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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x type=”note”]몇 번을 망설였다. 썼던 글을 지웠다가 다시 쓴다. 홍콩 시민의 싸움을 ‘영국 제국주의 시절에 만들어진 문제의 원인을 엉뚱한 중국에 돌리는 어리석음’으로 해석하는 몇몇 글을 접했기 때문이다. 납득하기 어렵다. 글을 쓰는 내 마음도 조심스럽다. 그저 여러 견해 중 하나로 참고해주시면 좋겠다. (필자)[/box]

2019년 홍콩 범죄인 인도법 반대 시위. 범죄자를 홍콩에서 중국 대륙 등으로 송환할 수 있게 한 범죄인 인도법 개정안에 반대해 일어난 시위. 시민불복종 운동인 2014년의 '우산 혁명'의 규모를 뛰어 넘는 홍콩 역사상 최대 시위. 사진은 2019. 4. 28. 모습 (출처: etan liam, CC BY ND) https://flic.kr/p/2ekbLwP
2019년 홍콩 범죄인 인도법 반대 시위. 사진은 2019. 4. 28. 모습 (출처: etan liam, CC BY ND)

 

[toggle style=”closed” title=”2019년 홍콩 범죄인 인도법 반대 시위 (개요)“]

범죄자를 홍콩에서 중국 대륙 등으로 송환할 수 있게 한 범죄인 송환법 개정안에 반대해 일어난 시위. 시민불복종 운동인 2014년의 ‘우산 혁명’의 규모를 뛰어 넘는 홍콩 역사상 최대 시위다. 2019년 3월 31일 첫 시위가 시작돼 현재(2019. 6. 19. 기준)까지 계속 중이다.

3월 31일 첫 시위

  • 시민 인권 전위(CHRF, Civil Human Rights Front)에 의해 첫 시위. 루어드 로에서 시작하여 시민 광장까지 행진.

6월 9일 ‘시위대 100만 돌파’

터져나온 분노 (2019년 6월 9일 홍콩)
터져나온 시민들의 분노 (2019년 6월 9일, 홍콩)

6월 12일 ‘과잉진압’

  • 100만 명이 넘는 시민 참여한 평화 행진에서 친중파 행정장관 캐리 람의 명령으로 출동한 홍콩 경찰이 시위를 과잉진압. 이 과정에서 최소 72명이 다치고, 이 중 2명이 중상(그중에서도 16세 학생이 고무탄에 머리를 맞아 위중한 상태).
한 트위터러를 통해 전해진 당시 현장의 모습
한 트위터러를 통해 전해진 당시 현장의 모습

6월 14일 ‘어머니들의 연좌 시위’

  • 행정장관 캐리 람은 TVB와의 인터뷰에서 아래와 같이 말함.

“12일 시위처럼 젊은 시위대가 폭력적으로 시위한다면, 어머니처럼 자녀들의 잘못을 두고 보지만은 않을 것.”  (캐리 람)

캐리 람의 망언 훨씬 전에 '어머니' 드립을 시전한 바 있는 최연혜 전 코레일 사장, 현 자유한국당 의원(20대 총선 비례대표 5번)
캐리 람의 어머니 ‘드립’ 훨씬 전에 코레일 노조 파업에서 어머니 ‘드립’을 시전한 바 있는 최연혜 전 코레일 사장, 현 자유한국당 의원(20대 총선 비례대표 5번)
  • 이에 14일 저녁 3시간동안 주최자 추산 6천 명의 홍콩 여성이 차터 가든에서 검은 옷에 카네이션꽃을 들고 연좌시위를 벌이며 캐리 람의 사퇴와 법안 철회를 요구.

6월 15일 ‘정부, 법안 무기한 연기’ 선언

  • 오후 3시경 홍콩 행정수반 캐리 람 행정장관은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법안 추진의 ‘무기한 연장’을 선언.

“경험에 비춰볼 때 올해 안에 법안 추진을 재도입할 가능성은 없다.”(캐리 람)

화면 속에서 법안의 무기한 연장을 발표하는 캐리 람 장관에게 '벅유'를 날리는 시민들.
화면 속에서 법안의 무기한 연장을 발표하는 캐리 람 장관에게 ‘벅유’를 날리는 시민들.

