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캘리포니아 주 새크라멘토에서 발행되는 신문 새크라멘토 비(Sacramento Bee)는 이 지역 최대 일간지이며, 캘리포니아 주에서는 다섯 번째 규모, 미국 전체로는 27위 수준인 유명 지역지이다.
2005년 4월의 어느 날, 이 신문의 오피니언란 데스크(부서 편집 책임자)는 회사 소속 기자인 다이애나 그리에고 어윈(Diana Griego Erwin)이 써 낸 기사를 체크하고 있었다. 퓰리처 상과 조지 포크 상을 받은 바 있는 그리에고 어윈은 이 신문에서 근무한 기간만 따져도 16년이 넘는 중견 기자였다. 그녀는 자신이 취재한 내용을 바탕으로 하여 1주일에 세 번씩 칼럼 형식의 기사를 쓰고 있었다. 이 날 어윈이 써 온 기사는, 바로 얼마 전 지역 야구팀 경기가 끝난 뒤 팬들 사이에 주먹다짐이 벌어져 사람이 죽은 사건에 대한 것이었다.
데스크는 어윈의 기사를 읽다가, 이 사건에 대한 시민 반응에 포함된 어떤 술집의 바텐더가 익명 처리된 것을 발견했다. 내용으로 보아 술집과 바텐더의 이름이 익명으로 되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데스크는 어윈에게 술집과 바텐더 이름을 실명으로 공개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어윈은 이러한 지시를 받고도 구체적인 이름을 내놓지 못했다.
기사에 인용된 사람이 별다른 이유 없이 익명화되어 있고, 그에 대한 데스크의 질문에 기자가 제대로 된 정보를 꺼내놓지 못했다는 사실은 즉각 내부의 우려를 불러 일으켰다. 기사는 게재 보류되었으며, 원래의 예정일보다 이틀 뒤에, 문제가 된 부분을 빼고 새로 쓴 칼럼이 실렸다.
의심이 든 편집국 책임자들은 그녀가 최근에 쓴 다른 기사도 점검해 보았다. 불법 체류 노동자에 대해 쓴 칼럼에 등장하는 한 취재원의 신상 정보를 요구했을 때도 어윈은 분명하게 대답을 하지 못했다. 편집국은 내부 조사 절차에 들어갔다. 그 결과, 어윈이 최근에 쓴 칼럼에 등장하는 43명이 실제로 확인되지 않는 비실존 인물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퇴직 압력을 받은 어윈은 신문사를 떠나야 했다. 신문사는 이 같은 사정을 알리고 독자에게 사과하는 공지문을 실었다.
2000년대 중반에 미국 언론, 특히 인쇄 매체에서는 비슷한 일이 잇달아 벌어졌다. 기자들은 없는 사람을 만들어 내거나, 다른 매체가 취재한 사람을 자신의 기사에 재활용했다가 발각되어 줄줄이 회사를 떠났다. LA 타임스에 따르면, 많은 언론인은 이런 일이 벌어지는 이유로 인터넷이나 24시간 텔레비전 뉴스와 경쟁해야 하는 새로운 매체 환경을 꼽았다.
일부 기자와 편집자들은 이러한 안이함(shortcut)과 추잡함(sloppiness)이 인터넷 뉴스 사이트나 24시간 텔레비전 뉴스 등과 더 치열하게 경쟁해야 하는 상황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한다. (LA 타임스, ‘내부 조사 끝에 칼럼니스트 사임’, 2005년 5월13일)) ※
기자들이 비윤리적인 일까지 벌이도록 만든 매체 환경 변화와 이로 인한 압력의 본질은 뉴스의 속도와 항상성이다. 인터넷과 케이블 채널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사건은 벌어지자마자 뉴스가 되고, 그런 뉴스는 언제나 소비될 수 있는 형태로 존재한다. 기자들은 좀더 많은 내용을 좀더 빨리 만들어 내어야 하는 전례없는 압력 아래 살게 됐다. 나가서 사람을 취재하고 사실을 확인하고 인터뷰를 따와 내용을 채울 시간이 없으므로 간편하게 구할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되고, 안 되면 만들어 내기라도 해야 하는 것이다.
