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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재명 대통령과 박지향 이사장의 질의응답, 그리고 드러난 역설

이재명 대통령과 박지향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의 질의응답이 역사학계에 충격을 주었다. 대통령이 공공기관 업무보고 자리에서 “환빠 논쟁 아느냐”고 물은 것이다.

이재명: “역사 교육 관련해서 그 무슨 환빠 논쟁이 있죠?”

박지향: “아,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이 “환빠”라는 용어조차 모른다는 답변은 첫 번째 충격이었다. 대통령이 “단군, 환단고기… 그 연구하는 사람들을 비하해서 환빠라고 부르잖아요”라고 설명하자, 박지향은 그제서야 “소위 재야사학자들”이라는 오래된 호칭으로 응답했다.

유사역사학에 대한 학계의 비판이 15년 넘게 축적되었지만, 정작 그 타겟이 되어온 기관의 수장은 이 문제에 관심조차 없었던 것이다. 더 큰 문제는 대통령의 다음 질문이었다.

이재명: “환단고기는 문헌이 아니에요?”

박지향: “모든 역사가 다 사실을 기록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박지향의 모호한 답변 후, 대통령은 이렇게 정리했다.

이재명: “역사를 어떤 시각에서, 어떤 입장에서 볼 거냐… 근본적인 입장들이 차이가 있는 것 같아요. 고민거립니다.”

검증된 역사학과 유사역사학이 단지 ‘관점의 차이’라는 뉘앙스였다. 이것은 지구평면설과 과학을 ‘입장 차이’로 보는 것과 같다. 환단고기는 1911년 이전 어떤 사료에도 등장하지 않으며, 근대 일본식 한자어가 고대 기록에 나오고, 고고학적 증거와 정면 충돌하는 위작이다.

그런데 이 대화가 이루어진 바로 그 정권에서, 동시에 인공지능과 테크 담론에만 몰두하는 모습이 뚜렷하다. 문화는 GDP 기여도로, 역사는 정통성 투쟁의 도구로, 인문학은 평생교육의 장식품으로 전락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 두 현상이 같은 정권에서 동시에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이재명 정부는 한편으로는 환단고기에 우호적 뉘앙스를 보이며 유사역사학 세력과 거리를 두지 않고, 다른 한편으로는 AI와 테크 담론만을 미래 전략의 핵심으로 삼는다. 과거는 유사역사학으로 신화화하고, 미래는 테크 담론으로 신화화하면서, 정작 현재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인문학은 주변화한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 둘 다 정치적 유용성이라는 같은 논리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2. 유사역사학의 정치적 동원: 좌우를 가리지 않는 망상

역사학자 기경량은 페북글에서 날카롭게 지적했다.

“박근혜 대통령 시절 국무회의에서 ‘역사를 잘못 배우면 혼이 비정상’이라고 했을 때, 민주 진영 사람들이 조롱했던 것 기억나나? 그때 박근혜가 입에 올린 ‘혼이 비정상’ 운운이 바로 환단고기를 인용한 거였다. 정치인이 환단고기를 믿고 옹호한다는 건 박근혜 수준이 된다는 것이다.”

유사역사학은 좌우를 가리지 않는다. 기경량이 말했듯, “사이비 역사 신봉자는 진보 보수, 좌파 우파의 구분이 없다. 여야에 다 퍼져 있다.” 박근혜는 환단고기를 인용하며 ‘혼이 비정상’을 말했고, 이재명은 “환단고기는 문헌이 아닌가”라고 물었다.

민주당 일각에서 유사역사학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그것이 ‘민족 정통성’과 ‘반일 정서’라는 정치적 자산과 결합되기 때문이다. 전라도천년사 사업, 가야사바로세우기 시민연대와의 간담회, 전국역사단체협의회와의 정책협약… 민주당은 유사역사학 세력과의 연대를 강화해왔다. 허성관을 경기도연구원 이사장에 임명한 것도 이재명 경기지사 시절이었다.

유사역사학 비판 작가 이문영은 이재명 대통령의 유사역사학 경도에 대해 일관되게 비판해왔다. 2017년 성남시장 시절 ‘식민사관’ 운운 발언, 2018년 경기지사의 허성관 영입, 2025년 민주당과 유사역사 단체 연대… 그리고 이제 대통령 자리에서 “환단고기는 문헌이 아닌가”라는 질문이 나왔다.

