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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사태를 지켜보며’라는 글을 썼다. 큰 반응이 있었고, 많은 비판이 있었다. 어떤 이는 너무 커다란 거대서사를 마구 휘두른 글이라고 비판했다. 어떤 이는 우리와 별로 부합하지 않는 소련 사례로 386 세대를 견강부회[footnote]견강부회(牽强附會): 가당치 않은 말을 끌어다 자기 주장을 합리화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footnote]한다고 비판했다. 누군가는 386 세대가 과연 사회에서 특혜만 누리고 모든 권력을 행사하는 절대악이라고 볼 수 있는가에 대해 반문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조금 다른 얘기를 해볼까 한다. 무리한 비교, 거대서사, 추상화를 피해서 이야기할 수 없을까 하는 욕심이 생겼다. 내가 가장 잘 아는 직접적인 개인의 체험을 위주로, 비슷한 문제의식을 살릴 수 있지 않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이 모든 논란의 중심에 선 ‘60년대생’ 각각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게 필요할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나와 가장 가까운 한 66년생 여성의 이야기를 통해, 조금 다른 시선에서 한국 사회를 돌아보고자 한다.

엄마 아들 모자 희망

나는 2013년, 2014년 대학 2년 생활을 끝내고 1년을 휴학했다. 고향에 내려가 책도 읽고 살도 뺀 뒤 공익 근무를 시작하고자 할 요량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서울에 있을 때는 자주 찾아뵙지 못했던 어머니와 같이 있을 시간이 많아졌다. 사실 고등학교 때도 같은 읍내긴 하지만 기숙사 생활을 했으니, 머리가 큰 뒤에는 거의 처음으로 오랫동안 어머니와 함께 시간을 보낸 셈이다.

어느 날은 조치원에서 어머니가 운전하는 마티즈를 타고 가고 있었다. 둘이서 외식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라디오에서 나온 어떤 음악에 목이 메시며 자신의 오빠, 즉 나의 외삼촌에 관해 이야기를 꺼내셨다. 저 노래, ‘한오백년’이 바로 외삼촌이 마지막으로 남긴 목소리였다는 이야기였다. 평생을 일만 하던 외삼촌은 실의에 빠져 술을 찾기 시작했고, 여느 날처럼 술을 마시다가 영영 깨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그게 어머니가 고등학교 3학년이 되던 해의 일이었다.

외삼촌이 있었다는 것은 알았지만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고, 사실 그 존재에 관해 제대로 인식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래서 그날 외삼촌에 관한 이야기를 어머니한테 들을 수 있었다. 어렵게 노동하며 살다 젊은 나이에 객사한 외삼촌의 이야기는 당시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나는 전혀 다른 시대에서 나고 자랐던 나의 어머니와 외삼촌, 이모, 외조부에 대한 강한 궁금증이 생겨났다. 그런 이유로 조치원에 있는 동안, 또 공익 근무를 하는 동안 어머니와 틈틈이 당신의 살아온 궤적에 대해 듣곤 했다.

지금부터 써나갈 이야기는 그런 이야기이다.

기억 사진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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젯방살이

나의 어머니는 1966년 충청북도 괴산군 청안면의 백봉리라는 시골에서 태어났다. 소백산맥 줄기가 흐르는 이곳은 엄청난 시골인데, 나 자신은 가보지 못했지만, 인근 보은군에 갔을 때 그 모습이 어떨지 대략 짐작해볼 수 있었다. 아마 박정희 정권의 조림사업이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했으니, 벌거벗은 민둥산들이 늘어서 있고 그 사이로 조그만 개천들이 흐르던 흔한 산골 마을이었을 테다.

어머니는 자신의 부모님이 원래부터 괴산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당시 나의 외할머니는 1926년생으로 재혼을 하신 분이었다. 외할머니는 첫째 남편에게서 낳은 자식들은 모두 바깥으로 보내고 둘째 남편인 우리 외할아버지 쪽으로는 61년에 외삼촌을, 63년에 이모를 낳았고 어머니가 태어날 무렵인 66년 아니면 초등학교를 가기 전쯤에 괴산 쪽으로 옮겨간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괴산으로 간 이유는, 아마 외할아버지가 빚이라든가 도박이라든가 하는 이유로 금전 문제가 뭔가 있어서 도주를 한 것이 아닌가 추측한다는데, 구체적인 것은 잘 모른다고 한다.

외할아버지의 직업은 무허가 침구사였다. 어떻게 의서 같은 것을 통해서 배웠는지, 그냥 감으로 놓던 것인지, 하여튼 침과 뜸이 그분의 업이었다. 그 과정에서 의료사고도 일으켜 감옥까지 갔다 왔다고 한다. 외할머니는 1960년대 첫째 남편을 보내고 도저히 여성 혼자서 살 수 없어서 외할아버지와 재혼한 것이었는데, 어디나 있던 시골 할머니의 모습이었다고 한다.

그러던 와중 1972년, 외할아버지는 중풍에 걸려 쓰러지게 된다. 하반신 마비가 왔고,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되었으며, 무엇보다 식사와 배변을 혼자서 할 수 없게 되었다. 외할머니는 그런 와중에 병 든 남편과 삼남매를 길러내야 했으니 청천벽력을 맞은 셈이 되었다. 어머니는 당시 ‘젯방살이’를 기억한다. 셋방살이의 사투리다. 별로 좋지도 않은 집의 단칸방에 중풍 환자, 아내, 아이 셋이 살았다는 이야기다.

할머니 손 기도

외할머니는 그렇게 실질적인 가장이 되었다. 자식을 키우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생계는 보따리 장사로 꾸려나갔는데, 엿장사, 장갑, 양말 장사, 나물 장사 등등 갖은 물건을 팔아 간신히 먹고 살 수 있었다고 한다. 이 때 나의 이모(어머니의 언니)가 외할머니와 같이 장사를 다니셨다. 당시 외할아버지가 중풍에 걸리자 집안의 모든 ‘바깥일’이 불가능해졌다고 했다. 외할머니는 문맹이셨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외삼촌은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진학도 하지 못했고, 이모는 국민학교 재학 중 전학 수속을 밟지 못해 국민학교도 중퇴하게 되었다. 이모가 외할머니의 장사를 도운 건 바로 그런 이유였다.

