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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x type=”note” ] 널리 알려진 사람과 사건, 그 유명세에 가려 우리가 놓쳤던 그림자, 그 속에 담긴 의미를 이상헌 박사‘제네바에서 보내온 편지’에 담아 봅니다. (편집자) [/box]

브라질에서 축구는 ‘푸테보우'(Futebol)이다. 그럴듯하게 포르투갈어로 번역할 법도 한데, 굳이 어정쩡한 영어식 외래어를 썼고, 그렇게 정착했다. 축구 수입과 그 극복의 역사를 기억하려는 고집일 테다. 그들이 지금, 그들이 사랑했던 축구를, 축구장을, 그리고 이를 둘러싼 부패, 정치, 착취를 불태우려 한다. 축구가 위험하다. 브라질이 위험하다.

브라질의 축구 영웅 가린차(1933-1983)의 모습이 새겨진 깃발 (사진: 위키커먼즈)
브라질의 축구 영웅 가린차(1933-1983)의 모습이 새겨진 깃발 (사진: 위키커먼즈)

가난과 고통, 백인의 폭력 속에서 태어난 ‘예술 축구’

브라질 축구는 ‘예술 축구’다. 현란한 드리블이 그 정점에 있다. 하지만 그 예술은 고통과 가난에서 나왔다. 독립(1822년)했지만 여전히 식민지의 유산이 짙게 드리운 브라질에 스코틀랜드인이 축구를 수입했다. 1870년 즈음이었다. 신기하기만 했던 브라질 사람에게는 공도 없고 축구장도 없었다. 해어진 양말을 똘똘 말아서 길거리에서 찼다. 바닥도 고르지 않고, 규칙도 없으니, ‘창조적’으로 축구를 했다.

제법 잘하는 이들이 나오자, 백인들과 축구할 일이 생겼다. 식민지 경영의 노곤한 삶에 지친 백인들에게는 제법 흥밋거리였다. 그렇다고 지는 걸 좋아할 리 없었다. 브라질 선수가 백인 몸에 조금이라도 부딪치는 일이 있으면, 규칙보다 주먹이 앞섰다. 그래서 브라질 거리축구 선수들은 백인들과 접촉하지 않고, 공을 요리조리 몰고 다는 게 상책이라는 걸 알게 된다.

유럽인처럼 지저분하게 밀고 당기지도 않으면서, 현란하게 마치 삼바를 추는 듯 공을 다루는, 그 예술 축구가 그렇게 생겨났다. 백인들에게 두들겨 맞거나 보복당하지 않으면서, 이길 수 있는 법이었다. 그들에게 축구는 곧 식민 착취였고, 동시에 착취에 저항하는 몸부림이었다.

브라질이 펠레보다 사랑한 축구 선수 ‘가린차’

브라질 사람들이 꼽는 최고의 축구선수는 펠레가 아니다. 가린차 (Garrincha)다. 1950년대와 60년대에 펠레와 브라질의 영광을 이끌었던 선수다. 여느 선수처럼, 가난한 노동자 가족 출신이다. 게다가, ‘불구’가 된 다리를 가졌다. 오른쪽 다리는 안쪽으로, 왼쪽 다리는 바깥쪽으로 휘었다 (사진 참조).

불구의 다리로 최고의 예술 축구를 보여준 가린차
불구의 다리로 최고의 예술 축구를 보여준 가린차

축구할 만한 몸이 아니겠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런 다리 덕분에, 그가 공을 몰고 가면, 상대방은 그가 어느 방향으로 갈지 예측하는 게 불가능했다. 뒤뚱거리며 공을 몰고 가는 가린차를 어이없이 놓치고, 허망하게 그의 뒷모습도 보아야 했다. 폭소, 흥분, 이 모든 것을 관중에게 선사했다. 온 국민이 그를 사랑했다.