여론을 대표하는 정체 불명의 캐릭터
언젠가부터 한국 매체, 특히 신문에서는 사회적 논란거리를 다루는 기사에서 일정한 패턴이 정형화되어 왔다. 이슈나 사건을 서술한 뒤에 항상 ‘네티즌'(혹은 ‘누리꾼’, ‘트위터리안’) 몇 명이 따라 붙기 시작한 것이다. 이 네티즌들은 본문에 서술된 이슈에 대해 감상이나 비평 같은 반응을 토해 내는 역할을 수행한다. 이들은 사건 당사자가 아닌 제3의 관찰자로 등장하며, 해당 사건에 대한 여론을 보여주는 대표 선수 같은 모양을 취하고 있다.
한국 매체에 수시로 등장하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에 분개하고 통탄하고 냉소하는 네티즌 캐릭터는 누구이며, 왜 거기에 존재하는가. 이 캐릭터는 새크라멘토 비의 경우에서처럼 실체가 없는 가공 인물일 수도 있다. 기자 자신이 네티즌이 되어 코멘트를 하고, 이것을 자신이 쓴 기사에 인용한 2003년의 스포츠조선 인용자 조작 사건이 그렇다. 해당 기자는 축구협회에 분노하는 네티즌 반응에 대해 쓰면서, 기사에 인용할 적당한 코멘트를 찾기 어렵게 되자 자신이 그런 말을 써 놓고 이를 네티즌 반응인 것처럼 인용했다. 이런 사실은 눈 밝은 진짜 네티즌들에게 적발됐다. (오마이뉴스, ‘<스포츠조선> 기자 기사 조작 파문‘, 2003년 10월23일)
이 사건은 우연히 발각되었지만, 실제로 알려지지 않고 넘어가는 비슷한 사례가 얼마나 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좀더 상식적으로 말하자면, 한국 언론이 기사에 필요한 네티즌 반응을 따오기 위해 스스로 코멘트를 하는 자가발전을 할 필요는 사실 크지 않다. 세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는 말이 넘쳐나는 트위터를 비롯한 넷 공간에서 기자는 자신이 필요로 하는 방향의 코멘트를 얼마든지 찾아 낼 수 있다는 점이며, 둘째는 기자 자신이 직접 참여하면서 원하는 코멘트를 끌어낼 수 있다는 점이며, 나머지 하나는 이렇게 인용되는 코멘트들은 구체적으로 누가 말했는지를 전혀 밝히지 않는 게 관행화해서,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손을 댈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지금 이 글을 쓰면서 신문 글타래들을 잠깐 헤집어 찾아낸 최근 사례 몇 가지를 보자. (여기 인용된 신문들은 유달리 이런 사례가 많아서가 아니라 내가 보는 신문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사례로 인용되었으며, 문제의 양상은 다른 신문들도 마찬가지다.)