공부 잘하는 삼 남매 

어머니는 삼 남매가 모두 공부를 잘했다고 말했다. 확실히 그런 것 같다. 이모도 국민학교 학업 성적이 좋았고,  외삼촌도 다니던 학교에서 총명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삼 남매 모두 공부에 매진할 수 있는 환경은 절대 아니었다. 그 시절 다른 누구나 그러했듯이 말이다. 어머니가 국민학교에 들어간 뒤 생계를 위해 삼남매는 일찍부터 자그만 일손 돕기에 나서야 했다고 한다. 삼밭의 지붕, 이엉을 엮는 일을 많이 했다고 기억한다. 이모는 손재주가 좋고 속도가 빨라서 곧잘 해냈다는데 자신은 손재주가 느려서 그 일이 조금 힘들었다고 말한다. 장남이었던 외삼촌은 중학교에 가야 할 나이부터 다른 집에서 머슴을 살면서 돈을 벌어 집안 살림에 보탰다.

외삼촌과 이모는 기초적인 교육도 받을 수 없었지만, 어머니는 나름으로 운이 좋았다. 애초 백봉리에 이사올 때부터 미취학 아동이었고, 외할아버지가 몸져 누워 어디 이주할 형편도 안 되었다. 그 덕분에 어머니는 국민학교를 꾸준히 다녀 졸업장을 따낼 수 있었다. 물론 그것도 그 시절 많은 이들이 그랬듯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고 한다. 일단 입학부터 남들보다 1년 늦은 9살에 하셨다. 한편 당시 백봉리 시골의 형편은 모두가 거기서 거기였다고 하는데, ‘젯방살이’ 하던 어머니 집은 그 중에서도 제일 가난했다고 회상한다. 예컨대, 당시 70년대는 보자기와 고무신이 가방과 운동화로 변하던 전환기였다고 하는데 오직 자신만이 거의 유일하게 보자기와 고무신을 끝끝내 써야만 했던 학생이었다고 한다.

출처: 익산 활동초등학교 (재인용 출처: 김향이, 삶은스토리다)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6wJA&articleno=15799719&categoryId=320268&regdt=20180626142155
출처: 익산 활동초등학교 (재인용 출처: 김향이, 삶은스토리다)

국민학교 때부터 공부를 열심히 하지는 않았지만, 성적은 좋았다고 한다. 일제고사를 보면 100점을 심심찮게 맞았다고 하고, 그 상장도 집안 구석 어딘가에 있을 거라고 한다. 그렇게 백봉초등학교에서 매년 전교 1등을 손쉽게 따낸 어머니는 공부에 재미를 붙였다고 한다. 하지만 학업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외할머니는 집안 살림이 어려우니 어머니가 일찌감치 일이나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외할머니가 보기에 여자가 굳이 중학교까지 나올 필요도 없었다. 아마 그렇게 외삼촌과 같은 국민학교 졸업으로 끝나나 싶었을 것이다.

중학교에 진학하다 

하지만 그 무렵 국민학교 담임이 찾아와 외할머니를 설득했다. 전교 1등을 중학교에 안 보내냐니 대체 이게 무슨 말이냐는 것이었다. 대체 어떤 논리로 설득했는지 모르겠지만, 하여간 외할머니는 끝내 설득이 되어 어머니를 백봉리에서 꽤나 떨어진 청안면의 중학교로 보내는 것을 허락한다. 문제는 육성회비였는데, 어쩔 수 없이 이웃집에서 급하게 빌려 학교를 보냈다.

청안중학교에서 어머니는 매번 3등 아니면 4등을 했다고 한다. 1반은 남자반, 2자는 남녀합반, 3반은 여자반이었는데 3년 내내 1반의 1등과 2반의 2등을 넘을 수 없어서 매번 3반에 가셨던 것 같다. 본인의 말에 따르면 다른 학생들은 어떨 때는 과외도 받고, 꼭 그렇지 않아도 참고서와 전과 정도는 누구나 있었다고 한다. 물론 이제 막 셋방살이를 끝냈음에도 여전히 집안 형편이 안 좋았기에 자신은 그런 교보재를 구할 수는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한 학년이 올라갈 때쯤 선배들을 찾아다니며 다 쓴 참고서를 얻으러 다녔다고 한다.

이 무렵 어머니는 상위 10등 안에 들었기에 장학금을 받으며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이 시기 집안도 가난했고 ,다른 할 것도 없던 어머니는 학업에 본격적으로 재미를 붙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당시 꿈은 영어 교사였는데, 그 때 영어 과목이 꽤 재밌었기에 그런 장래희망을 갖게 된 것 같다고 한다.

어머니의 꿈은 영어선생님이 되는 것이었다.
중학교 시절 어머니의 꿈은 영어선생님이었다.

중학교 2학년인 1981년에 한국외대 철학과에서 농활을 왔던 것이 또 기억이 난다고 하셨다. 아직도 철학과의 이화경이라는 대학생 언니라는 이름이 또렷하다고 하신다. 열흘 정도 농활을 와서 대학 생활과 서울 생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에 대해 이것저것 긴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할 것이 정말 없던 당시 시골에서는 진짜 신기하고 희귀한 이벤트였던 셈이다. 그 때 시대 분위기에 맞게 철학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고자 했던 어머니는 철학과 오지 말라는 대답만을 들었다고 하는데 이화경 씨는 정말 현명하신 분임에 틀림 없다. 이후 몇 번 동안 펜팔 식으로 편지도 주고받았다고 한다. 어려웠던 중학교 시절에도 나름 인상 깊게 남은 기억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 해는 아버지, 즉 나의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해이기도 했다. 그 당시 백봉리에서 청안중학교까지는 상당히 큰 고개가 있어 버스를 타고 통학을 했어야 하는데, 그 통학이 너무 어려워 잠시 자취를 하셨다. 그런데 마침 그 때 학교 체육시간 무렵에 ‘너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다고 한다. 그때가 마침 장마철이어서 버스도 운행을 안 하고 있었는데, 차타고 40분은 가야하는 소백산맥 고갯길을 세 시간, 네 시간을 걸어서 갔다고 한다. 거의 다 와서는 오토바이를 얻어 탔다고는 하지만.

