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식 칼럼]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지만, 공정한 절차야 말로 정당성의 근거입니다. 이재명(민주당 대선 후보) 선거법 사건에 관한 2025년 5월1일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을 김연식(성신여대, 헌법학)이 ‘절차적 정당성’과 ‘사회적 수용 가능성’의 관점에서 분석합니다. (⌚8분)
2025년 5월 1일, 대법원 선고는 사회 전반에 걸쳐 작지 않은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그 여파는 단순히 한 정치인의 운명을 넘어, 법과 정치, 그리고 민주주의의 구조적 작동 방식에까지 질문을 던진다. 이 문제는 여러 층위에서 분리해 분석할 필요가 있다. 법의 결정으로서 판결, 절차의 의미, 그리고 사회적 수용성과 정당성이라는 복잡한 차원이 난마처럼 얽혀 있다.

사법 리스크: 정치가 만든 연옥
어떤 정치인의 진퇴 여부를 법원이 결정하게 되는 상황은, 엄밀히 말해 정상적인 민주주의의 작동 방식이라고 보기 어렵다. 민주주의는 선거를 통한 시민의 판단과 정치적 책임의 구조 위에 서 있어야 하며, 정치인의 정치적 생존은 궁극적으로 유권자의 손에 달려 있어야 한다. 법원이 형사적 책임을 따지는 것은 필요하다. 하지만 정치적 진퇴까지 사법 체계에 온전히 맡기는 구조는 정치의 자기책임성과 제도적 자율성을 훼손할 위험이 있다. 정치의 공간은 사법 판단에 종속되어서는 안 되며, 민주주의의 건강성은 정치적 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능력에 달려 있다.
마찬가지로, 한 정당 전체의 운명이 특정 정치인의 유무죄 판단에 매달리는 현실 또한 건강한 정당정치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정상적인 정당이라면, 특정 인물의 인격에 당과 국가의 운명을 동시에 걸지 않는다. 공당이라면 인격과 체계를 분리할 수 있어야 하며, 특정 인물이 아니더라도 대체 가능한 리더십을 마련해 둘 수 있어야 한다. 만약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이는 결국 정당 내부에서 인재를 길러내지 못한 채, 외부 인물을 ‘용병’처럼 데려와 그 앞에 옥새를 바치는 행위와 다를 바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상황의 원인을 사법부에만 돌릴 수는 없다. 그 근원은 오히려 입법, 즉 정치 체계 자체에 있다. 그동안 선거법과 관련해서는 공정성과 투명성을 명분으로 법적 기준을 강화해 왔고, 특히 진보적 세력이 이러한 점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현재의 사법 리스크를 단지 정치의 사법화 문제로만 환원해서는 안 된다. 오늘의 사태는, 정치가 스스로 선택한 규범이 어떤 구조적 결과를 초래했는지에 대한 성찰을 회피한 결과이기도 하다. 그동안 정치는, 마치 페르시아 전쟁이라는 국가적 위기를 앞두고 델포이 신탁 앞에 무릎 꿇었던 아테네 시민들처럼, 스스로 감당해야 할 불확실성과 책임을 외면한 채, 그것을 사법이라는 더 크고 복잡한 불확실성의 체계 앞에 제물처럼 바치고, 그 결과를 신탁처럼 절대시하며 경건히 기다려온 셈이다.
지금 우리가 마주한 이 어지러운 현실은 어쩌면 누구도 전적으로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하면서도 자신의 이해관계를 관철하려고 한 의도적 무능의 결과이다. 각자의 고의 한 스푼, 그리고 침묵 한 스푼이 차곡차곡 쌓여 만들어진, 그렇게 완성된 구조화된 지옥이다. 중요한 것은, 이 지옥은 어느 날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꾸준히 무시된 경고, 반복된 회피, 선택적으로 외면한 책임들의 축적이다. 그리고 이제, 그 결과가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사법의 착각 ― 판결은 진리인가?
