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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사진은 노용헌.

2014년 4월 16일. 우리 모두의 아픔으로 남은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다. 그러나 정부, 언론, 수사기관 등은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가려진 진실, 정부의 책임 회피, 미흡한 책임자 처벌, 유족과 생존자를 향한 왜곡된 비난 속에 온전한 진상규명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세 번의 공적 조사위원회가 활동했지만, 일치된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1. 4·16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특조위 2015.8~2016.6)
  2. 세월호 선체조사위원회(선조위 2017.3~2018.8)
  3.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사참위 2018.12~2022)

정치적 견해로 갈라진 ‘차이’는 진상규명을 더욱 어렵게 했고, 10년이 지나서도 ‘명확히 밝혀진 것이 없다’와 ‘아직도 세월호냐’는 간극을 좁히지 못하고 있다.

세월호 참사 피해자와 진실을 밝히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뿐 아니라 진실을 숨기고 잘못을 감추려 했던 가해자들까지 추적한 보도가 있다. 10년간 많은 보도가 나왔지만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이야기다. 훗날 세월호 참사에 대한 역사 왜곡이 일어나지 않게 객관적 자료를 더 많이 남기고 싶다는 한국일보 세월호 10주기 특별기획팀을 만났다. 이들과의 인터뷰는 민언련 이달의 좋은 보도상 시상식이 열린 5월 29일 진행됐다.

△ 세월호 10주기 ‘산 자들의 10년’을 보도한 한국일보 진달래·유대근·원다라 기자

‘세월호 10주기 보도’ 어떻게 차별화할까


10 주기가 특별했던 이유는.

유대근: 언론과 기자 사회는 세월호 참사에 죄스러운 마음을 품고 있다. 2014년 참사 당시 제 역할을 못 한 언론에 비판도 많았고, 이를 만회하고 싶은 마음이 기자라면 누구나 있을 것이다. 10주기는 더 특별해 열심히 준비하게 됐다. 기획보도를 준비할 때 사회부에서 기획취재 전담팀인 엑설런스랩에 협업을 제안했고 오랜 시간 함께 집중 취재했다.

무엇에 중점을 두고 기획했나.

유대근: 10년 동안 쌓인 이야기들이 많다 보니 차별화도 돼야 하지만 알맹이를 놓치지 않기 위해 고민했다. 모두가 안다고 생각하는 세월호 참사를 우리가 정말 제대로 아는지, 10년간 일을 사실 중심으로 정확하게 정리해 보자는 게 하나의 목표였다. 또한 왜 아직도 유족들이 싸울 수밖에 없는지 깊이 들여다봤다. 유족들은 우리 사회가 더 안전해지길 바라는 마음에 투쟁을 이어가고 있는데, 그러려면 무엇부터 해야 하는지 다뤄보고 싶었다.

사진은 노용헌.

가해자 무작정 찾아가 기다렸다


인터뷰 대상이 93명인데 그중 가해자 섭외는 쉽지 않았을 텐데.

전유진: 일반 인터뷰처럼 약속 잡는 방식으로 진행할 수 없어 쉽지 않았다. 아는 건 주소밖에 없어 몇 시간이고 집 앞에서 기다리다 가족이나 당사자를 만나면 붙잡고 물어봤다. 이사 했다면 이웃들에게 물어 새로 옮긴 집을 찾아가기도 했다. 하루 종일 기다리다 빈손으로 돌아온 적도 있다.

유대근: 김석균 전 해경청장은 책도 쓰고 가끔 동정이 알려져 어디에 있는지 알았지만, 세월호 선원들은 참사 직후 구속돼 형을 살았고 이후 어떻게 사는지 알 수 없었다. 가해자 재판기록에 있는 주소지로 무턱대고 찾아갔다. 의외로 그대로 거주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인터뷰를 거절한 사람도 있지만, 세월호 이야기를 꺼릴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자신들의 이야기를 털어놓는 사람도 많아서 취재가 가능했다.

10년간 보도되지 않았던 유족 섭외는 어떻게 했는가.

원다라: 유족들에게 이번 보도가 또 다른 2차 가해가 되지 않도록 노력했다. 세월호 참사는 평범한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당한 사고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독자가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던 일이라고 공감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평범하면서도 인터뷰에 나오지 않은 분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지금까지 인터뷰하지 않은 분들이라면 앞으로도 나설 가능성이 없다는 유가족협의회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때마침 세월호 10주기를 앞두고 제주부터 시작된 ‘진실·책임·생명·안전을 위한 전국시민행진’이 시작돼 참여했다. 유족들과 대화하고 유대감을 쌓는 계기가 됐다. 언론에 대한 실망이 크다 보니 이번 기획의 취지를 잘 설명하는 게 큰 산이었다. 행진에 함께한 유족과 시민단체 분들이 아이디어도 주면서 은인숙·강병길 부부(단원고 2학년 4반 강승묵 학생 부모)를 소개해 주셨다.

