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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던 피터슨 이해하기

왜 사람들, 특히 젊은 남성들은 조던 피터슨에 열광하는가?

Cage Skidmore, "Jordan Peterson", CC BY SA (2018. 6. 15. 촬영) https://flic.kr/p/272GRGH

젊은 남성들의 지적 영웅으로 떠오른 캐나다의 임상 심리학자 조던 베어런트 피터슨(Jordan Bernt Peterson, 1962년생). (출처: Cage Skidmore, “Jordan Peterson”, CC BY SA, 2018. 6. 15. 촬영)

조던 피터슨 현상에 대한 설명에서 꼭 나오는 이야기가 “정체성 정치의 실패를 입증하는 증거”, “남성 중심 가부장제를 옹호하고 기독교 질서나 강조하는 역사적 반동”이라는 이분법이다. 그런데 많은 이분법이 그렇듯이 사실 이런 진단은 현상의 껍질만 슬쩍 보고나서 자기가 생각하는 바를 아주 단순하게 조던 피터슨에 투영한 바에 지나지 않는다.

먼저 한 쪽에서는 조던 피터슨은 ‘역사의 올바른 길’인 페미니즘, 정치적 올바름, 다문화주의를 비난하는 시대착오적 인물이며, 수많은 젊은 남성들이 이에 선동당하고 동조하는 것은 아주 위험한 증상이라고 주장한다. 조던 피터슨이 페미니즘 성향의 앵커와 토론할 때 이들이 항상 물어보는 게 이거다. 왜 젊은 남성들에게 호소하느냐, 왜 너의 영상에 젊은 남성들이 그렇게 열광하느냐, 너에게는 그들을 선동해 정치적 분열을 확대하고 있다는 혐의가 있다. 이런 식이다.

반대편에서는 바로 그 페미니즘 및 기타 사상 때문에 사회가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고 진단하며, 피터슨을 시대의 지성인이자 양심으로 추켜세운다. 이들이 보기에 페미니즘과 정치적 올바름으로 젊은 남성은 억압당하고 있다. 따라서 피터슨은 언론, 학계의 거짓 선동꾼과 싸우는 시대의 양심이다.

또 다른 한편에선 피터슨의 보수성을 비판하면서도, 정체성 정치1의 관점에서 피터슨이 “정체성 정치를 무력화시킬 크립토나이트를 대중에게 제공”하고 있으며, “승승장구하는 것처럼 보였던 좌파는 실은 쇠퇴하고 있”다고 말한다(케이틀린 플래내건, ‘좌파가 조던 피터슨을 두려워하는 이유’).

그러나 이 말들은 모두 부분적 진실만을 담고 있을 뿐이다.

피터슨이 이 정도 입지에 오른 이유는 단순히 페미니즘 하나 비판해서가 아니다. 물론 그가 유명해지고 인기를 얻은 상당한 이유가 페미니즘과 정체성 정치에 대한 그의 시원시원한 ‘말빨’에 있는 것은 사실이다. 전설로 자리잡은 캐시 뉴먼과의 인터뷰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별처럼 많은 수많은 ‘논객’을 뛰어넘고 그가 언어와 종교의 장벽도 뛰어넘고 세계적 스타가 된 것을 설명할 수 없다. 마일로 이아노풀로스나 벤 샤피로가 얘기하는 영상들과 비교하면 잘 알 수 있다. 페미니즘을 비롯해서 현대 서구의 진보정치를 비판하는 건 이 사람들이 한 술 더 떴으면 더 떴고 피터슨보다 더 심한 독설을 마구 내뱉는다. 그러나 이들은 결코 피터슨 같은 인기와 숭배를 얻어내지 못했다.

여기서 피터슨 본인의 대답을 들어볼 필요가 있다. 아까 페미니즘 성향의 앵커들이 한 질문들에 대해서 그는 이렇게 말하곤 한다.

