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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병의 유행을 증폭시키는 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다. 유전적 소인이나 생활습관 같은 개인적인 부분부터 사회적 불안정이나 기후변화 같은 거대한 요인들도 있다. 이 글에서는 이주노동과 감염성 질환, 특히 HIV(Human Immunodeficiency Virus; 에이즈 바이러스)의 문제를 이야기해 보려고 한다.

출처: Sohel Parvez Haque, hiv. CC BY 2.0
출처: Sohel Parvez Haque, hiv. CC BY 2.0

HIV는 다양한 요인으로 퍼져나간다. 개인적인 생활 습관도 있고, 사회적인 요인들도 있다. 여전히 주류의 시각은 HIV를 개인의 문제로 취급하곤 하지만, 그 이면에는 훨씬 복잡한 뿌리들이 자리하고 있다. 그중 하나가 이주노동이다. 특히 남아프리카, 그리고 남아공 인근의 사례를 중점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남아공, 전 세계에서 HIV 유병률이 가장 높은 나라

남아공은 전 세계에서 HIV 유행이 가장 심한 곳이다. 사회적 불안정성이 높고, 다양한 위험요인에 노출되는 인구가 많은 지역은 다른 곳에서도 발견된다. 하지만 “왜 남아공에서는 이렇게 심각한 문제가 나타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많은 이론이 경쟁하고 있다.

남아공에서는 1980년대 후반부터 HIV가 거대한 유행으로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1999년 기준으로 성인 HIV 유병률(기준 기간 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의 비율)은 19.94%였으며, 현재는 18.5%, 그리고 HIV에 감염되어 살아가고 있는 인구가 570만 명가량으로 추정된다. 남아공 인근의 소국들은 상황이 더 심각하다. 스와질란드의 성인(18~45세 사이) 유병률은 26%에 달한다. 길에 걸어가는 성인 세명 중 한 명은 HIV에 감염되어 있다는 의미다.

출처: 라이프 매니지먼트 온라인
출처: 라이프 매니지먼트 온라인

인종차별의 역사를 가진 남아공

남아공에서의 이주노동, 그리고 HIV 유행을 살펴보려면 남아프리카의 역사를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남아공은 독특한 국가다. 수 세기에 걸쳐 진행된 식민지와 인종차별의 역사는 제도적이고 법제화된 차별이 성행하도록 만들었다. 그 정점이 바로 1948년 법제화된 “아파르트헤이트”다.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 남아공의 유색인종 차별정책)는 200여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체계적으로 파괴된 사회 구조의 결과물이라 볼 수 있다. 또한, 이를 통해 제도화한 여러 가지 규정들은 남아공 인근 국가뿐만 아니라 남아공 내부에서도 취약 계층에게 일상화한 장거리 이주 노동을 강제했다. 게다가 남아공의 경제성장과 더불어 급속도로 진행된 도시화도 사람들의 이주를 가속화시켰다.

1913년 제정된 원주민토지 법(Native Land Act)으로 백인들은 원주민의 땅을 빼앗았다.
1913년 제정된 원주민토지 법(Native Land Act)으로 백인들은 원주민의 땅을 빼앗았다.

남아공의 역사를 잠시 살펴보자. 남아공은 15세기 이후 대항해시대 유럽-아시아 무역의 중심 통로였다. 수에즈 운하 건설 전까지 케이프타운을 거치지 않고는 무역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물론 당시에는 여행이 아닌 물자수송이 중심이었기 때문에 당시 도시를 건설하고 지배권을 행사하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기업에 의한, 기업을 위한, 기업의 도시로 번성했다.

이곳은 해양무역 중심지였으므로 당시 대부분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초기 정착민들은 해안가에만 머무르고 있었다. 하지만 1814년을 전후로 하여 역사가 급변하기 시작했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 영국이 전리품으로 케이프타운 일대의 지배권을 획득하기 때문이다.

