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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훤주의 지역에서 본 세상] 베테랑 기자 김훤주가 세상 이야기를 따뜻하고 담백한 시선으로 전합니다.

창녕박물관 ©한국관광공사 포토리아-김지호.
창녕박물관 ©한국관광공사 포토리아-김지호.
창녕박물관 ©한국관광공사 포토리아-김지호.

8월 15일에 창녕박물관을 찾아갔었다. 전시 내용을 둘러보는데 적지 않게 당황스러웠다. 설렁설렁 훑어보았는데도 잘못되거나 적당하지 않은 표현이 여러 군데 있었다.

안내데스크에 말했더니 “휴일이라 학예사가 없고 자기는 해설사라 책임 있는 대답을 하기 어렵다”면서 “전달해 드릴 수는 있지만 이런 지적은 담당자에게 직접 해야 더 효과가 있으니 평일에 한 번 더 오거나 전화를 달라”고 했다.

그래서 나흘 뒤에 다시 찾아갔다. 그동안 잘못된 부분을 문서로 정리할 수 있었는데 스무 군데가 넘었다. 학예사에게 보여주며 필요한 대목은 설명을 곁들였다. 다 맞지는 않겠지만 최대한 빨리 확인하고 고쳐야 하지 않겠느냐 말했다.

돌아오는 대답이 뜻밖이었다. 가야와 관련한 부분은 그러잖아도 손질할 생각을 하고는 있지만 당장은 안 되고, 나머지 부분도 올해는 예산이 없기 때문에 내년이 되어야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생긴다는 얘기였다.

글자만 몇 개 고치면 되고 큰돈이 드는 일도 아닌데도 이랬다. 짧아도 한 달 이상, 길면 1년 가까이 그대로 두겠다는데 내게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창녕박물관을 찾았다가 틀린 지식을 사실로 알고 돌아가는 이를 한 명이라도 줄이고 싶은 심정으로 이 글을 쓴다.

1.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 계성 고분군 그리고 토기

창녕은 지난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일곱 개 가야 고분군 가운데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을 보유하고 있는 비화(非火)가야의 옛 땅이다. 창녕에는 계성 고분군도 있는데 교동과 송현동 못지않게 규모도 대단하고 범위도 넓다.

여기서 대간(大干)이 새겨진 토기가 출토됐는데 창녕박물관은 “신라의 지방지배 방식을 규명하는 데 중요한 자료”라 적었다. 하지만 이 글자를 통해 밝혀진 ‘신라의 지방지배 방식’은 아직 없다. 그래서인지 창녕박물관에도 무엇이 규명되었는지에 관한 서술은 보이지 않았다.

더불어 6세기 중반~7세기 초반의 무덤에서 나온 토기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계성고분군이 모든 시기에 ‘신라의 지배를 받은 지방’이라고 오해받도록 만든 것이다. 창녕은 555년부터 신라의 직접 지배를 받았고 계성고분군은 4~7세기에 조성되었다.

“4세기 후반부터 가야가 신라에 편입된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축조가 이루어진 고분군”이 계성고분군이라 적은 대목도 있다. 비화가야가 신라에 편입된 시기는 6세기 중반이니 일부러든 아니든 신라 점령 시기를 200년가량 앞당긴 역사 왜곡이다.

2. 창녕은 낙동강의 동쪽에 있었고, 가야와 신라 경계는 그때그때 달랐다

창녕박물관은 창녕의 산성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신라와 가야가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했다고도 했다. 이 표현의 가장 큰 잘못은 이렇게 하면 고대 창녕이 가야였는지 신라였는지 정체성이 모호해진다는 데에 있다.

창녕은 신라의 경주와 마찬가지로 낙동강의 동쪽에 있다. 아라가야·대가야와 가락국(금관가야) 같은 다른 가야 세력은 모두 낙동강의 서쪽에 있다. 그러므로 신라와 가야의 경계가 낙동강이라 한다면 창녕은 이미 그때부터 신라의 영역이었다고 하는 것과 같다.

가야와 신라의 경계는 그때그때 달랐다. <삼국사기> 파사이사금 87년 기록을 보면 “(신라가) 서쪽으로는 백제와 이웃하고 남쪽으로는 가야와 붙어 있다”고 되어 있다. 그래서 경주 남쪽이고 낙동강 동쪽인 울산·양산·동래에서도 우리는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가야계 고분군을 볼 수 있다.

3. 분별없이 사용한 ‘삼국시대’란 용어

창녕박물관은 ‘삼국시대’라는 용어를 분별없이 사용해 이런 잘못을 키우고 있다. ‘삼국’이 가야를 빼고 신라·고구려·백제만 가리킨다는 근본적인 한계를 이르는 것이 아니다. 굳어진 용어이고 아직 대체할 말이 생성되지 않았으므로 필요하면 쓸 수도 있다고 본다.

창녕박물관의 유물 대부분은 가야 고분에서 나온 것인데도 거의 전부 삼국시대 꼬리표가 붙어 있다. 하지만 이것은 오히려 작은 문제다. ‘가야시대’라 하면 더 정확하겠지만 이런 정도는 창녕박물관이 대담하지 못하기 때문이라 여기고 그냥 넘어갈 수 있다.

그렇지만 “신라와 가야가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던 삼국시대”는 그냥 넘어가기 어려운 표현이다. <한국 고고학 사전>에 따르면 ‘삼국시대’는 대략 3세기부터 7세기까지이므로 신라와 가야의 경계가 낙동강이었던 시기가 무려 400년으로 늘어난다.