그렇게 아버지를 떠나보냈으나, 아마 9년 동안 중풍으로 앓던 것을 생각하면 어머니는 금세 회복하셨던 것 같다. 중학교 3학년까지 마치고, 어머니는 이후 진학에 대해 고민을 하게 된다. 성적은 최상위권이었고, 일단 연합고사도 보았으나, 고등학교 진학은 역시 고민되는 문제일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학비도 비싸고 당시 괴산에는 고등학교가 제대로 없어서 괴산의 중학생들은 모두 증평이나 청주로 멀리 유학을 나가야만 했다고 한다. 이 과정의 숙식비도 문제였다. 거기에 아마 외할머니는 중학교까지 보내줬는데 무슨 여자가 고등학교냐고 하지 않았을까. 이건 내 추측이다.

여고 야간반 

하지만 다른 길이 열리긴 했었다. 중학교 교사 한 분이 청주의 일신여고 야간반에 가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대신 숙식은 자신의 집에서 해결하되, 어린 아들의 국민학교 등하교만 봐주면 된다는 조건이었다. 고등학교에 가고 싶었던 어머니는 흔쾌히 수락하고 청주로 유학을 갔다. 마침 연합고사가 일신여고 야간반 기준으로는 상당히 높은 점수로 나와 장학금이 나왔고, 청안중학교 교사도 매우 반가워했다고 한다.

그러나 야간고 생활도 순탄하지는 않았다. 먼저 숙식을 제공해주겠다는 교사 부부의 요구사항이 점점 많아졌다고 한다. 나중에는 아침 일찍 일어나 아침 식사도 차려야 했고, 점차 그냥 식모살이와 다를 바가 없어졌다고 한다. 그 와중에 아직도 잊을 수 없는 것은 도너츠에 관한 기억이라고 한다. 그 부부와 중학생 딸, 그리고 어린 아들과 모두 함께 도너츠를 만들어서 구운 적이 있다고 했다. 당연히 모든 밑준비와 뒷정리는 어머니의 몫이었다.

그렇게 도너츠가 완성되어 있어야 하는 다음날, 어머니는 깜짝 놀라게 된다. 분명 집에서 직접 해먹는 도너츠를 너무 먹고 싶어 했는데, 그 도너츠 만드는 데 분명 자신이 제일 많은 일을 했는데 도너츠가 보이질 않았다는 것이다. 집을 뒤져보니 자기는 전혀 모르게 다락방에 고이 모셔져 있는 도너츠를 발견했고, 그간의 식모생활이 너무 서러워서 울면서 도너츠를 집어먹었다고 한다.

도넛 도너츠

 

하여간 야간고등학교 생활은 계속되었다. 아침식사 차리고, 오전에 꼬마애 학교 보내고, 하교하면 데려오고, 점심 먹이고. 3시 반에 나와서 버스를 타고 학교에 가면 10시까지 공부했다. 그러면 다시 일찍 일어나 다음날 아침식사를 차려야 했다. 그럼에도 고등학교 때 전교 1등 언저리의 성적을 받았다고 한다. 본인 말에 따르면 야간반이 아무래도 주간반보다 실력이 떨어져서 1등이 가능했던 거라고 하지만, 어쨌든 장학금은 계속 나와서 고등학교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교사집에서 나와 친구 아파트로  

그러던 와중 2학기 중간에 그 교사의 집을 나오기로 결심하셨다. 자세히 기억은 안 나지만 식모살이를 하는데도 돈을 안 줬기에 그게 큰 불만이었다고 한다. 숙식만 해결하기에는 외지인 청주 살이가 쉽지 않았다. 남의 집이어서 주말에도 눈치 보며 쉬는 것도 힘들었고, 친구 만나러 가는 자유로움도 없이 얹혀사는 것도 불편했다고 한다.

이런 문제로 고민하고 있던 와중에 할아버지는 교장이고, 아버지는 시청 직원이어 나름 유복한 집안의 친구가 자신의 집에 들어와서 살지 않겠냐고 제의했다고 한다. 집이 유복한 데도 야간반에 다니는 이유는 공부를 못해서였다고 한다. 이유는 잘 기억이 안 나지만, 이 친구분은 어머니를 엄청 좋아했었고, 난생 처음 어머니는 아파트 생활을 하게 된다. 그 친구분은 전교 최우등생인 어머니와 함께 다니며 성적에 날개가 돋았다고 한다.

하지만 숙식이 대충 해결된다고 생활비가 다 충당되는 것은 아니기에 어머니는 돈을 벌어야만 했다. 지금처럼 서비스업이 발전되어 있는 것이 아니기에 무조건 답은 공장이었다. 바로 그때 롯데햄 공장에 취직을 하셨으니 그 해가 1983년이다. 공장에서 라벨 도장 찍기, 포장하기를 비롯해 이것저것 많은 일을 했다고 한다.

https://youtu.be/zZWtgpwUdEE

수십 개의 햄 깡통 중에서 공기가 빠지거나 불순물이 들어간 불량 깡통을 딱 하나 잡아내는, 생활의 달인이 즐비한 생산직의 풍경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고 한다. 나중에 어머니가 기안84의 ‘복학왕’에서 주인공 우기명이 김치공장에서 일하는 만화를 우연히 봤는데, 두 가지에 놀랐다고 한다. 30년 동안 식품공장이란 데는 변한 게 없구나. 그리고 이 친구는 나이도 젊은데 공장 일을 이렇게 잘 묘사할 수 있나?