그렇다면 사법부는 과연 아무 잘못이 없는가? 그렇지 않다. 사법부의 본질적 문제는 자신들의 판결을 마치 ‘진리’나 ‘정의’인 양 착각하는 데 있다. 법원이 내리는 판결은 법체계 내부에서는 유효한 ‘합법/불법’의 결과물일 수 있으나, 그것이 곧 학문 체계에서 ‘참/거짓’으로 받아들여지거나 사회 전체에서 ‘정의’로 수용되는 것은 아니다. 학자들은 법원의 판단을 곧장 진리로 받아쓰지 않으며, 시민들 또한 그것을 반드시 정의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판결은 어디까지나 법체계 내부에서 효력을 가질 뿐이다. 법원의 판결은 진리가 아니라 법체계 내부의 ‘결정’이기 때문이다. 독일의 사회학자 니클라스 루만(Niklas Luhmann)의 사회적 체계이론에 따르면, 법체계는 참/거짓의 기준이 아니라 합법/불법이라는 자기참조적(self-referential) 코드에 따라 작동한다. 판사는 진리를 발견하는 자가 아니라, 제도화된 프로그램과 절차 속에서 결정 가능한 것을 선택하는 행위자다.
만약 법적 판결이 사회적 설득력과 도덕적 정당성을 획득하려면, 절차적 정당성과 사회적 수용 가능성이 반드시 뒷받침되어야 한다. 법의 결정은 체계 내부에서 유효할 수는 있어도, 사회 전체의 공감을 자동으로 담보하는 것은 아니다.

절차는 정의를 대신한다
오늘날 우리는 진리보다는 절차가 정당성의 근거가 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때 절차는 단순한 형식이 아니라, 결정을 가능하게 만들고, 그것을 정당화하며, 사회적으로 수용 가능하게 하는 소통의 구조다. 그래서 ‘공정한 절차’는 법뿐만 아니라 정치, 행정, 언론 등 다양한 기능 체계 간에서도 통용되는 정당성의 상징 언어가 된다.
그렇다면 절차는 어떻게 오늘날과 같은 위상을 갖게 되었을까? 오늘날 사회에서는 동일한 사건도 사람마다 전혀 다르게 받아들이는 시대다. 정치인의 발언 하나를 두고도, 그것이 단순한 의견인지 허위인지에 대한 판단은 각자의 경험과 정치적 관점에 따라 엇갈린다. 심지어 국민 모두가 생중계로 지켜본 사건조차—예컨대 계엄령과 관련된 상황—누구에게는 위협으로, 다른 이에게는 오해로, 또 어떤 이에게는 정당한 조치로 해석된다.
이처럼 진리에 대한 합의가 불가능해진 시대에,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의 정당한 절차를 거친 결정뿐이다. 모두가 같은 ‘진리’에 동의하긴 어렵지만, 모두가 수용할 수 있는 ‘방식’은 존재할 수 있다. 그 방식이 바로 절차이며, 이는 다원성과 복잡성 속에서도 사회를 지탱할 수 있게 하는 구조다.

진리를 포기한 사회는 반드시 비관적인 것만은 아니다.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점에서, 사회 체계의 우연성과 비개연성의 틈바구니 속에서 개인은 오히려 더 큰 자유를 누릴 수 있다. 그것은 절대적 진리의 이름으로 가해지는 폭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공간이며, 결정 가능한 가능성들 사이에서 다른 선택이 존중받을 수 있는 조건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자유만큼이나 우리는 불확실성과 복잡성을 감당해야 할 책임도 함께 떠안는다. 더 많은 회의와 이견, 더 많은 숙의와 절차적 검토가 요구되고, 그 결과 결정은 지연되거나 심지어 불가능에 가까워지기도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회적 체계이론의 언어를 사용해서 말하면, 절차는 선택의 우연성—즉, 필연적이지 않은 결정—을 정당화한다. 절차는 진리를 대체하는 기능적 장치로서, 질서를 유지하고, 복잡성을 조정하며, 의미를 공유하는 통로가 된다. 더 나아가, 특정한 진리를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안정적인 조건 속에서 대체 가능한 가능성을 열어두는 구조를 만든다. 이것이야말로 오늘날 절차가 갖는 실질적 힘이자, 현대 사회가 지속되기 위한 핵심 조건이다.