트위터 이용자들은 임 총장의 사퇴를 민주통합당의 공천을 바로잡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FACENE***는 “임종석의 사퇴는 늦은 감이 있으나, 민주당이 바로 설 수 있는 새 계기가 되었다”며 “임 총장의 사퇴가 그 동안 잘못된 모든 공천을 바로 잡는 시작이 되기를 기대한다”고 썼다. @kg***은… (한겨레, ‘한명숙 “임종석 필요하다”…총장직 사의 반려‘, 2012년 3월9일)
누리꾼들은 한국방송의 과도한 현장 통제 소식을 듣고 한국방송에 비난을 보내고 있다. 트위터 이용자 ‘@kangyu***’는 “가카 특보답다. 이번에는 ‘인규산성’?, KBS앞 차벽 설치”라고 조롱했고 ‘@ddo***’는 “이놈의 뻐스는 참 창의성 없다”고 답답해 했다. … (한겨레, ‘KBS에 ‘인규산성’ 등장…“MB특보답네”‘, 2012년 3월6일)
한편 이동관 전 수석의 ‘제 시체를 밟고 넘으라’는 발언에 트위터 이용자들은 “날짜와 장소를 알려주면 여러 사람이 밟고 가면 좋겠네요”(@mindg***), “축구화 신을까? -.-”(@actw***) “아이젠 박아서 밟아줄께”(@iron-h***) 등의 말로 비꼬았다. 누리꾼들은 이동관 전 수석에 대해 서민을 외면하고 측근 비리로 얼룩진 이명박 정부의 ‘입’ 역할을 자처한 데 대한 부정적 평가를 내렸다. 트위터이용자 @mettay***은… (한겨레, ‘이동관 “내 시체 밟고 넘어라” 누리꾼 “축구화…”‘, 2012년 2월28일)
이같은 소식에 커뮤니티 사이트들의 네티즌들 사이에서 술렁이고 있다. 네티즌들은 “명령과 복종만이 있는 군대에서 부적절한 관계라면 곱게 볼 수가 없다”, “여군이 늘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참으로 좋지 못한 소식이다”, “사실이라면 군법에 따라 엄벌해야 한다” 등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일부 네티즌들은 “군대도 출세의 길이 있다보니 서로가 뒤를 캐 신고하고 지적하는 복마전과도 같은 곳이다. 어찌됐든 이러한 일은 발본색원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동아일보, ‘최익봉 육군 특전사령관, 女부사관과 ‘부적절한 관계’ 들통!’, 2012년 3월9일)
이들 사례에서 보듯, 기사에 등장하는 네티즌들은 1) 뚜렷한 가치 판단에 따라 사건이나 인물에 대해 언급하고 있으며 2) 네티즌들을 대표하는 듯한 지위를 갖고 3) 그런데도 정체가 거의, 혹은 전혀 밝혀지지 않는 방식으로 인용되고 있다.
이렇게 인용되는 네티즌이 모두 가공의 인물이라고 할 수는 없다. 적어도 겹따옴표로 인용되는 코멘트들은 인터넷 게시판과 트위터에 실제로 존재하는 글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언론 기사에 인용되는 소스가 품고 있어야 할 정체성이라는 점에서 볼 때, 새크라멘토 비 식의 가공 인물과 한국 매체의 네티즌들은 본질적으로 많은 점을 공유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1) 실체가 밝혀져 있지 않으며, 2) 따라서 확인할 수 없고, 3) 기자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해주고 있다.
1)과 2)는 언론 보도의 기본 원칙에 어긋나는 부분이라서 그 문제점을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다. 아무리 간단한 코멘트라도 어떤 사람이 했는지 분명하게 밝히는 것은 보도 윤리에서 기본 중의 하나다.
1)과 2)의 문제가 없더라도, 즉 실체가 있고 확인할 수 있는 사람을 뉴스에 인용했더라도 안전하지는 않다. 이것은 뉴스 보도 관행에 깃들어 있는 고전적인 문제다. 뉴스에 등장하는 인물, 특히 뉴스메이커가 아닌 일반인이 보편적 여론을 보여주는가에 대해서는 오래 전부터 경계와 비판이 있어 왔다. 이를테면 어떤 강력 사건에 대한 시민 반응을 알아보기 위해 기자는 마이크를 들고 쇼핑몰로 나간다. 쇼핑하러 온 사람 중에서 적당한 이를 찾아 마이크를 대고 그들의 반응을 묻는다. 또는 폭등한 배춧값에 대한 시민 반응을 알아보기 위해 기자는 근처 식당가를 찾는다. 식당 주인이나 종업원, 손님에게 이런 사태에 대한 생각을 묻는다.
이런 일반인은 모두 우연히 마침 거기에 있었기 때문에 인터뷰 대상자가 된 것이지만, 기사에서는 여론을 대표하여 보여주는 사람 역할로 등장한다. 시청자나 독자는 이러한 뉴스를 보거나 읽으면서, 다른 사람들이 대개 그렇게 생각한다고 여기게 된다.
