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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네바 오전 8시] 이상헌(ILO 고용정책국장)이 전하는 노동과 세계 그리고 인간에 관한 이야기… 지난 3월 8일은 세계 여성의 날. 연례행사처럼 발표된 유리천장 지수는 12년째 꼴찌, 성별 임금 격차는 OECD 1위.

꼴찌와 1등: 유리천장 지수 꼴찌, 성별 임금 격차 1등

지난 3월 8일은 세계 여성의 날이었다. 이코노미스트가 유리천장 지수를 발표했다. 한국은 12년째 꼴찌다. 이제는 익숙한 연례행사. 거기에 OECD 성별 임금 격차는 압도적인 1위. 약 31%의 임금 격차. 한국만 앞자리 수가 다르다. 앞자리가 2로 시작하는 2위권(이스라엘, 라트비아, 일본, 사이프러스, 에스토니아)은 분발하시라.

한국에서 여성으로 노동한다는 것의 의미를 다양한 통계와 그래프를 매개로 이상헌 박사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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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24년 3월 8일 인터뷰 일부와 3월 22일 금요일 제네바 시각 오전 8시에서 9시 5분까지 이상헌 박사와 진행한 화상 인터뷰를 이 박사와 상의해서 답변 중심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독자께서 조금이라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인터뷰 내용을 좀 더 세분해서 정리했습니다. 목차 링크를 통해 궁금한 항목을 골라 읽을 수 있습니다. 다만, 전체적인 맥락을 고려해 읽으시면 더 좋겠습니다. (편집자)

한국 ‘유리천장 지수’ 12년째 꼴찌


유리천장 지수의 특징은 노동시장 통계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것, 정치적인 것들을 모두 고려한다는 점이다. 즉, 경제적인 통계도 활용하지만 그건 일부다. 우리나라 경우에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율로만 보면 지난 10여 년 사이에 많이 올라갔다.

그런데도 왜 꼴찌냐면, 우선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임금 격차가 매우 크다. 여러 이유가 있는데, 경제 활동 참여 인구 중에서 여성 노인의 저임금 노동이 많은 편이다. 그래서 성별 임금 격차는 별로 줄지 않았다.

단, 격차가 곧 차별은 아니다 격차는 ‘현상’이다


성별 임금이나 고용률에 관한 통계나 그래프를 볼 때 주의할 점이 있다. 성별 임금 ‘격차’가 곧 임금 ‘차별’은 아니라는 점이다. 한국은 그래프에서 보는 것처럼 성별 임금 격차가 OECD 회원국 중에서도 가장 높다. 독보적으로 1위다. 한국만큼 격차가 심하진 않지만 성별 임금 격차가 심한 일본이나 이스라엘, 라트비아, 사이프러스 같은 나라는 대체로 보수적이다.

그런데 미국이나 캐나다(약 17%), 핀란드(15%) 같은 의외의 나라가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다. 그래도 한국의 절반 정도다. 한국의 성별 임금 격차는 그만큼 크다. 다만, 임금 ‘격차’라고 하지 그걸 곧바로 ‘차별’이라고 하지 않는다. 다시 강조하지만, 둘의 개념은 다르다.

성별에 따른 차별적이고 구조적인 요인이 임금 격차라는 ‘현상’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그 격차만을 비분강개해선 이 차별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그 안에 내재된 차별의 문제, 그리고 교육과 정치와 문화, 경제, 가족의 문제에 총체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그런데 그건 제도만으로 이뤄지는 게 아니라 공적인 행사에서 아저씨들만 모여서 기념사진을 찍었다가는 사회적으로 큰일난다는 인식이 생겨야 비로소 가능해진다.

가령 ILO가 한 50명 규모 세미나 연다고 치자


경제적인 수치보다 더 심각한 건, 정치·사회적인 측면이다. 가령 ILO에서 국제 세미나를 개최해서 여기에 세계 각국에서 40~50명을 초대한다고 치자. 제일 민감하게 신경 쓰는 게 뭘 것 같나. 남자 대 여자 비율이다. 남자만 모여서 하는 세미나를 했다? 그러면 그야말로 난리 난다.