뉴라이트가 일제 식민지배를 ‘근대화’로 미화하는 것과, 유사역사학이 환단고기를 사료로 포장하고 실증 사학을 ‘식민사관’으로 공격하는 것은, 모두 정치적 목적을 위해 역사학의 엄밀성을 희생시킨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역사는 탐구의 대상이 아니라 동원의 도구가 된다.

3. 테크노크라시의 또 다른 얼굴: 인문학의 주변화

그런데 같은 정권에서, 인공지능과 테크 담론에만 집중하는 모습이 뚜렷하다. 문화는 내재적 가치가 아니라 산업 경쟁력과 수출이라는 경제적 효용의 프레임 안에 갇혀 있다. 문화는 GDP 기여도로, 역사는 정통성 투쟁의 도구로만 소환된다.

역사에 대한 인식 역시 마찬가지다. 뿌리에 대한 정통성 확보, 뉴라이트 역사관과의 전쟁, 그리고 이와 연동하는 현실 정치 및 국가관이라는 협소한 프레임 안에 갇혀 있다.

이런 구도에서 인문학으로서의 문화, 역사학, 그리고 그 연구자들은 돈도 안 되고 힘도 안 되는 것으로 치부된다. 그저 ‘평생교육’이나 추상적인 ‘시민교육’의 한 구석자리나 차지하는 낡아빠진 장식품, 언젠가 한번 찾아서 달아봐야지 하는 장신구에 불과하다. 필요할 때 꺼내 쓰고, 쓸모없으면 서랍에 넣어두는 선택적 교양으로 전락한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인식의 문제가 아니다. 국가 예산 구조가 이를 그대로 보여준다.

2025년 기준 정부 전체 R&D 예산 약 29.6조 원 중 인문사회계열이 차지하는 비율은 약 1.2%에 불과했다. 더 심각한 것은 2026년 예산안에서 전체 R&D 예산이 35.3조 원으로 19.3% 증가했음에도, 인문사회 비중은 0.93%로 오히려 감소했다는 점이다. 전체 R&D 예산에서 인문사회 비중이 1% 미만으로 떨어진 것은 극히 이례적이다.

교육부 학술연구지원사업을 보면 구조가 더 명확하다. 2025년 총 1조 149억 원 중 인문사회 분야는 4,191억 원(41%), 이공계는 5,958억 원(59%)이 배정되었다. 순수 R&D 예산만 따지면 격차는 더 벌어진다. 인문사회 2,996억 원 대 이공계 5,958억 원으로, 거의 2배 차이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소관 기초연구사업 예산만 해도 2025년에 2조 3천억 원 이상이 배정되었다. 인문사회 전체 기초연구예산 2,996억 원의 거의 8배다.

학문후속세대 지원 격차는 더욱 극명하다. 2025년 기준 석·박사 연구장려금 지원 인원을 보면, 인문사회는 석사 약 200명·박사 약 400명인 반면, 이공계는 석사 약 2,850명·박사 약 2,281명이다. 10배 이상 차이다. 인문사회 분야에서 제자를 양성하는 교수자로서 이 수치는 진심으로 충격을 떠나 경악하게 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하다. 정부는 “AI가 미래”라고 말하면서, 정작 AI를 비판적으로 검증할 인문학 연구자는 양성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기술 개발에는 수조 원을 쏟아붓지만, 그 기술이 누구를 배제하는지, 어떤 편향을 내포하는지, 무엇이 옳은지를 묻는 연구에는 1%도 투자하지 않는다.

이것은 단지 기술과 인문학 사이의 불균형만이 아니다. 인문학 전체, 특히 역사학이 정치적 도구나 평생교육의 장식품으로 전락하면서, 학문 본연의 비판적 역할을 상실하고 있다는 신호다. 대통령이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을 만나 역사정치의 구조적 문제가 아니라 “환빠 논쟁”을 물었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사회학자 김동춘은 다른 각도에서 문제를 제기했다. “이 소중한 시간에 ‘환빠’ 질문을 한 것은 적절치 않았다. 동북아재단의 설립 취지에 맞게 식민지근대화론이나 중국의 동북공정 이후 중국 민족주의 강화와 샌프란시스코 체제 재해석 움직임에 한국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물었어야 했다.”

