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교수님 논문도 검색해주세요
언젠가 개강을 앞두고 강사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학과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논문 열심히들 써요. 강의 평점 같은 거 적는 난은 이력서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강의 대충하란 말은 아닌 거 다들 아시죠?”
잠시 혼란스러웠으나, 곧 둘 다 잘하라는 내용임을 알았다. 학과장의 조언은 일면 차갑게 느껴지기 쉬우나, 실상은 연민 어린 말이다. 그저 강의나 잘하면 된다고 하면 될 것을 젊은 강사들의 앞날을 고려해 강의와 연구의 우선순위를 잘 마련하라고 한 것이다. 그래서 그가 야속하거나 원망스럽지 않았고, 그저 자신의 위치에서 할 말을 했다고 생각하고 말았다.
강의와 연구, 두 마리 토끼
강의와 연구는 제도권에 발을 들인 이상 반드시 함께 해 나가야 한다. 어느 하나를 제대로 해내지 못한다면 대학에서의 존재 근거를 잃는다. 어느 편에 더 가치를 둘 것인가는 본인의 선택이다. 물론 강의 평점도 높고 연구 성과도 좋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기란 쉽지 않다.
그런데 우리에게 당장 급한 것은 ‘연구 성과’, 그러니까 ‘논문’이다. 강사공개채용이든 교수공개채용이든, 대학 인력시장에서 점수로 계량화되는 것은 논문의 편 수다. 지원자가 지금까지 몇 편의 논문을 학진등재지에 게재했는가, 최근 3년 동안에는 몇 편을 썼는가 하는 것을 체크해 점수로 변환한다.
강의 경력도 참고사항인 것으로 알고 있지만, 그가 학생들에게서 몇 점의 강의 평점을 받았는가는 전혀 고려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연구든 강의든 ‘어떻게’하느냐보다는 ‘더 많이’ 하는 것이 중요하다.
많은 시간강사에게 강의는 부족하나마 당장 오늘의 생계를 해결해 주는 수단이고, 연구는 내일의 생계를 위한 희망이 된다. 그래서 적당히 강의하고 자신의 논문을 한 편 더 쓰는 것이 자신의 미래에 도움이 될 것을 모두가 안다.
강의준비를 하는 대신 논문 자료를 한 줄 더 읽고, 과제 첨삭을 하는 대신 논문을 한 줄 더 쓰면 된다. 강의실에서도 그저 정해진 교재의 진도만 나가면 그만이다. 그렇게 아낀 시간과 에너지는 연구뿐 아니라, 생계를 위한 다른 아르바이트를 할 여유도 만들어 줄 것이다.
마음은 연구에 몸은 강의 준비에
그런데 살다 보면 대개 연구보다는 강의로 무게가 기울어진다. 많은 시간강사가 연구실에서 정작 논문은 열어 보지 못한 채, 강의준비나 학생들의 과제물 평가와 첨삭에 바쁘다.
선배 강사 L은 학생들의 과제물 첨삭에 무척 공을 들인다. 언제나 30여 명의 리포트마다 빨간 펜으로 첨삭을 해 돌려준다. 단어 선택이나, 문장 구조, 문체, 문단 구성에 이르기까지 섬세하게 해 낸다. 그러면 거진 일주일 동안은 새빨개진 눈으로 그것만 한다. 보기 안쓰러워 조언 아닌 조언을 한다.
“논문 마감도 얼마 안 남았는데 적당히 해요.”
그러면 한숨인지 뭔지 모를 담배 연기를 함께 내뱉으며 이렇게 말한다.
“그래도 할 건 해야지.”
나는 그저 총평을 곁들이거나 공개 첨삭을 하는 선에서 타협했기에, L의 모습은 정말이지 존경스럽다. 시간강사의 노력이 그저 강의시수에 따른 시급으로만 평가받아서는 안 되는 이유다. 그리고 내 주변엔 수많은 L이 있다. 그들이 강의준비를 하는 시간만 해도 한 학기의 강의시수를 훌쩍 뛰어넘는다.
그렇게 한 학기를 보내고 나면, 대개 ‘논문은 다음 학기에나 마감시켜야겠다’고 생각하고, 부차적 대상이 되곤 한다. 누군가는 방학을 이용해 연구에 매진하면 되지 않겠느냐 묻겠지만, 그렇게 여유 있는 시간강사는 흔치 않다. 4개월 단위의 계약이니 방학 중엔 월급이 나오지 않기에, 우선 생계를 꾸리는 것이 급하다. 나는 학기 중에도 강의가 없는 날은 맥도날드에서 아르바이트하고, 일주일에 한두 개의 번역 일감 같은 것을 받아 와 일한다.
‘연구’ = 최저임금 기준조차 없는 비사회적 단어
사실 ‘연구’는 무척이나 모호하고, 허울 좋고, 비사회적인 단어다. 노동행위로 인정받기 힘들뿐더러, 보수가 지급되는 경우도 극히 드물다. 연구뿐 아니라, 소설, 음악, 영화 등 모든 창작 활동이 그러하겠지만, 최저 시급의 기준조차 정할 수 없다. A4용지 한 페이지를 쓰는 데 하루가 꼬박 걸리기도 하고, 일주일, 길게는 몇 주일을 잡아먹는다.
그렇게 몇 개월, 몇 년을 연구해 학회지에 그 성과를 발표해도, 그 어떤 수입이 없다. 오히려 학회는 논문을 투고한 연구자에게 가입비, 연회비, 심사비, 게재비 등을 요구한다. 적게는 15만 원에서 많게는 40만 원 정도다. 그에 더해 보통 원고지 120매를 기준으로 1매 추가분마다 5,000원 정도를 더 받는다. 참담한 심정으로 자료 인용을 줄이고, 문단을 통으로 삭제한다. 그래도 언제나 140매는 넘어간다.
