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공유하기

[마냐의 북라이딩] 무력한 우경화 사회 일본. 저자는 동일본 대지진 이후 일본이 바뀔 것이라는 기대가 배신당하는 과정을 들여다본다. (⏳5분)

📕마냐의 북라이딩📚

네오콘이 삼킨 일본,
한국의 미래일까?

서의동, [네오콘 일본의 탄생] (2025)

일본의 우경화는 어떻게 진행됐는가. 빌드업 과정을 살펴보는 게 의미 있는 이유는 일본이 대체로 우리보다 앞서 겪는 일들이 있기 때문이다. 다만 국내 거대정당의 극우화가 이렇게 빠르게 이뤄질지 몰랐다. 태거트 머피가 [일본의 굴레] (2011)에서 일본 자민당이 극우에 삼켜진 과정을 언급하며 검찰과 언론의 혁혁한 공을 언급했을 때 우리와 닮았다고 생각만 했다. 현실은 한순간이다.

[네오콘 일본의 탄생]은 말 그대로 새로운 보수, 네오콘이 일본을 장악하는 과정을 추적했다. 특히 ‘전후(戰後)’ 일본이 분기점을 맞은 것처럼 ‘재후(災後)’, 2011년 3월11일 동일본 대지진(이하 ‘3.11’) 재난 후 일본이 바뀔 것이라는 기대가 배신당하는 과정을 세밀하게 들여다본다.

2011년 3월 11일 이와테현 미야코시. 거대 쓰나미 모습. 위키미디어 공용.

당시 도쿄특파원 부임 닷새 만에 3.11을 맞은 서의동 경향신문 논설실장에게 선진국 일본의 민낯은 초라했다. 공식 사망자만 2만2000명, 47만 피난민을 낳은 3.11은 일본이 국가의 존재 방식을 근본부터 성찰하는 개혁의 계기가 될 것이라는 기대를 모았다. 하지만 역사는 반대로 굴러갔다. 3.11은 우경화와 퇴행의 변곡점이 됐다.

내셔널리즘과 역사 왜곡

이미 1990년대 일본의 위기는 복잡했다. 닛케이 지수는 1989년에 정점을 찍었다. 집값 급등으로 일본인 80%가 스스로 중산층이라 여겼으나 1980년대 후반 거품이 꺼지면서 양극화가 본격화했다. 경제위기 상황에서 1990년대 탈냉전 흐름은 대외 충격을 더했다. 걸프전 외교에 실패해 전쟁 비용의 20%를 부담하고도 파병을 안 했다는 이유로 비난에 시달렸다. 쿠웨이트는 당시 참전국들에 고맙다는 뉴욕타임스 전면 광고를 내면서 일본만 쏙 뺐다. 이런 굴욕 탓에 경제력에 맞게 군사적으로도 역할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기 시작했다. 혼돈 속에 불안이 커졌다. 출구는 MAGA와 닮은 일본 내셔널리즘이었다.

역사 왜곡도 본격화했다. 1990년대 위안부 문제가 공론되면서 당시 호소카와 모리히로 총리가 침략전쟁을 인정했다. 과거사 반성이라니. 자민당 우파에겐 충격이었다. 그들은 당내 역사검토위원회를 만들었다. 1995년 보고서를 내고 “침략전쟁이 아니라 자존자위 전쟁이자 아시아 해방전쟁”이었고, “난징대학살, 위안부 등은 날조이며 일본은 전쟁범죄를 저지른 적 없다”고 했다. 곧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 등장, 역사 전쟁에 나섰다.

저자는 일본 사회 변화의 핵심으로 아베 신조로 대표되는 보수우익 그룹에 주목했다. 3.11 이듬해 집권해 2020년까지 9년 가까이 최장수 총리를 지낸 아베는 우경화 빌드업의 주역이다. 그 시절 일본은 역사 수정주의와 배타적 애국주의가 득세했다. 진보 정당과 시민사회의 존재감은 거의 사라져 버렸다.