6월 16일 ‘검은 대행진(상복 시위) 200만 참여’

  • 블룸버그 추정치에 따르면 가장 많이 참여했을 때 총 200만 명 이상이 시위에 참여(참고로 홍콩 인구는 740만 명).
6월 16일 현지 시각 19:40분쯤시 시위대 중 한 명이 호흡 곤란으로 탈진했다는 응급 신고가 접수돼 앰뷸런스가 해당 시민을 병원으로 후송하는 장면. 2019년 6월 16일 홍콩에서 일어난 '모세의 기적'
6월 16일 현지 시각 19:40분쯤시 시위대 중 한 명이 호흡 곤란으로 탈진했다는 응급 신고가 접수돼 앰뷸런스가 해당 시민을 병원으로 후송하는 장면. 2019년 6월 16일 홍콩에서 일어난 ‘모세의 기적’
  • 캐리 람, 오후 8시 30분 추가 기자회견을 자청하며 공개사과.
  • 2019년 6월 16일 홍콩 시위의 요구 사항
  1. 홍콩 범죄인 인도법안의 완전한 철회
  2. 홍콩 범죄인 인도법안 관련 체포자 전원 석방
  3. 시위 강경 진압에 대한, 캐리 람 행정장관과 스티븐 로우 홍콩 경찰청장의 공식 대국민 사죄
  4. 캐리 람 홍콩 행정장관의 즉각적인 사퇴
  5. 중국 공산당 정부의 홍콩 정부 간섭 금지(일국양제, 항인치항, 고도자치 보장)
  • 2014년 우산 혁명의 (비공식) 주제가, “발언하지 않는 자 누구인가”(誰還未發聲; 레미제라블의 ‘Do You Hear the People Sing’) 홍콩에 다시 울려퍼지다.

https://youtu.be/RNbXLbHrMds

 

이상 위키백과 ‘2019년 홍콩 범죄인 인도법 반대 시위’ 등 참조해 발췌 요약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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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시위가 비등점을 향해 끓어오르고 있다. 이 글에서 굳이 자세히 밝히진 않겠지만, 이미 ‘중국’이라는 시스템 안으로 편입된 홍콩 입장에서 지금의 시위가 의미 있는 결과로 이어지긴 쉽지 않을 테고, 그저 최악의 사태로 치닫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두려운 건 현재의 여러 여건을 고려했을 때 ‘최악’이라는 극단적 표현에도 불구하고, 그 가능성은 극단이 아닌 평균에 수렴한다는 점이다. 머릿속에 계속 전남도청, 그리고 자금성 앞 삼거리의 이미지가 떠오르는 것을 애써 휘휘 저어 지우고 있다.

어쩔수 없는 외부인으로서, 지금 내가 그리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은 도대체 이런 일들이 왜 벌어졌는가, 홍콩 시민이 주장하는 바는 무엇이고, 중국은 왜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가를 이해하려고 애쓰는 일 정도가 아닐까 한다. 홍콩의 문제는 정말이지 ‘양파 껍질’이라는 표현이 더할 나위없이 딱 들어맞는 복잡다단한 층위를 지니고 있다. 양파 껍질을 모두 벗기고 나면 그 안에 핵심은 없다는 점도 동일하다. 문제의 핵심은 그렇게 존재하고자 애쓰지만, 존재하지 않는 ‘홍콩 시민’이라는 정체성이다. 이 싸움은 ‘정체성’의 문제인 것이다.

홍콩의 탄생 

‘주지하는’ 것처럼 홍콩은 아편전쟁을 계기로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하지만 ‘주지되지 않는’ 부분은 아편전쟁의 핵심 무대는 홍콩이 아니라 그보다 더 내륙에 있는 광저우였다는 점이다. 홍콩은 어부 몇 사람을 빼고는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버려진 땅이었다.

하지만 바다에서 주장강을 따라 올라가 광저우를 공격하기 위한 상륙 거점으로 영국 측이 요새화하면서 홍콩이 ‘탄생’했다. 한 나라의 영토라는 측면에서는 중국 땅을 제국주의 영국이 ‘점령’한 것이겠지만, 도시로서의 홍콩을 보면 (중국이 아닌) 영국이 홍콩을 탄생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탄생의 시점에서 벌써 홍콩은 중국의 도시인가 영국의 도시인가 하는 혼란이 시작되는 것이다.

2차 아편전쟁 - 광저우
2차 아편전쟁 – 광저우. 아편전쟁의 핵심 무대는 광저우였고, 홍콩은 광저우를 공격하기 위한 교두보였다.

일단 도시가 만들어졌으니 사람들은 몰려오게 마련이다. 당연히 가장 가까운 광둥성, 광시성 그 옆의 윈난성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런데 애초에 이 지역 자체가 중국 입장에서는 가장 변방이다. 민족적으로는 베트남과 같은 월족인데다 언어도 완전히 다른 광둥어를 쓰는 사람들, 게다가 식민지 홍콩은 중국 주류 한족의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다보니 지역민의 영향력이 더 컸다.