법적 결정의 권위는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현대 사회에서 법은 독립된 기능 체계로 작동하지만, 동시에 정치 체계와 더불어 사회 전체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결정 체계이기도 하다. 진리가 절차로 대체되는 사회에서, 법의 권위는 단지 결정의 내용에 근거하지 않는다. 그 권위는 그 결정이 어떤 절차를 통해 도출되었는가, 다시 말해 절차에 대한 신뢰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법이 외부 사회에 실질적인 효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다른 기능 체계와의 신뢰 가능한 접점이 반드시 마련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접점을 구성하는 핵심 조건이 바로 절차적 정당성이다. 루만은 법체계가 사회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절차를 매개로 외부 체계와 구조적으로 결합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때 절차는 외부의 다원적 기대를 수용할 수 있는 통로로 작동하면서도, 최종 결정은 법체계 내부의 이진 코드(합법/불법)에 따라 자기참조적으로 이루어지는 구조를 가진다.
절차에 대한 요구는 단순히 형식적 요건을 충족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형식적 요건조차 충족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애초에 법체계 내부에서도 유효성을 상실한 것이기에 더 이상 논의할 가치조차 없다. 절차에 대한 진정한 요구는, 법원이 사회 외부에서 제기될 수 있는 오해와 갈등을 최소화하고, 결정 과정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도록 절차를 더욱 세심하고 신중하게 설계하고 운영할 책임을 지는 데 있다.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라는 대법원의 지적은 분명 타당하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정의가 절차를 통해 구성된다는 현실 또한 간과할 수 없다. 그렇다면 절차적 정당성에 의문이 제기되는 상황에서는, 가장 안정적인 대응은 기존에 마련된 절차를 따르는 것뿐만 아니라, 그 절차가 어떻게 적용되어 왔는지—즉, 선례를 존중하는 것까지 포함되어야 한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일수록 법관은 본능적으로 보수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며, 이는 곧 기존 선례에 대한 의존성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선례는 법적 구속력을 갖는 보통법 국가뿐 아니라(Stare Decisis), 대륙법 체계에서도 사실상의 구속력을 지니는 현실적인 기능을 수행한다(jurisprudence constante).
물론 특정한 절차 적용 방식이 반복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실정법상 효력을 지닌 ‘선례(precedent)’로서 법적 구속력을 갖는다고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그러한 관행을 따르지 않았다고 해서, 선례를 위반한 것과 동일한 수준의 위법성이 발생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그러나 해당 결정의 사회적 파급력이 클수록, 그 판단이 내려지는 결정 과정—곧 절차—에는 한층 더 높은 수준의 정당성과 예측 가능성이 요구된다.
이러한 법원의 태도는 소극성과 보수성으로 해석되어 종종 비판의 대상이 되지만, 동시에 그것은 체계 내부의 정당성을 유지하기 위한 전략적 미덕으로도 이해될 수 있다. 법원이 기존의 판례와 기준을 참조함으로써 판단의 안정성과 사회적 수용 가능성을 확보하려는 태도는, 사회적 체계이론의 표현을 빌리자면, 자기참조적 체계가 외부 환경 속에서 생존하기 위한 구조적 전략이라 할 수 있다.
대법원과 헌법재판소
이러한 점에서 대법원의 결정은 헌법재판소의 태도와 뚜렷하게 대비된다. 일부에서는 이번 헌법재판소의 탄핵 결정을 “대한민국의 마그나 카르타”라며 높이 평가하지만, 나는 그 평가에 쉽게 동의하기 어렵다. 헌재는 더욱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해석했어야 할 지점에서, 기존의 판례와 형식에 스스로를 가두는 보수적 태도를 취했다. 해야 할 말을 끝내 하지 않았고, 내릴 수 있었던 판단도 끝내 유보했다.
예컨대 한 헌법학자는 헌재가 12.3 계엄 사태에 대하여 “헌정사적 의미에서 준엄한 헌법적 규정을 했어야 한다”고 비판한 바 있다. 그러나 헌법재판소는 이에 대한 최종적 판단을 정치의 영역에 유보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러한 태도는 분명 보수적으로 비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이는 헌재가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에서 결정의 사회적 수용성과 헌법재판 제도의 중립성과 안정성을 함께 고려하여 절차적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전략적 선택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에서 김복형, 조한창 재판관의 별개의견을 해석해 볼 수 있다. 이들은 전문증거법칙에 대한 절차적 기준을 강화하고자 하였으며, 이는 절차적으로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은 별개의견 형식을 통해, 해당 기준의 적용 시점을 ‘당해 사건’이 아닌 ‘향후 사건’으로 유보하였다. 이는 법체계의 자기참조적 자율성과 사회적 수용성 간의 균형을 고려한 전략적 판단으로 해석될 수 있다.