1962년 월드컵에서 갈지자 드리블을 보여주는 가린차 (사진: 위키커먼즈)
1962년 월드컵에서 갈지자 드리블을 보여주는 가린차(왼쪽) (사진: 위키커먼즈)

하지만 축구는 착취의 여신이다. 가린차를 내버려 두질 않았다. 수많은 여인들이 그를 따랐고, 그는 마다하질 않았다. 결혼도 했으나, 순탄치 않았고, 태어난 애들마저 애꿎은 운명을 맞았다. 술은 그의 친구가 되었고, 과음은 일상이 되었다. 이 모든 것에 끝이 있기 마련. 가난과 병고. 그는 결국 술에 쓰러진다. 그의 나이가 겨우 50살 즈음에. 그는 축구를 사랑하고 정복했으나, 인생에 속수무책이었다.

“세상 모든 이를 웃게 하더니 이제 모두를 울리는군요”

그의 장례식은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나왔다. 그의 찬란하고도 비참한 인생은 카니발 같은 인생을 살아가는 모든 브라질 사람에게 너무나 친숙한 것. 그 친숙함이 모두를 울렸다. 플래카드가 내걸렸다. “당신은 세상의 모든 이들을 웃게 하더니, 이제 우리 모두를 울리는군요.” 그들은 그의 죽음을 탄식하며, 또 자신의 삶을 탄식했다. 그렇지만, 축구는 계속되었다.

가린차를 기리는 장례 행렬 (1983, 출처 미상)
가린차를 기리는 장례 행렬 (1983, 출처 미상)

다시 축구가 브라질을 울린다. 축구를 살아가는 브라질 사람들이 축구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부패와 착취에 저항하며, 연일 거리를 점거한다. 그들이 사랑하는 축구 스타디움까지 봉쇄했다. 그 옛날 식민지 시절에도, 백인들을 요리조리 농락하며 압도하기는 했으나, 축구장을 막지 않았다. 그 엄혹한 시절에도 예술 축구를 만들었다.

2013년 6월 브라질 시위에서 경찰은 브라질이 사랑하는 축구장마저 봉쇄했다. 단 한번도 없었던 일이다. (사진: Semilla Luz, CC BY)
2013년 6월 브라질 시위에서 경찰은 축구장마저 봉쇄했다. 식민지 시절에도 축구장을 막지는 않았다. (사진: Semilla Luz, CC BY)

하지만 부패와 무능 그리고 낭비의 상징이 된 축구장은 이제 그저 콘크리트 덩어리일 뿐이다. 그래서 불태우고 봉쇄한다. 축구는 다시 한 번 착취의 상징일 뿐. 또, 그래서 아마도 지금, 많은 브라질 사람들이 가린차를 떠올릴 것이다. 부패의 상징이 된, 또 다른 축구 영웅 펠레를 보면서…

브라질 소년들과 함께 걷고 있는 가린차 (출처 미상)
브라질 소년들과 함께 걷고 있는 가린차 (출처 미상)

[box type=”info”]지난 2013년 6월 브라질에서 개최된 컨페더레이션스컵 기간에 6개 도시 80만 명이 참여하는 대규모 시위가 있었다. 시위대는 대중교통요금 인상에 항의했고, 구호는 점차로 공공서비스 개선에 더해 ‘월드컵 개최 불가’로 이어졌다.

2013년 6월 컨페더레이션스 컵 시즌에 ‘공공서비스’ 개선과 ‘월드컵 취소’를 요구하며 거리를 점령한 시위대의 모습 (사진: Semilla Luz, CC BY)

최근 펠레는 “축구와 정치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면서 월드컵 기간에 정치적인 시위를 벌이는 것은 옳지 않다고 시위대를 간접적으로 비난한 바 있다. 2014년, 브라질 12개 도시에서 월드컵이 열린다. 하지만 현재 완공된 축구장은 7개뿐이다. (참고 기사: 연합뉴스, 2014년 2월 7일)

이 칼럼은 컨페더레이션스컵 당시의 시위를 배경으로 쓴 글을 퇴고한 것이다. (편집자)[/bo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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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댓글

  1. 흥 미로운 글 잘 보았습니다. 지금 브라질은 어떨지 궁금하네요. 월드컵이 코앞인데…

  2. 글 잘 봤습니다
    아~ 정말 흥미로우며 가슴 시린 글입니다
    지금 큰 슬픔에 저항하는 이들의 삶이 월드컵 이후 나아지길 바랍니다
    이 글에서도 브라질 축구의 ‘가린차’ 와 그들의 삶의 이면을 볼 수 있어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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