김동춘의 지적은 정확하다. 대통령이 진정 역사와 인문학의 가치를 이해했다면, 유사역사학 논쟁이 아니라 동북아 역사정치의 구조적 문제를 물었어야 한다. 그러나 질문의 방향은 “환단고기는 문헌이 아닌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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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대학 강의실의 풍경: 학습의 공동화

인문학의 주변화와 관련해 요즘 대학가의 교육 현장이 심상치 않다. 최근 목격되는 현상은 이러한 테크노크라시적 사고방식의 연장선상에 있다. 챗지피티, 제미나이, 클로드, 퍼플렉시티 등 대형 언어모델(LLM)의 등장 이후, 대학가는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다. 문제는 이 변화가 ‘학습 도구의 혁신’이 아니라 ‘학습 그 자체의 공동화’로 귀결되고 있다는 점이다.

많은 대학이 도입한 AI 탐지 도구(GPT-Killer, Turnitin AI Detection, CopyKiller 등)는 학생들의 과제물에서 AI 작성 여부를 판별한다. 그러나 이에 대응해 학생들 사이에서 ‘Humanize(휴머나이저)’ 도구가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이 도구들은 AI가 생성한 텍스트에 의도적으로 오타를 삽입하고, 띄어쓰기를 틀리게 만들며, 문장 길이를 불규칙하게 변형한다. 그 결과 탐지 프로그램은 ‘사람이 쓴 글’로 판정하지만, 실제로는 학생의 사고 과정이 전혀 개입하지 않은 완벽한 기만 출력물이다.

이것은 개별 학생의 도덕적 해이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효율성과 결과물 중심 교육 시스템이 만들어낸 필연적 귀결이다. 대학은 학생들에게 ‘생각하는 법’을 가르치지 않는다. 대신 ‘결과물을 빨리 내는 법’, ‘취업에 필요한 스펙을 쌓는 법’을 가르친다. 학점은 학습의 증거가 아니라 취업 포트폴리오의 한 줄로 전락했다. 이런 구조에서 학생들이 AI를 ‘효율적으로’ 활용해 학점을 관리하려는 것은 오히려 시스템이 요구하는 합리적 선택처럼 보인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 현상이 정부와 사회가 주입하는 ‘테크 만능주의’와 정확히 맞물려 있다는 점이다. 이재명 정부는 AI를 ‘제4차 산업혁명의 핵심 동력’으로 규정하며 기술 혁신과 산업 경쟁력 강화를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다. 대학 역시 ‘AI 활용 역량’을 미래 인재의 핵심 요건으로 제시한다.

그러나 정작 ‘AI를 어떻게 비판적으로 검증할 것인가’, ‘AI의 편향을 어떻게 식별할 것인가’, ‘알고리즘이 배제하는 목소리는 무엇인가’와 같은 질문은 제기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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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왜 같은 정권에서 두 현상이 나타나는가

언뜻 모순처럼 보인다. 유사역사학은 ‘민족 정통성’을 강조하고, 테크노크라시는 ‘글로벌 경쟁력’을 강조한다. 하나는 과거로, 하나는 미래로 향한다. 어떻게 같은 정권이 이 둘을 동시에 추구할 수 있는가?

답은 간단하다. 둘 다 정치적으로 유용하기 때문이다.

유사역사학은 민족 정서를 동원한다. “우리는 위대했다”, “일제가 역사를 왜곡했다”는 서사는 정치적 지지 기반을 강화하는 강력한 도구다. 역사적 사실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유권자의 감정이다.

테크 담론은 경제 성장 신화를 유지한다. “AI가 미래다”, “100조원 투자”라는 수사는 정권의 역동성과 미래지향성을 보여주는 상징이다. 실제 효과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뭔가 하고 있다”는 이미지다.

둘의 공통점은 명확하다. 진리 추구가 아니라 정치적 유용성이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인문학은 둘 모두에게 방해물이 된다. 인문학은 끊임없이 묻기 때문이다. “이것이 정말 사실인가?”, “이것이 정말 옳은가?”, “누가 배제되는가?”

유사역사학은 이런 질문을 ‘식민사관’으로 매도하고, 테크노크라시는 ‘비효율적’이라고 치부한다. 결과적으로 인문학은 과거의 신화와 미래의 신화 사이에서, 현재를 비판적으로 성찰할 자리를 잃는다.

이것은 시간성의 정치이기도 하다. 유사역사학은 과거를 신화화한다(“우리는 위대했다”). 테크 담론은 미래를 신화화한다(“우리는 앞서간다”). 그 사이에서 현재의 비판(“지금 우리는 옳은가?”)은 설 자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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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이중전선의 구조적 분석

역사학은 이제 이중전선에 놓였다.

