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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영화 파묘가 불편했다’(슬로우뉴스 제목 ‘쇠말뚝은 없다’)는 글을 개인 소셜미디어에 올리고 나서 욕을 많이 먹었다. 물론 공감과 격려도 조금은 있었다. 이쪽저쪽 모두에게 고맙다는 말씀을 올린다. 돌이켜보니 좀더 정확하게 쓸 수도 있었는데 마음이 급하다 보니 그렇게 하지 못한 구석도 있었다.

다 내 잘못이고 내 탓이다. 반성(反省)이라는 말뜻 그대로 많이 돌아보며 살펴보고 있다.

[파묘] (2024. 장재현) 쇼박스.

731부대는? 기록 없는 지배는 없다


글을 읽어보시고 여러 분들이 댓글을 달아주셨다. 하나하나 모두 대답해 드려야 마땅하겠지만 어쩌면 무의미한 노릇일 것 같아 세 개를 추려 말씀을 올릴까 한다.

첫째는 이런 내용이다. ”일제는 731세균전 부대와 일본군 위안부 관련해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민족정기 말살용 쇠말뚝 박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기록을 남기지 않았을 수 있다. 그러므로 기록이 없다는 것을 갖고 사실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지 않느냐?

이에 대한 대답은 이렇다. 일제가 기록을 남기지 않고도 식민 지배를 할 수 있었다면 그야말로 엄청 뛰어난 능력이다. 문서를 생산하지 않고는 지배를 할 수 없었고 실제로도 731부대나 일본군 위안부와 관련한 기록을 방대하게 남겼다. 1945년 패전 이후 이런 기록을 말살하려 했고 많은 부분이 없어졌지만 남은 것도 적지 않고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새롭게 드러난 부분도 늘어나고 있다. 그러므로 이런 지적은 무엇에 대해서도 근거로 삼을 수 없는 거짓말이다.

중국 지린성 기록보관소가 일본 관동군이 땅속에 묻고 간 731부대 관련 문서 속에서 발견했다며 공개한 사진. 일본의 만주국 민생부 보건국 직원들이 1940년 11월 지린성 눙안현에서 한 어린이에게 페스트 방역하는 모습. 사진 신화망. 한국일보에서 재인용.

조선총독부 청사는 그러면?


둘째는 알아보기 쉽게 정리하면 이렇다. ”조선총독부 청사의 위치와 모양을 보면 그들이 저지른 풍수 침략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경복궁 일부를 허문 자리에 조선총독부 청사를 짓고 그것을 위해서 내려다보면 일본을 뜻하는 일(日)자 모양이다. 광화문 일대 거리 조성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대략적으로 설명하면 이렇다. 먼저 경복궁 일부를 허문 것과 직접 관련이 있는 사건은 1915년의 조선물산공진회였다. 그때 허문 자리에다 일제가 조선총독부 청사를 세운 시기는 1920년대였다. 그전에 조선총독부는 다른 데에 있었다.

일(日) 모양인 건 맞다. 그런데 그러면 일(日) 모양 건물은 모두 일제를 찬영하는 건물인가? 당시 유행한 건축양식을 살펴보면 이런 건물 모양은 특별한 게 아니다.

총독부 청사의 일(日)자 모양은 일본을 뜻한다고 볼 소지가 있지만 팩트라 하기는 어렵다. 당시 세계 건축의 흐름에서 공공기관을 그렇게 공간을 두고 짓는 것이 주류였다. 관련해서 내가 사는 창원의 진해 신시가지의 방사상 도로도 욱일기를 본뜬 것이라는 얘기가 있었다. 그러나 사실은 당시 통행이 가장 원활한 도로 양식이라 그렇게 설치했다.

다음 광화문 일대 신작로 조성은 일제와 직접 관련이 없다. 대한제국 시기 고종 정부가 주관해서 진행했다. 이 또한 당시의 세계적인 추세였던 방사상 구조를 따르려다 예산이 모자라 제대로 못했을 뿐 일제의 의도와는 무관하다.(이런 부분은 사실 내게 물을 일은 아니다. 인터넷이나 관련 연구 논문을 검색하면 금세 알 수 있다.)

경멸과 쇠말뚝은 관계가 없다


마지막 셋째는 “‘일제는 우리를 더럽게 여기고 경멸했는데 왜 쇠말뚝을 박느냐?’고 했는데 그게 말이 되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들이 우리를 경멸했기 때문에 쇠말뚝을 박지 않았다”고 적은 적이 없다.

나는 “일제가 우리를 두려움이나 경계의 대상으로 여긴 적이 없기 때문에 쇠말뚝도 박지 않았다”고 했다. 그들이 우리를 능멸하고 무시했다는 말은 그에 대한 방증으로 덧붙인 것이었다. 두려워하지도 경계하지도 않았는데 무엇 때문에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들여 가성비 나오지 않는 쇠말뚝을 박았겠느냐는 얘기다.

