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우뉴스는 창간특집으로 미디어와 속도의 문제를 다뤘다. 다양한 주제와 접근으로 이 문제를 풀어냈지만, 우리가 처한 미디어 환경에 대한 근심은 모두에게 마찬가지였다. 편집팀은 각자의 고민을 기사로 표현했지만, 기사로 풀어내지 못한 할 말이 어찌 없을까. 창간특집을 정리하는 의미로, 이 주제에 대해 편집팀 성원들은 무엇을 느끼고 생각했는지, 그리고 슬로우뉴스는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토론하는 기회를 마련했다.
이를 위해 편집팀은 세 차례에 걸쳐 온라인 모임을 가졌다. 토론을 의도했지만 자연스럽게 방담으로 흘렀다. 두 차례 온라인으로 논의를 벌였고, 그 논의에 바탕해 열 개의 질문을 우리 스스로에게 던졌으며, 거기에 답했다. 이를 최대한 간략하게 정리한다.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비슷한 취지의 진술은 되도록 하나만 살리고, 나머지는 제외했다.
I. 저널리즘과 속도
역시 가장 우선해야 할 주제는 이번 특집이 여러가지 관점과 사례로 분석하고 평가한 저널리즘과 속도의 문제가 아닐 수 없다.
1. 속도와 이에 대한 강조나 추구 때문에 잃어버리는 가치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편집팀이 제시한 대답은 일상성, 섬세함, 성찰, 사유 등의 단어로 압축된다. 행복이나 사랑, 우정 같은 가치가 사라져감을 걱정하기도 했으며, 고민해야 할 일들이 고민되지 않고 속도에 휩쓸려갈 것을 염려하기도 했다. 결국 속도는 우리 시대의 가치를 휩쓸어가는 존재이며, 그 가치들의 대척으로 소비를 세우고 있다는 지적도 있었다.
- 일반적으로는 진지함, 성찰, 기억, 반성, 미디어에서는 깊이와 정확성을 잃어버린다. (deulpul)
- 속도 지향의 사회에서 모든 에너지는 소비로 집중되고 있다. (뗏목지기™)
- 정말 중요하게 고민해야 할 문제들이 속도의 흐름 속에 쓸려 버린다. (설렌)
- 평범한 사람들이 겪는 일상의 행복, 사랑, 우정과 같은 이야기는 점점 더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이병찬)
- 상황의 다층성 같은 섬세함을 버리기엔 세계는 너무 복합적이지만, 속도는 그 복잡한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섬세함을 잃게 한다. (capcold)
- 속도는 우리 시대의 면책특권이고, 그 범위는 점점 넓어지고 있으며, 결국 속도를 제외한 모든 가치를 잃어버릴 수 있다. (sharefeel)
- 성찰, 존재의 좌표, 이를 통한 모험심과 상상력,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객기, 믿음… (민노씨)
특히 SNS에 대한 지적이 눈길을 끌었다.
- 뉴스도 뉴스지만 SNS의 지나치게 빠른 속도 때문에 어지러울 때가 많다. 숨 좀 고르고 살았으면 좋겠다. (필로스)
- 리트윗 같은 방식으로 잘못된 정보가 전파되는 과정은 사유와 판단 과정이 완전히 배제된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임예인)
다른 측면도 지목되었다.
- 저널리즘이 속도를 그렇게 강조하거나 추구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결과적으로 빠르면 좀더 좋아지는 구석이 많다. 부정적 측면은 냄비 근성에 플러스 알파 정도다. (이승환)
2. 속도 때문에 잃어버리는 가치들은 속도를 늦춘다면 복원될 수 있을까?
그렇게 보는 의견이 여럿 있었다. 속도에 희생되는 것들은 속도를 줄이면 되살아날 가능성이 있다는 견해다.
