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우리포트] 국민연금 막판 협상, 누가 거짓말을 하나: 더 내고 더 받는 개혁, 이것이 최선일까.
이재명(민주당 대표)이 승부수를 던졌다. 국회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여당이 제시한 소득대체율 44%를 전적으로 수용하겠다”고 말했다. “꼭 해야 할 일인데 시간은 없으니 불가피하게 민주당이 다 양보하겠다”면서 “1%포인트 차이 때문에 연금 개혁안을 무산시킬 수는 없다”고 강조했다.
이게 왜 중요한가.
- 이재명의 제안이 받아들여진다면 지지부진했던 연금개혁이 16년 만에 한 단계 앞으로 나갈 수도 있다.
- 하지만 13% 보험료율에 44% 소득 대체율이 선택 가능한 최선인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당장 보험료율 인상이 시급한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더 내고 더 받는 구조에서는 재정 안정에 큰 도움이 안 된다는 지적도 나온다. 소득대체율을 올리는 건 개악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 연금 개혁은 고도의 정치적 결단이 필요한 사안이다. 정작 윤석열(대통령)은 발을 빼고 있고 정치적 유불리에 따라 숫자 게임으로 변질될 우려가 크다.
핵심 쟁점.
- 지금 국민은 소득의 9%를 보험료로 내고 65세 이후에 평균 소득의 40%를 연금으로 받는다.
- 시민대표단은 보험료율을 13%로 올리고 소득대체율을 50%로 올리는 방안을 채택했다.
- 국민의힘과 민주당은 보험료율 인상에는 이견이 없다. 다만 각각 소득대체율을 43%와 45%로 올리자는 안을 내놨다. 조금씩 말이 바뀌긴 했지만 결국 1%포인트의 입장 차이가 남아있는 상황이다.
충돌하는 지점.
- 국민의힘이나 민주당이나 말이 조금씩 바뀌었다.
- 2주 전까지만 해도 “2%포인트 차이로 불발”이라는 기사가 쏟아졌다. 국민의힘 43%와 민주당 45%가 팽팽하게 맞섰다.
- “양쪽 주장을 1%포인트씩 양보하는 44%로 합의하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제안했던 게 조선일보다. 중앙일보도 “보험료 13%-소득대체율 44%안이나 그 언저리가 현실적인 대안일 수 있다”고 제안했다. 이때만 해도 43 Vs 45 구도였다.
- 7일 국민연금 특위 회의에서 “소득대체율을 각자 한 발씩 양보해 44%로 합의하자”고 제안한 게 국민의힘이었고 민주당이 거부했다. 44 Vs 45 구도로 바뀌었다.
- 국민의힘 44%가 공식 제안으로 굳어진 건 10일 유경준(국민의힘 간사)의 페이스북 글이 계기다. “소득대체율 44% 수정 제안에 책임있는 답변을 하라”고 주장했다.
- 그런데 이재명이 24일 “44%와 45% 사이에서 타협할 의사가 명확하게 있다”고 제안하면서 판이 달라졌다. 43~44 Vs 44~45 구도가 됐다.
- 이어 25일에는 “민주당이 다 양보하겠다”면서 “여당이 제시한 소득대체율 44%를 전적으로 수용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제 44 Vs 44의 구도가 됐다. 이제는 소득 대체율이 쟁점이 아니고 합의를 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됐다.
말이 달라졌다.
- 애초에 44%안으로 받아들여진 유경준의 페이스북 글에는 별다른 조건이 없었다.
- “기초연금의 국민연금으로의 전환과, 퇴직연금과 기업연금을 국민연금의 상층에 쌓아 넣는 등 구조개혁이 반드시 논의되어야 한다”고 언급하긴 했지만 특별히 선결 조건을 건 건 아니었다.
- 그런데 이재명이 44%를 받겠다고 하니 “소득대체율 44%는 국민연금과 기초연금의 통합을 일부라도 포함하는 구조개혁이나 연금개혁의 다른 부대조건들이 합의됐을 때의 조건부 안”이라고 말을 바꿨다.
- 장동혁(국민의힘 원내 대변인)은 “부대조건을 쏙 빼놓고 소득대체율 44%만 수용하면서 국민의힘이 제안한 연금개혁안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말하는 것 자체가 사실과 본질을 왜곡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애초에 국민의힘이 요구한 구조개혁이 무엇인지는 설명하지 않았다.
