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텍스트] 상속세 3000억 원 못 내서 가업 승계 포기… 코리아 디스카운트 요인, 마일리지형 세제-종업원 소유 등 보완 필요. (⏳4분)

생활가전 렌탈업체 청호나이스가 글로벌 사모펀드(PEF, Private Equity Fund) 칼라일에 매각을 검토하고 있다.
지난해 6월 정휘동(회장) 별세 후 약 3,000억 원 규모의 상속세가 발생하면서 유족들이 재원 마련을 위해 매각을 추진하는 것이다. 업계에서는 고용 불안, 매각 후 기업 경쟁력 저하 등을 우려한다.
청호나이스 노조는 15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노동자를 배제한 채 진행 중인 매각 절차를 즉각 중단하고, 매각 현황에 대한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할 것을 촉구한다”고 밝혔다.
이게 왜 중요한가.
- 국내 중견기업이 직면한 ‘상속세의 벽’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건이다.
- 1993년 청호나이스를 설립한 정휘동은 지난해 67세 일기로 갑작스레 별세했다. 정휘동은 지분 75.1%를 보유한 지배주주였고, 동생 정휘철(부회장)이 8.18%, 마이크로필터가 13%를 갖고 있다. 마이크로필터 지분의 80%도 정휘동 소유다.
- 현재는 부인 이경은이 회장직을 승계해 회사를 이끌고 있다. 이경은과 아들이 상속받은 지분에 부과되는 상속세는 3000억 원에 육박한다. 지분 매각을 통한 재원 마련이 불가피하다는 게 유족 판단으로 알려졌다.
“미국·일본의 나쁜 점만 남았다.”
- 한국 상속세는 OECD 국가와 비교해서도 높은 수준이다. 상속세 최고세율은 50%다. 최대 주주 할증까지 포함할 경우 60%에 달한다. 상속세가 존재하는 OECD 주요국 평균 세율은 20% 내외다.
- 정석윤(한양대 경영대 교수)은 8일 국회 토론회에서 “한국은 미국과 일본의 나쁜 점만 골라 담았다”고 비판했다.
- 미국은 한국과 같이 피상속인의 전체 재산에 일괄 과세하는 유산세 방식이지만, 1인당 면제 한도를 약 1,360만 달러(약 200억 원)로 설정하고 다양한 절세 수단을 허용한다. 한국은 ‘일괄공제 5억 원’이 25년째 동결 상태다.
- 일본도 상속세 최고세율이 55%에 준한다. 그러나 일본은 유산취득세 방식으로 상속인 각자가 실제 취득 금액에 비례 과세한다. 한국과 비교해 부담이 분산되는 효과가 있다.


‘상속세 장벽’에 막혀 매각 수순.
- 이름만 들어도 아는 국내 중견기업이 상속세 이슈 등으로 가업 승계가 막힌 뒤, 매각 절차를 밟는 사례가 적지 않다.
- 국내 1위 밀폐 용기 업체 락앤락이 대표적이다. 2017년 창업주 김준일(락앤락 회장)은 4000억 원이 넘는 상속세 부담 때문에 가업 승계를 포기하고 홍콩계 사모펀드에 회사를 넘겼다. 국내 1위 가구업체 한샘도 2021년 상속세 부담과 승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가업 승계를 포기하고 사모펀드에 경영권을 매각했다.
- 손톱깎이 기업 쓰리쎄븐, 종자회사 농우바이오, 콘돔 제조업체 유니더스 등도 상속세 이슈가 나올 때면 회자되는 기업이다. 모두 매각의 길을 선택했다.
- 이재용(삼성전자 회장)을 포함한 삼성그룹 일가가 이달 안에 12조 원 규모의 상속세를 완납할 전망이다. 중견기업 사정은 전 세계 수익 1위 기업관 다르다. ‘가업 승계 포기’가 현실에 가깝다. 자본시장연구원에 따르면, 상속세 부담과 후계자 부재로 제3자 매각을 고려하는 중소·중견기업은 약 21만 개에 달한다.

‘부자 감세’라는 강력한 프레임.
- 보수와 경영계는 상속세를 ‘징벌적 과세’라 비판한다. 노동계와 진보는 ‘부의 대물림 방지’라는 당위로 충돌한다. 집권 여당인 민주당이 상속세 인하를 쉽게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는 이유는 ‘부자 감세’라는 프레임이 워낙 강력해서다.
- 한 번 설계된 세금은 쉽게 없앨 수 없다. 상속세 역시 유지하되, 현재 중견기업이 겪고 있는 가업 단절 위기를 완화할 방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준비되지 않은 기업 매각엔 고용 불안과 경쟁력 저하가 뒤따를 수 있기 때문이다.
- 박훈(서울시립대 세무대학 교수)은 “기업 유지는 지역 경제 활성화, 고용 안정 측면에서 매우 중요하다”며 “상속세와 가업 승계 문제를 ‘부자 특혜’로만 보면 논의가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기 힘들다”고 했다.
- 조봉현(전 IBK기업은행 부행장·IBK경제연구소장)은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반(反)기업 정서가 존재하며, 가업 승계를 ‘부의 대물림’으로 보는 시각이 강하다”며 “가업 승계는 단순한 부의 이전이 아니다. 경영 노하우, 기업 가치, 고용, 기술, 거래 관계·기업 문화 등 축적된 경제적 자산과 책임의 이전이라는 점에서 재인식이 필요하다”고 했다.
- 높은 상속세는 코리아 디스카운트 요인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상속을 앞둔 대주주 입장에서 주가가 오르면 낼 세금만 늘어난다. 대주주가 기업 실적을 개선하거나 배당을 늘려 주가를 높일 유인이 떨어진다. ‘코스피 8000’을 바라는 민주당(정청래 대표) 입장에서도 상속세 개편은 토론할 가치가 있다.
해법과 대안.
- 생각해볼 수 있는 여러 대안들이 있다. 조봉현은 가업 승계 시 책정한 상속·증여세를 후계자가 기업 투자로 전환 대체하고 그만큼 상속·증여세에서 공제하는 방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 독일식 가업 상속 모델도 대안일 수 있다. 독일은 기업이 일정 기간 고용과 사업을 유지하면, 매년 일정 비율의 세금을 감면해 상속세 부담을 덜어준다. 기업이 과거 납부한 법인세 등 기여도를 반영하는 것도 방법이다. 이를 반영해 가업 승계 시 상속·증여세를 감면하는 마일리지형 세제도 고민할 수 있다.
- 이와 다른 차원의 대안도 있다. 가족 승계만 우대하거나 외부 매각만 촉진하는 현재 틀에 ‘종업원 소유’라는 제3의 경로를 넣어야 한다는 것.
- 이동한(민생연대 정책위원)은 “기업 승계를 상속세나 M&A 절차 문제로만 보지 말고, 소유 구조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 문제로 보아야 한다”고 했다. 종업원 소유를 제도화하면, 한국 경제의 소유 구조를 더 넓고 건강하게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