예를 들어서 내각을 구성한다든지, 대기업 임원진을 구성한다든지, 학교나 정부, 국회를 비롯해 모든 생활에서 성별 비율을 정말 중요하게 따진다. 그런 점에서 우리나라와 일본은 빵점이다. 남자들만 잔뜩 모여 있는 사진을 찍으면 여기에선 그것 자체로 스캔들이다. 난리 난다. PC(정치적 올바름)가 아니라 유럽에선 일상적인 문화다.

직접 세보니 여성은 10명, 남성은 7명. 이런 사진이 유럽 어느 나라든 국가기관 공식 행사의 ‘평범한’ 단체 사진이다. 사진은 북마케도니아 의회 대표단 방문 기념 촬영. 스웨덴 국회 제공. 사진은 Melker Dahlstrand. 2024.01.23.

악명 높은 한국, ‘어떻게 남자만 떼 지어 오나?’


국제회의, 가령 장관급 회의를 하면 한국은 남자 관료들만 오는 경우가 꽤 있다. 다른 나라에서는 깜짝 놀란다. 한 10명 왔는데 어떻게 전부 남자냐? 가끔 여자가 한 명 있는데, 대부분 통역사다. 국제사회에서는 아주 악명 높다. 문재인 정부 때 강경화 장관 등 약간 신경을 쓴 것 같긴 하지만…

한편, 아이러니하면서 재밌는 현상은 한국 남자 아이돌은 국제적으로 아주 인기가 있다. 보통 한국 남자를 마초적일 거라고 생각하는데, 남자 아이돌은 굉장히 여성적이라서 그 점을 아주 좋아한다. 오히려 유럽 남성 이미지는 거칠고 반항적인 이미지가 주류다. 한국 남자 아이돌은 굉장히 여성적이고 부드럽고, 새로운 형태의 남성형을 어필하는 것 같다.

너무 익숙한 아저씨들의 회의. 여기 있는 아저씨가 남자 스태프들과 국제회의에 간다. 2024년도 제14회 국무회의. 2024.03.26.

한국 정부에 조언? 가장 중요한 건 일상이다


정말 갈 길이 멀다. 정책적인 노력도 필요하지만, 한국 기득권 남성의 재교육이 필요하다. 정치적인 립 서비스나 의무가 아니라 본인이 나서서 사소한 것까지 챙겨야 한다. 가령 작은 모임을 하더라도 남성만 모여있으면 여성을 일단 모셔야지 고민하고, 배치 하나부터 신경 써야 한다.

그리고 민주주의가 당연한 것처럼 성평등을 위한 정치를 당연한 것, 핵심 의제로 설정해서 거기에 따라 일상적인 정치를 만들어 가야 한다. 특히 성공한 남성 기득권들이 각성해야 한다. 성공한 여성들도 가끔 보면 여성을 자신이 성공하기 위한 디딤돌로 삼을 때가 있는 것 같은데, 자신의 개인적인 정치적 어젠다보다는 성평등의 보편적인 의제를 고민할 필요가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가장 강조하고 싶은 건 ‘일상’이다. 정치의 영역이든 생활의 영역이든 문화의 영역이든 모든 영역에서 ‘일상적으로’ 보여줘야 한다. 특히 한국은 정치 과잉의 사회다. 대통령부터 정치권 주요 인사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가 그 자체로 성평등에 관한 아주 중요한 사회적 메시지다. 매일매일 체크리스트의 일부로 성평등 의제를 고민할 필요가 있다.

윤석열(당시 대통령 당선자)이 2022년 1월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여성가족부 폐지 공약. 윤석열 페이스북 갈무리.