요즘 젊은이들은 의미에 굶주려있다. 그들은 방황하고 혼돈에 어쩔 줄 몰라한다. 그러다가 책임을 지라는 나의 말을 보고 ‘바로 이게 내가 원하던 거야!’라고 깨달은 거다. 그래서 그들이 나의 말에 빨려들어온 거지, 정치적인 메시지는 내가 하는 활동의 본질이 결코 아니다. 남성이 많은 이유? 글쎄 내가 유튜브를 많이 하는데 유튜브는 거의 남성이 하곤 한다.”

나는 이 말이 앞의 다양한 ‘정치적 해석’들보다 훨씬 더 본질에 깊게 다가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남성이 유튜브를 많이해서 남성들이 더 열광한다는 추측만 빼면 말이다.

역사 속에서 의미의 역할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행복해지고자’가 가장 상식적인 대답일 것이다. 하지만 피터슨은 ‘의미’ 때문에 사는 것이라고 말한다. 나 또한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삶이 고통이라는 건 ‘축의 시대’ 수많은 선지자들이 설파하던 진리였다. 피터슨 말마따나 행복은 깨지기 쉽고 오래 지속될 수 없고 목표로 삼기에 부적절하다. 행복과는 전혀 거리가 멀던 전쟁과 기근이 횡행하던 전근대에도 사람들로 하여금 전쟁터에 나가고 중노동을 하고 문명을 이끌게 만든 건 바로 의미였다. 지금 겪고 있는 이 고난도 무언가 더 큰 의미와 연결되어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기꺼이 가시밭길로 들어섰던 것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저명한 긍정심리학자 마틴 셀리그먼은 긍정적인 심리 상태를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고 보았다. 첫째는 쾌락, 이건 호르몬 자극으로 달성할 수 있다. 둘째는 몰입, 이건 어떤 대상을 성취하고자 할 때 만들어지는 고도의 집중상태다. 마지막 셋째가 의미다. 사람들은 스스로 자기 존재가 무언가 더 광활한 의미의 사슬과 연결되어 있음을 느낀다. 삶과 행동은 단순히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걸 스스로 인식한다. 죽음마저 불사하며 어떤 가치에 사람들을 뛰어들게 만드는 것은 그리고 높은 확률로 ‘의미’다.

"요즘 젊은이들은 의미에 굶주려있다. 그들은 방황하고 혼돈에 어쩔 줄 몰라한다." (조던 피터슨)

“요즘 젊은이들은 의미에 굶주려있다. 그들은 방황하고 혼돈에 어쩔 줄 몰라한다.” (조던 피터슨)

바로 이게 문제다. 사실 이 우주는 엄밀히 따졌을 때 의미라는 게 전혀 없기 때문이다. 괜히 도덕경에 ‘천지불인’이라는 말이 있었겠는가. 지구는 사실 우주 위의 먼지 조각에 불과하고, 생명의 진화와 문명의 발전 모두 어떤 면에서는 우연의 산물이다. 적어도 물리적 실체가 세상의 근본이라는 근대적 세계관을 받아들인다면, 이 우주가 본질적으로 무의미하다는 것은 아주 논리적인 귀결이다. 자연은 ‘스스로 그러해서’ 존재하지 별 다른 의도나 섭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적어도 근대 과학은 그런 섭리 위에서 세워지지 않았다. 따라서 인간도 자연계의 일부라면, 인간 세상도 사실 본질적으로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인간은 의미가 존재하지 않는 우주에서 의미를 느끼는가?

그건 의미를 느끼는 게 생존에 도움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껏 높아진 지능과 더 커진 사회집단은 인간에게 막대한 인지적 부담을 안겨주었고, 더 복잡하고 섬세한 의사결정을 요구했다. 한 번 제대로 키우는 데 엄청난 자원이 들게 된 인간의 신생아를 어떻게 키울 것인가? 언어 능력으로 훨씬 정교해진 공동체 내에서의 정치적 투쟁은 어떻게 관리해야하는가? 집단 간의 경쟁에서 살아남고자 구성원들을 어떻게 동원할 것인가? 이 같은 질문에 더 적절한 답을 내려온 사람들이 우리의 조상을 이루었다. 아마 의미의 근원을 이루는 수많은 정서가 이 과정에서 다듬어졌을 것이다.