물론, 헌법재판소 역시 이번 사건에서 ‘이례적’인 절차 적용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대법원과 달리 헌재는 절차를 지연하는 방식을 선택했으며, 그 배경에는 피소추인의 재판 지연 전략 또한 일정 부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대통령 탄핵과 같은 사건은 그 자체로 매우 이례적이기 때문에, 헌재의 이번 판단을 ‘확립된 관행’ 또는 선례로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런 형식적 논점을 떠나서라도, 헌재가 거센 비판과 감정적 반발을 감수하면서까지 결정을 늦춘 이유는 단지 ‘옳은 판결’을 고민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절차적 흠결을 최소화하기 위한 전략적 시간 조절이었다. 헌재가 더 중요하게 고려했던 것은 판결의 내용이 아니라, 그 결정이 사회적으로 어떻게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인가, 즉 사회적 수용성이었다.
의견 수렴과 내부 검토가 반복된 이유도, 정치적 갈등을 격화시키지 않기 위한 방어 전략으로 해석될 수 있다. 내용적 정당성만으로는 부족하다. 공정한 절차를 거쳤다는 인식이 있어야만, 결정은 공동체 내에서 수용될 수 있다. 헌재는 그 점을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시간을 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절차는 때로 의도적으로 지연되거나 조정될 수 있다. 그러나 핵심은, 이러한 이례적 적용의 정당성 여부가 판단 내용의 타당성이나 논리적 합리성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절차적 정당성의 확보 가능성에 달려 있다는 점이다.
그런 차원에서 보면, 과연 이번 대법원의 이례적인 절차 적용이 사회적으로 수용 가능한 절차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는가에 대해서는 독자 각자의 판단에 맡기고자 한다.
물론, 어떤 결정이 진정한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것이라면, 경우에 따라 절차적 정당성에 일정 부분 손상이 있더라도 정당화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해당 판단이 내용상 절대적 정의를 담보한다는 강한 확신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처럼 다원화되고 중심 없이 기능적으로 분화된 현대 사회에서, 그런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체계는 거의 유일하게 종교처럼 초월적 진리를 전제하는 기능 체계 정도일 것이다.
만약 법이 절차적 정당성을 스스로 훼손하면서까지 내용적 정의를 주장한다면, 이는 법체계의 자기참조성의 한계를 넘어서 외부 체계의 의미 코드를 침범하는 것이 될 수 있다. 그 순간 법은 자신의 합리성과 자율성을 스스로 위태롭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회적 논란이 충분히 예견되는 사안일수록, 법은 절차적으로 사회적 다양성에 더욱 개방적이어야 하며, 내용적으로는 자기 체계 내부의 엄정한 기준과 절제된 해석에 기반한 법 적용이 이루어졌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더욱이 내부적으로도 전원일치에 이르지 못한 판단, 그것도 통상적 관례보다 이례적으로 짧은 심리 기간을 거친 판단이, 외부적으로는 단지 ‘법적 결정’이라는 이름만으로 사회적 정당성을 요구한다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에 대해서는, 분명히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대법원의 확신은 어디서 왔는가 ― 무능인가, 의도인가?
그렇다고 이번 결정을 통해 대법원이 말한 것처럼 과연 법적 불확실성을 실질적으로 해소했는지도 여전히 의문이다. 헌법 제84조는 대통령에게 내란·외환죄를 제외한 형사소추 면책을 부여하고 있다. 그런데 통상적인 재판 일정상, 대선 이전에 형이 확정되기는 사실상 어렵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이 경우, 당선 이후에도 재판이 계속될 수 있는지에 대한 해석상 혼란이 불가피하다. 당연히 이는 향후 대법원과 헌법재판소 모두에게 부담이 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정치적으로도 상당한 파장을 일으킬 수 있는 요소이다.