욕먹을 줄 알면서도 글을 쓴 까닭


많은 이들이 욕할 줄 알면서도 이런 글을 쓴 데는 까닭이 있다. 2월 27일 영화를 보고 나서 자칫 잘못하면 많은 이들이 ‘일제의 민족정기 말살용 쇠말뚝 박기’를 팩트로 인식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여러 영화평 또는 소감에서 그런 글들이 많이 나왔다. 그래도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지나가는 소나기 잠깐 처마 밑에서 피하면 그만이지’ 하는 생각이 더 강했었다.

이런 생각이 바뀌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3월 1일 오후 MBC에서 이런 뉴스가 나왔다. “1994년부터 일어난 쇠말뚝뽑기운동.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략했을 때 백두대간의 정기가 흐르는 곳마다 쇠말뚝을 박아놓았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습니다.” ‘파묘’가 현실이라는 얘기였다.

사실 새로 쓴 기사가 아니라 1995년 3월 12일 자 [시사매거진2580] 리포트를 영화 [파묘] 열풍에 편승에 다시 재활용한 기사다. 누가 기사를 썼는지도 알 수 없다. 동영상을 플레이하면 95년 방송이 나온다. 이렇게 무책임하게 기사를 재활용(?)해도 되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예사일이 아니네’ 싶었다. 한 번 터지기 시작하면 앞뒤 가리지 않고 모두 집어삼키는 것이 우리나라 보도매체의 속성인 것은 모르는 사람이 없다.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도 못 막는 사태가 벌어질 것 같았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의 역사에 대한 인식에 혼란이 커질 것은 뻔한 노릇이었다.

더불어 사회적 비용의 낭비도 심해진다. 30년 전 상황을 되살려 보면 바로 짐작할 수 있다. 민족정기선양위원회라든지 쇠말뚝뽑기운동본부 등이 만들어지는 것은 시간문제고 대부분 사람들은 저마다 한두 마디씩 얹을 것이며 인터넷을 비롯한 사회적 공론장은 이에 관한 얘기들로 가득 찰 것이다. 그런데, 그게 팩트가 아니라면 이 얼마나 허망한 노릇인가.

이런 정도면 되었다


그래서 서둘러 글을 써서 밤 10시 넘은 시각에 내 개인 소셜미디어에 올렸다.

3일에는 ‘슬로우뉴스’에서도 채택해 주어 좀더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게 되었다.

그 때문인지 지역 사회에서도 작으나마 관심을 받게 되었고 5일 저녁 MBC경남 ‘뉴스파다’에 출연까지 하게 되었다.

어쨌거나 지금 인터넷에는 ‘일제의 민족정기 말살용 쇠말뚝 박기는 역사적 사실이었다’고 하는 얘기는 그다지 많지 않다. 그와 같은 부류의 신문·방송·통신의 보도도 더는 나오지 않는다. 그러면 나는 이것으로 되었다. 이정환 ‘슬로우뉴스’ 대표가 언급한대로 ‘영화적 상상력과는 별개로 아닌 건 아닌 거다’라는 얘기다. 사회적 비용의 불필요한 지출을 막는 데 조금이나마 이바지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학자는 사실을 징검다리 삼지 비약을 징검다리 삼지 않는다


내 페이스북에 어떤 분이 호사카 유지 교수가 쓴 글을 댓글로 붙여주셨다. 보니까 내 글에 대한 반박인 것 같았다. 거기에는 이런 대목이 들어 있다.

“1941년 12월 진주만 공격으로 태평양전쟁을 도발한 일본의 군부는 음양사들을 시켜 저주의 힘으로 미영 연합군이 불타서 전멸하도록 매일 열렬하게 저주를 올리게 했다. 이런 이야기는 모두 역사적 사실이다.” (A)

“일제강점기 일제는 한반도를 지배하기 위해 영화처럼 음양사들을 시켜 한반도에 주술적 공작을 펼쳤을 것이다. 그 당시 음양도는 일본의 국책이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B)

호사카 유지.

호사카 유지 교수는 이 글에서 미국·영국에 대해서는 사실로 말했지만(A), 한반도에 대해서는(B) 짐작으로 말했다(“펼쳤을 것이다”). 그리고 그 근거는 객관적 사실을 적시하는 대신 자신의 주관적 판단으로 대체했다. 이것은 내가 알기로 학자의 글쓰기가 아니고 평론가의 글쓰기다. 그분은 대학에서 학문을 공부하는 학자이지 평론가가 아니다.

내가 아는 학자는 어떤 서술에서 다른 서술로 넘어갈 때 사실을 징검다리로 삼을 따름이지 비약을 징검다리로 삼지는 않는다. 사실은 평론가도 2류 정도만 되면 비약을 바탕으로 논리를 전개하지는 않는다.

제대로라면 이렇게 해야 한다. ‘미국과 영국을 상대로 일제가 저주를 퍼부었다고? 그러면 조선에 대해서도 그렇게 했는지 한 번 알아보아야 하겠네. 제대로 확인하려면 일본 정부와 미국 정부의 극비 해제 문서부터 살펴야겠지? 글은 그러고 나서 쓰면 되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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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댓글

  1. 아니 무슨 판타지오컬트 영화를…. 비판을 하려면 건국전쟁을 좀 심도있게 까셔야죠.