아무 말도 없이 여성가족부를 없애겠다는 게시물을 올리는 대통령 당선자의 행태는 여기에선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일이다. 여당도 여당이지만, 야당도 전력투구해야 할 문제로 보지 않는 것 같다.

여성 쿼터가 필요한 이유 (외국어 배우기와 비슷하다)


유럽에서는 성별 균형과 조화를 신경 쓰는 문화가 일상으로 자리하게 된 역사적인 계기랄까 정책적인 전환이랄까, 그런 일련의 역사적인 흐름과 이벤트들이 축적돼 왔다. 1960년대 페미니즘 운동, 80년대의 반동, 90년대 2000년대 다시 상승하는 페미니즘의 분위기 등. 유럽에서는 최소한 100년 이상 축적된 과정을 거쳤다.

가령 외국어를 배워야 한다고 쳐보자. 그 언어를 어릴 적부터 자연스럽게 습득한 사람과 그걸 외국어로 배워야 하는 사람은 분명히 차이가 있다. 꼭 배워야 할 필요가 있다면, 특별한 방법이 필요하다. 과외를 하든, 학원을 다니든. 그게 ‘여성 쿼터’다. 한국에서는 쿼터에 관해 부정적인데, 빨리 성평등을 배우려면 쿼터 시스템이 필요하다.

그래서 여성 할당제(쿼터)는 다소 폭력적이고 일방적인 측면이 있지만, 한편으로는 대단히 교육적인 방식이기도 하다. 그렇게 계속 일부러라도 배워야 한다. 그런데도 수십년이 걸리는 문제다. 왜냐하면 그걸 그저 제도로 강제한다고 해서 그게 내면화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과 문화를 내재화해야 한다. 그냥 자연스럽게 우러나와야 한다.

‘격차’ 해소 → 노동 문제


성별 임금 격차 안에는 다양한 요인이 있다. 남성이 여성보다 교육 수준이 높다든지, 생산성이 높다든지. 이런 걸 인적 비용이라고 한다. 교육이나 기술의 요소다. 그런 요소 때문에 ‘격차’가 나는 경우도 있다. 그 격차를 해소하는 건 노동 정책의 문제다. 여성에게 일자리를 더 주고, 더 많은 교육 기회를 부여하고… 즉, 노동시장 정책을 통해서 그 격차를 해결하는 거다.

‘차별’ 해소 → 복합 문제


그런데 성별 임금 격차에 단순한 인적 요소 등의 차이가 아니라 ‘차별적 요소’가 들어 있을 수 있다. 같은 일을 하는데 남자에게만 더 많은 임금을 주면? 당연히 차별이다. 대체로 임금 격차가 10% 미만이면 차별 요소가 적다고 한다.

그래서 한국은 인적인 요소로만 임금 격차를 설명하기에는 차별적 요소가 강하다. 일본도 비슷하다. 대체로 성별 임금 격차가 20% 넘게 나는 나라는 차별적 요소가 강한 편이다.

그래서 이런 경우에는 노동 정책으로만 풀어내기 어렵다. 그 차별이 정치, 사회, 문화 등이 얽힌 복합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각도에서 복합적으로 그리고 동시적으로 해결해 가야 한다. 즉, 단순하게 임금 격차의 문제라고 해서 ‘임금’으로만 봐서는 안 되고, 여기에 관계된 문화, 정치, 사회 등 복합 시스템에 접근해야 그 문제를 제대로 풀 수 있다.

문제 해결은 당연히 쉽지 않다. 하지만 어렵다고 볼 게 아니라 그만큼 ‘모든 사람의 문제’이라고 봐야 한다. ‘모든 사람의 문제로 끌어들여야’ 하고, 모든 사람이 액션을 취해야 한다. ‘애브리원스 비즈니스’로 만들어야 한다.