열아홉, 독립하다 

그 아파트에서도 오래 있을 수는 없으셨다. 이건 본인의 실수가 컸다고 회상하신다. 집에 얹혀살면서 일도 하는데도 월세를 안 냈으니, 그 집 아주머니 입장에서는 그게 퍽 불만이었나보다. 고학하는 학생에게 돈을 꿀 필요조차 없이 잘 살던 그 집 아주머니가 갑자기 돈을 빌려달라고 했다는데, 어른이 되어서 생각해보니 월세로 받아가려고 했던 것 아닌가 생각이 된다고 한다. 그러나 어머니는 자신이 눈치가 없어서 그 돈을 다시 갚아달라고 이야기했고, 그 요구에 깜짝 놀란 그 사건이 계기가 되어 결국 그 집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고등학교 2학년이던 1984년, 당시 나이 19세에 어머니는 최초로 완전 독립을 하게 된다. 여전히 공장에 다니면서 돈을 벌던 어머니가 마침내 청주 인근 골목길에 쪽방을 하나 얻게 된 것이다. 골목길 바로 옆에 붙어 있고, 담장도 없는 집이라 사실상 무방비 상태나 다름 없던 집이었다고 한다. 작은 마당 정도가 있었고, 그 마당을 가로지르면 냄새 나는 ‘푸세식’ 화장실이 있었다. 그 사이에는 물펌프와 고무 다라이가 있어 거기서 씻어야만 했다.

그 집 창에는 구멍이 있었는데, 누가 맨날 그 구멍을 통해 자신 집을 엿보아서 처음에는 크게 불안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친절하고 따뜻한 주인집 아저씨가 그 구멍을 막아줘 그 뒤로는 안심하고 살 수 있었다고 하셨다. 그 무렵 롯데햄 공장을 나와서 맥슨전자 공장에서 무선전화기를 만드는 조립라인에 들어갔다고 한다. 공부조차 제대로 마치는 게 힘들었던 어머니도 어쨌든 한국 경제의 발전상에 영향을 받고 있었다.

맥슨전자는 청주 소재의 무전기 제조 회사였고, 지금도 무전기를 만들고 있다. http://www.maxonkorea.com/sub.asp?maincode=481&sub_sequence=528&sub_sub_sequence=530&exec=list&strBoardID=kui_530
맥슨전자는 청주 소재의 무전기 제조 회사였고, 지금도 무전기를 만들고 있다.

외삼촌의 죽음, 사라진 대학의 꿈 

1985년이 되었다. 20살인 어머니는 고등학교 3학년으로 올라갔고, 공장일을 그만두셨다. 모아놓은 돈도 있고 하니, 1년 동안 집중적으로 공부해서 대학에 가고 싶었다고 한다. 하지만 어머니는 대학이라는 꿈을 순식간에 접을 수밖에 없었다. 바로 그 해 오빠, 나의 외삼촌이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사인은 관상동맥 심근경색이었다. 외삼촌은 중학교에 가지도 못하고 머슴살이를 했으며, 고등학교에 갈 나이에는 백봉초등학교 근처에 개발되었던 석회공장에 들어가 외할머니 대신 집안을 부양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사실 어머니의 언니, 그러니까 나의 이모도 그런 면에서는 비슷했다. 이모는 일찍부터 도시로 나가 인천의 미싱 공장에서 일을 하였다고 한다. 인천에서 일찍 결혼하여 나와 대략 10살 차이 나는 사촌 형과 누나를 낳으셨다. 그 때 이모가 돈을 조금 모아 어머니가 중학교 때 괴산에 땅을 조금 사주셨다고 했다. 어머니는 아직도 그 조그만 밭뙈기를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우리도 땅이라는 게 생겼구나. 우리도 남의 땅이 아니라 우리 땅에서 농사를 지을 수 있구나. 할머니와 정말 기뻐했고, 고추 농사를 지어 수확까지 하셨다. 찬밥에 된장찌개와 같이 찍어먹는 고추는 중학교 때 가장 맛있게 먹은 음식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농사의 꿈도 금세 무너졌다. 산골이었고, 조림 사업도 제대로 안 되어 있는 곳이라 1년만에 수해가 나서 밭을 못 쓰게 된 것이다. 그 밭은 결국 다시 팔았다.

총명하였으나 머슴살이, 농사, 석회공장 등을 전전한 외삼촌은 점점 자신의 삶에 대한 희망을 잃어갔다고 한다. 그래서 동네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문제의 1985년 어느 날에 마을회관이었는지 어느 집이었는지 모를 곳에서, 외삼촌은 친구들과 또 술을 마시고 잠에 들었으나, 영영 깨어나지 못했다. 친구들이 외삼촌이 죽어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서 가족들한테 알렸다고 하는데, 그러면서 테이프 하나를 주었다고 한다. 그날 술자리에서 외삼촌이 부른 노래가 담긴 테이프. 그 노래가 바로 한오백년이었다. 그렇게 외삼촌은 마지막 노래 하나만 남기고 돌아가셨는데, 어머니는 어떻게 그 와중에 그런 건 굳이 남아서 사람 슬프게 만드느냐고 말씀하셨다.

외삼촌은 쓰러졌고, 한오백년이 담긴 테이프를 남겼다. 그리고 어머니의 대학 진학 꿈은 사라졌다.
외삼촌은 쓰러졌고, 당신께서 부른 ‘한오백년’이 담긴 테이프를 남겼다. 그리고 어머니의 대학 진학 꿈은 그렇게 사라졌다.