- 유승민(전 바른미래당 의원)도 참전했다. “기초연금과 국민연금의 연계 및 통합, 현재의 확정급여에서 확정기여 방식으로의 전환, 연금재정 악화시 자동안정화장치, 필요시 재정투입 등의 구조개혁을 모수개혁과 함께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왜 달라졌을까.
- 국민의힘이나 민주당이나 지금의 국민연금이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데 동의한다. 재정안정이 핵심 키워드라는 이야기다.
- 하지만 연금 개혁은 어떻게든 욕 먹는 일이고(실질 소득이 줄어들 텐데 기분 좋을 사람은 많지 않다) 국민의힘이나 민주당이나 선거에 미칠 영향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 민주당은 윤석열 정부의 연금 개혁에 들러리를 설 이유가 없고 가뜩이나 윤석열도 한 발 빼고 있는 상황인데 굳이 먼저 치고 나갈 이유도 없다. 애초에 연금 개혁은 국회가 아니라 정부 차원에서 주도해야 하는 사안이다.
- 국민의힘 입장에서는 하기는 해야 하지만 굳이 욕 먹을 일을 떠안는 게 부담스러웠을 수 있다. 총선 전에도 그랬고 참패 이후에는 민주당 핑계를 댈 수 있게 됐다.
- 그래서 적당한 안을 내놓고 결렬시켜서 다음 국회로 넘기려고 했을 텐데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두 당이 내놓은 안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서로 상대방에게 결렬의 책임을 떠넘기고 싶어서 눈치를 보고 있는데 이재명이 승부수를 던졌다.
- 정권 교체를 노리는 이재명 입장에서는 윤석열 정부에서 연금 개혁을 마무리 짓는 게 유리하다. 욕을 먹어도 윤석열이 더 먹고 다음 정부는 부담이 덜하다.
- 최근 논란의 본질은 결국 누구 때문에 판이 깨졌느냐를 두고 벌어지는 명분 싸움이다.
- 애초에 이재명 입장에서는 잃을 게 없는 승부수였다. 국민의힘이 받으면 이재명의 통 큰 양보로 국민연금 개혁의 물꼬를 텄다는 명분을 얻고 국민의힘이 안 받으면 양보를 했는데도 국민의힘이 어깃장을 놓았다고 비난할 수 있다.
- 그래서 43 Vs 45 구도로 출발했는데 국민의힘이 먼저 1%포인트를 양보해서 43~44 Vs 45 구도가 됐다. 이제 민주당이 받을 차례다.
- 그런데 갑자기 이재명이 44%를 받겠다고 하니 국민의힘이 난감한 상황이 됐다.
- 국민의힘 입장에서는? 판이 깨져야 하는데 깨지지 않는 상황이다. 국민의힘은 구조 개혁을 같이 해야 한다는 핑계를 대면서 다음 국회로 넘기려 할 가능성이 크다.
- 당장 채 상병 특검법도 부담이다. 민주당이 채 상병 특검법을 28일에 재의결한다는 계획인데 국민의힘은 남은 국회 일정을 모두 보이콧하고 싶어한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21대 국회가 끝나기를 바란다.) 하지만 채 상병 특검법이 본회의에 올라오면 국민의힘도 투표에 참여해서 총력 방어를 해야 하는 상황이다.
조선일보는 왜 이럴까.
- 조선일보는 24일 1면 머리기사에서 “44%와 45%는 받는 돈 1만 원 차이”라고 지적했다. 어차피 큰 차이 없으니 합의해서 통과시키자는 말이다.
- 25일 사설에서는 “민주당이 이 문제만큼은 정치적 계산을 뒤로하고 나라를 앞세워주기를 고대한다”고 당부하기도 했다. “절박한 ‘연금 개혁’ 민주당이 처리하면 수권 자격 입증할 것”이라는 사설 제목도 파격적이다.
- “내는 돈’ 13% ‘받는 돈’ 44% 안을 처리하고 그 평가를 국민에게 맡긴다면 당장 정치적 손해를 보더라도 다음 지방선거와 대선에서 국민 신뢰를 얻을 것”이라고도 했다.
- 조선일보의 이런 입장은 그동안의 논조를 보면 이해할 수 있다. 지금의 더 내고 더 받는 국민연금은 고소득 계층에 더 유리하다. 조선일보는 과거에도 여러차례 보험료 상한액을 더 높여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국민연금은 한국의 그 어느 금융상품보다 수익률이 좋다.