차별의 기원: 결혼과 출산…그러니까 가족


임금이나 고용률 격차에 내재된 차별 요소의 연원은 무엇인가? 결혼과 임신(출산)이다. 여성은 흔히 자기 자신의 개인적인 사유가 아니라 ‘가족의 일’로 가장 먼저 그 가족구성원 중에서는 일자리를 포기하거나 일자리 포기를 강요받는다. 결혼이나 임신, 출산과 육아는 남성 배우자에게도 똑같이 해결해야 할 문제고, 여성 개인의 문제가 아닌데, 그 문제 해결의 책임을 여성에게 ‘몰빵’한다. 즉, 한국에서 여성은 결혼이나 출산, 양육과 같은 가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달리 말하면 그 책임을 전적으로 짊어지기 위해 일자리를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가족은 어떻게 착취와 차별의 진지가 되는가.

그래서 30대 초반까지는 성별 임금 격차는 별로 크지 않다. 그러다가 30대 초중반 이후 급격하게 격차가 벌어지고, 점점 더 커진다. 여성이 다시 노동시장에 복귀해도 기존 임금을 회복하지 못한다. (아래 그래프 참고.)

20대 후반에 고용률이 뚝 떨어지고 회복되지 않는 게 결혼과 임신, 출산의 문제다. 그러다가 30대 중반부터 다시 그래프가 회복되는 건 출산과 육아의 문제를 최소한으로 해결한 뒤에 비정규직으로 재취업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성의 고용률 추이는 M자 형태를 띤다.

참고로, 한국 여성의 연령대별 고용률 추이는 OECD 평균과도 심한 차이를 보이는 반면, 한국 남성의 연령대별 고용률은 OECD와 별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출산에 따른 남성 고용률의 변화는 전혀 없는 걸 알 수 있다. (아래 그래프들 참고.)

고용률이 핵심이다


고용률이 핵심 중 하나다.

우선 인정해야 할 사실, 여성 고용률은 많이 좋아졌다. 그런데 정말 오랜 세월에 걸쳐서 천천히 좋아졌다. 단순하게 산술적으로 계산하면, 성별 고용률 격차를 23%에서 15%로 줄이는 데 20년쯤 걸렸으니까 지금 격차(약 15%)를 줄여서 성별 고용률이 비슷하게 되려면 40년쯤 걸린다는 계산이 나온다.

첫 출산과 고용률 절벽


첫 아이 출산에 따른 여성 고용률 변화를 좀 보여주는 자료가 있다(NBER WORKING PAPER SERIES, ‘The Child Peanlty Atlas’, 2024.02). 전 세계 130개국을 비교한 자료다. (아래 그래프 참고.)

한국은 전 세계 어느 나라보다 급격하게 고용률이 떨어진다. 마치 절벽처럼 떨어졌다가 회복도 꽤 느린 편이다. 우리와 유사한 나라는 방글라데시 정도다. 중국은 첫 아이 출산 후 고용률은 잠시 떨어졌다가 복구되고, 일본도 고용률 하락 폭은 매우 큰 편이지만, 그 회복이 우리와 비교하면 아주 빠른 편이다. 미국이나 프랑스는 우리와 비교하면 낙폭 자체가 적은 편이고, 태국이나 베트남은 낙폭도 적고, 회복도 빠르다.

경력단절 시스템에서 출산의 의미


경력 단절 시스템에서 일하는 여성이 임신하고 출산한다는 건 일을 그만두느냐 마느냐 하는 기로다. 당연히 출산율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출산하고 반년 정도 쉰 뒤에 다시 원래 업무에 복귀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위 그래프에서 보듯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외국은 출산에 따른 경력 단절의 위험이 적거나 경력 회복이 매우 빠른 데 비해 우리나라는 그렇지 못하다.

유럽의 해법 1. 돌봄은 사회적 책임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 60년대 베이비붐을 겪은 이후로 유럽 대부분 나라에서 출산율이 급격하게 낮아졌다. 핵심은 가족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로 모아졌다. 출산, 부모 돌봄, 요리, 육아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그 해결 방식에 따라 남녀가 노동시장에 반응하는 방식이 바뀌었고, 그 방식의 변화에 따라 임금 격차도 생겼다. 그러면 프랑스를 포함해 유럽의 많은 나라가 이 문제를 결국은 어떻게 해결했을까. 두 가지 방식이 있었다.