오빠가 돌아가신 것은 어머니에게도 큰 충격이었다. 거기에 외삼촌이 부양하던 외할머니가 또 문제가 되었다. 한 때 단칸방에서 다섯 가족을 부양하던 보따리 장사 외할머니는 벌써 60세가 되셨다. 당시 외할머니는 괴산에서 손자 손녀, 그러니까 나의 사촌 형 누나를 돌보고 계셨다. 이모가 인천에서 공장에 다니시고 계셨기 때문이다.

공장과 방통대

결국,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어머니는 대학 진학을 포기한 뒤 언니를 따라 인천의 아남반도체 공장에 취직했다. 여기서 영어 시험을 굉장히 잘 쳤기 때문에 조장을 맡을 수 있었다고 한다. 조장으로 생산라인에 투입되기보다는 검수 쪽을 맡아서 했다는데, 공장 2교대 근무가 어머니는 너무 힘들어서 오래 못하고 그냥 그만두고 나왔다고 한다.

그리고 조카들과 홀로 있는 외할머니를 모시기 위해 청주로 내려와 영태전자라는 공장에 취직하게 되었다고 한다. 다시 단칸방에 조카들(나의 사촌 형, 누나), 외할머니, 어머니가 사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 시절은 결국 마지막으로 제대로 당신의 어머니와 살게 된 시절이 되어 가장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있다고 한다.

지금까지 봐서 알겠지만 어머니가 원체 활동적이고 무언가를 하려고 했던 성격인지라, 여기서도 가만히 공장에만 다니려고 하지는 않으셨다. 대학을 못 간 것에 아직 어머니는 조금 미련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이미 고등학교 3학년이던 때로부터 4년이나 지났다. 그래서 타협점으로 선택한 것은 바로 청주의 방송통신대학교였다. 낮에는 영태전자를 다니고, 근무가 끝난 뒤 방송통신대학교 수업을 들었다. 1990년의 일이었다. 어쨌든 어머니도 ‘캠퍼스 라이프’를 즐긴 셈이다.

내 어머니의 짧은 '캠퍼스 라이프' 방송통신대학교
내 어머니의 짧은 ‘캠퍼스 라이프’ 방송통신대학교

하지만 공장 다니면서 대학 공부를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방통대라지만 그 공부를 따라가는 건 역시 어려웠다고 한다. 그렇게 2학년 1학기까지 마치고 대학 생활에 대한 회의가 들 무렵, 인생의 중대한 전환점이 또 찾아오게 되었다. 인천에 있는 이모가 선 자리가 들어왔는데 나가볼 생각이 없느냐고 물어본 것이다. 외할머니가 맨날 시집가라고 들들 볶고 있던 상황이라, 어머니는 에라 모르겠다 하고 선을 보게 되었다. 그 상대가 바로 나의 아버지였다.

어머니의 결혼

어머니는 1991년에 결혼하여 둘은 제주도로 신혼여행도 다녀오고, 가좌동에 아파트를 얻어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셋방, 단칸방, 쪽방을 그렇게 많이 살다가 둘이서 아파트를 얻게 되었으니 그 기쁨을 나로서는 감히 짐작을 하지 못하겠다.

80, 90년대 세워진 아파트의 모습. 노태우 정부는 '80년대 후반 부동산값 급등을 억제하기 위해 '주택 200백만호 건설' 정책을 내놨다. 그리고 '90년 75만, 91년 61만, '92년 69만 가구가 공급됐다. (참조 기사: 중앙일보) https://news.joins.com/article/1640289
80, 90년대 세워진 아파트의 모습. 노태우 정부는 ’80년대 후반 부동산값 급등을 억제하기 위해 92년까지 ‘주택 200백만호’를 공급한다는 정책을 내놨다. 그리고 ’90년 75만, 91년 61만, ’92년 69만 가구가 공급됐다. (참조: 중앙일보)

그런데 또 문제가 생겼다. 당시는 노동자 대투쟁이 한창이던 시기였다. 우리 가족도 그 거대한 흐름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어머니는 무작정 일자리를 찾아 나섰다고 한다. 그렇게 인근 소형 형광등 공장에 나가 간신히 월급을 받았고, 저금통을 털어서 쌀을 사곤 했다고 한다. 그 무렵이 1992년으로, 나의 형이 막 갓난 아기였던 시절이다.

그렇지만 이 역경도 뒤에 찾아올 어려움에 비하면 정말 아무 것도 아닌 수준이었다. 어머니는 가까운 집안사람이 서류에 도장만 찍으면 된다고 해서 자신도 생각도 없이 찍었다고 하는데, 그게 바로 담보 제공 도장이었다. 그 덕택에 결국 가좌동 아파트로 경매 딱지가 날아오게 된다.

고모 '덕분에' 어머니와 아버지의 꿈이었던 아파트에는 '딱지'가 붙게 된다.
가까운 집안사람 ‘덕분에’ 어머니의 꿈이었던 아파트에는 ‘딱지’가 붙게 된다.

밥만 하는 지옥 

그리하여 어머니는 경매로 날린 집에서 간신히 남은 현금으로 티코 자가용을 장만하고 시가로 들어갔다. 어머니는 이 때가 정말 힘들었다고 말한다. 하루 종일 밥만 하는 삶이었다고 한다. 아침에 아침 식사를 해주고 나면 시부모님 아침 식사를 해줘야 했고, 느지막이 일어나는 백수 도련님(나의 삼촌)의 늦은 아침까지 해주고 나면 또 시부모 점심시간이었다.

평소에 나가서 일을 하고 공부하는 것을 좋아했던 어머니 입장에서 이건 거의 밥만 하는 지옥이나 다름 없었을 것이다. 바로 그렇기에 저녁에 아버지가 퇴근하여 돌아와 아이와 함께 드라이브를 나갈 수 있던 그 시간이 유일한 탈출구나 다름 없었다고 한다. 비록 티코였지만, 그마저도 당시에는 현대적 도시생활의 상징이었다.