한쪽에서는 테크노크라시가 인문학을 ‘비효율적’, ‘비생산적’이라며 주변화한다. 문화는 산업 경쟁력으로, 역사는 정통성 도구로만 소환되며, 역사학 연구자들은 ‘평생교육’이나 ‘시민교양’의 장식품으로 전락한다. AI와 빅데이터가 ‘객관적 진실’을 제공할 것이라는 기술결정론 속에서, ‘왜’와 ‘누구를 위해’를 묻는 인문학적 성찰은 설 자리를 잃는다.

다른 한쪽에서는 유사역사학이 학문적 엄밀성을 공격한다. 사료 비판, 실증적 검토, 해석의 다양성이라는 역사학의 방법론은 ‘식민사관’으로 매도되고, 민족 감정에 호소하는 비학문적 주장이 ‘진정한 역사’로 포장된다.

이 두 전선은 언뜻 상반되어 보이지만, 본질적으로 같은 구조적 문제에서 비롯된다. 둘 다 역사학의 고유한 방법론과 가치를 부정한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테크노크라시는 ‘효율성’이라는 이름으로, 유사역사학은 ‘민족 정통성’이라는 이름으로, 역사학이 추구하는 비판적 성찰, 엄밀한 검증, 복수의 해석 가능성을 거부한다.

예를 들어, AI에게 한국 현대사의 주요 사건을 물으면 대개 ‘다수의 논리’에 기반한 답변을 내놓는다. 흥남부두 철수는 “10만 명을 구조한 인도주의적 작전”으로 요약되고, 한국전쟁 포로 문제는 “국제법에 따라 관리되었다”고 서술된다. 하지만 배에 타지 못한 사람들은 누구였는가, 국가는 어떤 기준으로 국민을 선별했는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의 폭력은 왜 언급되지 않는가와 같은 질문은 애초에 데이터에 충분히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에 AI는 답하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데이터 편향이며, 동시에 배제의 메커니즘이다. AI는 학습 데이터의 통계적 패턴을 재생산하기 때문에, 역사 속에서 국가가 국민을 분류하고 배제했던 것과 똑같은 논리가 21세기 알고리즘 안에서 작동한다. 학생들이 이를 검증 없이 수용하면, 그들은 과거의 국가 폭력을 기술이라는 이름으로 재생산하는 공범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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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기술과 인문학의 올바른 관계: 비판적 활용

이 시점에서 명확히 해야 할 것이 있다. 나는 인공지능 활용을 무조건 반대하지 않는다. 문제는 기술결정론이다. 기술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는 믿음, AI가 ‘객관적 진실’을 제공할 것이라는 환상, 효율성이 곧 정당성이라는 논리. 이런 테크 담론을 나는 반대한다.

하지만 기술과 AI를 적절한 방법으로, 윤리적 고민과 함께 활용한다면, 그 가능성을 나는 높이 평가한다. 예를 들어, AI를 활용해 방대한 사료를 검색하고 분류하는 것은 역사 연구에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디지털 아카이브를 통해 접근 불가능했던 자료에 접근하는 것도 가능하다. 텍스트 마이닝 기법으로 언론 보도의 경향성을 분석하거나, 통계 모델로 역사적 패턴을 탐색하는 것도 의미 있는 시도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의 전제는 비판적 검증이다. AI가 내놓은 결과를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떤 데이터에 기반했는지, 어떤 편향을 내포하는지, 무엇을 배제하는지를 끊임없이 질문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역사학이 AI 시대에 제공할 수 있는 핵심 역량이다.

학생들에게도 같은 원칙을 적용해야 한다. AI를 쓰지 말라고 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가르쳐야 한다. AI가 생성한 텍스트를 검증하고, 편향을 식별하고, 자신의 관점을 더하는 과정. 그것이 바로 학습이며, 그것이야말로 AI가 대체할 수 없는 인간 고유의 능력이다.

2015년 구글 포토 AI가 흑인 사용자를 ‘고릴라’로 분류한 사건은 단순한 기술적 오류가 아니었다. 이는 학습 데이터의 백인 편중이라는 구조적 문제, 즉 소수자 데이터를 ‘이상치(Outlier)’로 취급하는 배제의 논리가 작동한 결과였다. 만약 그 개발팀에 ‘누가 배제되고 있는가’를 묻는 인문학적 감수성을 가진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출시 전에 이 문제를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자율주행차 알고리즘이 사고 상황에서 누구를 보호할지 결정할 때 필요한 것은 파이썬 코딩 능력이 아니라 생명과 윤리에 대한 철학이다. 노인과 어린이 중 누구를 우선할 것인가, 탑승자와 보행자 중 누구를 보호할 것인가. 이것은 기술로 해결할 수 없는 가치 판단의 문제이며, 바로 인문학이 다루는 영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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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유사역사학에 맞서는 법: 엄밀성의 정치적 의미