여기에 ‘중국의 유태인’으로 불리우는 객가 사람들도 돈 냄새에 예민하게 반응하며 몰려들었다. 그리고 차오저우(광둥성의 최동단, 산터우의 북쪽 지역)와 멀리는 항저우(저장성의 성도) 사람들까지 홍콩에 들어오게 되는데 결과적으로 이들은 청 왕조의 신민이라는 의식 같은 건 거의 없었고, 그렇다고 신해혁명의 결과 광저우에서 수립된 중화민국 정부에 소속감을 느낄 이유도 없었다.

홍콩이라는 도시가 탄생하자 가깝게는 광시와 광동성 사람들이 그리고 멀리는 저장성의 황저우 사람들까지 홍콩으로 유입됐다.
홍콩이라는 도시가 탄생하자 가깝게는 광시와 광동성 사람들이 그리고 멀리는 저장성의 황저우 사람들까지 홍콩으로 유입됐다.

그러다보니 출신지를 중심으로 하는 ‘동향단’들이 가장 중요한 조직이 되었다. 반청복명(反淸復明; 청을 몰아내고 명을 부활시킨다)의 오랜 역사 운운하지만, 결국 범죄조직인 ‘삼합회'(三合會)가 희한하게도 군소 동네 깡패조직들의 연합체 형태로 홍콩에서 등장한 것도 이런 이유가 있다.

영국의 홍콩 지배가 공식적으로 시작된 것은 1841년인데 1860년과 1898년의 추가 할양 조치들을 통해 현재의 홍콩 권역이 확정되었다(99년 동안 빌리기로 했다면서 1841년에 할양되었는데 왜 홍콩 반환이 1997년인지 의아해하는 분들이 있는데 1841년과 60년 할양은 아예 기간 제한이 없었고, 1898년 신계 지역 할양 건만 99년 조차였다. 사실 이 시점에서 영국은 99년이란 ‘사실상 영원히’라고 생각했던 것이지만…).

민족의식? 그게 뭐하는 건가요? 

이 시기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들이 종종 등장한다. 홍콩 할양을 전후로 한 시기를 배경으로 한 [황비홍] (서극, 1991)은 그 당시 실제로는 그러지 못했던 ‘외국인 두들겨패기’를 거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판타지였다. 하지만 그보다는 당시 민중에게 황비홍 시리즈 후반으로 갈수록 짙어졌던 민족의식, 중화주의가 그리 강하지 못했다는 점이 더 큰 ‘픽션’의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청조 말, 혼란한 시기에 탄생한 영웅 황비홍!" [황비홍] (서극, 1991)
“청조 말, 혼란한 시기에 탄생한 영웅 황비홍!” [황비홍] (서극, 1991)
영국이 홍콩을 지배하던 1800년대 후반을 배경으로 한 [프로젝트A] (성룡, 1984)의 설정이 오히려 현실에 더 가까웠을 것이다. 성룡, 원표 등 중국인이 하급 경찰·군인이고, 영국인 상관에게 ‘옛 써!’를 붙이며 거수 경례하는 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심지어 이 영화에서 악역 해적들은 중국인이다.

프로젝트 A (성룡, 1983)
프로젝트 A (성룡, 1983)

서양 제국주의자들의 개가 되어 동포를 물어다 바치는 민족의 배신자들로 묘사되었어야 마땅할 홍콩 경찰과 군대가 정의의 수호자이자 주인공으로 묘사되는 것은 ‘민족의식의 부재’를 상상한다면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는 일이다. 이 영화가 1984년, 홍콩의 중국 반환 선언이 나온 해에 가장 많은 홍콩인이 본 영화라는 것도 의미심장하다.[footnote]홍콩에서는 1983년 12월 22일 개봉했고, 한국에서는 1984년 개봉했다. 한국(39만 명 동원)에서도 아주 흥행했다. 홍콩에서는 84년 흥행 1위. 성룡이 부른 주제곡은 ‘동방의 위풍’은 민족주의와 중화주의의 요소가 아주 강하긴 하다. (편집자)[/footnote] 중국으로의 반환이 현실로 다가오자 새삼스레 영국인들과의 동거가 그리 나쁘지 않다고 되새기는 모양새랄까.