아파트가 경매로 넘어가자 부모님은 할머니댁에 들어갔다. '밥하는 지옥' 속에서 티코는 어머니의 '유일한 탈출구'였다.
아파트가 경매로 넘어가자 부모님은 시댁으로 들어갔다. ‘밥만 하는 지옥’ 속에서 티코는 어머니의 ‘유일한 탈출구’였다.

그러던 즈음에 외할머니가 암 판정을 받으셨다. 1994년, 내가 어머니 배 속에 있던 때였다. 외할머니를 인천으로 모시고 오고 병원에서 검사를 받게 했다. 방광암에 신장암이 있었고, 수술이 가능하기는 하지만 너무 대수술이어서 성공 확신을 하기도 힘든 상황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때 어머니는 돈이 없어서 수술비를 댈 수 없다는 게 너무 서글펐다고 한다. 시댁에 묶여서 늘 밥을 차려야 했기에 자신이 요양을 할 수도 없던 상황이었다. 당시 상황이 그러했지만 아직도 수술을 못 시켜드린 것은 너무 가슴이 아프다고 한다. 그렇게 외할머니 암은 전신으로 전이되었다.

만삭의 어머니, 시련을 이기게 한 노래 

그때 힘든 일이 여러 번 더 겹쳤다. 더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어쨌든 계양구의 아파트에서는 외할머니를 요양하는 것은 가능했다. 하지만 그 또한 정말 힘든 일이었다고 한다. 온몸으로 전이된 방광암과 신장암 때문에 외할머니는 끝도 없이 하혈을 했고, 정신은 이미 오락가락 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 와중에 나를 태아로 품은 어머니는 만삭이었고, 형은 키우기가 너무 힘든 그런 종류의 아이였다. 그런 힘든 시기에 문득 TV를 틀었을 때 나온 노래가 있었는데, 그 때 그 노래가 정말 큰 위안이 되어주었다고 한다. 바로 이진관의 ‘인생은 미완성’이다. 참고로 나도 어머니가 뇌경색으로 쓰러지셔서 사경을 잠시 헤매실 적에 이 노래를 찾아 듣곤 했었다.

인생은 미완성 쓰다가 마는 편지
그래도 우리는 곱게 써가야해

사랑은 미완성 부르다 멎는 노래
그래도 우리는 아름답게 불러야해

사람아 사람아 우린 모두 타향인걸
외로운 가슴끼리 사슴처럼 기대고 살자

인생은 미완성 그리다 마는 그림
그래도 우리는 아름답게 그려야해

친구야 친구야 우린모두 나그네인 걸
리운 가슴끼리 모닥불을 지피고 살자

인생은 미완성 새기다 마는 조각
그래도 우리는 곱게 새겨야해
그래도 우리는 곱게 새겨야해

-이진관, ‘인생은 미완성’

이진관의 '인생은 미완성'은 시댁의 공적이 되고, 생모의 임종이 가까워온 만삭의 어머니께는 작은 위로였다. 그리고 어머니께서 외경색으로 쓰러졌을 때 내게도 그랬다.
이진관의 ‘인생은 미완성’은 시댁의 공적이 되고, 생모의 임종이 가까워온 만삭의 어머니께는 작은 위로였다. 그리고 어머니께서 외경색으로 쓰러졌을 때 내게도 그랬다.

한편 외할머니는 그 무렵 정신이 온전할 때 종종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배 속에 있는 둘째 아이 딱 한 달만 보고 죽으면 소원이 없겠다고. 언제나 그렇듯 이런 이야기에는 ‘정말 그렇게 되더라’가 따라붙는다. 나는 1994년 11월 11일에 태어났고, 외할머니께서는 그 해 12월에 돌아가셨다.

IMF의 어둠을 온몸으로 통과하다

이후 내가 3살 되던 무렵에 우리 집은 충청북도 음성군으로 이사왔다. 그리고 우리집은 공장 경영을 결정하고, 그 경영에 매달리게 되었다. 당시 피자라는 음식이 알려졌지만, 즉석 피자는 사치품이던 시절, 냉동 피자가 유행이었었고, 공장은 그 냉동 피자에 공급할 소스를 생산했다.

물론 시기를 생각해보라. 잠시 잘 되었을지 몰라도 이 글을 읽는 당신은 그 결말을 쉽게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IMF 위기가 찾아왔다. 어음이 막혔다. 결국, 우리 집은 IMF 위기와 함께 장렬히 파산했고, 공장은 버려졌다. 남은 건 약간의 현금과 음성군 생극면의 시골집 하나였다. 하지만 음성에서는 할 수 있는 게 없었고, 우리는 인근 충주시로 떠났다. 그때가 2000년. 어머니는 35세였다.

IMF 사태(1997)의 여파로 우리 부모님이 운영하는 공장은 장렬히 파산했다. (출처: 경향신문)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_id=201310312140465
IMF 사태(1997)의 여파로 우리집이 운영하는 공장은 장렬히 파산했다. (출처: 경향신문)

닥치는대로 일을 했다고 하셨다. 그렇게 돈이 좀 모여서, 우리집은 다시 음성에서 ‘투다리’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이 때는 장사가 제법 잘 되어서 급한 불을 끌 수 있었다. 이 때가 2001년, 나는 충주 칠금초등학교를 떠나 음성 무극초등학교로 전학을 갔다.

그 뒤 우리집은 ‘투다리’를 정리하고 또 다른 사업을 시작했다. 롯데칠성 음료수 대리점이었다. 대리점에 관해서도 할 말이 많긴 하지만 자세한 건 생략하고, 하여간 열심히들 일하셨다. 어머니는 트럭 운전을 배워서 직접 음료수를 배달 나가기도 하셨다. 나와 형도 겨울에 나와 빈 병을 골라내는 일을 하곤 했다. 형한테 미안한 얘기를 하자면 나는 일하다가 몰래 안으로 들어가서 실론티 먹고 있었는데 형은 일 못 한다고 좀 구박 받았다고 한다. (형 미안해.)