유사역사학에 맞서는 방법도 명확하다. 학문적 엄밀성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대중과 소통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유사역사학이 힘을 얻는 이유는 그것이 감정적으로 호소력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은 위대했다’, ‘일제가 우리 역사를 왜곡했다’는 메시지는 자긍심과 분노라는 강력한 정서를 자극한다. 반면 정통 역사학은 ‘사료가 부족하다’, ‘해석이 엇갈린다’, ‘단정할 수 없다’는 신중한 태도를 취한다. 학문적으로는 옳지만, 대중적으로는 힘이 약하다.

그렇다고 학문적 엄밀성을 포기하고 감정에 호소할 수는 없다. 그것은 유사역사학과 똑같은 길을 가는 것이다. 필요한 것은 엄밀성과 대중성의 결합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왜 엄밀성이 중요한지를 설명해야 한다. 역사학의 엄밀성은 ‘민족을 부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권력의 자의적 역사 해석을 막기 위해서 필요하다. (뉴)라이트가 독재를 ‘발전’으로 미화할 때, 유사역사학이 민족 감정을 정치적으로 동원할 때, 이를 견제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학문적 엄밀성뿐이다.

기경량이 지적했듯, “사이비 역사 신봉자는 진보 보수, 좌파 우파의 구분이 없다. 여야에 다 퍼져 있다.” 박근혜는 환단고기를 인용하며 ‘혼이 비정상’을 말했고, 이재명은 “환단고기는 문헌이 아닌가”라고 물었다. 유사역사학은 정치 이념을 초월한 망상이며, 그 망상에 빠진 정치인의 말로는 역사가 증명한다.

이문영이 강조했듯, “환빠”라는 용어는 이제 단순히 환단고기 신봉자가 아니라 유사역사학 추종자 전반을 가리키는 대명사가 되었다. 그것은 부라보콘이 아이스크림 콘의 대명사가 된 것과 같다. 중요한 것은 용어가 아니라, 검증되지 않은 역사 주장을 정치적으로 동원하는 구조 그 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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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역사사회학자로서의 고민: 문제와 함께 머물기

나는 역사사회학을 전공한다. 역사사회학은 구조와 과정을 동시에 보며, ‘어떻게 작동하는가’와 ‘왜 그렇게 되었는가’를 함께 묻는다. 그런데 최근 12.3 비상계엄과 내란을 겪으며, 내가 붙들고 있는 질문이 하나 있다. 우리는 왜 이렇게 문제를 빨리 해결하려 하는가?

테크노크라시는 말한다. “AI가 해결해줄 것이다.” 유사역사학은 말한다. “우리는 위대했으니 자긍심을 가지면 된다.” 응보적 정의는 말한다. “가해자를 처벌하면 된다.” 정치는 말한다. “다음 선거에서 이기면 된다.”

전부 쉬운 답이다. 그리고 전부 문제를 실제로 해결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진짜 문제는 답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질문하기가 너무 불편하기 때문이다.

“AI가 배제하는 사람은 누구인가?”라고 물으면, 개발자들은 불편해한다. 효율성 논리가 흔들리기 때문이다.

“환단고기는 위작이다”라고 말하면, 민족주의자들은 분노한다. 자긍심이 상처받기 때문이다.

“역사적 진실은 단정할 수 없다”라고 말하면, 정치인들은 외면한다. 정통성 투쟁에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문학의 역할은 무엇인가?

불편한 질문과 함께 머무는 것이다. 쉬운 해결책을 거부하고, 복잡한 현실을 견디며, 배제된 목소리를 듣고, 검증을 멈추지 않는 것. 그것이 인문학이 할 수 있는, 그리고 해야만 하는 일이다.

테크노크라시와 유사역사학은 정반대처럼 보이지만, 본질은 같다. 둘 다 불편한 질문을 회피한다. 하나는 기술로, 하나는 감정으로. 하지만 진정한 변화는 회피에서 오지 않는다. 문제와 함께 머물 때, 비로소 새로운 가능성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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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결론: 인문학의 자리는 질문을 멈추지 않는 곳에 있다

테크노크라시의 시대, 인문학의 자리는 어디인가?