- 속도를 늦춘다고 섬세해지는 것은 아니지만, 속도만 추구하면, 확실히 섬세함을 버리게 된다. (capcold)
- 속도는 미디어들이 기계가 되는 이유 중 하나라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조금은 회복되지 않을까? (써머즈)
- 감속은 진지함, 성찰, 기억, 반성, 깊이와 정확성을 충족시키기 위한 환경이다. 그리고 필요조건이다. (deulpul)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많은 사람이 감속에 대한 기대감을 피력했다면, 이런 의견도 있었다.
- 속도를 늦추기보다는 속도에 대한 강박으로 인해 나타나는 미디어의 폐해를 미디어 스스로 끈질지게 노력해서 극복하고 인정받아야 한다. (이승환)
3. 속도를 통해서 얻는 가치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속도는 절대악인가. 편집진은 속도를 부정적으로만 보지는 않았다. 속도만이 갖는 긍정성을 직접적이거나 비유적인 표현을 통해 진술했다.
- 중요한 의제를 선점할 수 있고, 다양한 관점을 빠르게 전파할 수 있다. (이병찬)
- 속도 그 자체가 가치다. ‘빨리’ 전파된다는 건 그 자체로도 대단히 중요하다. 의료로 비유하자면, ‘빨리 발견’하는 게 질병의 진단과 치료에 아주 중요한 것처럼. (임예인)
- 뇌와 같다고 생각. 전류가 빠르게 흐를수록 즉각적으로는 옳지 않은 판단을 해도, 결과적으로 더 많은 지성을 모아 더 나은 결론을 낼 수 있다. (이승환)
본능적 욕구로서의 권력욕, 주관적인 권능감에 주목한 의견도 있었다.
- 속도는 그 자체로 권력이고, 쾌락적인 속성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가치인지는 모르겠지만, 무엇이든 먼저 선점하고, 누군가보다 빠르다는 건 아주 우월한 권능감을 준다. 이건 부정하기 어렵다. (민노씨)
검열과 통제에 저항하는 수단으로 속도를 지적하기도 했다.
- 속도는 검열이나 통제를 무력화시키는 좋은 수단이다. 물론 속도 그 자체보단, 속도 있는 새 미디어의 효과이기도 하지만. (sharefeel)
시민운동과 연결 짓는 관점도 있었다.
- 이집트 혁명과도 같이 대중의 힘이 한 곳으로 모여야 할 시점에 시의성 있게 결집할 수 있게 한다. (설렌)
속도의 현실적 가치를 직설적으로 토로하기도 했다.
- 속도만큼 돈과 직결되는 게 무엇이 있을까? (PLSY)
4. 그렇다면 속도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가치는 다른 수단을 통해서는 얻을 수 없는가?
이 질문에 대체로 속도와 한 몸으로 연결된 가치들이기 때문에 다른 수단을 통해서는 ‘그 가치’를 얻을 수 없다고 답했다. 다만 다음과 같은 의견이 있었다.
-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다만 이 속도에 제어 장치가 만들어지는 건 각 그룹 간 문제라고 보는 편이다. (이승환)
II. 우리 자신에 대해
5. 글을 보낸 뒤에 보완하고 싶었던 점이나 아쉬웠던 점이 있었다면?
데이터와 사례 보완에 대한 아쉬움이 많았다. 더불어 다양한 관점, 특히 자신의 글이 비판하는 편의 관점을 포함시켜 사안을 좀더 입체화했어야 하지 않았나 하는 의견도 몇몇 있었다. 각 글에 해당되는 세부 내용이므로 길이 관계상 더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궁금한 독자분들이 댓글로 문의해주면 답할 예정이다.
6. 좋았던 다른 필자의 글은 무엇이고, 그 글에서 그래도 아쉬웠던 점을 꼽자면?
아쉬웠던 점을 꼽아달라고 했지만, 대부분은 아쉬운 점을 언급하지 않았다. 그 마음 충분히 이해한다. 글 하나 하나를 함께 기획하고, 함께 고민하고, 초고가 만들어지면 구글 문서에 올려두고 서로 검토하고, 고치고, 칭찬에 기분 좋아지다가 또 비판에 마음 한편이 조금은 위축되기도 하면서, 그렇게 글을 만들어 왔다(다 완성해 놓고도 의견 수렴의 결과로 ‘잘린’ 글들도 당연히 존재한다). 애정이 없다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내 글이건 남의 글이건 가릴 것 없이 모두 그렇다. 그렇다면 동료로부터 가장 좋은 글로 뽑힌 글은 뭘까?