엄밀하게 말하면 낙동강이 신라와 가야의 경계였던 시절은 없었다. 신라는 낙동강 동쪽에도 서쪽에도 있었고 가야 또한 마찬가지였다. 낙동강 서쪽의 신라 영역은 532년에 가락국이 항복하면서 처음 만들어졌다. 하지만 그때도 창녕 비화가야는 낙동강 동쪽에서 크고 높은 고분을 만들고 있다가 23년 뒤에 신라의 직접 지배에 들어갔다.

4. 곽재우는, 창녕이 아니라, 의령에서 싸웠다

‘창녕의 조선시대’에도 잘못이 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곽재우가 이끄는 의병들이 남강과 낙동강의 왜군 수송로를 공격하는 등 많은 전공을 세웠”다고 했다. 사실과 부합하지만 창녕과는 무관하다. 홍의장군 곽재우는 의령에서 활동했다.

“그해 8월에는 의병장 성천희가 창녕을 탈환하였다”고도 했다. <난중잡록> 7월 6일·8월 4일 기사를 보면 성천희와 함께한 의병장으로 신방집·성안의·곽찬·조열·성천유·신의일 등 여섯 분이 더 나온다. 지역을 지킨 선조들의 활약에 지역 박물관이 인색할 필요는 없다. 의병장 이름도 더 써넣고 전투 모습도 한 줄 걸치면 더 좋지 않겠나.

<난중잡록>은 어떻게 싸웠는지도 기록해 놓았다. 의병들은 창녕을 점령한 왜적과 이전부터 맞서 싸워오다가 드디어 7월 4일 창녕을 포위하고 종일 공격했는데 고을 수령을 자처하는 백마 탄 왜장을 활로 쏘아 죽이자 그들이 사흘 만에 목책을 불태우고 달아났다.

창녕에는 영산도 있다. 조선시대까지는 창녕과는 별도의 행정 단위인 영산현이었다가 일제강점기에 창녕군 하나로 합쳐졌다. 이런 영산에서 임진왜란 당시 벌어졌던 전투를 빠뜨리고 창녕만 적어넣은 것은 창녕박물관의 작지 않은 잘못이다.

영산 전투는 <난중잡록> 7월 9일 기사에 세밀하게 그려져 있다. 분량이 지나치게 많아 그대로 옮기기는 어렵고 한마디로 말하면 곽재우·윤탁이 이끄는 의령·합천·삼가 연합 의병부대가 7월 11일 악전고투를 벌인 끝에 이튿날 아침에 되찾았다는 내용이다.

5. 전설을 검증 없이 옮겨놓은 ‘화왕산성 전투’

창녕박물관은 1597년 정유재란 때 “의병들이 산성을 수축하고 화왕산성에서 왜군을 크게 무찔렀다”고 적었다. 이는 민간에 내려오는 전설을 검증 없이 그대로 옮겨놓은 수준일 뿐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

당시 산성 수축은 창녕 화왕산성이 아니라 현풍 석문산성에서 경상좌도 방어사 곽재우의 지휘 아래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다 미처 다 쌓기도 전에 왜적이 재침하는 바람에 곽재우 부대가 창녕 화왕산성으로 옮겨온 것이었다.

그리고 화왕산성에서는 창과 칼이 부딪치고 화살과 총알이 공중을 메우는 그런 전투는 벌어진 적이 없다. 당시 조정의 방침이 적들이 먹을거리를 얻지 못하도록 들판을 깨끗이 비우고 산성에 들어가 지키는 견벽청야(堅壁淸野) 수성전이었기 때문이다.

곽재우 또한 이를 따라 창녕·영산·밀양·현풍 네 고을의 병사와 백성을 이끌고 들어가 굳게 화왕산성을 지켰다.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왜적 대부대가 쳐들어왔으나 하루 밤낮을 대치하다 끝내 침범하지 못하고 물러나 지리산을 향해 갔다.

6. 교육기관 설명은 오류 많고 핵심 놓쳐

창녕의 교육기관에 대한 설명도 사소하지만 잘못된 대목이 많다. 너무 구질구질해 일일이 꼽기 어려울 정도다. 핵심은 이렇다. 국자감·성균관·종학 등 중앙·국가 차원의 제도·기관은 적으면서도 정작 창녕 교육의 특징은 제대로 담아내지 않았다.

1580~81년 정구 현감이 주도해 세운 초등교육기관으로 팔락정·술정을 비롯한 팔재(八齋)가 있었다. 1786년 정동기 현감이 설립하고 이성순 현감이 1788년까지 기틀을 다져 100년 넘게 이어져 왔던 공립 초등교육기관 이문재(以文齋)도 있었다. 다른 지역에는 없는 보석 같은 역사인데 창녕박물관은 이 둘을 모두 놓치고 있다.

7. 문법 잘못은 소소하지만 근본에 관한 문제

이밖에 띄어쓰기·맞춤법에도 잘못이 적지 않다. 하나하나 밝히기가 민망할 지경이다. 다만 이런 잘못은 소소하지만 근본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에 많이 틀리면 되게 없어 보이고 싼 티가 풍긴다는 말은 해놓고 싶다.

마지막 당부를 남기고…

창녕박물관에서 돌아나올 때 학예사에게 부탁했다. “내가 얘기해 드린 잘못은 대충 살펴본 결과이고 전부가 아닐 수 있다. 그러니 시간을 충분히 갖고 다른 잘못이 있는지도 꼼꼼하게 한 번 더 살펴보고 바로잡기 바란다.

이번에 창녕박물관을 찾은 까닭은 어떤 모임에서 내 고향이 창녕이라고 역사문화 탐방 진행을 맡겨서였다. 몇 차례 연기되었다가 10월 25일로 정해졌다는 연락을 어제 받았다. 그전에 일부라도 바로잡혀져 고향 창녕의 부끄러움이 조금이라도 줄어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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