아베는 당과 관료를 완벽하게 장악했다. 관료들은 아베 부부 스캔들을 덮기 위해 공문서까지 위조했고, 내부 고발자 재무국 직원은 자살했다. 2017년의 유행어 ‘손타쿠’는 남의 마음을 미루어 헤아린다는 뜻이지만, 요구나 지시가 없어도 윗사람이 원하는 방향으로 행동한다는 얘기다.

아베는 언론 탄압에도 능했다. 공영방송에 역사 수정주의자들을 경영진으로 보냈다. 보수우익 매체들의 무차별 공격으로 NHK를 위축시켜 공영방송뿐 아니라 민영방송에서도 아베 정권에 쓴소리하던 앵커들이 줄줄이 하차했다.

A급 전범 용의자였으나 기소되지 않고 석방되어 1958년 총리로 화려하게 복귀한 ‘전범’ 기시 노부스케(1896-1987, 사진은 1961년 모습). 그의 손자 아베(1954-2022)는 야마가미 데쓰야에게 사제 총기로 암살당한다. 2025년 9월7일 사임 표명한 이시바 총리 후임으로 유력한 다카이치 사나에. 아베 신조 후계자를 자처한다. 자민당에서도 가장 ‘오른쪽’.

시민사회의 쇠락과 청년들의 우경화

3.11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직후 반원전 시위가 거셌지만, 도쿄전력을 절대적 광고주로 모셨던 언론은 “극좌파가 배후”라고 깎아내렸다. 좌파는 시민 열망을 수용할 능력이 없었고, 우파는 버블 붕괴 후 불안을 영토 갈등 등 내셔널리즘으로 돌파했다. 3.11 이후 터져 나온 탈원전 움직임도 정치 이슈로 덮었다. 이시하라 신타로 당시 도쿄도지사가 난데없이 중일 분쟁 이슈였던 센카쿠 열도를 사들이겠다고 폭탄선언을 내놓으며 갈등을 키웠다. 중국의 반일 시위가 뉴스를 도배하는 와중에 탈원전 이슈는 맥이 빠졌다. 다른 인종이나 국가에 증오감을 쏟아내는 우익 단체들의 큰 이야기와 더불어 우파 정치인들의 인기몰이가 거셌다.

청년들은 저항의 선두에 서는 대신 냉소에 빠졌다. 버블 붕괴로 중산층 신화가 힘을 잃으면서 ‘나는 힘들어 죽겠는데 세상은 평화라니, 내가 나쁘거나 사회가 잘못됐거나 둘 중 하나’라는 식의 정서가 확산했다. 여기에 “민주주의, 시민운동, 인권은 학교에서나 접할 수 있는 질감 없는 언어”였고, 멋진 척하는 좌파에게 환멸을 느끼며 기성세대 억압으로 인식했다.

이들을 부추긴 것은 만화 등 문화였다. 우익 만화가 고바야시 요시노리의 [전쟁론]은 160만 부 이상 팔린 초 베스트셀러. 태평양전쟁을 옹호했다. 2채널이라는 한국 일베 같은 온라인 게시판에서 먼저 혐한, 혐중 논리를 꺼내 들면 오프라인 시위로 번지고, 정치인들이 받아쳤다.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좌파는 순수한 이념으로 과격한 행보를 이어가다가 무너졌다. 1980년대 나카소네 총리가 추진한 공공 부문 민영화는 강한 노조를 무너뜨렸다. 저자는 서경식 선생을 인용, 평화주의를 표방하면서도 천황제와 미일안보조약을 용인하고, 동아시아 평화를 거론하면서도 식민지 책임 문제에 대한 인식은 빈약했던 좌파의 ‘애매함’이 우익의 대두를 막는 데 실패했다고 지적했다.