더불어 수천 년에 걸쳐 진행된 ‘반투(Bantu) 대이동’의 마지막과 겹치며 다수의 아프리카 내부 이주민들이 남아프리카로 밀려들었다. 덕분에 내륙에서 밀려난 정착민, 반투족, 그리고 영국까지 뛰어들어 경쟁이 심해졌으며, 이런 경쟁에서 군사력의 우위를 지닌 영국은 폭압적인 지배를 시작한다.

다이아몬드, 남아공을 뒤흔들다

역사의 파란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867년 오렌지 프리 스테이트(남아공 중앙 지역)에서 다이아몬드가 발견되었다. 이 사건은 남부 아프리카의 역사를 뒤흔들었다. 불과 몇 년이 지난 1872년에는 다이아몬드 채굴을 위한 도시들이 빠르게 건설되어, 50,000명 이상이 여러 신도시에 거주했다. 특히 노동력 집약이 높은 광산 채굴을 위해 내륙에서 노동력을 강제로 끌어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주로 목축을 하고 있던 현지 주민들은 열악한 노동환경에 들어가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도에서까지 노동력을 끌어 와야 했다. 이런 여러 가지 배경들은 현재의 복잡한 남아공의 인종·언어 구성이 탄생하는 배경 중 하나가 된다.

출처: Justin Krebs, Blood Diamonds Are Forever. CC BY-ND 2.0
출처: Justin Krebs, Blood Diamonds Are Forever. CC BY-ND 2.0

광산 도시들의 탄생과 다이아몬드라는 압도적인 자본력이 집결하면서 상황은 점점 취약계층에게 힘든 쪽으로 굴러갔다. 노동집약적 구조와 자본, 물리적 힘이 특정 집단에 집중됨에 따라 소수 백인의 지배가 공고히 굳어지며 인종차별 정책이 제도화하고 법제화했다.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에서는 누가 투표할 수 있고, 누가 어디서 어떻게 주거할 수 있으며, 어떤 일을 할 수 있고, 교육과 의료 혜택은 어떻게 돌아가며, 누구와 결혼하고, 누구와 성관계를 맺을 수 있는지까지 결정했다.

토착민의 이주를 종용하는 백인들의 정책

이 중 이주노동과 연관된 규정은 이러했다.

“반투는 유럽인 거주지에 노동력을 제공하는 동안만 머무를 수 있다. 노동을 제공할 수 없는 상황이 되면 원래 거주지나 국가로 돌아가야 한다.”

– 남아공 정부, 1967년

즉 노동력을 제공하는 사람에게만 이동을 허락하는 셈이다. 대부분 이런 경우 가족을 고향에 두고 타지로 이동하여 노동력을 제공해야 했다. 결과적으로 이주노동을 강제하는 법적 조항이었던 셈이다.

규정은 ‘어디서 살아야 하는지’도 정했기 때문에 토착 거주민들은 계속해서 정권이 지정한 거주지역으로 밀려들어 가야 했다. 당시 71%의 지방 거주민들은 14%의 땅에 살고 있었고, 나머지 땅은 불과 6만 7천여 명의 백인들이 가지고 있었다. 토착 거주민들은 좁은 지정 거주지역으로 몰려나며 생활환경은 갈수록 열악해지고, 전통적인 목축이나 농업 등에 기댈 수 없어졌기 때문에 경제상황도 나빠졌다.

남아공 백인과 토착민의 인구 비율과 거주 지역 넓이 비율

전통적인 가치와 문화들이 무너졌던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지정 거주구역에서는 도저히 생활을 영위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남성들은 돈을 벌기 위해 도시지역으로 이동해야 했다. 도시로 밀려온 이들은 열악한 기숙사에 머물렀다. 법적으로 가족을 동반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이런 생활을 지속하며 도시와 지방에 모두 부인을 두는 것이 흔했으며, 기숙사를 중심으로 성매매가 늘어났다. 기본적인 생활환경은 열악하고 의료서비스는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에 성매개 질환도 흔했다.