이 문제의 불확실성을 해소하려면, 최소한 5월 11일 후보 등록 마감일, 늦어도 6월 3일 대통령 당선인 확정일 이전까지는 판결이 확정되었어야 했다. 물론 어떤 결정이 내려지든, 특정 후보의 진퇴 여부를 사법부가 결정하는 것이 정당한가에 대한 반론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사안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정치가 입법을 통해 사법에 일정한 권능을 위임해 버린 구조적 연옥이기 때문에, 그러한 반박은 쉽게 설득력을 얻기 어렵다. 결국, 헌법적 모호성과 그로 인한 혼란을 피하려면, 무죄 확정 또는 파기자판이 필요했지만, 많은 전문가들은 실무상 파기자판이 인정될 가능성은 낮다고 예측해 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는 대법원이 이번 사건에서 이례적으로 절차를 신속히 진행하려 한 이유가, 헌법 제84조의 해석과 그로 인해 촉발될 정치적 논란에 휘말리는 것을 피하고자 한 것, 그리고 궁극적으로 무죄 확정을 목표로 한 전략적 판단이 아니었는가 하는 의심을 갖게 되었다. 다시 말해, 헌법 해석에 따른 법리적 혼란과 무죄 확정에 따른 정치적 파장 가운데 어느 쪽이 더 ‘덜 위험한 선택’인지 저울질한 끝에, 후자를 선택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다.
물론, 이와 같은 판단이 실제로 있었다 하더라도, 나는 그러한 신속한 심리와 판결이 과연 정당했는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을 갖고 있다. 사건의 성격상 정치적 논란과 절차적 정당성에 대한 문제는 불가피했을 것이며, 과연 대법원이 그 모든 후과를 감당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현재의 상황 역시 여전히 납득하기 어렵다. 서울고등법원이 파기환송심을 아무리 신속히 진행하더라도, 재상고 절차에 법정상 최소 27일이 소요된다는 점에서 대선 전에 형이 확정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것이 다수 법률 전문가들의 견해다(2025.05.07. 현재 기준, 파기환송심 재판부인 서울고법은 오는 15일로 예정된 파기환송심 첫 공판 기일을 대선일 이후인 6월 18일로 변경했다. 편집자). 그렇다면 헌법 제84조와 관련된 핵심적 불확실성은 해소되지 않은 채, 오히려 절차적 정당성에 대한 의문과 정치적 논란만이 더욱 증폭되는 최악의 상황이 초래된 셈이다.

일각에서는 대법원이 상고이유서 제출 기간을 단축해 이례적으로 신속한 선고를 시도하고 있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그러나 과연 그런 조치가 법적으로 가능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는다. 만약 실제로 그러한 절차가 강행된다면, 이는 절차적 정당성은 물론이고, 법적인 흠결까지 발생시켜 판결 자체의 효력마저 위태롭게 만들 수 있다.
만약 이러한 결과를 대법원이 예측하지 못했다면, 이는 명백한 판단력의 결여이자 제도적 무능이라 평가받을 수밖에 없다. 반대로, 이러한 사태를 충분히 인지하고도 그대로 절차를 진행한 것이라면, 이는 법률이 정한 절차적 조건을 무시하면서까지 특정 후보를 제거하려는 정치적 의도로 해석될 여지 또한 생긴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 역시 설득력이 약한 측면이 있다. 홍성수 교수의 말처럼 평생을 절차적 정당성과 적법 절차에 헌신해 온 대법관들, 그것도 전원합의체에 속한 10인의 대법관이 동시에 절차적 위법성을 외면하고 하나의 판단에 동의했다는 전제 자체가 쉽게 납득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더욱이 만약 그러한 의도가 실제로 존재했다면, 오히려 ‘파기자판’이라는 더 적법하고 명확한 결론을 선택했을 가능성이 더 높았을 것이다. 하지만 대법원은 그마저도 택하지 않았고, 바로 이러한 점이 이번 결정의 판단 과정 전반에 대해 더 깊은 의문을 남긴다.
물론, 이 모든 판단은 외부에서 추정할 수밖에 없는 영역이며, 그 진의는 대법관들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나 역시 재판 절차의 전문가는 아니기에, 이 상황에서 어떤 다른 가능성이 존재했는지, 또는 더 나은 방법이 있었는지는 단언하기 어렵다.

모든 상황을 대법원의 입장에서 고려하고, 그들이 최선을 다했다고 가정하더라도 여전히 납득할 수 없는 지점이 있다. 이처럼 복잡한 정세와 향후 파장의 중대함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음에도, 대법원이 국민 앞에서 실시간 생중계로 선고 장면을 공개하고, 신속한 결정을 강행한 이유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정치적 논란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내린 이 판결은, 사법적 메시지라기보다는 정치적 상징으로 ‘박제된 장면’으로 남게 되었고, 이 장면은 향후 지속적으로 반복·재생산되며 사회적 갈등을 증폭시킬 가능성이 크다.