그러나 당연한 말이지만, 이런 방식으로 인터뷰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여론을 객관적으로 대표하지 않는다. 언론이 여론을 보여주기 위해 일반인을 인터뷰하는 방식(person-in-the-street interview)을 사회과학에서는 편의적 표본 추출(convenience sampling), 혹은 접근가능성에 따른 표본 추출(availability sampling)이라고 한다. 오가다 걸리는 사람이 인터뷰 대상이 된다는 거다. 특정한 시점에 특정한 장소에 있는 특정한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는 보여줄 수 있지만, 대표성은 없으며 따라서 이러한 의견을 일반화할 수 없다. 뉴스 매체는 기사에 사람의 얼굴을 보여주고 사람 냄새를 첨가하기 위해 이러한 인터뷰와 코멘트를 즐겨 사용하지만, 그렇게 나온 의견을 보편적인 것처럼 묘사하거나 해석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런데 이제는 인-더-스트릿이 아니라 온-더-모니터로 이런 일이 가능하다. 가능할 뿐만 아니라 매체 환경의 변화 탓에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 하는 수단처럼 되어 관성적으로 사용된다. 거리에 나갈 필요도 없이, 인터넷에 널린 코멘트들을 그저 카피해 오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이 코멘트의 주체는 실체도 없고 확인할 수도 없다. 언론이 응당 해야 할 역할에 비추어 보면 이러한 방식은 본질적으로 안이함이고 추잡함이다.
사실 보도와 공정성이 동시에 침해된다
더 큰 문제는 3), 즉 언론이 이들의 입을 빌어서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한다는 점이다. 전통적인 거리의 일반인 반응이 객관성이나 대표성에서 문제가 있었다면, 새로 등장하는 온-더-모니터 취재 방식은 이에 더하여, 다양한 여론 중에서 특정한 일부를 필요한 대로 취사선택하여 보여줄 수 있다는 새로운 문제를 드러낸다. 언론사나 기자 개인의 가치지향성이 뉴스 보도 행태에 그대로 반영되는 경우가 잦아서, 전(全) 기사의 사설화, 전 기자의 논설위원화라는 비판을 받는 한국 언론의 양상을 고려하면, 이런 점은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된다. 객관성을 지향해야 할 뉴스 스토리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일제히 특정한 입장에 서서 말하고 있다면, 겉으로는 객관적 인용의 모양을 취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기자를 대신하여 하고 싶은 말을 해 주는 대변인 노릇을 하는 꼴이다.
위에서 인용한 사례들에서 보면, 네티즌 반응은 이러한 반응을 아우르는 틀을 서술한 뒤에 등장하는데, 따라서 이 틀에 벗어나는 반응은 기사에 포함되지 않는다. 이러한 틀에는 이미 가치와 판단이 담겨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대표적인 예가 다음의 경우이다.
누리꾼들은 이동관 전 수석에 대해 서민을 외면하고 측근 비리로 얼룩진 이명박 정부의 ‘입’ 역할을 자처한 데 대한 부정적 평가를 내렸다. 트위터이용자 @mettay***은… (위 인용 기사)
이것은 네티즌의 반응을 객관적으로 드러내어 보여주는 방식의 서술이 아니다. 대신 특정한 틀, 즉 이동관을 부정적으로 평가해야 한다는 틀을 미리 설정한 상태에서 이에 포섭되는 코멘트들을 등장시키려는 의도가 드러난 방식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예컨대 “누리꾼들은 이동관 전 수석에 대해 부정적 평가를 내렸다. 트위터 이용자 @mettay***은…” 했다면 원문과 느낌이 상당히 달라진다. 더 나아가 “누리꾼들은 이동관 전 수석에 대해 활발한 의견을 쏟아냈다. 트위터 이용자 @mettay***은…” 했다면 그 느낌 차이는 더욱 크다.