한 번 인간이 인지적으로 제대로 자리잡고 난 뒤에는 한동안 큰 문제가 없었다. 무한하고 복잡한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기에는 여전히 인간 인식에는 부족한 면이 많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사후세계를 바라보았고, 영혼과 정령, 부족의 근원에 대해 얘기했다. 그 시기 인간의 삶이 토머스 홉스의 말처럼 “고독하고, 가난하고, 잔인하고, 불결하고, 짧았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을 살아가게 한 것은 이런 의미와 신화, 그리고 사회적 관계망이었다.

의미와 신화, 그리고 사회적 관계망은 인간의 '생존'에 기여했을 것이다.

의미와 신화, 그리고 사회적 관계망은 인간의 ‘생존’에 기여했을 것이다.

농경이 시작되고 국가가 세워지고, 이전보다 더욱 복잡한 도전이 제기되자 의미 체계는 한 차례 더 혁신을 이뤄냈다. 보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의미를 찾고 보편적인 세상의 질서를 찾아내고자 한 ‘축의 사상’들이 등장한 것이다. 물론 여기까지도 큰 문제는 없었다. 고등종교 속에서 사람들은 더 큰 의미를 느끼고 더 큰 규모로 협력해나갔다.

아무리 당장의 농사일이 고되도, 이 모든 것은 하나님, 알라, 혹은 천지신명의 뜻에 따라 이전부터 해오던 것이었고 앞으로도 할 일이었다. 삶이 정 고될 때는 지역 사회와 확대가족, 종교 공동체 등의 사회적 네트워크에 의지했다. 그 속에서 인간은 정서적 안정을 찾을 수 있었고, 다 같이 종교의식에 참여하며 자신의 삶은 어쨌든 의미 있는 것이라고 납득했다.

의미의 종말

문제는 그 후에 나타났다. 계몽주의, 과학혁명, 산업혁명이 연달아 일어나면서 지각변동이 시작된 것이다. 처음에는 신의 섭리에 더 잘 다가가고자 시작했던 프로그램들은 점차 세계에서 마법을 해체해갔다. 사실 알고보니 이 우주에는 딱히 의미라고 할 게 없었다. 모든 것은 뇌 안에서 벌어지는 뉴런의 전기화학적 상호작용이었고, 다윈주의에 따른 적자생존의 결과였다. 종교는 그저 인간이 자신을 기만하고자 만든 것이었다.

물론 이것이 당장 사회를 뒤집었다는 것은 아니다. 근대화를 가장 먼저 시작한 서구 국가들에서도 전통적인 사회체제가 최종적으로 붕괴하는 것은 몇 백년이 걸린 일이었다. 많은 경우 ‘마법을 해체’하는 새로운 지식에 관한 고민은 지식인, 그 중에서도 최신 유행에 가장 민감한 최전선의 지식인의 고민이었다.

여전히 대다수 사람들은 여전히 교회에 꼬박꼬박 나갔다. 설령 교회가 세력을 잃었다고 해도 무언가 의미를 제공해줄 사회관계망은 차고 넘쳤다. 안정적인 가족, 대규모 노동조합, 다양한 지역사회 클럽들 등등. 내가 내 주변 사람들을 위해 하나의 역할을 다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의 삶의 의미는 어느 정도 확보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공동체 화합 협동 조화

20세기 후반부터 동시다발적으로 가속화된 경향들은 이 마지막 보루들을 차츰차츰 분쇄해나갔다. 바로 여기서부터 본격적으로 의미가 사라지는 시대가 시작된 듯 싶다. 피임약이 개발되고 가전제품이 광범위하게 보급되면서 여성들이 일터로 쏟아져들어왔다. 이는 전통적인 성역할 규범을 무너뜨리면서 가정의 해체에 큰 역할을 했다.