무엇인가에 대한 강한 확신이나 자신감 없이 이런 방식의 결정을 내리긴 어렵겠지만, 정작 그 확신의 실체가 무엇이었는지는 지금도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
법의 무용성과 사법의 오만
이번 사건은 법과 정치, 나아가 법과 사회의 관계를 다시금 성찰하게 만든다. 이들 영역은 루만이 지적했듯 기능적으로 분화되어 있으며, 구조적으로만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을 뿐이다. 법원의 결정은 법체계 내부에서는 유효한 판단일 수 있지만, 그것이 곧바로 정치나 사회에서 동일한 방식으로 작동하지는 않는다. 법이 어떤 결론을 내렸다고 해서 정치가 자동으로 이를 수긍하거나, 사회가 그 결정을 곧바로 ‘정의’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법은 자칫 무력하고 무용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자기 제한성 속에서 법은 역설적으로 사회적 효력을 획득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하게 된다. 법은 정치나 도덕의 이름으로 진리를 선언하지 않고, 오히려 합법/불법이라는 자기 기준에 따라 절제된 방식으로 작동하는 체계다. 그리고 바로 이 자기제한 속에서 ‘절차’는 핵심적인 기능을 수행한다.
절차는 법이 다양한 사회적 해석과 기대 속에서도 스스로를 유지할 수 있게 하며, 외부 체계와 충돌하지 않으면서도 사회적 수용성을 확보하도록 돕는 구조적 장치다. 정당한 절차를 거쳐 도출된 결정만이 정치적 긴장과 도덕적 분열을 넘어서는 사회적 합의의 기반이 될 수 있다. 그렇게 본다면, 법은 그 ‘무용성’을 통해 오히려 가장 정밀한 방식으로 사회의 복잡성을 흡수하고 조정하는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법적 판단이 사회적으로도 효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더욱 정교하고 세심한 절차적 정당성이 반드시 뒷받침되어야 한다. 법은 법의 언어로 말하지만, 그 결정이 사회 속에서 살아 숨 쉬기 위해서는 작동 방식 자체가 사회적으로 신뢰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결정은 체계 외부로 확산되지 못하고, 결국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문장으로 남고 만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이번 사건에서 대법원이 이례적인 방식으로 절차를 적용한 판단은, 단지 법체계 내부의 정당성만이 아니라 외부 체계—즉 시민사회와 정치 체계—로부터의 신뢰까지도 위태롭게 만든 결정이었다. 결과가 사회적으로 수용되기 위해서는, 그 결과를 낳은 과정 역시 사회적으로 정당화 가능해야 한다. 그 점에서 이번 결정은 그 최소한의 조건마저 지키지 못했으며, 오히려 법체계가 스스로의 한계를 노출한 대표적 사례로 남게 될 것이다.
나는 이번 사안을 사법부 내부에 은연중에 자리한 일종의 오만—즉 ‘우리가 국가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식의 자기 확신—이 드러난 사건이라 본다. 법원의 결정은 어디까지나 법체계 내부에서 유효한 것일 수 있으나, 그것이 사회 전체의 운명을 좌우하는 순간,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는 충돌한다. 법원이 사회 전체의 의미를 독점하고 정의를 선언하려 드는 순간, 그것은 곧 사법 독재다. 법적 정당성과 사회적 수용성은 동일한 것이 아니며, 사법부가 이 둘을 혼동하는 순간, 우리는 법치주의라는 이름 아래 민주주의가 위협받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이번 결정은 그 최소한의 절차적 정당성마저 위태롭게 만든 것이며, 법체계 스스로가 그 한계를 드러낸 결정으로 기록될 것이다. 이는 마치 숨을 헐떡이던 법치주의의 관 위에 못을 박은 것이나 다름없으며, 그 결정은 사법의 정치화 논쟁에 불을 붙인 도화선이 되었다.
이제 그 모든 후과는 사법부가 온전히 짊어지게 되었다. 정치권이 무책임하게 자신을 구속하는 사법 리스크를 구조화해 놓았듯, 사법부는 스스로 선택한 행위의 결과로 인해 정치적 리스크의 정점에 서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