첫 번째, ‘돌봄’을 사회적 책임이라고 명확하게 방향 잡았다. 그래서 돌봄을 가족의 문제, 개인의 문제, 여성의 문제에서 사회 복지의 문제로 옮겨 놓았다. 그래서 돌봄은 노동시장의 문제가 아니라 복지의 문제가 됐다.

가령 프랑스는 공동육아 시설에 대규모로 투자했고, 육아 비용에 관한 부담을 줄이려고 아동수동을 늘렸다. 노령화에 관해서도 노인 돌봄을 국가적인 복지 차원으로 접근했다. 이런 노력으로 프랑스에서는 70년까지 출산율이 급속히 떨어졌다가(1960년 2.73명에서 1993년 1.65명), 2004년부터 시행된 영아보육수당(PAJE) 등의 직간접적인 출산 지원 정책으로 최근 20년 동안 꽤 많이 회복했다(2009년 이후 인구대체율 2.1에 근접한 2.08명 기록, 이후 6년 연속 2.0이상 기록 등).

즉, 유럽은 돌봄의 책임 소재에 관해 개인의 문제와 사회의 문제로 그 책임 분담을 심각하게 고민했고, 사회적 책임의 비중을 늘리는 방향으로 정책적 방향성을 가져갔다. 물론 그렇다고 가족이나 개인의 책임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더불어 이런 정책적 노력은 1년, 2년… 5년 10년에 그 성과를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기본적으로 20~30년은 일관해서 지속해야 그 효과를 볼 수 있다.

유럽의 해법 2. 문화적 정치적 환경 조성


두 번째는 남녀가 집안에서 가사를 분담하고, 육아 책임을 분담하며, 돌봄 노동을 나누는 일은 기본적으로 사적인 영역의 일이다. 거기에 정치권력이 함부로 개입할 수 없고, 개입해서도 안 된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문화적이고, 정치적인 운동이 많았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인데, 남녀가 가정 안에서 서로 존중하면서 가사 분담이나 돌봄 책임에 관해 서로 자알~ 협상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결코 협상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환경이 성별로 다르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가령, 작은 회의를 하더라도 성별 구성을 50:50으로 신경 쓰는 사회와 남성 중년이 대부분의 자리를 차지하는 회의 공간이 아무렇지 않은 사회에서 남자와 여자가 아무리 개인적인 공간에서 민주적으로 ‘협상’하고 ‘토론’한다고 해도 그게 제대로 되지 않는다.

즉, 문화적, 정치적, 사회적 공간이 중요하다. 특히 정치라는 공적 영역에서 성평등을 위한 ‘시그널’을 끊임없이 사회에 내보내야 한다. 작은 회의든 큰 회의든, 국회를 구성할 때든 내각을 구성할 때든, 평등을 신경 써야 한다. 정치 바깥에서도 큰 기업이든 작은 기업이든, 임원진을 구성할 때, 직원을 고용할 때 성별 비율을 꼼꼼하게 따지는 분위기가 공기처럼 흐르는 그런 사회적 공간이 있어야 ‘집안’이라는 개인적인 공간에서도 남녀가 협상력(바게닝 파워; bargaining power) 균형을 맞출 수 있다.

무엇을 할 것인가: 출산 페널티 줄이고 계속 일하게 하라


성별 임금 격차를 모티브로 차별의 문제를 이야기했는데, 이 문제는 아주 복합적인 문제다. 그리고 그 해결도 복합적이고 동시적이며 다각도로 진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가장 먼저, 무엇을 할 것인가. 가장 중요한 선결문제는 무엇인가.