펄의 글 ‘직무유기를 반성하며 – 독자들은 진실을 원하는가’가 압도적인 몰표를 받아 편집팀이 뽑는 최고의 글로 선정됐다. (물론 상품은 없다. ^ ^)
deulpul의 글과 이승환+필로스의 글은 각각 세 표를, 뗏목지기™의 글과 leejeonghwan의 글은 각각 한 표를 받았다. 독자들이 이런 걸 궁금하게 여길지 모르겠지만, 편집팀에겐 의미가 크다. 누구보다 믿고 신뢰하는 동료들이 마음으로부터 보내는 찬사이기 때문이다.
7. 시간이 좀더 허락되었다면, 좀더 ‘슬로우’했다면 위 5, 6의 아쉬움이 보완할 수 있었을까?
독자들은 어떻게 평가하시겠는가. 편집팀 대부분은 시간적으로 여유가 더 있었더라도 아쉬움을 보완할 수 없을 것으로 생각했고, 그렇게 답했다. 왜냐하면 ‘슬로우’는 물리적인 속도 혹은 시간만을 의미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100년을 줘도 못하는 건 못하는 거다. 슬로우뉴스에게 ‘슬로우’란 앞으로 만들어 갈 철학이고, 방법론이며, 태도다.
III. 시선을 밖으로
8. 기성 저널리즘의 시도들 가운데 슬로우뉴스의 지향과 조화하는 프로젝트가 있다면?
이에 대해선 다양한 답변들이 나왔다. 우선 독자와 교감하고 더 나아가 함께 기사를 쓰는 인터랙티브 방식을 강조하는 의견이 있었다.
- 강정수 소개로 접한 가디언의 실험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앞으로 독자와 직접 호흡하는 인터랙티브한 미디어로 슬로우뉴스가 자리하면 좋겠다. (민노씨)
- 개인적으로 뉴욕타임즈의 인터랙티브 기사들을 좋아한다. 데이터와 쌍방향성. 우리도 그런 걸 시도하면 좋겠다. (써머즈)
끈기와 근성, 독한 심층 탐사보도의 전범을 언급하기도 했다.
- 슬로우 저널리즘의 전범 사례는 NYT의 이라크전 취재라고 생각한다. 거의 10년 가까이, 남들 다 잊어버려도 죽어라 계속 후속 보도. 그 비싼 지면공간을 채워가며… (capcold)
- 목표는 크게 잡아야 하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지향점은 온라인 저널로서 2년 연속 퓰리처를 수상한 프로퍼블리카. (sharefeel)
TV 프로그램과 신문의 개별 프로젝트를 소개하기도 했다.
- 지금은 이름이 바뀐 것으로 아는 MBC ‘뉴스후’의 시작 당시 취지, 기타 호흡이 긴 기획 취재들. (deulpul)
- 서울신문에서 과거의 법조 관련 사건(미제 포함)들을 다시금 보여주는 장기 시리즈물이 있었다. 그리고 한국일보도 주말판 H면 ‘사건과 사람’에서 과거의 사건들을 다시금 파헤쳤다. (펄)
9. 시민 영역 프로젝트 가운데 슬로우뉴스와 지향을 함께 한다고 생각하는 프로젝트가 있다면?
역시 다양한 답변이 나왔다. 여기에서 언급되는 프로젝트는 앞으로 슬로우뉴스에서 직접 소개할 가능성이 높은 것들이다. 우선 총선연대와 진보넷이 함께하는 미디어 정책 비교 사이트 ’19대 국회를 바꾸자’를 capcold와 필로스가 각각 추천했다.