영국, 약탈자이자 해방자이며 보호자 

홍콩은 서양에는 ‘동양의 신비’를 맛볼 수 있는 안전한 여행처가 되어 관광지로 부상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돈이 돌자 일자리를 찾아 홍콩으로 향하는 중국인들도 조금씩 늘었다. 홍콩섬은 물론이고, 빈터나 다름없던 구룡반도, 신계 지역에 주거지역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이렇게 모여든 노동자들은 1920년대 노동쟁의와 총파업 등으로 식민정부와 대립하기도 했다. 하지만 영화 [엽문] 시리즈에서 묘사되는 것처럼 2차 대전 동안 일본이 홍콩을 점령하면서 홍콩인들은 심각한 고통을 당했다. 그래서 전쟁이 끝난 후 다시 진주한 영국 정부에 대한 인상은 전과 상당히 달라져있었다. 약탈자인 동시에 해방자가 된 것이다.

더구나 본토에서 국공내전이 길어지면서 전쟁, 그리고 그 승자가 된 공산당을 피해 홍콩으로 향한 피난민 입장에서 영국은 공산주의 중국에 대항해 자신을 지켜줄 수 있는 보호자였다. 이 때 이민자 중에는 홍콩 초기 이민과 달리 자산과 교육수준이 상당한 사람이 많이 포함돼 있었다는 특징도 있다.

영국 국기

공산당이 정권을 장악한 후 홍콩도 무력으로 해방시켜야한다는 주장이 중국 내에서도 제기되었으나 막 탄생하여 권력기반이 취약했던데다 곧이어 벌어진 한국전쟁에 전력을 집중해야했던 공산당은 홍콩 진입이 연합군과의 전면전으로 확대될 것을 우려하여 홍콩 경계 지역인 선전 지역까지만 장악하고 홍콩 문제는 뒤로 미루어놓기로 한다.

홍콩으로, 홍콩으로 

남북 간의 휴전선이 그러하듯이 불안한 힘의 균형 상태에서 중국과 체제 경쟁을 하게 된 홍콩 식민정부는 일단 홍콩 권역에 도착한 사람들은 강제로 추방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웠기 때문에 목숨을 걸고 경계를 넘어다니는 사람들이 생겼다. 본토에서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이나 도저히 먹고 살 길이 막막한 사람들이 최후의 수단으로 홍콩으로 탈출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은 돈도 ‘빽’도 능력도 부족한 사람들은 홍콩항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제대로 된 일거리보다는 주로는 범죄로 빠지게 되는 경우가 많아 ‘성항기병’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런데 이들을 본토 촌놈, 성항기병이라고 부르는 ‘홍콩 시민’이란 결국은 같은 중국인이면서 만다린어 대신 광둥어를 쓰고 더 나아가 샘이니 토니니 영어 이름까지 붙이고 영어로 의사소통을 하며 식민지배층에 편입되려고 애쓰는 ‘가짜 중국인’ 아닌가. 안그래도 복잡한 홍콩의 인구구조에 계층적 분열이 심화되면서 정체성의 문제가 본격적으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성항기병 (맥당웅, 1984)
성항기병 (맥당웅, 1984)

결정적인 계기는 본토에서 마오쩌뚱이 밀어붙였던 대약진운동, 그리고 문화혁명의 처참한 실패였다. 전국에서 수백만 단위로 사람이 죽어나가는데다 모든 사회질서를 변혁해야한다며 말도 안되는 구실로 사람들을 괴롭히고, 숙청하는 생난리통을 견디다 못한 사람들이 대거 홍콩으로 몰리기 시작했다. 이들은 홍콩에서 최하층 노동자군을 형성하면서 엄청난 인건비 경쟁력으로 홍콩 제조업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밀어올렸다.

지금은 ‘메이드 인 홍콩’ 제품을 주변에서 거의 찾아보기 힘든 상황이지만, 1980년대 중후반까지도 홍콩 산업의 핵심은 제조업이었다. 이 많은 사람을 수용하려다보니 부동산 규제는 거의 형해화되어 심지어 건물을 지을 때 2층부터는 인도 위쪽으로 내밀어서 공간을 점유해도 됐고 그러다보니 간판이 안보인다는 이유로 이번엔 간판들이 차도 위로 고개를 내미는 엉망진창의 스카이라인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홍콩의 간판

나는 누가 아닌가? 

정체성은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으로 만들어지기도 하지만 ’나는 누가 아닌가?‘라는 부정적 질문의 거울상으로 답을 찾게 되기도 한다. 중국인인가, 영국인인가, 광동인인가, 본토인인가, 그 모두이고 그 모두가 아니라면 그래서 결국 ‘홍콩인이란 누구인가’라는 혼란스러운 질문에 답이 보이기 시작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이 반대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인식하는 계기를 통해서였다.