출산에 관련된 페널티를 줄이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 될 것으로 본다. 여성을 계속 일하게 할 수 있는 동기를 만드는 게 가장 중요하다.

저출산 사회의 역설: 우린 이미 타이밍을 놓쳤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이미 그 타이밍, 여성의 출산 부담을 줄이고, 여성을 계속 일하게 할 수 있도록 사회 전체가 조력하는 바로 그 기회를 놓친 측면이 있다. 그런데 그래서 오히려 역설적으로 남녀 임금 격차가 줄어들 가능성이 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이제 많은 여성이 출산하지 않는다. 경력에 가장 큰 위해 요소가 결혼과 출산이라는 건 분명해졌고, 과거에는 경력을 포기하면서 결혼과 출산을 선택했지만, 지금은 적극적으로 비혼과 무출산을 선택한다. 그건 합리적인 선택이다. 그래서 적어도 ‘현상적으로는’ 성별 임금 격차는 점차로 줄어들 가능성이 크다.

성별 임금 격차와 차별… 결국 화두는 가족(돌봄)이다


결국 성별 임금 격차에 관해 길게 이야기했지만, 이 문제는 가족의 문제다. 왜냐하면 출산의 문제고, 육아의 문제이며, 돌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돌봄’을 중심에 놓고, 가장 중요한 사회적 어젠다로 올려놓고 논의해야 하는 문제다.

돌봄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성별에 따른 차별 문제는 물론이고 다양한 문제들, 노인의 문제, 이주 노동자의 문제 등 앞으로 우리가 가장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여러 가지 문제의 해결이 어려워진다. 이들은 복합적으로 여러 영역에 겹쳐 있고, 하나의 유기체처럼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의제를 뽑으라면, 그걸 표현한다면, 그건 ‘돌봄(노동)’이다.

앞으로 우리에게 닥친 문제는 좀 더 심각하다. 여성이 출산이나 육아를 이유로 일자리를 그만둬도 다른 사람을 채용하면 됐지만, 앞으로는 그마저도 쉽지 않을 거다. 그러면 부족한 노동력을 어떻게 채울 것인가 하는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한다. 그래서 다시 ‘돌봄’ 문제가 가장 과제로 등장할 수밖에 없다. 앞선 인터뷰에서도 몇 번 강조했지만, 돌봄-이주 노동-노인 문제는 그야말로 화두다.

극한직업 ‘워킹맘’. 여성 노동의 문제도 결국은 가족의 문제, 돌봄의 문제와 아주 긴밀하게 관련을 맺는다.

돌봄노동 문제는 해결하기 매우 까다로운 영역이다. 왜냐하면 ‘돌봄’의 핵심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냥 누구나 대체 가능한 노동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다. 핵심은 ‘누가 돌 볼 것인가’이다. 여기에서 그 누가는 ‘타인’이다. 돌봄노동은 필연적으로 필요한데, 앞으로는 그걸 할 사람이 없다. 그러니까 외국인 노동자가 필요한 거고.

그런데 그런 이주 노동자를 농촌 비닐하우스에서 일하게 하는 것과 ‘내 새끼’ 육아나 ‘가족’을 돌보게 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돌봄은 사회적인 문제지만, 그 개인에게는 아주 감정적이고, 사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자기가 잘 모르는 낯선 사람에게 자신의 가족을 맡기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집에 데려와 일을 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돌봄 노동을 담당한 외국인 노동자는 주로 우리와 문화적으로 가까운 중국 조선족들이었다. 주로 ‘조선족 이모님’을 집으로 데려와 일을 맡겼다. 그런데 앞으로는 필리핀, 태국에서 그런 이주 노동자가 온다. 그건 정말 전혀 다른 문제다.