- 국민연금은 납입 기간이 긴 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유리한 제도다. 여유 자금이 있는 사람들은 더 많이 내고 더 많이 돌려 받는다는 데 반대할 이유가 없다. 국민의힘 안이든 민주당 안이든 보험료율이 13% 올라가더라도 그 이상으로 돌려 받는다면 기꺼이 환영할 일이다. 수익 비율이 조금 낮아지긴 하겠지만 여전히 국민연금은 최고의 금융상품이기 때문이다.
누가 거짓말을 하나.
- 이재명이 언론 플레이를 하고 있는 건 맞다. “윤석열 정부도 소득 대체율 45%를 실무적 안으로 제시한 바가 있다”고 주장한 건 사실일 수 있지만 공식 제안으로 남아있는 게 없고 맥락도 조금 다르다.
- 두 가지 의도가 있을 수 있다.
- 첫째, 일단 통 크게 양보했다는 명분을 확보할 수 있다. 어쨌든 연금 개혁의 책임은 윤석열 정부가 진다. 반발이 없지 않겠지만 일단 보험료율을 9%에서 13%로 올리는 것만으로도 큰 진전이라고 할 수 있다.
- 둘째, 국민의힘의 반대로 딜이 깨지는 게 유리하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 만약 민주당이 딜을 성사시킬 생각이라면 지금 상황에 윤석열을 굳이 자극할 이유가 없다. 이 상황에서 윤석열이 거짓말을 했다고 주장하면 윤석열 입장에서는 받고 싶어도 받기 어렵게 된다. (아, 우리가 45%를 제시한 적 있었군요, 44%면 받아야겠네요, 하지는 않을 것이다.)
- (위 그림은 국민연금 재정추계위가 전망한 한국 경제 성장률과 제도 수급비를 나타낸 것이다. 경제 성장률은 계속 떨어져서 2061년 이후에는 0.2% 수준에 머문다. 제도 수급비는 국민연금 납부자 대비 수급자의 비율을 말한다. 2050년 이후 100%가 넘게 된다.)
13%-44%, 이것이 최선인가.
- 신인석(중앙대 교수)은 서둘러 합의 처리할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 세 가지 이유에서다.
- 첫째, 여전히 내는 것보다 더 받는 구조고 땜질 처방일 수밖에 없다. KDI(한국개발연구원)가 제안한 신연금과 구연금을 분리하는 방안도 검토해 볼 수 있다.
- 둘째, 논의 방법의 결함이다. 시민 대표단의 공론 조사에 정작 미래 세대의 의견은 반영되지 않았다.
- 셋째, 정작 정부는 아무런 안도 내놓지 않았다. 국회가 아니라 정부가 문제 해결의 주체가 돼서 역사적 평가를 받아야 한다는 이야기다.
소득 대체율의 함정.
- 보험료율 2%포인트 인상은 소득 대체율 4%포인트 인상과 맞먹는다. 소득 대체율을 올리면 그만큼 보험료율 인상 효과를 깎아먹는다는 이야기다.
- 이번에 40%에서 44%로 4%포인트 올리면서 보험료율을 9%에서 13%로 4% 올리는데 합의하더라도 실제로 재정 안정에 미치는 효과는 2%포인트 인상 효과에 그친다는 이야기다.
- 연금은 당연히 많이 받으면 좋다. 우리가 간과해서 안 될 부분은 많이 내고 많이 받아가면 그만큼 기금이 소진되는 시점도 앞당겨진다는 사실이다.
- 여기에서 두 가지 질문이 필요하다.
- 첫째, 더 내고 덜 받기를 해도 부족할 판 아닌가.
- 둘째, 지금도 용돈 연금이란 비판이 많은데 덜 받으면 더 쪼그라드는 거 아닌가.
- 두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은 이것이다. 일단 지속 가능하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 기금이 소진되면 국가가 책임지면 된다고 하지만 보험료로 막든 세금으로 막든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다. 우리가 더 내지 않으면 우리보다 훨씬 더 숫자가 적은 우리 다음 세대가 막을 방법이 없다.
오건호의 답변.
- 국민연금 논의에 참고할 만한 교과서 같은 책이 오건호(내가만드는복지국가 운영위원장) 등이 쓴 ‘연금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들’이다.