유대근: 2014년 4월 세월호 참사 취재 당시 생존자 중 한 분에게 연락하니 ‘무용담’이라도 들려달라는 거냐며 꾸중 들었던 게 생각난다. 이분들은 인터뷰에 응하는 자체가 정말 큰 용기를 내주시는 거였다. 당시 상황을 상기한다는 게 괴로운 일인데 우리 사회가 세월호 참사를 통해 좀 더 나아졌으면 하는 마음에서 나서주셔 감사하다.

유족인 장훈 소장 섭외는 어떻게 했는가.

진달래 : 유족들이 계속 투쟁하는 이유를 제대로 알고 싶다는 생각에 선조위나 사참위에 참여한 분들의 인터뷰를 추진했다. 유족들이 세월호 참사의 ‘사실’에 대해 잘 다뤄줄 분으로 장훈 4.16안전사회연구소장을 많이 추천하셨다. 장훈 소장은 희생자 장준형 학생(단원고 3학년 8반) 아버님이다. 진상규명을 위해 적극 활동하신 분으로 흔쾌히 응해주셨다. 면담자 중 가장 많이 만났다.

‘책임자 처벌’의 저울은 공정했을까


첫 인물로 세월호 전영준 조기장 이야기를 실은 이유는.

유대근: 그간 깊이 있게 다뤄지지 않은 인물군이 가해자여서 앞에 배치했다. 전영준 조기장은 씻지 못한 죄를 지었다. 하지만 임시로 채용돼 세월호에 탄 지 하루밖에 안 된 그가 구조 책임을 다하지 않은 죄로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받은 사연은 참사 이유를 잘 드러낸다. 지면 배치에서도 전영준 조기장과 김석균 당시 해양경찰청장을 맞서는 구도로 설정했다. 두 사람의 이야기로 세월호 참사 과제인 책임자 처벌이 공정하게 이뤄졌는지를 보여주고 싶었다.

△ ‘산 자들의 10년’ [1]: 죄와 벌-전영준·김석균 한국일보 지면 기사

전영준 조기장 이야기는 안타까움이, 김석균 전 청장에겐 책임을 묻는 느낌이 강했다.

전유진: 처벌의 저울보다 참사 여파가 공정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전영준 조기장의 1년 6개월 형에 대해 처벌의 시간이 길다고 볼 순 없다. 하지만 그와 가족이 겪은 경제적 어려움, 심적 고통 등은 해경 간부나 정치인, 청해진해운 임원 등 다른 가해자들에 비해 더 컸을 수 있다. 전영준 조기장이 승객을 뒤로하고 도주한 책임이 있지만, 다른 가해자와 비교했을 때 처벌 강도가 비례하지 않는다는 비대칭을 보여주고 싶었다.

유대근: 가해자 이야기를 쓰면서 제일 고민된 점은 가해자를 감싸거나 동정하는 뉘앙스가 느껴지면 안 된다는 강박이 컸다. 끊임없이 동료들에게 물으면서 기사를 썼다. 다행히 인물들을 통해 세월호 참사를 다시 돌아볼 계기가 됐다는 평가가 나와 마음이 놓였다.

해경지휘부 수장으로 구조에 실패한 김석균 전 해경청장 기사를 보니 반성하지 않는 듯한 태도가 엿보이던데.

유대근: 김 전 청장이 책을 낸 계기로 3월 초 연락했고 인터뷰는 쉽게 성사됐다. 그는 전형적인 관료라는 느낌이 들었다. 구조를 못 한 것은 잘못이고 유족과 희생자들에게 죄스러운 마음을 갖고 있다면서도 당시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는 게 일관된 입장이었다.

전례 없던 참사였던 만큼 전례 없는 대응으로 적극 구조에 나서야 했지만, 판결문이나 자서전 등을 보면 그는 관례적으로 ‘업무처리’ 하듯 일한 것으로 보였다. 과적·불법이 일상이던 청해진해운, 헌신적인 구조 대신 적당한 ‘처리’에 그친 정부 등 가해자들이 일상적 업무 수준으로 참사를 치부한 게 큰 참사로 이어졌다는 생각에 허망했다.

유족 장훈 소장과 가해자 김석균 전 청장이 비슷한 시기 책을 냈다. 정반대 시각의 두 책을 본 평이 궁금하다.

