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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이 오늘(미국 시간 6월5일), ‘비전 프로(Vision Pro)’라는 이름으로 헤드셋(공간 컴퓨터)을 공개했다. 가격이 무려 3499달러다. 내년 봄에 미국부터 출시되는데 한국에 건너오면 500만 원을 넘길 가능성이 크다.

이게 왜 중요한가.

  • 게임 체인저가 될 거라는 기대 때문이다.
  • 예상했던 가격 보다 훨씬 비싸다. 그런데도 잘 팔린다면 시장의 판도가 바뀐다는 이야기다.
  • VR(가상현실)이니 AR(증강현실)이니 MR(혼합현실)이니 유행이 한참 지난 것 같은데 애플이 다시 들고 나오니 완전히 다른 판이 됐다.
  • AI(인공지능)도 언급하지 않았고 메타버스란 말도 안 썼다. 공간 컴퓨팅(spatial computing)이란 개념을 밀고 있다.

핵심은 이것이다.

  • 헤드셋이 디스플레이가 된다. 커피숍에서든 지하철에서든 비행기 안에서든 헤드셋을 뒤집어 쓰는 순간 수백인치 화면이 뜬다.
  • 맥북이나 아이폰의 화면을 그대로 불러올 수 있다. 데스크톱 미러링 기능이다. 듀얼 모니터나 트리플 모니터가 아니라 화면 가득 여러 창을 펼쳐놓고 일할 수 있게 된다. 맥북에 연결된 키보드와 마우스를 그대로 쓸 수 있다.
  • 콘트롤러가 필요 없다. 헤드셋 안팎에 카메라가 달려 있어 안쪽에서는 눈길을 따라잡고 바깥쪽에서는 손 모양을 보고 반응한다. 12개의 카메라, 5개의 센서, 6개의 마이크가 장착돼 있다. 눈동자가 커서 역할을 하고 엄지손가락과 검지손가락을 모으면 마우스 클릭이 된다.
  • 일상 생활과 다를 바 없는 해상도를 제공한다. 헤드셋을 쓰고 텍스트를 읽을 수 있다.
  • 패스 쓰루(path through)를 지원한다. 투명하게 비쳐보인다는 이야기다. 헤드셋을 쓴 상태에서 옆 사람에게 윙크를 보낼 수 있고 아무런 불편 없이 스마트폰 문자 메시지를 확인하거나 답장을 보낼 수 있다. 증강현실 모드에 있을 때는 투명하게 비춰보이고 가상현실 모드에 있을 때는 가려진다. 그런데 사진으로 보면 좀 기괴한 느낌이긴 하다.
  • 다이얼 버튼으로 배경(현실의 공간)을 어둡게 만들거나 사라지게 만들 수도 있다.

몰입형 화상 회의, 이건 상상도 못했다.

  • 헤드셋을 쓰고 화상 회의를 하면 나를 찍는 카메라는 어디에 두나. 상대방은 내가 헤드셋을 뒤집어 쓴 모습을 보게 되나. 이런 의문이 있었는데 궁금증이 풀렸다.
  • 디지털 페르소나(아바타)가 뜨고 내 얼굴 표정을 읽어서 보여준다. 카메라 앞에 앉는 게 아니라 헤드셋을 쓰고 공간 안으로 들어가는 개념이다.
  • 그런데 아바타 퀄리티가 그리 뛰어난 것 같지는 않다. 상대방도 모두 헤드셋을 쓰고 있다면 모르겠지만 혼자 재밌는 걸로는 곤란하다. 오, 여러분 이거 보이세요? 나만 보이나요? 이러면 미친 놈처럼 보일 수 있다.

오큘러스와 어떻게 다른가.

  • 그동안 이 동네는 오큘러스 판이었다. 오큘러스 퀘스트3는 500달러, 퀘스트 프로는 1000달러다. 그나마도 안 팔려서 깎은 게 이 가격이다.
  • 하지만 문제는 가격이 아니다.
  • 비전 프로도 얇은 건 아니지만 비전 프로와 비교하면 오큘러스는 정말 두껍고 무거워보인다. (무게는 퀘스트 프로가 731g, 퀘스트2는 503g, 공식적으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비전 프로는 300g 정도라고 한다.)
  • 비전 프로는 배터리 내장형이 아니다. 외장형 배터리는 2시간 정도 지속된다. 배터리를 좀 더 큰 걸 쓰거나 아예 어댑터에 연결해서 쓸 수도 있지 않을까.
  • 안경 쓴 사람들을 위해 마그네틱 링이 부착된 렌즈를 따로 팔 거라고 한다.