‘외국인’ 노동자와 ‘이주’ 노동자의 차이


돌봄이 육아보다 좀 더 포괄적인 개념인 데 비해, 이주 노동자와 외국인 노동자는 그런 관계는 아니다. 그 둘의 관계는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우선 이주 노동자는 더 적극적인 개념이다. 거기에는 한국으로 이주해서 생활(거주)한다는 개념이 내포돼 있다. 그에 비해 외국인 노동자는 단순하게 일하는 노동자의 국적이 외국이라는 점에서 이주 노동자의 개념보다는 중립적이고, 단순하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이주 노동자의 논의 맥락에서 외국인 노동자로 표현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가령 우리가 사우디아라비아로 돈 벌러 가거나 독일로 돈 벌러 간 우리나라 파독 광부나 파독 간호사는 그들, 사우디나 독일 입장에서는 그저 단순하게 ‘외국인 노동자’일 뿐이다. 물론 장기간 노동을 통해 그곳에 정착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한국으로 돌아올 사람들이다. 하지만 이주 노동자는 ‘생활’과 ‘거주’의 개념까지를 포함하고 있다.

돌봄노동과 이주 노동자


특히 돌봄 노동자는 이주 노동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는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게 한 가정의 돌봄 노동을 5~6년 정도 해서 그 노하우가 축적됐다고 치자. 그 경우에 그렇게 한 가정의 돌봄노동에 특화한 노하우를 가진 외국인 노동자를 다른 외국인 노동자로 ‘교체’하기가 쉬울까. 당연히 어렵다.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서 태국, 필리핀 등 동남아 가사 외국인 노동자는 이주 노동자가 될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이다. 이제 우리는 단순히 우리의 노동을 대신해 주는 외국인이 아니라 우리 땅에 거주하고 생활하는 ‘이주’ 노동자의 ‘정착’ 문제를 적극적으로 고민해야 할 시기다. 그런데 그런 고민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이민청, 법적 규제가 아니라 공적 ‘서비스’ 제공해야


그래서 이민청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 지금 윤석열 정부의 이민청은 출입국사무소의 확대 개념에 가깝다. 즉, 법적인 절차를 총괄하는 기관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현재 윤석열 정부의 이민청은 외국인 노동자의 관리와 처벌에 주된 목적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내가 생각하는 이민청은 그런 기관이 전혀 아니다.

내가 말하는 이민청은 완전히 다른 포괄적인 업무를 수행하는 기관이다. 우선 누구를 한국 땅에 데려와야 할지 체계적으로 초대하고 초청해야 한다. 그렇게 한국 땅을 밟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제대로 대우받으면서 일할 수 있도록 ‘경제적 노동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고, 그 외국인 노동자들 가운데 상당수는 ‘이주 노동자’로 정착해서 우리와 함께 살아갈 사람들이니까 한국 사회에 통합할 수 있도록 ‘사회적 통합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

앞으로 우리와 함께 살아가야 할 이주 노동자의 규모는 최소한 300만~400만 명 규모다. 이 문제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면, 그 사회적 비용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민 문제는 앞으로 우리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화두로 떠오를 것이 확실해 보인다.

돌봄과 이주와 노인과 여성…저출생 문제의 핵심 연결고리


한국 총선에서 노동 의제가 소외됐다는 의견이 있다고 하는데, 그런 인식은 저출산과 돌봄 노동을 연결하지 못하는 철학과 관점의 결핍이라는 생각도 든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거대 양당이 핵심 총선 의제로 제안한 ‘저출생’ 대책은 여성의 노동과 직결한 핵심 노동 의제다.

저출생과 돌봄 노동과 여성과 이주 노동자 문제를 연결해서 사고해야 한다. 물론 이 문제는 노동에 한정되는 것은 아니고, 복지 문제이면서 환경 문제이면서 여성 문제이기도 하다. A는 노동 문제, B는 환경 문제, C는 여성 문제… 이런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노동 어젠다를 기획하고 제안하는 쪽에서도 이제 단순한 협의의 노동 의제를 제안해선 안 된다.

돌봄과 이주, 노인과 여성의 문제를 함께 묶어서 노동 어젠다를 세팅할 필요가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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