그것은 질문을 멈추지 않는 곳에 있다. AI를 활용하되 검증하는 자리, 기술의 편향을 식별하는 자리, 유사역사학의 감정 동원을 견제하는 자리, 권력의 자의적 해석을 막는 자리. 쉬운 해결책을 거부하고 불편한 질문을 던지는 자리. 그곳이 바로 인문학이 서야 할 자리다.

나는 AI를 적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AI를 비판적으로 활용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 인문학의 새로운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동시에, 유사역사학의 감정 동원에 맞서 학문적 엄밀성을 대중에게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 것 역시 역사학의 책무라고 생각한다.

이 두 과제는 하나로 수렴한다. 테크노크라시가 제시하는 “효율성”이라는 쉬운 답과, 유사역사학이 제공하는 “민족 자긍심”이라는 감정적 위안을 모두 거부하고, 대신 복잡하고 불편한 현실과 함께 머물며 새로운 가능성을 찾는 것.

이중전선은 정말 힘들다. 한쪽에서는 ‘구시대적’이라는 비난을 받고, 다른 한쪽에서는 ‘민족을 부정한다’는 공격을 받는다. 하지만 바로 그 자리야말로 인문학이 포기해서는 안 되는 자리다.

문화는 GDP 기여도가 아니라 인간 존엄의 표현이며, 역사는 정통성 도구가 아니라 비판적 성찰의 장이다. 이 명제를 지키기 위해, 인문학은 테크노크라시와 유사역사학이라는 이중전선에서 비판의 목소리를 내야 한다.

“환단고기는 문헌이 아닌가요?”라는 질문에, 역사학은 명확히 답해야 한다. “문헌이지만 위작이며, 역사학은 검증 가능한 사료와 방법론으로 작동합니다. 우리는 쉬운 답 대신, 증거와 함께 머물며 과거를 이해하려 합니다.”

그리고 대학 강의실에서 Humanize 도구로 ‘인간인 척’ 하는 학생들에게도 말해야 한다. “AI를 쓰되, 검증하고, 비판하고, 네 생각을 더하라. 쉬운 출력물을 거부하고, 어려운 질문과 함께 머물러라. 그것이 학습이고, 그것이 인간이 AI와 다른 이유다.”

이재명 대통령에게 제안한다.

대통령은 박지향 이사장에게 “환빠 논쟁”을 물었다. 하지만 정작 필요한 것은 역사학자들과의 진지한 대화다. 이공계 연구자 및 기업인들과만 대화하지 말고, 인문학 연구자들, 역사학자들, 사회학자들과도 만나야 한다.

AI 스타트업 대표들과만 만나지 말고, 인문학 기반 소셜벤처, 비판적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 현장, 역사 아카이브 구축 프로젝트를 운영하는 사람들과도 대화해야 한다. 그들은 돈은 없지만, 질문은 가지고 있다. 그 질문이야말로 이 나라가 방향을 잃지 않게 해주는 나침반이다.

그리고 한국연구재단을 포함한 국가 연구지원 체계를 재검토해야 한다. 전체 R&D 예산이 35조 원을 넘는데, 인문사회 비중이 1%도 안 된다는 것은 구조적 문제다. 이것은 AI를 개발하면서 동시에 AI를 검증할 능력을 포기하겠다는 선언과 같다.

2조 3천억 원을 기초과학에 투자하는 것은 좋다. 하지만 인문사회 기초연구에 3천억 원도 안 되는 예산을 배정하면서 “균형 잡힌 발전”을 말할 수는 없다. 학문후속세대 지원에서 인문사회 석·박사가 이공계의 10분의 1도 안 되는 현실에서, 20년 후 이 나라에서 누가 기술을 비판적으로 사유할 것인가?

기술은 속도를 제공하지만, 방향은 인문학이 제공한다. 방향 없는 속도는 절벽을 향한 질주일 뿐이다. 대통령이 진정으로 AI 강국을 꿈꾼다면, 역설적이게도 인문학에 투자해야 한다. 구글 포토가 흑인을 고릴라로 분류한 것은 코딩 실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누가 배제되는가’를 묻는 사람이 없어서였다.

그것이 내가, 역사사회학자로서 지금 서 있는 자리다. 테크노크라시와 유사역사학 사이에서, 쉬운 답을 거부하고 불편한 질문과 함께 머물며, 끊임없이 묻고 검증하는 자리. 질문을 멈추지 않는 것. 그것이 이 시대 인문학의 유일한, 그러나 가장 강력한 나침반이자 역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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