미국이라는 성역도 문제다. 2009년 하토야마 유키오 정부는 미군의 12살 초등학생 강간 사건 이후 오키나와 미군기지 이전 등을 추진하다가 미국과 관료, 언론이 한몸으로 달려드는 통에 10개월 만에 물러났다. 미국의 민간 싱크 탱크가 2000년부터 주기적으로 내놓는 ‘아미티지-나이 보고서’의 경우, 매번 일본 언론과 정치권이 호들갑을 떨며 수용한다. 천황을 중심으로 한 일본의 통치 체제’인 ‘국체(國體)’가 미국으로 바뀌었다는 진보학자 시라이 사토시의 주장은 매우 현실적이다. 일본은 이런 난제들을 극복할 수 있을까?

네오콘이 삼긴 일본, 한국의 미래일까?

최근 일본 참의원 선거에서 ‘일본인 퍼스트’를 내세운 극우 참정당이 약진했다. 상대적으로 온건했던 이시바 시게루 총리가 물러난다는 소식이다. 차기 일본 리더 후보들은 대체로 극우 성향으로 분류된다. 물가 상승과 누적된 양극화로 인한 불만은 언제나 극우의 불쏘시개다. 혐오를 부추기는 우파 정당의 행태, 청년들의 우경화, 권력의 개가 된 언론과 검찰 이야기도 지구촌 유행병처럼 곳곳에서 비슷하다. 이 흐름에서 우리만 괜찮을 수 있을까?

‘일본인 퍼스트’를 주창한 일본 참정당 대표 가미야 소헤이. 고등학교 단기 교사로 사회생활을 시작해 정치 밑바닥에서 산전수전 겪으며 성장했다. 연설을 굉장히 잘한다는 평가. 지난 제27대 참의원 선거(2025.07.20)에서 ‘일본인 퍼스트’를 선거 화두로 만들며 의석을 1개에서 15개 로 늘려 제4당으로 당을 성장시켰다.

책 출간 후 저자 초청 북토크에서 물었다. 일본의 우경화 과정을 우리도 따라가게 될까? 저자는 단호하게 부인했다. 시민이 다르다고 했다. 대통령 탄핵을 두 번이나 한 민주주의 주권자들이 나라를 지키고 있다.

마침, 지난 8월 일본에서 ‘조세이 탄광’ 수몰 사고 희생자 유골이 발굴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1942년, 이 탄광 사고로 조선인 136명을 포함, 183명이 숨졌다. 작년 10월부터 수차례 잠수 수색 끝에 희생자 유골이 무려 83년 만에 돌아오게 된 배경에는 1991년 ‘조세이 탄광 수몰 사고를 역사에 새기는 모임’을 결성한 일본 시민들의 노력이 있었다.

한국의 유족들과 시민들이 나섰고, 일본의 시민들이 화답해 기적을 만들었다. 일본 정치인들이 역사 왜곡에 본격 나설 무렵, 반대편에서 역사를 새기려 애쓴 이들이 있었다는 것은 위로가 된다. 진정한 연대는 서로 과거를 제대로 마주할 때 단단해진다. 네오콘 이웃과 어떻게 발을 맞출지 정부도 고민이 깊겠지만, 시민들은 서로 할 일을 하는 수밖에.

지난 7월 북살롱 오티움에서 열린 북토크에서 서의동 작가. 2025. 오티움.

관련 글

2 댓글

  1. 이글의 제목 중 “삼긴”은 삼킨의 오타일까요? 아니면 “삼기다”라는 의미 일까요? 후자라면 맥락이 좀 어울리지 않고요. 곳곳에 모두 삼긴으로 표기했네요. 정작 내용에는 관련 단어가 사용되지는 않았습니다.

  2. 김용구 님께

    이런! 당연히 ‘삼킨’의 오타입니다. ㅜ.ㅜ;
    바로 정정하겠습니다!!
    오류를 바로잡을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