1966년 홍콩섬과 구룡반도를 오가는 페리선, 그러니까 우리나라 지하철2호선처럼 많은 사람들이 출퇴근 과정에서 이용하게 마련인 교통수단의 이용료가 갑자기 인상되자 이에 불만을 표시하는 이들이 생겨났다. 따지고보면 사소한 문제였지만, 워낙 많은 사람의 ‘일상생활’이 걸려있다보니 이들의 불만은 금새 시위의 형태를 띠게 되었다. 암묵적 공생관계 정도로 모호한 관계에 있던 영국식민정부에 대해 ‘홍콩인’이라는 집단을 단위로 항의가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영국-홍콩을 분리해서 사고하게 만드는 최초의 사건이었다.

1966년 홍콩섬과 구룡반도를 운행하는 페리섬의 요금이 인상하자 홍콩은 처음으로 영국과 대립했다.
1966년 홍콩섬과 구룡반도를 운행하는 페리섬의 요금이 인상하자 홍콩은 처음으로 영국과 대립했다.

이듬해의 사건은 더 극적이었다. 문화대혁명 중이던 본토의 모택동주의를 신봉하는 홍콩 내의 좌파들이 주도한 ’67 반영 폭동’은 처음엔 영국 정부에 무능, 부정부패와 심각한 빈부격차 등에 불만을 갖던 홍콩인들의 지지를 받았으나 점차 과격, 폭력 양상을 띠는 투쟁방식과 홍콩경계지역에 ‘홍콩해방군까지 창설한 중국의 위험한 움직임에 염증을 느꼈다.

67년 반영폭동
67년 반영폭동

특히 좌파에게 비판적 논조를 보인 아나운서의 차에 화염병을 투척하여 아나운서와 아내까지 불에 타 숨지는 끔찍한 사건이 벌어지자 민심은 좌파들에게 완전히 등을 돌리는 한편 중국 공산당 정부에도 강한 두려움을 갖게 된다. 영국 시민도, 중국인도 아닌 ‘홍콩인’과 ‘홍콩 자신의 운명’에 대한 인식이 싹트게 된 것이다.

이 사건들을 계기로 영국 정부도 ‘체제 경쟁’에서 중국에 우위를 점하지 않으면 ‘홍콩인’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는 점을 인식하게 되어 뇌물과 부정부패로 찌들어있던 홍콩의 관료사회를 혁신한 외부조직으로 ‘염정공서’를 조직하여 대대적인 수사와 검거를 통해 짧은 시간에 개선을 이루어낸다. 우리나라에서 최근 논의되는 ‘공수처’의 모델이 되는 기관이기도 하다.

노스 포인트에 있는 염정공서(ICAC) 본부 빌딩(좌,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염정공서는 1,200여 명의 직원이 근무하고, 부패 혐의자를 영장 없이 체포하고, 48시간 동안 구금할 수 있는 수사권한을 가진다.
노스 포인트에 있는 염정공서(ICAC) 본부 빌딩(좌,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염정공서에 근무하는 직원 수는 1,200여 명이고, 부패 혐의자를 영장 없이 체포하고, 48시간 동안 구금할 수 있는 수사 권한을 가진다. 국제투명성기구가 발표한 부패지수(CPI)에서 홍콩은 전 세계 12위로 아시아권에서는 싱가포르에 이어 2위다. 참고로 우리나라는 당시 39위.

협상, 덩샤오핑 vs. 대처  

번영의 절정에서 점차 제조업보다 무역, 금융 중심지로 한창 발돋움해 나가던 1980년대 초, 홍콩 신계 지역의 반환 기한이 10년 앞으로 다가오자 홍콩의 금융과 부동산 자산 가치가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장래가 불안하니 미리 팔아치우거나 자산을 이동하려는 사람들이 나타난 것이다. 정치적 안정성이 생명인 이 영역을 보호하고자 영국 정부는 중국 정부와 기한 연장 협상에 나서게 된다.

도쿄, 싱가포르와 함께 아시아 금융과 제조업의 중심지로 역할하며 번영을 구가한 1980년대 초반의 홍콩 모습.
도쿄, 싱가포르와 함께 아시아 금융과 제조업의 중심지로 역할하며 번영을 구가한 1980년대 초반의 홍콩 모습.

대처 영국 수상이 덩샤오핑을 만나러 인민대회당을 들어설 때까지만 해도 영국은 이미 수많은 사람이 살고, 현재 상태에서 홍콩이 중국에도 큰 자금원이 되고 있으니 중국도 현상 유지를 원할 것이며, 최악의 경우 신계 지역이 반환되더라도 난징조약에 의거해서 홍콩섬과 구룡반도 일부 지역은 유지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덩샤오핑은 연장 논의를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더 나아가 1997년 시점에 홍콩 전역을 반환받을 것을 천명한다. ’그러면 홍콩 경제가 파탄날텐데?’라는 우려에 반환 후 50년 간 한 국가 아래에 두 개의 체제를 인정할 것이라는 이른바 ‘일국양제’론으로 응수한다.

