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우리포트] 오래된 질문과 지극히 상식적인 답변, 대한민국은 언제 건국됐나.
“정말 이상하지 않나요?”(“Is it weird? Absolutely.”) 팀 월즈(미국 민주당 부통령 후보)가 한 말이다. 도널드 트럼프(미국 공화당 대통령 후보)와 그 지지자들을 두고 한 말이지만, 요즘 한국에서 광복절을 두고 벌어지는 논란을 보면 이 말이 떠오른다.
장면 1. 8월26일, 국회 정무위원회 회의.
- 유동수(민주당 의원)가 김형석(독립기념관 관장)에게 물었다. “1945년 광복됐다는 것을 인정하나? 관장 자격으로 이야기해달라.”
- 김형석이 말했다. “멘트를 하지 않겠다.”
- “예스도 아니고 노도 아니란 말인가.”
- “그렇다.”
장면 2. 8월26일, 고용노동부 장관 인사청문회.
- 박홍배(민주당 의원)가 김문수(고용노동부 장관 후보자)에게 물었다. “1919년은 일제 식민지 시대인데 무슨 나라가 있냐고 말한 적 있다. 지금도 같은 생각인가.”
- 김문수가 “같은 생각”이라고 말하자 다시 물었다. “그러면 일제 강점기에 살았던 우리 선조들은 국적이 일본인가.”
- 김문수가 다시 말했다. “그러면 일제시대 때 국적이 한국인가. 상식적인 얘기를 해야지 말이 안 되는 얘기를 하면 안 된다. 일제시대 한국이 국적이 있었나. 나라가 망했는데 무슨 국적이 있었나.”
이게 왜 중요한가.
- 한국 보수 진영이 주도하는 오래된 프레임 전쟁이다.
- 박근혜 정부 시절 건국절 논쟁부터 시작된 거대한 인식의 격차가 있다.
- 보수 언론도 이 소모적인 논쟁에서 발을 빼고 싶어 하는 눈치인데 윤석열(대통령) 주변에서 이슈를 계속 키우고 있다.
- 거슬러 올라가면 식민지 근대화론과 이승만(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와도 연결되는 문제다.
사실.
- 임시 정부 수립은 1919년 4월11일이고 광복은 1945년 8월15일이고,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은 1948년 8월15일이다.
- 그렇다면 대한민국 건국은 1919년인가, 1945년인가, 1948년인가, 이 지점에서 입장이 엇갈린다.
엇갈리는 주장.
- 역사적 맥락에서 ‘대한민국의 건국’은 단순히 ‘정부 수립’ 이상의 의미가 있다.
- 우리는 빼앗긴 나라를 되찾은 것인가. 아니면 없던 나라를 만든 것인가.
- 질문을 바꿔볼 수도 있다. 나라를 빼앗긴 동안 이 나라는 일본이었나. 그 35년 동안 우리는 일본 국민이었나.
우리가 빼앗긴 것은 무엇인가.
- 교과서에 나오는 국가의 3요소는 주권과 영토와 국민이다. 한국은 영토를 빼앗겼지만 임시 정부를 세우고 주권을 선포했다. 광복 이후 영토를 회복한 뒤 3년이 지나 정식으로 정부를 수립했다.
- “나라를 빼앗겼다”고 말하곤 했지만 실제로 “우리는 나라가 없었다”고 말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다. 나라가 없으면 새로 만들어야 하지만 부당하게 빼앗긴 거라면 돌려받으면 된다.
- 도둑이 안방을 차지했다고 내 집이 아닌 건 아니다.
끝나지 않은 건국절 논쟁.
- 2006년 이영훈(서울대 교수) 등이 주축이 된 이른바 뉴라이트가 8월15일을 광복절(1945년) 대신에 건국절(1948년)로 기념하자고 제안했다. 우리가 자력으로 광복을 되찾은 게 아니니 광복절은 큰 의미가 없다는 주장이다.
- 식민지 근대화론은 일제 강점기에 근대화의 토대가 마련됐다고 보는 이론이다.
- 뉴라이트는 애초에 1919년 임시 정부와 독립운동의 역사를 부정하거나 평가 절하한다. “임시 정부는 국제적으로 인정받지 못했다”면서 “나라를 빼앗겼으니 일본 국적이 아니면 뭐냐”는 발상은 그야말로 일본의 신민을 자처하는 꼴이다.
- 최민우(중앙일보 정치부장)의 논리도 비슷하다. “나라가 있었다면 왜 독립운동을 했겠느냐”면서 “나라를 빼앗겼으니 일장기를 달고 올림픽에 출전했던 것 아니냐”고 반문한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적 팩트”고 “일제 시대, 우리에게 나라가 있었다는 주장은 뒤늦은 정신 승리”라는 이야기다.