유대근: 김석균 전 청장의 책 부제가 ‘바다의 징비록’이다. 세월호 참사 대응 기록을 남겨 교훈을 얻게 하겠다는 취지인데 본인 해명이 대부분이다. 거짓은 아니지만 수차례 재판을 거치면서 자신만의 논리로 무장하다 보니 자기중심적 해석이 많이 담겨 있다. 특히 유가족보다는 박근혜 전 대통령과 김경일 해경 123정장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담았는데 ‘누구를 위해 책을 썼을까’라는 생각에 화가 났다.

내러티브 자문을 해준 소설가가 ‘김석균 전 청장이 자신의 이야기를 정사로 남기고 싶어 하는 마음이 보인다’고 할 때 소름이 돋았다. 훗날 세월호 세대가 떠나고 나면 더 많이 기록을 남긴 사람들 중심으로 역사가 해석될 텐데 그때를 위해서라도 정확한 세월호 이야기를 남겨야겠다고 다짐했다. 역사왜곡을 막기 위해서라도 유족 등 희생자들의 이야기를 많이 기록하려 한다.

원다라: 김석균 전 청장은 최초의 행정고시 출신 해경청장이란 영광을 여러 번 책에 언급했다. 세월호 참사로 해경청장 자리에서 내려온 것에 비통함을 표했는데 황당했다. 그는 해경에 대한 비난을 ‘바다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대한 몰이해’로 설명했다. 그런데 ‘행정고시 출신 해경청장은 바다에 대해 얼마나 알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김석균(전 해양경찰청장. 임기: 2013.03.18 ~ 14.11.19). 해양경찰청 제공.

세 번의 조사위, 끝나지 않은 결론


선조위 관계자도 다 취재했는가.

유대근: 2차 선조위 위원 7명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모두 확인했는데 대면 인터뷰는 김창준 위원장(더불어민주당 추천, 변호사)과 김영모 부위원장(자유한국당 추천, 한국해양수산연수원 명예교수)을 했다. 김철승 교수(국민의당 추천, 목포해양대 국제해사수송과학부)의 입장은 위원장과 부위원장을 통해 전해 들었고, 권영빈 변호사(유가족 추천)는 전화로 인터뷰했다. 공길영 교수(유가족 추천, 한국해양대 항해학부)는 인터뷰를 거절했고, 장범선 교수(바른정당 추천, 서울대 조선해양공학과)는 작고해 인터뷰하지 못했다.

세월호 참사가 정쟁화되면서 어디 추천이냐에 따라 위원 활동을 바라보게 되는데 자유한국당이 추천한 김영모 부위원장의 소회는?

유대근: 세월호 참사는 세 번의 공적 조사위원회가 꾸려졌는데 첫 번째 ‘특조위’는 변호사나 교수 등으로 꾸려졌고, 두 번째 ‘선조위’는 해양·조선 전문가들로 꾸려졌다. 선조위 김창준 위원장은 해양사고 전문 변호사였고, 김영모 부위장은 선장 출신으로 해양안전을 강의하고 있다. 김 부위원장은 해양안전연구원으로서 참사 원인을 밝혀내겠다는 소명감으로 참여했지만 자유한국당 추천이란 정치적 프레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고 했다. 공학적으로 가능성이 희박한 잠수함 충돌설, 이른바 외력설 대신 내부 결함으로 침몰했다는 내인설을 지지한 것조차 정치적으로 해석됐고 결과를 왜곡하려는 시도 등이 반복돼 답답했다고 밝혔다.

초기 음모론 등 다양한 가설이 제기되며 정치적 해석에 치우친 문제도 드러났는데.

유대근: 세월호 참사 이후 한국에서 연구를 지속하는 재난학자 스콧 게이브리얼 놀스 카이스트 교수가 “유가족이 과학적 사실을 믿지 않는다고 해서 비난할 수는 없다”고 말한 대목이 기억에 남는다. 유가족으로서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전문가들이 과학적으로 정리된 이후에도 잘못된 주장을 반복하는 것은 다른 의도가 있다고 생각한다. 세월호 참사는 누군가가 책임지고 매듭지어야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러나 2기 선조위도 침몰 원인에 관해 단일한 결론이 아닌 선체 내부에 문제가 있었다는 ‘내인설’, 외력 가능성을 담은 ‘열린 안’으로 상반된 두 가지 보고서를 내놓았다. 3기 사참위 역시 단일한 결론 없이 활동을 마쳤다. 정부나 신뢰할 수 있는 기관의 끝맺음이 없다 보니 유가족 입장에서도 끝나지 않은 사건이 되었다. 정부와 조사위원회의 무책임함이 유족들의 어려움과 혼란을 가중시켰다.