이주노동의 역사는 에이즈의 역사

당시 이주노동 현황을 보자. 1985년 남아공 내에서 1,833,636명이 ‘이주자’로 분류되어 있었다. 남아공 내부에서만 이주노동자가 많았던 것이 아니었다. 남아공은 남부 아프리카에서 가장 경제규모가 큰 국가다. 1998년 기준으로 일 인당 평균 소득은 모잠비크 210달러, 레소노 570달러, 남아공 3,310달러였다. 이러한 기반을 토대로 남아공은 주변 국가들에서 노동력/이주노동자를 흡수하는 스펀지가 되었다.

바츠와나에서 27,814명, 바소토에서 139,827명, 말라위 30,144명, 모잠비크 68,665명, 스와지 22,255명 등 20만 명이 넘는 해외 이주노동자들이 노동력을 제공하고 있었다. 특히 대체로 이런 국가들에서는 공식집계에 잡히지 않는 비공식 이주노동자가 압도적으로 많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주노동자로 살고 있는지는 짐작조차 쉽지 않다.

노동자의 손

이주노동의 역사와 함께 에이즈의 역사는 이 지역의 역사를 반영한다. 이런 여러 가지 역사적 배경들이 HIV를 비롯한 성매개 질환이 퍼지기 좋은 최적의 환경을 제공해 왔기 때문이다. 이주노동자들의 생활환경은 군대 막사를 연상시킬 정도로 열악했기에 성매매 이외에는 별다른 취미활동을 찾지 못할 정도였다. 이런 남성들을 대상으로 대규모 성매매업소들이 기숙사 주변에 생겨났다.

남성들이 성매매하며 파트너의 숫자가 늘어나자 남성들뿐 아니라 성매매 여성들도 HIV에 취약해졌다. 감염은 일상화되었으나 이에 대한 예방이나 치료를 제대로 받기 어려웠다. 더군다나 광산에서 현금으로 꽤 괜찮은 소득을 올리고 있는 남성과 이들을 통해 소득을 올려야 하는 성매매 여성 사이에서는 강력한 상하 권력관계가 생겨나는 바람에 여성들이 콘돔 사용을 권하는 등 남성에게 안전한 성관계를 강요할만한 여지가 없었다. 이렇듯 취약한 환경에서 HIV에 감염된 남성은 이주노동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 또 다른 지역적 유행을 만들어냈다.

그뿐만 아니라 아파르트헤이트 정권하에서 전통적인 가치의 붕괴와 반복되는 폭력은 사람들에게서 희망을 앗아갔다. 물리적 폭력이 만연하는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폭력에 취약한 여성들은 ‘물리적 보호’를 대가로 성관계를 제공하는 경우도 많았다. 게다가 에이즈에 대한 인식도 바꾸기 어려웠다.

“에이즈가 10년 후에 나를 죽인다고 한들, 뭐 어쩌라고? 그냥 될 대로 돼라지.”

계속된 사회 불안정과 분쟁은 폭력을 내재화하게 했고, 그만큼 여성들은 성폭력과 폭력에 쉽게 노출됐다.

칼턴빌 사례: 불안정한 사회가 HIV 감염을 촉발한다

이런 일련의 흐름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가 하나 있다. 요하네스버그에서 100km 떨어진 칼턴빌(Carletonville)이라는 광산도시에서 벌어진 일이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내 칼턴빌 위치

90년대 후반 칼턴빌 내에서는 60%의 청소년기 여성들이 HIV에 감염되어 있었고, 도시 여성의 50%는 성매매를 하고 있었다. 남성의 HIV 감염률은 제대로 집계되지도 않았다. 남성과 여성을 막론하고 성관계를 맺는 파트너의 수도 다른 지역에 비해 높았고, HIV나 성매개 질환 검진도 제대로 받지 않았으며, 알콜 소비량도 많았고, 폭력이 만연했으며, 사회적 관계망도 별로 없었다. 이들에게는 ‘안정적인 삶’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심각한 HIV 유행을 확인한 이들은 왜 이 지역에서 HIV 감염률이 압도적으로 높은지를 살펴보았다.