덩샤오핑은 '일국양제'론으로 반환에 관한 우려를 불식한다.
덩샤오핑은 ‘일국양제’론으로 반환에 관한 우려를 불식한다.

포클랜드 전쟁의 승리 직후 자신감에 차 있던 영국은 완전히 계산이 어긋나버린 상황에 당황한다. 회담 후 대처 총리가 인민대회당 앞의 긴 계단을 내려오다가 삐끗해서 넘어지는 장면은 회담결과를 설명하는 신문기사의 헤드라인감으로 손색이 없었다. 영국은 점유를 유지하고, 버텨볼 생각도 했으나 회담 관련 보도들이 나간 후 홍콩의 주식과 부동산 가격이 반토막이 나는 상황이 되자 더 붙들고 있어봐야 득이 될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1984년 홍콩반환협정을 조인한다.

1984년 12월 19일 홍콩 반환 문서에 서명하는 대처 영국 수상.
1984년 12월 19일 홍콩 반환 문서에 서명하는 대처 영국 수상.

영광스러운 철수 혹은 ‘말뚝박기’ 전략 

하지만 영국은 바로 이 시점부터 ‘영광스러운 철수’를 위한 대대적인 정책 전환에 들어간다. 덩케르크에서 보여준 영국의 특기가 바로 철수 작전이지만, 그보다 더 영국다운 철수 작전은 인도와 아프리카 등 식민지에서 보여준 모습들이었다. 좋게 보아준다면 ‘영국 민주주의의 이식’이고, 통상의 시각에서 보자면 후임자를 바보로 만들기 위한 전형적인 ‘말뚝박기’이며, 나쁘게 보자면 ‘이간질’이라고 할 수 있는, 식민정부는 철수하더라도 그 지역의 종족, 인종, 지역 갈등을 극대화시켜서 나중에 영국이 개입할 공간을 확보하는 전략이었다.

1997년 7월 1일. 홍콩은 156년 동안 이어진 영국의 통치를 마감하고 중국에 반환됐다.
1997년 7월 1일. 홍콩은 156년 동안 이어진 영국의 통치를 마감하고 중국에 반환됐다.

지난 90여년 가까이 외면해왔던 홍콩인의 정치적 권리를 확장하고, 홍콩인을 고위 관료로 임명하는 정책을 펴는 것이 너무 속이 뻔히 보이는 일이긴 했지만, 어쨌든 그 과정에서 홍콩인은 자신의 정치적 자의식을 확장했다. 이런 ‘말뚝박기’의 가장 결정판은 홍콩의 최상위 엘리트 5만 명을 선별하여 영국 거주권을 안긴 것이다.

오피니언 리더인 이들이 ‘나는 영국 시민!’이라는 자부심을 가슴에 품고 홍콩 사회 각계 각층에 뿌리를 박으면 향후 중국의 통치가 원만히 이루어지기 어려우리란 계산이 노골적으로 드러난 정책이었다. 최근 홍콩 시위에 대해 친중국계 인사들이나 중국 정부가 ‘제국주의 영국의 음모’라고 말하는 것도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닌 셈이다.

의도 ‘이간질’ ≠ 결과 ‘민주주의’ 

그러나 어떤 일을 판단할 때는 그 의도와 결과를 나누어서 볼 필요가 있다. 비록 영국이 불순한 의도로 추진한 정책이라 해도 그 정책이 지향하는 방향은 ‘민주주의’라는 올바른 지점이었다. 식민통치가 끝나가는 ‘이제와서 왜…’라고 탓하는 것과는 별개로 ‘이제라도’ 주인된 권리를 인정한다는 것은 분명 홍콩인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게다가 최악의 비극인 1989년 천안문 사건이 벌어지자 홍콩인은 지지와 연대의 시위를 벌였고, 결국 6월 4일 끔찍한 학살이 벌어지자 시위 관련자들을 해외로 탈출시키는 카나리아 작전의 중심 무대가 되었으며, 천안문에 만들어졌으나 군인들에 의해 파괴된 ‘민주주의의 여신상’을 복원하여 공공장소(홍콩 빅토리아 공원)에 세운 중국 내 유일한 지역으로 남았다.

중국 천안문 6.4 항쟁(1989)은 중국 공산당의 무력 진압(사실상 대학살)으로 끝났다.
중국 천안문 6.4 항쟁(1989)은 중국 공산당의 무력 진압(사실상 대학살)으로 끝났다.

