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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차이나타운은 한국에서 가장 ‘대표적인 이국적 공간’으로 소비된다. 주말이면 수많은 관광객이 몰려 홍등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짜장면의 기원을 설명하는 설치물을 들여다보며, 붉은 대문과 용 조형물 앞에서 ‘여기만 오면 중국 같다’고 말한다. 이 감탄과 소비의 장면은 늘 반복되지만, 이 공간의 작동 방식을 제대로 질문하는 경우는 드물다.

‘자발적 게토’

게토(ghetto)“소수 인종이나 소수 민족, 또는 소수 종교집단이 거주하는 도시 안의 한 구역을 가리키는 말”이다. 역사적으로 게토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의 유대인 탄압이 그랬던 것처럼, 강제성을 내포한다. 그러니 ‘자발적 게토'(voluntary ghetto)라는 말은 의미로 보면 모순적이다.

하지만 나는 이 말을 인천 차이나타운을 설명하기 위한 ‘개념적 도구’로 쓰고자 한다. 차이나타운을 둘러싼 담론, 그 환상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누구에게 유리하게 작동하며, 어떤 현실을 지우는지를 이 용어를 중심으로 분석하고자 한다. 인천 차이나타운에 대한 인식은 ‘자발적 게토’가 내포한 형용 모순의 관계처럼 모순적이고, 또 위장적이며 전략적이다.

‘자발적’ 공동체라는 신화

게토라는 말은, 앞서 설명한 것처럼, 원래 타자화된 집단이 외부적 강제·배제 속에서 특정 지역에 밀집하게 되는 현상을 말한다. 그런데 ‘자발적 게토’라는 개념은 역으로, 그 구조적 강제가 마치 개인의 자유의지나 공동체의 자율성으로 만들어진 것처럼 설명한다. 인천 차이나타운은 오랫동안 이런 방식으로 이야기되어 왔다. 하지만 실제 역사를 들여다보면, 이 공간은 스스로 만들어진 적이 거의 없다.

  1. 첫째, 조계지 시대에 화교들이 정착한 것은 ‘중국적 공동체를 만들고 싶어서’가 아니라 제국의 군사·경제적 균열이 만든 강제적 공간 분리의 결과였다.
  2. 둘째, 해방 이후 한국 정부의 반중 정책과 화교 경제 억압 정책은 이들을 도시의 중심에서 더 멀어지게 만들었다.
  3. 셋째, 1990년대 이후 도시 개발과 관광 정책은 차이나타운의 ‘중국성’을 국가적 브랜드로 재포장했고, 이는 주민의 실제 삶과 거의 무관한 상업적 이미지 생산이었다.

즉, ‘자발적’이라는 단어는 이 모든 구조 조건을 무시하고, 마치 주민들이 스스로 선택해 고립적 공간을 만든 것처럼 은폐한다. 자발성은 가짜이며, 선택은 좁혀진 공간에서의 ‘강요된 선택’에 가깝다.

인천 차이나타운 조감도

현재의 차이나타운은 단지 중국풍 관광지 이상의 과거를 지닌다. 인천 개항은 조선 말기 불평등 조약 속에서 이루어졌고, 청·일 제국은 인천을 서로의 영향력 아래 두기 위해 조계지를 설계했다. 조계는 단순한 행정구역이 아니라 타자를 구획하고 감시하기 위한 경계의 기술이었다. 이 공간 배치는 오늘날까지도 도시의 뼈대처럼 남아 있으며, 차이나타운의 형성과 재분배 과정에서 결정적 역할을 했다.

해방 이후에도 화교들은 도시의 중심부를 자유롭게 이동할 수 없었고, 반중 정책의 여파로 화교 학교·상권은 수십 년간 쇠퇴했다. 일부 주민은 자영업이나 요식업으로 생계를 이어갔지만, 이 공간은 이미 ‘한국인도 중국인도 아닌’ 변두리와 중심의 사이, 경계적 삶(marginal life)을 살아야 했다.

이 역사를 ‘자발적 게토’라는 말로 포장하는 것은 식민주의적 도시 배치와 국가의 차별 정책을 지우는 것과 다르지 않다.

