관소품이라 규정하고, 기존 고문(古文)들을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고 하여 일으킨 사건이다. – 위키백과 ‘문체반정’ 참조. [/footnote]등 고육지책을 써가면서 싸웠으나 남인 체제공의 후계자 정약용은 정조 집권기에도 관직의 등락을 반복하였다.
그리고 49세의 나이로 정조가 갑자기 죽은 그 날 밤, 그날 밤부터 남인은 숙청당했다. 천주교도라는 이유로!
삐친 아이도 아니고 이게 뭔가?
“저와 함께 우리 당을 바꿔나갈 생각이 없다면 분명히 말해 달라. 이제 더 이상 어떤 제안도, 요구도 하지 않을 것이다. 묻지도 않을 것이다” (안철수)
수개월 전 문재인 대표는 ‘혁신’을 이야기하며 안철수 의원에게 ‘혁신위원장’직을 먼저 제안했다. 새정연의 당내 혁신 과정이 은밀하게 진행된 것도 아니고 만천하에 공개적으로, 단계적으로 추진되었다. 그동안 안철수 의원은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더구나 ‘문안박 희망스크럼’에 대한 제안은 잊었던가.
지난 수개월간 끊임없이 안철수 의원은 구애받고, 배려받았다. 그런데 혁신위원장직을 거절하고, 혁신안에 대한 제대로 된 이유 없이 ‘혁신은 실패했다’ 식의 주장을 나열했다. 다수 야권 지지자들이 기대하는 문안박 연대에 대해서는 쉽게 거절하고, 그렇게 그렇게 시간을 끌더니 결국, 총선이 4개월도 남지 않은 상황에서 ‘혁신 전당대회를 다시 하자’, ‘전당대회에서 패배하면 깨끗이 승복하겠다’, ‘나와 함께 할 생각이 있는가’식의 발언을 쏟아낸다.
안철수의 진의는 대체 무엇인가.
저와 함께?
전당대회를 왜 다시 해야 하는가. 더구나 이 시점에서 어떻게 전당대회를 하며, 전당대회를 하고 나면 당 내분은 수습되고 안정이 되는가? “저와 함께?” 도대체 이런 만용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역사의 호명 앞에, 국민의 부름 앞에 나왔다면 끝내 겸손할 줄 알아야 한다.
안철수라는 이름 석 자에 붙은 정치적 상징의 힘은 혼돈 가득 찬 현실 가운데 솟구친 국민적 열망에 다름 아니었다. 이명박 정권 앞에서 후보 하나 제대로 내밀지 못하며 완패를 당했던 현실,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 앞에 ‘잊지 않겠습니다’, ‘그런 사람 없습니다’라며 400만 군중이 울며 환송하던 그 열망, 유시민에 대한 기대와 실패 그리고 박근혜 정권의 등장. 수년간의 아픔과 고통으로 만들어진 상징이었다.
문재인 대표가 고작 초선의원이듯 안철수 의원 역시 고작 초선 의원이다. 더구나 막강한 기대에도 불구하고 노회찬 의원 지역구를 찬탈하듯 어색하게 자리 잡았다. 박원순 시장을 누가 만들었느냐고? 맞다. 초기 안철수 의원의 과감한 결단이 없었다면, 어떻게 박원순이라는 이름 석 자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할 수 있었던가.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원만하게 서울시를 이끌었고, 특히 전임 오세훈 시장과는 대조되는 모습으로 정무를 보며 서울 시민의 지지를 이끌어낸 것은 박원순 개인의 노력과 역량이었다. 더구나 그러한 노력의 결과로 연임에 성공한 것 아닌가. 박원순이 한때의 바람이 아니라 미래의 기대로 정착되던 지난 수년간 안철수라는 이름 석 자는 어떤 과정을 거쳤던가.
정치인 안철수, 도대체 어느 현장에 있었는가
왜 하필 정치적 파트너가 김한길이었던가. 부조리와 맞서 싸운 권은희 의원을 고작 그런 식으로 전략적으로 공천해서 유야무야 만드는 모습이 과연 지혜로웠던가. 안철수-김한길 공동 대표 당시 재보궐 선거는 어떠했는가. 최소한 문재인 집권 초기 당 지지율의 증가, ‘소득주도성장론’이나 ‘통일경제론’ 같은 구체적인 정책적 대안을 제안이라도 했던가. 당시 외쳤던 당내 혁신안은 실천이라도 되었던가.
그리고 지금.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파동 가운데 안철수 의원은 어디에 있었던가. 농민 백남기가 물대포에 맞아 쓰러지고, 엠블런스까지 경찰의 물대포가 발사되고 있던 바로 그 지점에 안철수 의원은 어디에 있었던가. 새누리당의 극악한 노동개혁과 온갖 경제 정책들을 쏟아낼 때 안철수 의원은 어디에 있었던가. 국정원 해킹 프로그램이 세간에 공개되었을 때 프로그램 시연 한 번 한 이후 대체 감시 국가로 흘러가는 이 나라를 위해 안철수 의원은 어떤 노력을 했던가.
대체, 왜, 어떤 현장과 어떤 이슈와 어떤 현실 가운데서도 안철수라는 이름 석 자는 찾아볼 수 없단 말인가.
안철수가 원하는 미래는 무엇인가
안철수가 원하는 미래는 김영삼, 김대중인가. 아니면 손학규, 정동영인가. 그것도 아니면 박찬종, 문국현인가. 왜 항상 문재인과 대립각을 세우는 것 외에는 보여주는 것이 없는가.
김영삼이 김대중과 싸워서 유명해진 것인가. 편안한 자리 놔두고 사사오입 개헌 반대하면서 자유당 박차고 나왔고 윤보선-유진산 체제 시절 그 한심한 야당을 극복하고자 40대 기수론을 외쳤고, 김대중이 대통령 후보가 되었을 때도 끝내 전국을 돌아다니며 김대중 대통령 지지연설을 했던 김영삼 아닌가. 그랬기 때문에 박정희와의 면담 이후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고 온갖 욕을 먹었어도 최연소 총재로 선명 야당을 이끌며 박정희 정권을 궤멸시켰고, 3당 야합으로 온갖 잘못을 저질렀어도 끝내 미워할 수 없지 않은가.
김대중은 어떤가. 실력과 내용을 가지고 온갖 이슈에서 명철함을 드러내며 스스로 존재감을 쌓아간 의원, 역사의 고난과 고통 앞에서 물러서지 않고 수많은 고통을 극복했던 그의 삶이 새정치민주연합의 정체성에서 참으로 중요한 부분 아닌가. 그저 좀비같이 특별한 노력도 헌신도 없고, 그럴싸한 말 몇 마디로 진보적인 척, 대안적인 척, 개혁적인 척 외치면서 끊임없이 좀비처럼 등장하여 야권 분열만 일삼는 허다한 정치인이 정녕 되고자 하는가.
정치는 5년 10년으로 끝나는 게 아니다. 역사는 영원하고 한국사회에서 정치는 여전히 절대적이다. 어떻게 민주주의를 지킬 것이며, 독재의 잔재에서 국민을 지키며, 미래의 역사적 과제를 이룰 수 있을까? 거대한 역사적 숙명은 결국 인내와 타협, 연대와 관용 가운데 이루어낼 수밖에 없다.
정치인 안철수는 이것부터 알아야 한다. 왜 시작도 안 한 상태에서 야합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그런 정치 기술만을 탐닉하는가. 속상하고, 답답하고, 고통스러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