이 시점에서 홍콩인들과 본토 중국의 사이에는 돌이킬 수 없는 깊은 골짜기가 패였다. 홍콩 반환이 결정된 1984년의 시점에서부터 유행하기 시작했던 홍콩 느와르 영화 특유의 어둡고 비극적인 정서가 피할수 없는 처절한 파국을 묘사하는 수준으로 극단화된 것도 1989년이 기점이었다. 1987년의 [영웅본색1], 1988년의 [영웅본색2]에서 오버스럽지만 멋있는 깡패의 이미지가 1989년 [영웅본색3]에서 공산주의와의 이데올로기 싸움으로 급반전된 것이나 1990년 [첩혈가두]가 ‘우리 그냥 다 죽자’는 분위기로 변한 건 우연이 아니다.

'우리 다 같이 죽자' 첩혈가두 (오우삼, 1990)
‘우리 그냥 다같이 죽자’ [첩혈가두] (오우삼, 1990)

일국양제, 불안한 동거  

1997년 홍콩 반환 이후 한동안은 생각했던 것 보다 별 다른 갈등이 나타나지 않았다. 일단 반환 직전에 빠져나갈 사람들은 다 빠져나갔다. 앞서 말한 5만 명 중 영국으로 들어간 사람들도 적지 않았고, 여기에 포함되지 않았더라도 영연방 국가로 이민을 시도한 사람이 많았다. 태평양을 건너면 바로 나오는 국가인 캐나다, 그 중에서 태평양 연안 도시인 밴쿠버로 많은 중국 이민자들이 몰렸다. (최근 미중 갈등의 도화선 역할을 했던 화웨이 창업자의 딸 멍 부회장이 체포된 곳이 밴쿠버였다.)

그리고 중국에서도 초반에는 급격한 정책 변화를 자제하여 거부감을 줄이기 위해 애썼다. 가장 큰 것은 중국이 이즈음부터 눈부실 만큼 급격한 경제 성장을 이루었다는 점이다. 반환 직전까지 정치적 불안정으로 경제 사정도 좋지 않던 홍콩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중국의 품에 안긴 것이 잘된 일일지 모르겠다는 인식도 생겨났다. 이대로라면 무난히 ‘일국양제’의 기획대로 통합이 이루어질 것으로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중국 경제의 성장이 홍콩에 득이 되는 것만은 아니라는 점이 서서히 드러났다. 홍콩 최대의 강점은 중국 유일의 자유무역항이고, 아시아 도시이지만, 영어 의사소통이 어디서나 가능하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중국의 개혁개방으로 마카오, 상하이, 최근 ‘시진핑 특구’로 불리우며 급성장하는 하이난까지 관광이면 관광, 무역이면 무역 무엇하나 홍콩에 뒤지지 않는 지역들이 속속 등장했다.

 

중국

게다가 홍콩에 들어오는 외국 기업들도 예전처럼 일본, 대만, 한국 등과의 중계무역 거점으로 홍콩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 본토와의 거래 거점으로 홍콩에 들어오다보니 중국의 표준어인 ‘만다린’을 구사할 수 있는 직원들을 원했다. 하지만 홍콩인들은 광둥어를 사용하지 않는가.

정체성의 싸움

여기서 ‘본토 이민’들이 등장한다. 십억이 넘는 인구 가운데 고르고 고른 인재들인 이들은 똑똑할 뿐 아니라 만다린이 모국어고 인건비는 홍콩인들보다 훨씬 쌌다. 이런 산업예비군이 물밀듯이 홍콩의 경계를 넘어오자 홍콩인들은 점점 일자리가 줄어들었다. 게다가 이렇게 많은 사람이 밀려오니 부동산 가격은 오히려 천정부지로 더욱 올랐고, 이런 인재들과 경쟁하려니 사교육 시장도 미친듯이 팽창했다.

홍콩의 고위공직자, 각 기업의 고위 임원들이 중국계 내지는 친중국계 인사들로 메워지자 ‘위험한 사상에 물든’ 홍콩인들을 꺼려하거나 배제하는 분위기도 완연해졌다. 그 결과 홍콩인들은 역으로 본토 중국인들을 ‘천박하고 무식한 야만인들’로 낮추어보고, 자신들의 숙명적인 불행의 씨앗이 그들 본토 중국인들로부터 비롯했다는 것에 대한 원망을 품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이 빼앗아갈 수 없는 홍콩인의 마지막 자존심이자 홍콩이 가진 중국 본토보다 나은 가장 중요한 부분인 ‘민주주의’벼랑 끝에 섰을 때 마침내 홍콩인은 폭발했다. 홍콩 시위를 민주와 반민주의 구도로만 파악하면 ‘중국의 다른 지역들은 다 괜찮은데 왜 홍콩만 저 난리야?’라는 질문에 답을 하기 어려워진다. 더 깊은 속내에는 ‘홍콩인으로서 나를 구성하는 핵심은 무엇인가?’에 답하기 위한 ‘정체성의 싸움’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터져나온 분노 (2019년 6월 9일 홍콩)
터져나온 분노 (2019년 6월 9일 홍콩)