- 언뜻 맞는 소리 같지만 궤변이다.
문재인의 1919년 건국론.
- 2017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2년 뒤 2019년은 대한민국 건국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라고 말했다. 현직 대통령이 1919년 임시 정부 수립을 대한민국 건국이라고 명시적으로 밝힌 것은 처음이었다.
- 김대중(전 대통령)과 노무현(전 대통령) 때는 건국이란 개념이 쟁점이 되지 않았다.
- 김대중은 1998년 광복절 행사에서 “올해로 건국 50주년을 맞았다”고 말한 적 있다. 노무현도 2003년 광복절 행사에서 “58년 전 오늘 나라와 자유를 되찾았다”면서 “그로부터 3년 후에는 민주공화국을 세웠다”고 말했다.
- 김대중과 노무현이 1948년을 건국이라고 말한 건 사실이지만 광복의 의미를 평가절하했거나 임시 정부를 부정한 건 아니다. 건국이란 말에 특별히 의미를 두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홍준표의 돌직구.
- 홍준표(대구시장)가 모처럼 윤석열 정부에 쓴소리했다. 페이스북에 이런 글을 썼다.
- “을사늑약은 원천 무효라고 국사책에 나와 있다. 일제시대 강제 병합되었지만 우리 국적은 일본이 아니고 1919년 4월11일 이전은 대한제국 국민이었고 임시 정부 수립 이후는 대한민국 국민이어야 헌법 전문에 충실한 것 아닌가. 을사늑약을 원천 무효라고 해놓고 당시 우리 국민들의 국적을 일본으로 인정한다면 을사늑약을 인정하고 상해임시 정부는 부정하는 것 아닌가.”
그들이 외면하는 역사적 사실.
- 김문수는 “식민지 시대에 무슨 나라가 있느냐”고 반문했지만 한국은 1987년 개정한 헌법 전문에서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선언하고 있다.
- 대한민국이 1948년에 탄생한 신생 국가가 아니라는 건 논쟁의 영역이 아니라 국가 차원에서 합의되고 공표된 사실이다.
- 이승만은 1948년 5월31일 제헌국회 개원 축사에서 “이 국회에서 건설되는 정부는 즉 기미년에 서울에서 수립된 민국 임시정부의 계승이니 29년 만의 민국의 부활”이고 “대한민국의 연호는 기미년에서 기산한다”고 말했다.
- 아이러니하게도 뉴라이트가 이승만을 건국 대통령으로 떠받드는 것과 달리 이승만은 1919년 건국을 강조했다. 제헌 국회가 국가의 연호를 단군기원으로 쓰자고 제안했으나 이승만이 대한민국 연호를 고집해서 이날 축사의 마지막 문장은 “대한민국 30년 5월 31일”로 끝난다. 1919년을 대한민국 원년으로 1948년은 대한민국 30년이 된다는 의미다.
- 1965년 한일 회담 결과 체결한 한일기본조약에는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 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는 대목이 있다.
- 1986년 7월, 전두환 정부는 국무회의에서 독일 정부 등의 질의에 대해 이렇게 의결한 바 있다.
- “을사 보호조약 등은 대한제국과 조약 체결권자(고종과 순종)에 대해 강박을 행사하여 체결된 조약이므로 당연무효다. (중략) 법적으로는 대한제국이 국가로서 소멸한 것이 아니라 계속 존속되어 왔으나, 다만 그 행위능력 즉 영토와 인민에 대한 실효성 있는 통치권만 일본에 의하여 불법적으로 대리행사되어 온 것이다. (중략) 대한민국은 1945년 8월15일 일본으로부터 분리, 독립한 신생국이 아니라 일본에 의해 제한되어 왔던 주권을 회복한 것이며, 대한민국은 동일한 국제법 주체인 국가 내에서의 국체, 정체 및 국호의 변경에 해당하는 것이므로 대한제국과 대한민국의 동일성은 계속 유지되는 것이다.”
‘건국’이 언제냐는 프레임 왜곡.
- 이철우(연세대 교수)는 동아일보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강도가 물건을 빼앗으면 주인이 소유권을 잃는가? 물건의 점유만을 잃는 것이지 소유권을 잃는 건 아니다. 국가 역시 강점으로 ‘소멸했다’는 것과 ‘주권이 침해됐다’는 건 다른 문제다.”
- 이철우는 대한제국과 대한민국의 동일성과 계속성에 대한 확신을 “대한민국의 주권적 자기 정의(sovereign self-definition)”라고 정의했다. “이걸 부정하고 대한민국을 1948년에 처음으로 태어난 나라로 보면 한반도 전체에 대한 대한민국의 관할권이나 독도 영유권 주장의 근거도 약화한다”는 이야기다. 이철우는 “일제 통치의 불법 무효를 전제하지 않는다면 수십 년 동안 과거사를 둘러싸고 오랜 한일회담을 통해 우리가 요구해 온 것 가운데 많은 부분을 잃게 된다”고 강조했다.
