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sense]’이순신 장군’ 하면 무엇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가?
많은 이들에게 이순신 하면 가장 먼저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는 세종로 네거리에 있는 동상일 것이다. 오른손에 큰 칼을 ‘들고’ 있는 거대한 동상은 수십 년 동안 우리에게 이순신 이미지를 각인시켰다. 그런 만큼 고증이 잘못됐다는 지적 또한 끊이지 않았다.
갑옷이 중국풍이라는 건 일반인들에겐 너무 어려운 문제라고 양보하더라도, 이순신이 왼손잡이냐는 지적 앞에선 반론의 여지가 없어진다. 거기다 이순신 스스로 밝혔던 “큰 칼 옆에 차고”[footnote]
閑山島 月明夜 上戍樓
撫大刀 深愁時,
何處 一聲羌茄 更添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가 남의 애를 끊나니.
-이순신, 한산도가[/footnote]고 아니라 ‘큰 칼 들고’ 있는 모습은 한국에서 역사 고증이 얼마나 관심 밖에 있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까 싶다.
활 든 이순신 장군 반갑다!
그런 점에서 2015년 11월 27일 경남 창원에 있는 해군사관학교 교육시설인 ‘통해관’ 앞 충무광장에서 열린 제막식에서 선보인 새 이순신 동상은 여러모로 반갑다.
왼손에 칼 대신 활을 잡고 등에 화살통을 메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 장수가 착용하던 ‘두정갑’을 입었고 허리에는 환도를 찼다. 특히 눈여겨볼 대목은 칼머리(손잡이)를 뒤로 가게 한 점이다. 동상을 잘 보면 왼손에 활을 잡고 칼머리를 뒤로 하게 한 환도를 차고 있다.
이순신 장군은 활쏘기가 일상생활이었다. 스스로 활쏘기 연습에 매진했고, 부하들에게도 칼로 적을 베는 것보다는 활로 사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쳤다. 세종로 동상이나 영화 ‘명량’에서 나오는 모습에 실망했는데 참 다행이다. 해군사관학교가 이번에 큰일 했다고 칭찬해주고 싶다.
조선시대 무인의 실제 모습
조선시대 무인들의 실제 모습을 확인해볼 수 있는 사진을 몇 장 올려본다. 사진을 보면서 조선시대 무인들의 복식을 검토해보자.
먼저 구한말 포도대장을 찍은 사진을 보자. 등 뒤로 화살통을 했다. 칼은 겨드랑이에 낀 모습인데 사실 칼은 의전용에 가깝다는 느낌이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칼은 단거리 백병전에 쓰는 것이고 활은 장거리 전투가 가능하다.
칼싸움해서 전투 승리하는 건 영화에선 멋있어 보일지 모르지만 뭐하러 위험하게 그렇게 하겠나. 그냥 화살 쏴서 사살하면 훨씬 더 장점이 큰 데 말이다. 특히, 한국처럼 산악지대에 산성 위주 방어전이 발달한 나라에서는 활의 위력이 극대화한다.
다음으로 정조 능행반차도를 살펴보기 바란다. 칼머리를 뒤로 가게 해서 칼을 차고 있고 활통을 차고 있다. 이 그림에서 장용영 대장을 확대한 모습을 보면 조선시대 무인들 기본 무장형태가 잘 드러난다.
‘안릉신영도’에서도 무인들 복식이 잘 드러난다. 안릉신영도는 1785년 황해도 안릉의 신임 현감이 부임하는 광경을 담은 행렬도인데 1786년 단원 김홍도가 그렸다.
이 그림 중 현감을 확대해보면 해군사관학교의 이순신 동상과 일치하는 활, 칼, 화살 등 모습을 볼 수 있다.
칼머리를 뒤로 가게 해서 칼을 차는 것은 사실 일본과 정반대다. 아무래도 칼을 위주로 한 전투방식과 활을 위주로 한 전투방식의 차이에서 나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동래부사접왜사도'(아래 그림)를 보면 그런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 그림은 18세기 동래부사가 초량 왜관에 온 일본 사신을 환영하기 위해 행차하는 모습을 기록한 것이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 후기 기병전술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최형국 박사가 자신의 홈페이지에서 재연한 조선시대 무인들의 활쏘기 모습을 보면 좀 더 명확하게 당시 무인들의 복식을 이해할 수 있다.
멋진 글 감사합니다. 몰랐던것을 알게 해 주셨습니다
다른 것은 모르겠으나 화살집 착용에 관한 부분은 엉터리입니다. 고증을 누구한테 검증받고 자문했는지 모르겠으나 저 동상은 반드시 수정되어야 하는 엉터리 입니다. 우궁사의 경우 오른쪽 옆구리에 착용해야 할 첩개가 왜 등뒤로 가 있죠? 고증용 자료라는 구한말 사진은 장식용 장비를 착용한 코스프레 수준의 복장에 불과한데 이것을 근거로 실전용 복식과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엉터리이며 화살집은 반드시 옆구리에 비스듬히 착용하여 화살이 뒤로 5~10도 이내로 기울어지게 착용하는 것이 맞습니다. 활에 대해 모르는 자들이 만들어 놓은 엉터리 자료들 때문에 영화나 사극드라마, 심지어는 이런 중요한 상징물에 까지 잘못된 고증이 난무하고 있는 것을 보니 안타깝기 그지없네요. 능행반차도속 인물의 옆모습에서 화살집(화살통이라 하면 보관용 나무통이나 지관등을 말하므로 시복을 가지고 화살통이라 하는 것 역시 잘못입니다. ) 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은 오른쪽 허리에 착용했기 때문이며, 본 글의 필자가 해사의 이순신 동상과 같은 모습이라고 말한 안릉신영도속 인물들의 등 뒤로 화살이 보이는 것은 인물을 전방 좌측의 모습을 기준으로 그렸기 때문입니다. 오른쪽에 찬 화살이 약간 기울어져 있고 인물들의 어깨를 넘어설 만큼 긴 실전용 화살을 장비했가 때문에 이 시점에서는 화살을 등 뒤에 찬 것처럼 보이게 되죠.
단순히 활을 잡은 이순신 장군의 모습만이 중요한게 아닙니다. 우리네 활문화, 특히 군사장비로써의 활에는 동개와 시복같은 부속장비가 반드시 일체로 필요합니다. 현대로 치면 소총에 권총 탄창을 끼우고 전쟁에 나간 것이나 마찬가지 모습입니다. 이순신장군께서 한탄하실 만한 일입니다.
환도는 코등이가 아니고 방패라고 부릅니다
코등이는 죽도의 개념으로 일본에서 쓰는 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