- 슬로우 시민 영역 매체프로젝트는 최근 런칭한 총선 미디어연대 2012media.kr 이런 류의 프로젝트가 세부 전문분야마다 나와줘야. (capcold)
그리고 이승환, 캡콜드를 비롯한 슬로우뉴스 필진 다수가 참여하는 인지잉여 프로젝트도 뗏목지기™와 임예인에게 추천받았다.
- 인지잉여 프로젝트. (뗏목지기, 임예인)
‘어쩌면 프로젝트’ (신비)도 주목받았다. 민노씨 외에도 펄이 신비의 이 소박하고, 아름다운 프로젝트를 추천했다. 어쩌면 프로젝트는 앞으로 슬로우뉴스를 통해 독자들과 만날 예정이다.
- 일상 속에서 자기가 사는 공간과 그 안의 삶을 사유하는 ‘어쩌면 프로젝트'(신비+코기토), IT 지식공유에서 출발해 이제는 세상을 표현할 수 있는 모든 것에 욕심내고 있는 이고잉의 아카이브 플랫폼 ‘오픈튜토리얼스’. (민노씨)
더불어 슬로우뉴스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게 있다.
- 인터넷 주인찾기. (써머즈)
IV. 마지막 질문
10. 앞으로 슬로우뉴스에서 다루고 싶은 주제가 있다면?
마지막 질문이야 항상 뻔하다. 하지만 뻔하다고 해서 중요하지 않다는 건 아니다. 이번 특집뿐만 아니라 슬로우뉴스 전반에 걸쳐 대단히 중요한 질문이다. 다양한 대답이 나왔는데, 독자들이 슬로우뉴스의 앞날을 짚어볼 수 있도록 가급적 모두 소개한다.
우선 ‘일상성의 회복, 발견’이라고 할만한 의견이 있었다.
- 창간 취지에도 썼듯 ‘당신도 누군가엔 소중한 뉴스’라는 화두를 붙잡고, 사소하고 일상적인 것들 속에 내재된 가치를 발견하는 작업을 해보고 싶다. (민노씨)
- 유명하진 않지만 자신의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의 인터뷰가 슬로우뉴스 안에서 지속적으로 나왔으면 좋겠다. (써머즈)
- 법에 대한 이야기, 주변에 사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 (이병찬)
(약간은 장난스런) 탈권위에 이끌린 의견도 있었고,
- 소위 ‘논객’이라 불리는 사람들, 때로는 교수로, 때로는 평론가로, 때로는 무슨 학자로, 적당히 유리한 칭호를 붙여 인용되는 이들의 깊이 없음에 대한 비판. (임예인)
- 모두까기 인형이 되어 다 까버리겠습니다? (이승환)
그 밖에 편집팀원들의 다양한 개성과 관심사에 따라 여러가지 의견이 나왔다.
- 1. 퇴직 언론인들을 활용하는 방안, 2. 위키피디아 등과 연계, 통시적 뉴스 작성, 3. 동일 주제로 동시에 글쓰기. (leejeonghwan)
- ‘먹을거리 공포 탈출하기’ 식품첨가물에 대한 오해나 과장된 위험 의식을 버리는 내용. (펄)
- SNS의 속도에 저항하는 글을 좀 써봤으면 좋겠다. (필로스)
- 현대예술로 넘어온 이후 미친듯이 쏟아져 내려온 수많은 화풍과 작가들을 슬로우하게 소개하는 문화면 글. (PLSY)
- 관심은 있지만 사실은 잘 모르는 ‘교육’ 테마를 다룰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 (뗏목지기™)
- 이후 특집으로 ‘개발 철거’, ‘노조’ 같은 대놓고 굵직한 사회 사안, ‘잉여’ 같은 일상적이고 복합적인 사안 등을 번갈아가며 다뤘으면. (capcold)
- 이미 거의 기억되지 않지만 사회의 줏대를 세우기 위해 여전히 중요한 사람이나 사건. (deulpul)
이 모든 바람이 슬로우뉴스를 통해 하루 빨리 독자와 만날 수 있길 바란다.
* 예상 발행일보다 늦어졌습니다. 독자들의 너른 양해를 구합니다.(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