- 오건호는 “노동시장 중심부 가입자(주변부에 비해 임금 2.7배, 근속연수 6배)에게 더 큰 혜택이 돌아가는 역진성이 나타난다”고 지적했다.
- 2022년 12월 기준 1인당 국민연금 평균 급여는 58만 원 수준이다. 오건호는 어차피 국민연금만으로 미래를 책임질 수 없다고 본다. 국민연금과 기초연금, 퇴직연금을 묶어서 노후를 다시 설계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 오건호는 “국민연금의 수입-지출 불균형이 심각하고 어느 나라보다 빠른 고령화가 진행되고 있는데도 ‘미래 세대는 다 감당할 것’이라는 주문은 한국 진보 진영이 사회적 연대와 지속 가능성에 얼마나 무관심한지 여실이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팩트를 보자.
- 한국 국민연금의 소득 대체율은 실제로 평균 31.2% 정도다. 흔히 말하는 소득 대체율은 40년 동안 보험료를 낸다고 가정할 때 이론적인 계산이고 실제로는 32년이 채 안 된다는 이야기다. 당연히 안정적인 직장에 다니는 고소득 계층이 납입 기간이 길고 보험료도 더 많이 내고 은퇴 이후에 더 많이 돌려 받는다.
- 국민연금관리공단 2022년 통계를 보면 18~59세 인구 가운데 보험료 납부자는 59%밖에 안 된다. 공무원연금 등 특수 직역 연금 가입자 6%를 빼도 전체 생산 가능 인구 가운데 35%가 국민연금의 사각지대라는 이야기다. 국민연금은 이들의 노후를 책임질 수 없다.
- 국회입법조사처 보고서를 보면 상용직 임금 노동자는 연금 가입율이 90%가 넘는데 임시 일용직 정규직 노동자는 54%, 비정규직 노동자는 43%에 그쳤다.
간단한 시뮬레이션.
- 위 그림은 소득과 납입 기간에 따른 국민연금 수익 비율을 비교한 것이다. 소득도 중요하지만 납입 기간도 중요하다. 소득이 높을수록 수익 비율이 낮아지는 재분배 효과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지금의 국민연금은 낸 것보다 훨씬 더 많이 받아가는 구조다.
- A 사례: 소득이 월 500만 원인 사람이 보험료를 월 9만 원씩 10년 냈다면 65세 이후 달마다 20만1950원을 받게 된다. 10년 동안 1080만 원을 내고 85세까지 산다면 20년 동안 4846만8000원을 받는다. 이 경우 수익비는 4.5배로 꽤 높은 편이다.
- B 사례: 소득이 월 500만 원인 사람이 보험료를 월 45만 원씩 40년 냈다면 65세 이후 달마다 160만2840원을 받는다. 40년 동안 2억1600만 원을 내고 85세까지 산다면 20년 동안 3억8468만1600원을 돌려받게 된다. 수익비는 1.8배에 이른다.
- 두 경우를 비교하면 소득이 적고 가입 기간이 짧을수록 수익비가 더 높지만 실제로 받아가는 돈은 소득이 많고 가입 기간이 길수록 훨씬 더 많다. A는 기금 부담이 -3767만 원이지만 B는 -1억6868만 원이다.
- 만약 더 내고 더 받는 개혁을 하면 A와 B에게 나가는 돈이 더 늘어나고 기금 부담도 그만큼 커진다.
중간 결론.
- 아직 진행 중인 사안이니 중간 결론을 내려보자.
- 보험료율을 올리는 것만으로 한 단계 나간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더 내고 더 받는 걸로는 근본적인 해법이 될 수 없고 재정 안정 효과도 크지 않다.
- 국민의힘의 진정성과 별개로 국민연금 개혁은 기초연금 확대와 국민연금 사각 지대를 보완하는 패키지 개혁이 함께 가야 한다.
- 이거라도 하자는 주장과 이렇게 적당히 덮고 가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맞선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이 문제를 제대로 논의해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 윤석열과 이재명 가운데 국민연금의 미래를 더 걱정하는 사람은 누구일까. 사실 둘 다 고민이 깊지 않은 것 같다. 시간이 지나서 13+44% 개혁을 성공한 개혁이라고 평가할까. 아닐 가능성이 크다. 정치적 결단인가. 그것도 아니다. 국민이 동의할까. 그것도 아니다. 21대 국회에서 서둘러 처리해야 할까. 조선일보가 다급하게 밀어붙이는 이유를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올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