대리점으로 그럭저럭 또 돈을 벌 수는 있었으나, 사실 쉽지는 않았다. 노동 시간이 너무 길었지만, 그에 비례해 돈이 나오는 건 아니었다. 잠시 일을 쉬면서 주식 투자를 하기로 했다고 한다. 그때가 2002년 무렵이었다. 하지만 5년 전에 파산한 집에서 푼돈 모은 거로 주식 단타를 쳐서 4인 가족 생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한 일이었다. 현금이 도저히 돌지 않았다.

어머니는 무언가 새로 장사를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되었다. 어떤 업종으로 무엇을 어디에서 할까? 고민과 우연 등이 겹쳐 시작한 것이 바로 2003년에 개업한 조치원 역전의 ‘김밥천국’이었다. 갖고 있는 목돈이 너무 없어서 3천만 원 빚을 내서 시작했고, 보증금도 내기 힘들어 대신 월세를 올려달라고 사정사정해서 계약했다. 그 뒤부터 나의 어머니, 그리고 나 자신의 삶도 다시금 커다란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는데, 거기서부터는 또 다시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 것이다.

어머니는 2003년 조치원역 앞에서 김밥천국을 시작했다. (출처: 네이버지도 거리뷰)
어머니는 2003년 조치원역 앞에서 김밥천국을 시작했다. (출처: 네이버지도 거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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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하지만, 보편적인 이야기 

이것이 내가 가장 잘 아는 50대 여자의 삶에 관한 이야기다. 나는 어머니가 살아온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놀라고, 그 불굴의 의지에 감탄하지만, 사실 어머니의 삶이 또 대단히 특별하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어머니가 학업을 어떻게든 고등학교까지라도 받을 수 있던 것은 어머니의 의지도 중요했지만, 운도 따라줬었다.

당장 이모와 외삼촌만 해도 중등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아마 역설적으로 외할아버지가 풍에 걸리지 않았다면 어머니도 학업을 제대로 못 이어갔을지도 모른다. 또 어머니는 정말 몹시 가난한 삶을 살았지만, 어떤 면에서는 한국 경제발전의 수혜도 보았다. 예컨대 동시대 경제 개방이 이루어지지 않은 인도와 같은 대다수 개발도상국에서 여성이 도시에 나가 홀로 공장에서 일한다는 것은 상상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요컨대 어머니가 태어나던 시기인 1960년대의 가난, 그 이후 한국 경제의 발전, 그 밖에 전통적 가치관이 지배하던 때 여성으로서의 삶, 이 모든 것이 시대적 맥락을 품고 있다. 게다가, 당시 한국 사회는 계층분화가 상대적으로 거의 일어나지 않았던, 굉장히 획일적인 사례였다.

그때도 조금 산다고 하는 집과 정말 가난한 집의 격차는 물론 상당했지만, 대다수는 무언가 집안에 문제가 있었을 것이고 나가서 일을 꼭 해야만 하는 상황에 부딪혔던 것이다. 그렇기에, 사실 이런 ‘가난 속에서 공부’ 스토리는 정말 흔한 것이기도 하다. ‘개천에서 용난다’는 말이 그토록 강력한 비유로 자리 잡은 이유도 흔했기 때문이었으리라. 가난 자체야 훨씬 더 보편적이던 그저 상수에 불과한 이야기였다. 따라서 나는 나의 어머니의 경험이 모종의 시대적 보편성과 어머니 자신의 특수한 의지를 동시에 보여준다고 믿는다. 우리 모두의 개인적 서사가 그러하듯 말이다.

대학생은 광장으로, 어머니는 공장으로 

그렇지만 문제는 뒤로 갈수록 복잡해진다. 아무리 모두가 똑같이 가난했다 하더라도, 작은 차이가 점점 더 커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1980년대, 대학생들은 민주화 투쟁에 나섰지만, 어머니는 공장에서 햄과 무선전화기 등을 만들었다. 몇몇 학생들은 데모를 무용담처럼 자랑하고, 다른 이들은 그때 겪었던 공포의 감정을 얘기하고, 또 다른 이들은 운동권을 경멸하지만, 결국 그 모든 것은 ‘대학에 가서 8이라는 학번을 부여받은’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나는 이들이 대학 안에서 운동의 향방과 미래를 두고 그 어떤 설전을 벌이고 어떤 숭고한 영웅담과 추악한 행패를 만들어냈든 솔직히 별로 관심이 없다. 왜냐면 대학생 그룹 내부의 차이는 대학생과 비대학생 간의 격차에 비하면 한 줌도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전자는 수평적이지만, 후자는 수직적이다.

1987년 6월 26일 서울역 주변에서 경찰과 대치 중인 학생과 시민들. (출처: 보도사진연감)
1987년 6월 26일 서울역 주변에서 경찰과 대치 중인 학생과 시민들. (출처: 보도사진연감)
1990년 7월에 발행된 어린이 백과사전에 실린 사진 (재인용 출처: ktsmemo) http://ktsmemo.cafe24.com/s/80photo/266&pg=3
1990년 7월에 발행된 어린이 백과사전에 실린 사진 (재인용 출처: ktsmemo)

386에 대한 얘기를 하면 누군가는 이렇게 말한다. 당시 대학이 운동권판이었던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운동권은 그때도 소수였다고. 하지만 나는 운동권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운동권이 포진한 여의도 정가의 엘리트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도 아니다. 운동권이든 운동권이 아니든, 1980년대 대학가의 그 어떤 정서를 공유하는 광범위한 인구집단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한줌 정치권보다는 그 정치권을 받쳐주는 거대한 집단이 훨씬 더 중요하다. 바로 그 인구집단이 한국 자본주의가 세계화의 물결에 올라타 극적으로 비상하던 90년대와 00년대에 활약한 집단이고, 대기업, 노동조합, 시민단체, 군, 법조계 등등 모든 조직의 핵심 중추가 되면서 한국 사회 최초의 ‘대규모 중산층’을 형성한 집단 아닌가? 즉, 주택 투자를 통해 자산을 불리고 자신의 사회적, 문화적 자본을 자녀에게 물려주려고 애 쓰는, 서구 사회에서 일찌감치 등장한 그 상위 20% 중산층이 바로 그들 아니냐는 것이다. 그들이 무슨 정당을 지지하느냐에 전혀 관계없이!

