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직 대통령 최초로 구속 기소된 윤석열은 보수 진영의 지지로 당선된 대통령이었다. 그가 벌인 난동을 단순한 개인적 일탈만으로 보기는 어렵다. 구조적 뿌리가 있다. 이를 명확히 인식하지 않으면, 윤석열과 같은 정치 지도자는 다시 나타날 수도 있다.

윤석열의 몰락 6단계.

윤석열은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된 걸까? 윤석열이 무너지는 과정을 단계별로 떠올려 보자.

  • 1단계 ‘당선’: 국민 다수의 지지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 2단계 ‘추락’: 취임 초기부터 그에 대한 지지는 급속도로 떨어지기 시작했고, 결국 국정 지지도가 10%대까지 다다랐다.
  • 3단계 ‘분노’: 그 어떤 정책도 제대로 실행할 수 없다면서 분통을 터뜨리기 시작한다.
  • 4단계 ‘투사’: 이 모든 것이 민주당 때문이라며, 국회와 야당과 야당 대표 탓을 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의 생각과 달리, 지지율이 10%대인 대통령은 어떤 정책도 제대로 시행할 수 없다. 그러나 그는 지지를 회복하려 노력하는 대신, 이 모든 것이 야당 대표의 음모 때문이라는 망상에 사로잡힌다.
  • 5단계 ‘망상’: 이런 국회의원들이 당선된 것은 분명 부정선거 탓일 것이라는 망상을 갖기 시작했다. 일부 유튜브 채널에서 퍼지는 가짜뉴스에 따라 선관위를 저격하기 시작한다.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사실이 수사와 재판을 통해 드러나자, 법적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는 더 큰 음모론에 빠져든다.
  • 6단계 ‘파국’: 계엄을 선포해 국회와 선관위를 장악하겠다는 기상천외한 해법에 다다른다. 윤석열이 했던 생각과 행동은 누가 봐도 비정상이다. 하지만 그의 실패는 당선 직후부터 상당부분 예정되어 있었다. 우리나라의 역대 대통령 중 다수가 겪었던 문제를 그도 겪었다. 역대 대통령들은 나름대로 그런 상황을 돌파하려 노력했고, 일부는 성공하고 다수는 실패했다. 윤석열은 그런 노력 중 어떤 것도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반대로 행동했다. 바로 가치지향이 다른 유권자를 통합하는 노력이다.

한국의 6개 유권자 그룹.

우리나라 유권자의 가치지향을 분석했던 자료를 다시 꺼내 본다. 2022년 여름, 윤석열의 임기가 시작된 직후에 했던 33개 문항에 대한 3000명 조사 결과를 토대로 우리나라 유권자의 정책 가치지향 클러스터를 6개로 나누어 분석한 것이다. 즉 스스로 정한 군집이 아니라 여러 상충되는 정책에 대한 태도를 정량적으로 구분해 나눈 군집이다.

  • 첫째, 평등-평화주의자가 40%에 육박했다. 전통적 진보적 가치를 지지하는 사람들이다. 기본소득제를 포함해 복지확대를 지지하며, 대북 평화정책을 지지하고, 남녀임금격차 해소 등을 지지하는 이들은 하나의 집단으로 결집되어 있었다.
  • 둘째, 자유-능력주의자는 20%를 조금 넘는 수준이었다. 능력주의와 공정성 담론을 신봉하면서 친미 반북한 정서가 강한 집단이다. 윤석열의 최근 성향을 고려하면 이들이 주요 지지자였을 것 같다. 그런데 생각보다 집단의 크기가 작다.
  • 셋째, 친환경-친성장주의자가 20%에 육박했다. 친기업적이지만 기후위기 같은 환경 문제도 심각하게 생각하는 그룹이다. 복지 확대에 대해서도 공감하는 그룹이다. 이들의 크기가 생각보다 컸다.
  • 넷째, 반권위-포퓰리즘 그룹이 10%에 미치지 못했다. 반페미니즘, 공정성, 기존 제도에 대한 불신을 특징으로 하는, 미국의 트럼프주의자와 비슷한 특징을 지닌 집단이다. 하지만 기본소득제 등 복지 확대를 지지하며 검찰 같은 권력집단에 반감을 가진 그룹이었다. 사회적으로 이런 이슈들이 크게 거론된 것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그룹이 작았고, 특히 전통적 보수층과는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점이 의외였다.
  • 다섯째, 민생우선그룹이 6% 조금 넘게 나왔는데, 이들은 친기업적이고 복지확대 등에 찬성하지만 정치이슈에는 무관심했다.
  • 여섯째, 개혁우선주의자들이 6% 조금 넘게 나왔는데, 이들은 검찰개혁 등의 정치 이슈에 민감하며 진보적 의견을 가지면서도 페미니즘 등의 사회 이슈에는 보수적 태도를 보이는 집단이다.

약한 가치 연대, 집권하는 순간 분열한다.

얼핏 봐도 전통적 보수층은 집권하기 어려운 구도이다. 진보적 가치 유권자는 똘똘 뭉쳐 있고, 보수적 가치 유권자는 분산되어 있었다. 대선 때 윤석열은 반문재인-반민주당-반이재명 구도를 만들어 다양한 그룹을 결집시키면서 당선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책적으로는 모일 수 없는 집단이 한데 모여 윤석열에 표를 던져준 셈이다.