나는 지금껏 내 전공과 관련해 많은 글을 썼지만, 아직 한 번도 ‘글 값’을 받아 보지 못했다. 학술진흥재단의 연구자 지원 제도는 대부분 정규직 교수를 위한 것이고, 박사과정수료 신분의 시간강사가 지원할 수 있는 항목은 아예 없다. 물론 내 연구가 학진등재지에 게재 판정을 받고 좋은 연구자의 논문에 피인용 된 것을 봤을 때 느끼는 기쁨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을 만큼 큰 것이다. 하지만 연구자에게 연구는 어떠한 방식으로든 ‘숭고’가 아닌 ‘생계’가 되어야 한다. 역설적으로, 그래야 강의에 충실할 수 있다.
숭고가 아닌 생계
강의와 연구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은, 생계와 자존감이 뒤얽힌, 시간강사 개인에게는 가장 막중한 선택 중 하나다. 누군가 어느 편에 집중하기로 하든, 그것은 존중하지 않을 수 없다. 나태함과 관성화는 물론 비난받아 마땅하겠지만, 둘 모두 잘해낸다는 것은 그야말로 하나의 ‘사투’에 가까운 일이 된다.
나 역시 첫 학기에 지도교수를 찾아뵙고 강의 준비 때문에 당분간 논문에 집중하지 못할 것 같다고 말씀드렸다. 그리고 정말 한 학기 동안은 논문을 거의 쓰지 않았다. ‘강의보다는 연구’가 맞다 생각하면서도, ‘연구보다는 강의’의 삶을 살았다.
그것이 학생들을 위한 길이라고도 생각했다. 그래서 논문 마감이 얼마 남지 않았다거나, 학회 일정이 바쁘다거나, 아르바이트 때문에 몸이 힘들다거나, 다음 학기 임용에 확신이 없다거나, 하는 피로감은 접어 두고, 학생들과 대면했다.
교수들의 ‘해피캠퍼스’
나는 학기 초마다 학생들에게 ‘논문 인용법’에 대해 반드시 강의해 왔다. 그러면서 DBPIA와 RISS에 대해 알려 주고, ‘교수님들의 해피캠퍼스’ 같은 곳이라고 덧붙였다. 두 사이트에서는 학회지에 게재된 여러 논문을 검색해 다운로드 받을 수 있다.
어느 학기에는 몇몇 학생이 손을 들으며 말했다.
“교수님의 논문도 검색해 주세요.”
학생들에게 연구, 학회, 학진, 이러한 단어들에 대한 이해는 적을 테고, 그저 자신을 가르치는 교수자가 몇 편의 논문을 썼는가 궁금했을 것이다. 나는 논문 DB의 인문학 디렉터리에서 내 이름을 검색했고, 최근 나온 논문의 목록을 보여 주었다. 많지는 않지만, 그런대로 몇 편이 검색 되어 다행이었다.
그런데 여러 학생이 저마다 어떤 이름을 대며 검색해 보고 싶어 했다. 아마 그들의 각 수업을 담당하고 있는 교수일 것이다. 그때부터 나는 강의와 연구가 어떤 우선순위 없이 서로 연동하는 개념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대학 노동자로서의 존재 근거
석사 과정생 시절에, 대학 평가에 대비하기 위해 여러 학과 교수들의 연구업적을 정리하는 일을 했다. 내가 했던 대학의 많은 ‘잡일’ 중 하나다. 논문 DB에서 찾는 데는 한계가 있어서 이메일을 보내 최근 몇 년간의 연구 업적을 부탁했는데, 단 한 편의 논문이나 저서도 없다고 답한 교수들이 적지 않았다. 함께 일하던 동기는 “이 사람들은 왜 교수를 하는 걸까” 하고 중얼거렸고, 나도 같은 심정이었다.
“교수님의 논문도 검색해 주세요.” 하는 학생의 요구를 누군가는 무례함이나 당돌함으로 여길지 모른다. 하지만 돌이켜 보니, 몇 년간 한 편의 논문도 쓰지 않고 강의실에 서는 행위가 오히려 학생들에게 무례한 것이다.
나는 그저 평범한 연구자다. 논문의 편 수가 그다지 많은 것도 아니고, 훌륭한 연구를 했느냐 묻는다면 더더욱 아니다. 학과장의 말씀대로 강의도 잘, 연구도 잘, 하는 것은 아마도 무척 버거운 일이 될 것이다. 지금 하는 몇 가지 아르바이트를 당장 그만둘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하지만 그저 강의와 연구의 어떤 우선순위를 두지 않은 채, 강의실에서, 연구실에서, 스스로 부끄럽지 않을 만한 최소한의 노력을 지속해 나가려 한다. 대학을 배회하는 유령과도 같은 시간강사의 삶이건만, 강의실과 연구실에서만큼은 ‘노동자’로서 존재하고 싶다.
특히 강의실에서 느끼는 당당함도, 부끄러움도, 대학 인력시장의 이력서에는 남지 않겠지만, 스스로 이력서에는 남는다. “교수님의 논문도 검색해 주세요” 라는 학생의 요청에, 다음 학기에도 어떻게든 화답할 수 있어야 대학 노동자로서의 존재 근거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올리신 몇 개의 글을 읽다가 도저히 안 되겠어서 저도 올립니다. 부끄럽습니다. 그러나 강의를 준비하기 위해 후다닥 댓글만 남기고 해야 할 일로 돌아갑니다. 생계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에게 배우기 위한 강의실로 돌아간다는 생각을 하면, 억눌려 터질 것 같은 몇 개의 문장들이 다시 잠잠해지곤 합니다. 그렇게 버티고 공부해야 합니다. 그렇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