원래 ‘일국양제’는 홍콩이 아닌 대만을 겨냥해서 만들어진 정책이었다. 홍콩은 그 테스트 베드의 역할이라고 할 수 있다. 홍콩 시위에 대한 중국 정부의 대응도 홍콩 자체의 상황보다는 최종적인 대 대만 정책의 방향성에 대해 중국지도부가 결단을 내렸을 때 정해지게 될 것이다.

또한, 여기에는 최근 미중 무역 갈등으로 촉발된 ‘중국의 독자 경제블럭화’ 가능성에 대한 판단이 영향을 주게 될 것이다. 화웨이는 안드로이드 없이도 독자 OS인 ‘훙멍’으로 살아남을 수 있다고 큰소리치고 있다. 쉽지 않아보이지만, 구글플레이스토어 없이도 독자 생태계를 구축하는데 성공한, 30년 간의 여론 조작으로 마침내 중국 젊은 세대에게 천안문을 잊도록 만드는데 성공한 중국이라면, 가능성이 아예 없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시진핑은 최근 러시아, 아프리카를 연결한 새로운 블럭을 구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고, 여기에 이란도 슬쩍슬쩍 간을 보고 있는 것 같다. 게다가 카운터파트는 트럼프에다가 브렉시트로 ‘맨땅에 헤딩’ 중인 영국, 분열과 우경화로 힘이 빠져가는 유럽연합이 아닌가. 못해볼 만한 조합도 아닌데, 이렇게 판단하게 되면 ‘신냉전’이라는 상상하기도 싫은 시나리오가 펼쳐진다. 이미 현 시점에서도 홍콩 시위는 ‘출구 전략’이 딱히 없는 막막한 상황이지만, 국제 정세가 만에 하나 저렇게 막장으로 치닫으면 이미 중국 내 경제적 비중이 상당히 낮아진 홍콩을 ‘버리는 카드’ 혹은 ‘본보기’로 삼게 될 가능성도 없지 않아 보인다.

출구 없는 방, 발 없는 새 

그 최악의 상황까지는 배제한다 하더라도, 여전히 현재의 시위는 빠져나갈 선택지가 없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다.

우리의 촛불시위처럼 대놓고 정치 지도자를 탄핵하거나 반체제를 기치로 내세울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이렇게 우리의 의지를 보여줬으니 중국 당국이 존중해줄 것’으로 믿을 수도 없다. 애초에 중국의 권력과 정치체제가 홍콩 민중의 뜻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게다가 시진핑이 마오쩌뚱을 흉내내어 장기 집권을 시도하고 있는 점, 중국 최대의 폭탄인 티벳을 비롯한 소수민족 문제에 홍콩 민중 시위가 ‘뇌관’으로 인식될 수도 있다는 점도 위험요소다.

그저 하루하루 ‘아니야, 아닐거야’라고 고개저으며 ‘홍콩 시위’를 검색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내가 정말 초라하게 느껴졌다. 몇 년 전 나이지리아의 IS ‘떨거지’ 테러단체인 보코하람이 여학교를 습격해서 학생들을 모두 납치해간 끔찍한 사건이 벌어졌을 때 영화평론하는 어느 선배가 ‘영화 평론인 척하고 이 사건에 대한 글을 써서 사람들에게 알려달라’고 부탁해서 길고 긴 글을 쓴 적이 있다.

나는 공부하는 사람이고, 글을 쓰는 사람이다. 할 수 있는 것이 글을 쓰는 것이고, 그래서 홍콩에 대해서도 글을 써보자고 생각했다. ‘할 수 있는 일’인 글쓰기가 끝나면 ‘내가 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좌절감이 더 바짝 다가온다.

힘든 밤이다.

"세상에 발 없는 새가 있다더군. 날아다니다가 지치면 바람 속에서 쉰대. 딱 한 번 땅에 내려앉는데, 그건 바로 죽을 때지." 영화 [아비정전] (왕가위, 1990) 중 아비(장국영 분)의 독백
“세상에 발 없는 새가 있다더군.
날아다니다가 지치면 바람 속에서 쉰대.
딱 한 번 땅에 내려앉는데,
그건 바로 죽을 때지.”
영화 [아비정전] (왕가위, 1990) 중 아비(장국영)의 독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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