  2. 기록 없는 지배는 없다에서 한 번 웃고요. 필요에 의해 기록을 하거나, 하지 않거나 폐기하죠.
    일제가 우리를 두려움의 대상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에 민족 정기를 끊을 목적으로 쇠말뚝을 박지 않았다고 단언한 것 역시 본인 가정입니다.
    호사카유지 교수가 태평양 전쟁때 음양사의 공식 지위와 역할 기록을 근거로 제시했고(기록과 팩트) 한국에 대해서는 가정이라고 하셨는데, 본인 역시 가정과 논리 비약을 썼네요.

  3. 기록없는 지배는 없다..에서 일단 웃습니다.
    기록을 필요에 따라 하거나/ 안하거나/폐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기록없는 지배는 없다..도 본인의 가정이죠.

    경멸과 쇠말뚝은 관계 없다고 하셨는데,
    일제는 한민족을 두려워하지 않고 경멸까지 했기 때문에 민족정기를 끊을 목적으로 쇠말뚝을 박지 않았다..고 하셨죠. 이 부분 역시 본인의 가정일 뿐입니다.

    호사카 유지교수가 음양사가 태평양 전쟁에서의 공식 지위/행적 기록을 제시하고 조선에의 역할은 가정이라고 지적하셨는데, 본인도 가정을 점철된 논리비약을 쓰셨습니다.

  4. 먼저 올린 댓글이 페이지 새로 고침을 몇 번이나 해도 안 올라와서
    재차 미상으로 올렸는데, 둘 다 올라갔네요. 중복이라 하나 지우고 싶은데 기능을 못 찾겠네요. 둘 중 하나만 지워주세요. 기왕이면 먼저 올린 글로요. 번거롭게 해드리게 됐습니다.

  5. 지극히 꼰대스런 글일 뿐입니다.
    안 써도 될 글을 굳이 쓰고,
    이런 변명까지 또 쓰는 걸 보면…ㅎㅎ

  6. “사회적 비용의 불필요한 지출을 막는 데 조금이나마 이바지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쇠말뚝’에 주의를 뺏겨 영화에 몰입하지 못했다는,
    얄팍한 영화 감상문에 이런 거창한 의의가 숨어 있었다니?

  7. 본인 생각을 사실처럼 쓰느라 비약이 정말 많은 글이네요. 뭐 좀 그럴싸 한가 하고 꼼꼼히 읽어 본 시간이 아까울 정도의 글입니다. 반성을 좀 더 해보셔야할 것 같아요.

  8. 쇠말뚝 이야기가 흥하게 된 배경도 결국은 청산되지 않은 과거에 있다. 일제시대가 끝나고 일제에 부역한 사람들은 처벌받았어야 마땅하나 그 사람들은 소위 지도층에 있었고 현실적으로 그 사람들에게 죄를 묻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받은 피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 마음속에 억울함(분노?)이 은은하게 깔려 있는 상태로 어영부영 시간이 지났고, 측량용으로 박은 것이든 아니든 90년대 뉴스에서 쇠말뚝을 뽑아내는 것을 보고 일제의 잔재가 지워지는 기분을 느낀 사람이 많았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쇠말뚝 뽑기는 전국민 심리치료용 이벤트라고 생각함

  9. 글을 잘 쓰시려고 노력은 하신 것 같은데 어불성설도 많고 두서가 없네요.
    한명의 한국인의 잊고있던 분노를 살려주시는데 일조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대한민국 만세♡ 독도는 우리땅

  10. “펼쳤을 것이다”
    이게 맘에 안드시는 모양이군요

    조선을 향해 음양사를 시켜 저주를 올렸는지 구체적 증거가 없다… 맞는 말씀이죠
    하지만 적국에게 저주를 올린 건 역사적 사실이라잖습니까?
    그러니 조선에 저주를 올렸다는걸 확언할수는 없습니다만 가능성만큼은 충분하지 싶습니다
    (조선은 약소국가라 저주따윈 필요없다고 여겼다면 그런 일을 하지 않았을수도 있겠죠)

    사실 개인적으로 호사카 유지 교수님 글에서 가장 놀랐던 부분이 바로 일제가 음양사를 활용했다는 내용입니다
    파묘에 대해 부정적인 글에서, 특히 주술적인 부분에 대해 비판하는 분들 중에서 대부분 하시는 말씀이
    근대화 이후 일제는 미신을 믿지 않고 배척했기 때문에 주술같은게 이뤄졌을 리 없다는 입장이었습니다
    교수님은 그걸 정면으로 반박했다는 점이 놀라웠습니다

    실제 접해보지도 못한 일본문화에 대해 방구석에서 중언부언 떠드는 사람들에 비하면
    역시 일본 출신은 다르구나 싶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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