이렇게 선거를 이기고 나면, 집권 초기부터 문제가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새로 집권해 정책을 발표하기 시작하는 순간, 지지층의 결집은 무너지게 된다. 복지 축소로 방향을 잡으면 자유-능력주의자들은 좋아하지지만 나머지 지지그룹은 모두 반대하게 된다. 대북 강경 노선을 채택하고 친미반중 노선을 실행에 옮겨도 마찬가지다.

뭔가 하려고 할 때마다 반대에 부닥치고 국정지지도가 떨어지는 건 예정된 수순이다. 반대파 국회나 진보적 유권자들 때문이 아니다. 자신의 지지자들이 분열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지층이 원래부터 상충되는 가치지향을 지닌 집단들의 연합이었기 때문이다.

선거의 시간에는 기존 정권의 반대자들을 결집시키는 게 가능했지만, 통치의 시간에는 이 결집이 유지되기 대단히 어려운 구조였던 것이다. 윤석열은 정권 초기부터 통치가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매우 현명한 협치가 필요했던 것이다.

윤석열이 망하는 길로 간 이유.

그러나 윤석열은 정반대의 길을 갔다. 20% 남짓의 유권자에게만 소구하는 정책과 기조를 잡아나갔다. 당연히 지지층 분열과 지지도 추락이 이어졌다. 이런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그는 어느 순간 과대망상에 빠져들기 시작했던 것 같다.

당시 조사했던 가치지향 구도에서는, 보수가 집권하면 통치가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 어려운 선거를 이기게 만든 게 이준석(당시 국민의힘 대표)과 막판에 윤석열 지지를 선언했던 안철수(국민의힘 의원)였다. 또한 민주당에서 국민의힘으로 옮겨간 일부 인사들도 일정한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인다. 이들을 지지하는 유권자가 대단히 많아서라는 관점에서보다는, 당시 윤석열 캠프의 가치지향이 다변화되어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을 감안한다면, 윤석열 집권기에 정부는 뭔가 적극적으로 일을 하기보다는, 기존의 가치가 훼손되지 않도록 다양한 가치그룹들과 협치하는 방식으로 국가를 운영해 나가는 것이 유일한 통치 방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진보적 정책도 일부 수용해야 했다. 핵심 지지층에게는 무능하다는 비난을 감수해야 하는 길이다. 그는 이런 비난을 감수할 수 없는 사람이었고, 그게 우리 모두의 불행이 되었다.

핵심 지지 그룹을 배신할 수 없는 한계.

이런 일이 그에게만 생겼던 것은 아니다. 선거에서는 반사이익으로 당선되었으나, 실제로는 우리나라 유권자 중 소수만이 지지하는 가치를 지닌 정파가 집권했을 때 늘 생기는 일이었다. 우리나라 유권자들의 정책 가치지향은 과거처럼 보수와 진보라는 프레임에 갇혀 있는 게 아니라, 다변화되어 유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복지국가 담론이 확대되며 진보적 유권자층이 확고해지기 시작한 2010년대 이후 보수 대통령들이 그랬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집권 초기에 대북 강경론과 4대강 사업 등으로 갈등을 일으키며 지지율이 하락했다. 집권 중반 이후 ‘공정한 사회’를 내걸고 진보적 가치를 지닌 사람들에게 소구했다. 대형마트 영업시간 규제와 출점거리 제한 등 골목상권 보호정책을 도입하고 대중소기업 상생을 강조했다. 그러나 이미 지지율이 크게 떨어져 회복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들이 이후 박근혜 후보에 대한 호감을 갖게 만드는 기반을 만들어 줬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선거 때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를 내걸어서 평등주의자에게 소구했다. 중국과 가까이 지내며 통일대박론을 펼쳐 평화주의자에게 소구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경제민주화 정책들을 제대로 실천하지 않고, 대북정책이 성과를 내지 못하면서 순탄치 못한 통치과정을 거치다가 탄핵에까지 이르렀다.

윤석열 대통령은 그나마 그런 시도조차 하지 않고 지지층을 좁혀 나가기만 하다가, ‘비상계엄 선포’라는 자폭에까지 다다르게 됐다.

어떤 그룹과 어떤 가치로 연대할 것인가.

누가 다음 대통령이 되더라도, 국가 운영이 매우 어렵다는 점은 분명하다. 다만 당시의 유권자 가치 지형이 비슷하게 유지되고 있다면, 보수진영의 대통령이 당선된다면 훨씬 더 국가 운영이 어렵다는 점은 분명하다. 한중수교를 이루고 북방정책을 펼쳤던 노태우 전 대통령 정도의 변화를 주면서 유권자를 통합하지 않고는 통치가 쉽지 않을 것이다.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대통령이 당선된다면, 기업이나 시장에 대해 다양한 생각을 포용해야겠지만, 전통적인 진보적 가치와 너무 충돌하지 않는 선에서 통치해야 유권자 통합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물론 2025년 현재 시점의 유권자 가치지향 구도가 어떨지는 새로 조사해 봐야 정확하게 알 수 있다. 사회경제적 변화가 크지는 않으므로 기존 구도가 급격하게 허물어지지는 않았을 것으로 짐작한다.

다만 당시 조사에서는 ‘민주주의’는 질문 대상이 아니었다. 누구나 동의할 것으로 봤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 질문을 함께 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궁금하다.

편집자 주.

이 글은 이원재님이 국회 ‘미래를 여는 의회민주주의포럼’에서 2025년 1월 22일 발표한 글을 기초로 정리한 것입니다. 이 글에서 참고한 조사와 분석은 이원재 님이 참여했던 민주당 새로고침위원회에서 진행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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