원다라: 유족들이 생명안전기본법 제정을 왜 요구하는지 이해하게 됐다. 참사가 일어났을 때 정치로 흘려보내는 것이 아니라 참사 자체를 바라보자는 취지다. 하나된 마음으로 참사 규명을 위해 적극 나서야 하지만 실제 정치적 논쟁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상설기구 설치를 통한 통합적이고 체계적인 조사가 절실히 필요하다.

“세월호 참사 진실을 밝히자” 옥토 제공, 2016.

보도되지 않았지만, 더 알리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진달래: 416 기억교실 존치 문제를 두고 학부모와 학교의 갈등이 벌어졌을 때 이를 가까이 지켜본 선생님을 인터뷰했다. 기억교실 갈등이 세월호 참사의 축소판 같았다. 서로 양보하면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인데 불신의 골이 깊어지면서 타협하지 못했다. 여건상 싣지 못해 아쉽다.

원다라: 인천가족공원 내 ‘세월호 일반인 희생자 추모관’을 찾았다가 예상치 않게 유족 배상수 씨를 만났다. 배상수 씨는 세월호 추모일이 다가오는 것 자체가 정신적 신체적 고통이 따른다며 참사 당일을 복기하는 질문과 언론의 관심이 불편하다고 했다.

그럼에도 그는 ‘내가 없으면 모든 게 사라질까 봐 지키고 있다’며 틈날 때마다 추모관을 방문해 관리하고 있다고 했다. 유족에게 ‘돈 때문이다’, ‘인터뷰하고 싶어 안달 난 사람들’이라며 악플 다는 사람들이 있다. 가족을 잃고 인터뷰하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유족들은 하나같이 세월호 추모일이 다가오는 것 자체가 고통이라 말했고, 인터뷰를 힘들어했다.

독자에 가닿기 위한 소설작법


소설 작법으로 이야기를 풀어낸 방식이 신선했다

유대근: 처음엔 일반 형식의 시리즈로 기획했다. 하지만 기사가 기록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많은 독자에게 가닿아 반응과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형식을 고민했다. 건너뛰는 기사가 아닌 읽히는 기사가 되자는 목표로 세월호가 결국 사람의 이야기이니 내러티브 스타일로 접근해 보자고 제안하고 내러티브로 구성했다. 사참위, 선조위 이야기나 사고 원인에 관련된 공학적 내용은 복잡하다. 어려운 이야기를 쉽게 써서 문턱을 낮춰보자는 취지도 있었다.

기사 형식을 벗어난 시도여서 어려움이 컸을 텐데.

일동: 어려웠다. 여러 차례 수정했다(웃음).

원다라 : 유대근 기자가 내러티브 방식을 제안했는데 기사 나가기 전까지도 ‘이게 맞나’ 고민했다. 기사는 결론이 담기지만 소설이나 영화는 읽고 나서 생각할 여지가 생긴다는 차이가 있는데, 내러티브 방식이 독자에게 한 번 더 고민하는 공간을 열어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각자 마음속에 있는 세월호를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랐다.

유대근: 주변 이야기를 들어보니 기사에 대한 나름의 해석이 있더라. 소설의 경우도 독자들이 나름대로 해석하지 않는가. 팩트로 쓴 내러티브지만, 열어놓은 공간에 독자들이 각자 해석을 해줬다는 게 고맙기도 하고 의도가 통했다는 안도감도 들어서 좋았다.

2차 가해 되지 않게 ‘댓글창’ 닫았다


민언련도 이태원참사 보도 댓글창 닫기 캠페인을 벌여 이번 기획의 댓글창 닫기를 눈여겨봤다.

유대근: 세월호 도보행진 기사를 썼을 때 심각한 수준의 악플이 많이 달렸다. 세월호 참사를 더 알아가자는 뜻에서 열심히 준비했는데 또 다른 2차 가해가 되면 안 되겠다는 판단에 댓글창을 닫게 됐다. 다만, 댓글창이 일종의 피드백이기도 한데 독자 반응을 바로 알 수 없는 점은 아쉬웠다. 하지만 SNS나 오프라인 등을 통해 반응을 들을 수 있어 댓글창 닫기는 잘했다고 본다.

기억에 남는 점이 있다면.

진달래: 우리 진심이 많은 분들께 왜곡 없이 전달됐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원다라: 어느 때보다 치열하게 고민하고 신중하기 위해 노력했다.

유대근: 취재하는 내내 마음이 무겁고 힘들었다. 끝나고 나서도 마침표를 찍었다는 느낌이 아닌 ‘큰 탈 없이 보도했구나’라는 생각부터 들더라. 세월호 참사는 우리 모두에게 큰 상처를 남긴 상징적 사건이다. 객관적 기록을 계속 남겨야 먼 미래 세월호의 진짜 역사가 바로설 수 있다. 앞으로도 열심히 써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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