관광도시의 욕망이 만들어낸 ‘중국풍 이미지’

한국의 차이나타운은 실제 중국 도시나 화교 커뮤니티의 생활과는 상당히 다르다. 오히려 관광 자본이 요구하는 이국적 상징들을 과잉으로 배치한 공간, 즉 관광 가능한 중국성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인천시는 1990년대 후반부터 이 지역을 ‘문화·관광 특구’로 개발하면서 중국풍 조형물, 한자 간판, 붉은 색채를 전략적으로 도입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실제 이주민의 삶, 지역 공동체의 역사, 화교 사회의 사회적·경제적 조건이 거의 반영되지 않았다. 관광객이 ‘보고 싶어 하는 중국’―신화화된 중국, 정형화된 이미지의 중국―이 우선시되었고, 주민은 그 이미지의 배경 인테리어처럼 취급되었다.

관광도시는 타자를 소비 가능한 형태로 재현한다. 일종의 이국성의 테마파크화다. 차이나타운은 한국 관광 산업의 욕망 위에 배치된 ‘중국의 모형 도시’이며, 그 안에서 현실의 화교·중국동포의 삶은 종종 보이지 않게 된다.

‘자발적 게토’라는 말은 종종 이렇게 설명된다. 중국인들이 서로의 언어·문화·음식을 공유하기 위해 이곳에 모여 살며 형성된 공동체. 하지만 현실은 훨씬 더 복잡하다. 많은 이주민은 한국 사회에서 언어적 장벽, 주거 차별, 고용 불안정을 겪는다. 대부분의 외국인 노동자는 수도권 중심지에 쉽게 접근할 수 없으며, 저렴한 임대료와 지인 네트워크, 고용의 편리성 때문에 특정 지역에 머무르게 된다. 이것은 자유로운 선택이라기보다는 구조적 제약에 대한 합리적 대응이다.

차이나타운은 그 제약이 누적되면서 ‘중첩된 배제의 공간’이 되었고, 그 결과 나타나는 밀집 현상을 ‘자발성’으로 해석하는 것은 폭력적이다. 이런 해석은 “그들 스스로 원했다”는 식의 책임전가 논리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는 마치 불안정한 노동자가 플랫폼 일을 선택한 것을 ‘유연하고 주체적 선택’으로 미화하는 것과 동일한 방식이다.

플랫폼 경제가 지배하는 이국적이고 안전한 한국 소비도시

인천 차이나타운은 한국 도시에서 일종의 감정적 소비 공간으로 작동한다.

  • 이국적이지만 통제 가능하고
  • 타자적이지만 위험하지 않으며
  • 현실의 이주민은 보이지 않고
  • 상징적 중국성만 소비된다

이 감정 구조는 관광 소비뿐 아니라 국가의 타자화 담론, 미디어 속 중국 이미지, 최근 한·중 관계의 긴장과도 맞물린다. 차이나타운은 정치적 중국이 아니라, 관광객이 안심하고 ‘즐길 수 있는 중국’을 제공한다. 즉, 이것은 중국인 없는 중국성이다.

감정 정치의 핵심은 ‘무해한 타자화’다. 실제 이주민의 빈곤, 차별, 생계 문제는 관광의 프레임 바깥에 놓인다. 이 공간에서 소비되는 것은 음식과 이미지, 즉 중국을 상징하는 감정적 기호들이다.

최근 몇 년간 차이나타운의 변화는 관광이 아니라 플랫폼 자본이 중심에 있다. 배달앱, 인스타그램 리뷰, 네이버 지도 평점, 유튜브 숏폼이 이 구역의 흥행도를 결정한다. 알고리즘은 특정 음식점·거리·간판을 반복적으로 노출시키며 관광 트래픽을 집중시키고, 이는 공간을 다시 재편한다.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는 다음과 같다.

  • 상위 노출 가게 중심의 불균형: 알고리즘 상단에 뜨지 않는 가게는 생존이 어려워진다.
  • 임대료 상승과 원주민 퇴거: 플랫폼의 흥행은 투기적 자본을 불러들이고, 주거비·임대료 상승을 초래한다.
  • 단기적 소비 중심의 공간재배치: 장기적 공동체보다는 ‘인스타 명소’ 중심으로 도시가 재구조화된다.
  • 역사적 층위의 소멸: 관광-플랫폼화는 공간의 시간을 얕게 만들고, ‘기억의 도시’에서 ‘이미지의 도시’로 전환시킨다.