다시 말하지만 이들, 80년대에 대학을 다녔다는 그 25%가 날 때부터 사회에서 ‘꿀만 빨았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몇몇은 정말 혹독한 투쟁의 삶을 살았다. 어떤 이들은 군대에 가서 지금은 상상도 못하는 구타와 가혹행위를 견뎌야 했다. 또 다른 이들은 자유의 공간이라는 대학에서도 여성으로서 억압 받고 착취당했다. 1인당 GDP가 3천 달러 정도 되던 군부 독재 국가에서의 삶을 1인당 GDP가 1만 달러가 될 때 태어난 내가 어떻게 함부로 짐작하겠는가.

학번 있는 사람 없는 사람
2011년 기준 ‘학번’ 있는 사람, ‘학번’ 없는 사람 (시각화 작업: 강임성)

그때도 지금도… 지워진 목소리

그렇지만 세대 간이 아니라, 그동안 목소리가 지워졌던 세대 내의 다른 계층 이야기에도 주목해야하지 않을까. 똑같이 어려웠으나 우연이 되었든 실력이 되었든 뭐가 되었든 고등교육을 받지 못한, 때로는 중등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75%의 인구에 대해서 말이다. 우리 어머니는 삼남매였고, 하나는 초등교육도 못 끝냈고, 다른 하나는 초등교육이 끝이며, 오직 어머니만 중등교육을 아주 간신히 마칠 수 있었다.

교육만 제대로 받으면 자신의 미래가치를 극적으로 끌어올릴 수 있던 바로 그 시기에 삼촌은 실의에 빠져 객사했고, 이모는 미싱 공장에 다녔으며, 어머니는 햄 공장에 다녔다. 이게 한국 사회에서 훨씬 보편적인 이야기인데 어째서 우리는 80년대를 이야기할 때 화염병과 사회구성체론, 문선, 프락치 같은 이야기만 하는 것인지 나는 아직도 이해가 안 간다. 어머니에게 80년대 데모의 기억은 청주 거리를 매운 최루가스를 맡고 눈물 콧물 흘리며 빨리 빠져 나가야겠다고 마음 먹은 게 전부다.

그리고 대학을 졸업한 이후에 한국 경제의 비상과 맞물려 대기업 정규직, 공공부문 등으로 진출하여 비교적 안정적인 소득을 구가할 수 있던 사람들이 ‘386이라고 쉬웠던 줄 알아?’라고 반문하는 것도 정말 이해하기 힘들다. 내가 그 시대를 살지 않아 무어라 말을 할 수는 없겠으나, 아무리 그래도 대학까지 나와서 내 어머니, 이모보다 힘든 삶을 살았을까?

내가 언젠가 이야기했던 우리 김밥천국 아주머니들의 삶도 별반 다를 것이 없다. 하나같이 식모살이, 국민학교 졸업, 중학교 중퇴 등으로 얼룩져 있는 이야기들이다. 물론 386 본인들은 이런 경험과 이야기들이 나보다 훨씬 익숙할 것이다. 그렇지만 어쨌든 80년대부터 무언가 갈라지기 시작했고 그게 30년의 세월을 거치며 엄청난 규모로 스노우볼링 된 것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자, 그렇다면 동 세대의 보편적인 경험에 비해서는 확연히까지는 아니더라도, 유의미하게 나은 조건을 잡았다고 할 때, 아래 세대에게 ‘우리 정말 힘들었어’ 주장하는 것은 조금 민망하지 않을까.

어머니께서 고용한 '아줌마'들은 사실은 대개 20, 30대 '언니'들이었다. 여전히 이들의 목소리는 지워진 채로
어머니께서 고용한 김밥천국의 ‘아줌마’들은 30대 중후반에 일을 시작해 이제 어느새 대부분 50대시다. 여전히 이들의 목소리는 지워진 채로 묻혀 있는 건 아닐까.

다시 한 번 또 강조하지만, 나는 그 한 줌이라는 운동권이 386의 전부라고 절대 생각 안 한다. 한국이 향후 고소득 국가로 나아가기 직전에 운, 실력이 모두 따라줘 고등교육을 받아 가장 적절한 시기에 가장 괜찮은 기회를 잡았던 그들 모두를 386이라고 칭해야 한다고 본다. 요즘 내 또래 중에 ’86’을 운동권이라고만 생각하는 사람들 거의 없다. 물론 ‘운동권’이라는 이미지가 너무 강력하고 애초에 그들을 상징하기 위해 만들어진 용어다보니 다소 혼란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제 그 의미를 운동권에만 담기는 어려워졌다는 것은 다들 어느 정도 직감하리라 믿는다.

세대와 계층에 대한 나의 이런 시선은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정립되어 갔다. 나에게 어머니의 이야기는 흔히 생각하는 ‘386’과는 전혀 다른 궤적을 그려오며 가정을 만들어간 사람의 이야기였고, 고개를 돌려보니 우리 고향 사람들 누구에게나 적용 가능한 보편적인 이야기였다. 하지만 50대가 특권층이 되었고, 청년 세대가 힘들다는 그 ‘잘난’ 청년 담론에서도 이런 사람들은 조명조차 되지 않고 있었다.

그들은 그 존재조차 인식되고 있지 않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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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 1차: 2019년 10월 14일 오전 10:22 (필자 요청에 의한 일부 수정,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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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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