메타버스와 어떻게 다른가.

  • 메타의 메타버스가 현실과 차단된 가상현실의 의미가 강하다고 한다면(오큘러스를 뒤집어 쓰는 순간 완전히 다른 세상으로 들어가게 된다) 애플의 공간 컴퓨팅은 현실의 공간을 확장하는 증강현실이나 확장현실에 가깝다. 오큘러스도 비슷한 기능을 지원하지만 애초에 콘셉트가 다르고 무엇보다도 해상도가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다.
  • “디지털 콘텐츠와 상호작용하면서 나만의 공간안에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느낄 수 있다”는 게 애플의 설명이다.
  • 애플 부사장이 지난해 월스트리트저널과 인터뷰에서 “메타버스라는 말을 절대 쓰지 않을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 마크 주커버그는 “메타버스는 개방적인(Open, Interoperable) 플랫폼이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애플이 뛰어든 이상 시장의 상당 부분이 애플의 가두리 양식장 안에 갇히게 된다. 비전 프로를 구매한 사람들은 메타가 만든 앱을 구매하지 않을 거라는 이야기다. (아마 오큘러스 앱 가운데 상당수가 비전 프로를 지원하게 되겠지만.)
  • 게임을 일부러 강조하지 않은 것 같은데 당연히 오큘러스가 하는 건 다 할 거고, 그보다 더 큰 시장을 노린다는 야망을 드러냈다. 사실 오큘러스를 사고 나서 게임 몇 개 해보고 이제 뭘 하지? 했던 사람들 많을 텐데, 좀 더 일상으로 파로 들겠다는 전략이다. 디즈니 CEO 밥 아이거를 발표자로 내세운 것도 이런 의도가 깔린 것이다.

아쉬운 대목.

  • 여전히 무겁다고 한다. 외장 배터리를 썼는데도 두 시간이나 뒤집어 쓰고 있기에는 갑갑한 수준이다.
  • 이 정도 디스플레이의 TV를 구입하려면 1억 원 정도 줘야 할 거라는 이야기도 나오지만 거실의 고정형 TV는 나름의 역할이 있는 것이고 헤드셋은 철저하게 개인화된 디바이스다.
  • 가격이 상당히 부담스러운 수준인 데다 어차피 집에서만 쓸 거라 자랑할 수가 없다. 같이 쓰는 친구들이 있다면 모르겠지만 아니라면 혼자 놀기에 만족해야 한다.
  • 지금보다 훨씬 작고 가볍고 배터리도 오래가는 제품이 나오겠지만 아직까지는 여전히 마니악한 제품이다.

전망.

  • 애플 팬덤이 많으니 기본은 할 가능성이 크겠지만 역시 가격이 관건이다. 물론 후속 제품이 나오면서 가격은 더 낮아질 가능성이 크다.
  • 지난해 팔린 아이폰이 2억 3200만 대, 아이패드는 6100만 대, 맥과 맥북이 2600만 대다.
  • 에어팟이 8200만 대 팔렸고 애플워치는 5300만 대 팔렸다.
  • 애플 뮤직 구독자가 8800만 명, 애플TV 플러스 구독자도 7500만 명이 넘는다.
  • 지금 현재 사용되고 있는 아이폰은 13억 대가 넘는다.
  • 애플 제품 가운데 가장 니치하다는 평가를 받는 에어팟 맥스는 549달러인데 전체 에어팟 판매의 1% 정도를 차지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2021년에 100만 대도 못 팔았을 거라는 게 밍치궈의 분석이다. 물론 100만 대도 엄청난 규모다.
  • 애플이 만들었으니 어느 정도 시장을 만들겠지만 게임 체인저가 될 것인지 확신하기는 어렵다. 어쨌거나 애플이 이 바닥에서 앞서 치고 나간 것은 분명하다.

(영화 ‘데몰리션 맨’의 한 장면. 공무 수행 도중 과실 치사로 1996년에 냉동 처벌을 받은 경찰이 2036년에 풀려난다. 섹스하자는 말에 잔뜩 기대를 했는데 마주 보고 앉아 헤드셋을 집어 쓰고 뇌파를 교환하는 방식이다. 1993년 영화. 왼쪽이 실베스타 스텔론, 오른쪽은 산드라 블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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