결국 차이나타운은 실제 주민이 살아가는 공간이 아니라, 데이터와 알고리즘에 의해 큐레이션된 소비지로 변모하고 있다.

선택적 기억 — 지워진 주체들

관광과 플랫폼이 전면에 등장하면서, 정작 이 공간의 핵심 주체인 화교·중국동포·이주 노동자는 주변부로 밀려나고 있다.

• 관광지 가격 상승
• 상업 공간 중심의 개발
• 불안정 노동의 확대
• 사회적 낙인과 편견
• 이주민의 주거·노동권 문제

이 모든 것은 차이나타운을 ‘살기 위한 공간’에서 ‘보여주기 위한 공간’으로 바꿔놓았다. 관광객에게는 인스타그래머블(Instagrammable)한 이미지가 중요하지만, 주민에게 중요한 것은 집세, 노동시간, 공동체 네트워크다. 그러나 도시 정책은 대부분 전자만을 고려한다. ‘중국풍 테마파크’ 속에서 주민은 투명인간이 된다. 이 지점이 차이나타운 공간 정치의 가장 구조적 문제다.

차이나타운에는 잊혀진 기억도 많다.

  • 개항기의 제국 경쟁 속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화교들
  • 반중 정책으로 삶이 무너진 1960~70년대 화교 사회
  • 중화요릿집의 경제적 쇠퇴와 삶의 재편
  • 동북아 외교갈등이 일상에 미친 영향
  • 이주민의 불안정한 생활사

하지만 관광지의 기억 프레임은 이런 억압의 기억을 담기 어렵다. 관광이 요구하는 기억은 화려하고 안전하고 ‘좋은’ 장소성이다. 그래서 국가와 지방정부는 불편한 기억을 지우고, 소비 가능한 과거만을 남긴다. 이 전략은 다른 도시 재생 구역(을지로·성수·경리단길 등)에서도 반복된다.

차이나타운은 ‘기억의 장소’가 아니라 기억의 선별기구다. 어떤 기억은 전시되고, 어떤 기억은 지워진다. 자발적 게토라는 표현은 이 선별과 삭제의 기술을 더욱 강화한다.

만들어진 신화의 정치적 효과

이 신화는 단지 잘못된 역사 해석이 아니라 실질적 정치적 기능을 가진다.

  • 국가·도시의 책임 축소: 공간 배치와 차별을 ‘주민들의 선택’으로 돌린다.
  • 사회적 배제의 정당화: ‘그들이 그들끼리 모이며 사는 것이 편하니까’라는 식의 인종화된 담론을 강화한다.
  • 공간 개발의 폭력 은폐: 관광 개발로 인한 주민 퇴거·생계 위협이 가려진다.
  • 타자화된 정체성의 고정화: ‘중국인은 이런 공간에 산다’는 인종적 범주를 강화한다.
  • 도시 문제의 비가시화: 빈곤, 임대료 상승, 노동 불안정 등 구조 문제가 ‘특수한 커뮤니티의 문제’로 축소된다.

이 모든 효과는 도시 정책과 관광 자본에게 유리하게 작동한다. 그래서 이 담론은 쉽게 철회되지 않는다.

차이나타운을 이해하기 위하여

인천 차이나타운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다시 던져야 한다.

  • 이 공간을 설계한 힘은 누구인가?
  • 관광객이 보고 싶은 ‘중국’은 누구의 상상인가?
  • 주민의 선택은 정말 자발적인가, 아니면 구조적 강제인가?
  • 플랫폼 자본은 이 공간을 어떻게 재편하는가?
  • 국가와 도시는 어떤 기억을 전시하고 어떤 기억을 지우는가?
  • 이 공간의 타자성은 누구에게 이익이 되는가?

차이나타운은 ‘자발적’ 게토가 아니다. 그것은 제국의 유산, 국가의 정책, 관광 산업의 욕망, 플랫폼 경제의 알고리즘이 중첩된 공간이며, 타자화의 정치경제가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도시적 무대이다. 우리가 그저 ‘짜장면 먹으러 가는 곳’으로 여겨온 그 장소는, 사실 한국 사회가 타자·이주민·정체성을 어떻게 구성하고 배치해 왔는지를 가감 없이 드러내는 중요한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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