간편하게 긁어오는 이런 작은 코멘트들은 결과적으로 여론을 왜곡하는 장치로 기능하게 된다. 사람들은 어떤 문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주류가 아니라고 생각하면 말문을 닫는다. 그 결과, 주류처럼 인식되는 의견은 더욱 확산된다.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이 주류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고 그래서 말문을 닫을지 말지를 결정하는 기준 중 하나가 언론에 등장하는 다른 사람의 생각들이다. 기사에 붙는 작은 인용 장치가 해당 이슈에 대한 여론을 왜곡하는 씨앗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네티즌이나 트위터리안이 아닌 사람들의 의견은 어디서 찾는단 말인가.
이러한 장치들은 결과적으로 언론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린다. 언론에 대한 신뢰의 본질이 무엇인가. 1) 사실을 2) 공정하게 전달한다는 데 대한 믿음이다. 정체도 불분명한 네티즌 반응을 객관성이 위협되는 방식으로 인용하는 관행은, 설령 그 동기에 삿됨이 끼어있지 않다 하더라도, 사실과 공정성 모두의 측면에서 신뢰를 깎아먹는 요소로 작용한다. 특정한 문제에 대한 네티즌의 의견을 보도하는 것을 취지로 하는 기사가 아닌 한, 기사에 감초처럼 들어 있는 이러한 불필요한 부분은 제거되어야 한다.
앞서 말했듯, 이러한 안이함과 추잡함이 속도전과 항상성이라는 매체 환경의 변화 때문에 나온 점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때문에 언론이 존재해야 할 본질적인 이유가 타협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다가는 ‘매체 환경의 변화 → 편법 → 신뢰 추락 → 환경 변화 → 편법 → 신뢰 추락’이 반복되는 쇠락의 나선 구조에 고착될 뿐이다. 미디어 환경이 변하면서 언론이 죽겠다고 하지만, 해야 할 몫을 저버리고 역할을 축소시키는 것은 언론 자신이 아닌가 돌아 보아야 한다.
※ 인용된 LA 타임스 기사는 이곳.
정말 요즘 기사들을 보면 기자가 하고 싶은 말을 다 네티즌, 트위터 인용하면서 하죠. 네티즌이 무슨 기자들 2중대도 아니고…
언론이 존재해야 할 본질적인 이유가 타협되어서는 안된다는 말씀이 인상적입니다.
이런 현실일수록 저널리스트들이 데이터분석을 위한 통찰력과 기술적인 능력을 키워서
(이럴 때 쓰는 말인지는 잘 모릅니다만) 데이터 저널리즘에 접근하려는 노력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기사 잘 봤습니다.
오타가 있네요. slippiness -> sloppiness
기사 내용에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건필하십시오.
바르게 고쳤습니다. 지적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것이 저도 ‘정체불명의 얼굴없는 네티즌’일 뿐이 아니었나?라는 생각에 그리고 우리나라 언론의 저러한 일들은 너무나 일상화 일반화?되어 있어서 솔직히 저도 저게 뭐가 문제이지? 하고 그다지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나?라는 생각에 이르러 제 얼굴이 다 화끈거리네요.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요즘 정체 불명의 캐릭터는 온라인뉴스팀에 의해 공식처럼 만들어지더군요. 하도 베껴서 그런지 이젠 바꾸지도 않더라구요. 염치를 모르는 언론이 되어갑니다.
일본 영화중에 ‘클라이머스 하이 (Climber’s High)’라는 영화가 있는데요 말씀하신 상황과 비슷한 상황을 극화한 영화여요. 지방신문사의 기자가 일본 민항기 추락사건을 추적하는 과정을 그린 영화인데 들풀님이 말씀하신 부분을 상당히 잘 묘사한 기억이 납니다. 이미 보셨으리라고 생각되지만 이 글 읽으시는 다른 분들한테도 추천할만해서 짧게나마 글을 남겨봅니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