몇 가지 흥미로운 경향들이 나타났다. 남성들의 경우 스포츠클럽 가입 여부나 포경 여부가 감염률에 영향을 미쳤고, 여성의 경우 교회나 각종 모임 등에 정기적으로 참여하고 있는지에 따라 감염률에 차이가 났다. 삶은 위험하고(특히 광산업에 종사하는 경우), 자주 이동해야 하며, 즐길 거리가 별로 없고, 성매매에 지불하는 비용이 상대적으로 낮다면 HIV가 만개한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경향은 같다. 사람들이 안정적인 관계를 가질 기회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안정적인 관계가 사라진다면 HIV 감염에 취약해질 수 있는 여러 가지 위험요인도 함께 높아지기 때문이다. 위험요인으로는 다수의 파트너, 강압적인 성관계, 콘돔 사용 여부, 정기적인 검진, 성매개 질환 감염 여부(성매개 질환에 감염되어 생식기에 병변이 있으면 HIV 감염 위험도 커진다) 등이 있다.

이주노동을 권하는 지금의 세상

칼턴빌의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 안정적인 사회, 그리고 사람들 간의 관계는 질병의 유행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HIV의 경우 파트너의 숫자, 위험한 성관계 등이 영향을 미치는데 그중에서도 이주는 이런 위험에 취약하도록 만든다. 안정적인 삶의 기회를 많이 앗아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 세계 사회는 이런 이주노동을 권하는 사회다. 많은 지역사회는 이주노동자들이 송금해오는 돈으로 경제를 지탱하고 있으며, 이는 벗어날 수 없는 굴레를 만들고 있다. 꼭 경제적 속박이 아니더라도 질병의 측면에서도 그렇다.

아주 먼 이야기가 아니다. 당장 월세가 올라서, 회사에서 강제로 발령을 받아서, 학업 혹은 일자리를 찾아서 삶의 터전을 옮겨야 하는 우리가 모두 이방인이고 이주민의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

“서로 다르지 않아요. 우리는 모두 이주민이에요. 어디에 있건 간에.”

[이주, 그 먼 길] 중에서

출처: Jeremy hunsinger, Capitalism Kills Love . CC BY 2.0
출처: Jeremy hunsinger, Capitalism Kills Love . CC BY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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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댓글

  1. 현대사회에서 노동자의 이주는 과거에는 주로 정치적인 이유가 주류를 차지했지만 오늘날에는 노동시장에서의 수요-공급을 메우려는 측면이 상당히 강하죠.(물론 과거의 대규모 이주의 원인에서 경제적 이유가 없었던것도 아니고, 지금의 이주에서 정치적 원인이 없는것도 아닙니다만 어디까지나 비중의 이야기를 하는겁니다.)

    개인적으로 과거 정치적 이유로인한 대규모 이주에비해 오늘날의 경제적 이유로인한 이주가 주류를 이루고있는 현 사회는 앞으로 이런 공동체의 파괴와 그로인한 부작용의 문제를 더욱 가속화시킬 수 있다고보는데, 왜냐면 과거의 이주가 주로 대규모 공동체단위로 한 사회에서 다른 사회로 이주하는 방식에 가까웠다면 현대의 경제적 이유로인한 이주는 개별 노동자가 개인화, 파편화된 방식으로 이주가 이루어지는게 대부분이고 이는 이주과정에서 발생하는 공동체형성의 어려움, 더 나아가서는 공동체의 파괴에 더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보기때문입니다.

    물론 이른바 세계화라던가 개방이라는 흐름속에서 이주 자체를 막긴 어려운게 사실입니다만 이러한 급격한 흐름이 그 자체로 단순히 개별 공동체에만 영향을 미치는게 아니라 각종 충돌과 갈등에 있어서 공동체들이 적절한 제동의 역할을 수행하기 어렵게하기도한다는 점에서 이런 부분에대한 고민이 앞으로 필요하지않을까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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