- 이원재(성공회대 교수)는 뉴스토마토 ‘끝내주는 경제’에서 최근 이철우가 페이스북에 쓴 글을 소개했다. “법적으로는 대한제국이 국가로서 소멸한 것이 아니라 계속 존속되어 왔으나, 다만 그 행위능력 즉 영토와 인민에 대한 실효성 있는 통치권만 일본에 의하여 불법적으로 대리 행사되어 온 것이다. 대한민국은 1945년 8월15일 일본으로부터 분리, 독립한 신생국이 아니라 일본에 의하여 제한되어 왔던 주권을 회복한 것이며, 대한민국은 동일한 국제법 주체인 국가 내에서의 국체, 정체 및 국호의 변경에 해당하는 것이므로 대한제국과 대한민국의 동일성은 계속 유지되는 것이다.”
결론.
- 프레임을 바꿔야 한다.
- 대한민국 건국이 1919년이냐 1948년이냐를 따지는 것은 어쨌거나 나라를 빼앗긴 건 사실 아니냐, 국제법적으로 한국은 일본이었다는 등의 논리로 변질되기 쉽다.
- 건국절 논란에 맞서서 대한민국은 1919년에 건국됐다고 맞서는 것도 해법이 될 수 없다. 대한제국과의 단절을 의미하는 데다 한국 정부의 공식 입장은 아니다. 국제 사회가 1948년 대한민국을 신생국으로 취급했던 것도 사실이다.
- 문서로 남아있는 한국 정부의 공식 입장은 “대한제국=대한민국”이다. ‘건국’이 끼어들 틈이 없다.
- 분명한 건 대한민국은 1948년에서야 건국된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 맥락 없는 건국절 논쟁에 대한 답은 간단하다. “한 번도 우리나라가 아니었던 적이 없다”고 말하면 된다.
- 윤석열의 죽마고우라는 이철우가 명쾌한 답을 내놨다. 궤변을 늘어놓는 사람들에게는 “일제 지배 불법 무효”, 이 여덟 글자를 이야기해 주면 된다. 여기에 반대하지 않다면 그때부터 지금까지 당연히 ‘우리나라’였던 것을 굳이 새로 건국해야 할 이유가 없다.
- 소모적인 논쟁은 여기에서 끝내야 한다. 김문수와 김형석은 사퇴해야 한다.
요 며칠새에 건국절 논란에 대해 반복적으로 슬로우 뉴스가 반응하고 있지만, 슬로우 뉴스의 애독자로서 느리고 깊기보단 짧고 얕은 뉴스의 연발이라 생각된다.
사태는 “일제 지배 불법 무효”로 수습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대한민국 정부의 공직에 있는 자들이 헌법에 명시된 정식을 거부하는 것에 의문을 던져야지, 역사전체를 단순화하는 것은 꼬투리만 남길 뿐이다.
광복국의 활동이 장제쓰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 연합국이 식민지 해방을 결정한 것은 분명하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신을 계승하는 것에 아무런 문제도 없다.
그러나 독립운동의 방향은 하나가 아니었으며, 그 시절에 식민지의 독립은 말그대로 건국을 의미했다. 임시정부의 민족주의, 공산주의, 아나키즘까지 다종다양했다(홍범도 장군을 문제시 삼는 것도 이 지점이다). 심지어 그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를테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도 좌파였던 여운형의 좌우합작운동에 대해 김구는 차가운 반응을 보였고, 김구와 이승만의 노선대결은 지금도 유명하다.
보수들이 잡고 있는 프레임은 식민지근대화론이나 박근혜 건국절보다 훨씬 오래 전으로 올라간다. 이는 학생운동이 활발했던 시절에 NL이 내세웠던 대한민국 건국이 괴뢰국이었으며, 따라서 새로운 민족 통합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논리에 대한 강렬한 반발에 기반한다. 물론 현재 그런 논리를 진지하게 내세우는 사람은 거의 없으며, 있다고 해도 영향력은 전무하다. 문제는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독립운동 노선은 다종다양했다는 데에 있다.
대한민국 괴뢰국 주장에 대한 알레르기로 시작된 이승만 국부화/숭배 프로젝트는 대한민국 “건국”은 불법이 아니라는 생각, 즉 이 글이 강조하는 대한민국의 정통성에 대한 옹호에서 비롯한다는 점이다. 민족주의에 민족주의로 맞서는 것이야말로 프레임에 종속된 것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