한편 그 뒤에 들어온 컴퓨터와 인터넷은 기업의 조직방식을 아예 바꿨다. 유연근무, 적시생산, 세계화 등의 용어들이 자연스럽게 논의되면서 기업 경영에 대대적인 혁신을 몰고왔다. 이 모든 변화는 대공장에 기반한 대규모 노동자 집단이 지역사회와 노동조합 커뮤니티 등에 갖고 있던 소속감과 애착을 해체시켰다.

1980년대 서구 선진 사회에서 태어난 젊은이들이 마주해야 했던 상황이 바로 이랬다. 종교는 한참 전에 영향력을 상실하기 시작했다. 20대 초반에 직장에 들어가서 직장을 통해 거의 평생동안 가는 광범위한 사회적 연결망을 형성하기도 어려워졌다. 결혼은 점점 더 줄었고, 설령 하더라도 오래 유지될 수 없었다. 과거처럼 무심하게 돈만 가져다주면 대충 유지되던 가정생활에 경제적 독립을 이룬 여성이 메달릴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삶의 의미를 찾겠는가?

‘왜 이렇게 힘든 일을 하시나요?’ 

이렇게 물었을 때는 예전에는 가족을 위해서,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 직장 동료들과의 유대관계 때문에, 하다못해 성경에서 근면하게 살라고 했으니까라고 답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가족도 불안하고, 미래도 불안하며, 직장도 불안한 세대에서 인생의 의미가 어디에 있냐고 묻는다면 속 시원하게 답할 수 있을까?

소외 절망 청춘 고독 슬픔

젊은 사람들이 피터슨에 열광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인간은 의미를 상실할 경우 삶의 이유를 찾지 못한다. 전통 종교, 가족, 일터가 급속도로 해체되는 가운데 많은 젊은이들이 망망대해 속에 내던져진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웹툰 ‘복학왕’의 우기명을 보면 아주 잘 이해될 것이다).

피터슨은 여기서 이렇게 말한다.

“일단 뭔가 니가 책임지고 끌고 갈 것을 찾아라.”
“너의 등에 짐을 져라. 그러면 거기서 인생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12가지 인생의 규칙은 충만한 의미를 찾는 여정을 위한 피터슨의 가이드인 셈이다. 괜히 그가 부제를 ‘혼돈의 해독제’라고 지은 게 아닌 것이다.

왜 남성들이었나?

1970년대 이래로 몰아친 흐름은 명백히 여성의 상대적 지위를 상승시키고 남성의 상대적 지위를 하락시켰다. 절대적으로 여성이 남성의 우위에 섰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여성은 이전에 갖지 못했던 경제적 주도권을 처음으로 갖게 되었고, 문화 컨텐츠 영역에서 막강한 소비자 집단으로 시장을 주도하기 시작했고, 다양한 정치 사회 운동을 이끌고 있다. 전반적으로 상승 국면인 것이다. 게다가 앞으로 선진 사회에서 근력을 쓰는 제조업은 점점 쇠퇴할 것이고, 사람을 상대하는 서비스업은 계속 팽창할 것인데, 이 또한 여성의 상대적 지위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되는 추세다.

남성은 반면 대대적인 하락을 겪었다. 다시 말하지만 절대적으로 남성이 여성보다 열위에 서게 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기존에 누리던 지위를 상당 부분 위협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일터는 남성 고용을 상당부분 책임지던 제조업이 위협 받으면서 흔들렸다. 가정 영역에서 새로운 역할과 지위를 찾아야 했지만 이건 남성도 여성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따라서 지지부진했다.

상대적으로 종교에 더 오래 남아있는 여성들에 비해 남성들은 종교에도 큰 관심이 없었다. 즉 의미 상실의 폭풍에 있어서 여성보다는 남성이 훨씬 더 적나라하게 노출되어 있었다. 이것이 내가 “남자들이 유튜브를 많이 하고 나도 유튜브에 영상을 올리니 남성 팬들이 많은 것이다”라는 피터슨 본인의 진술이 별로 타당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다.

여성은 상승하고, 남성은 하강한다.

여성은 상승하고, 남성은 하강한다.

아직 무너지지 않고 남은 것

피임기구와 가전제품의 보급, 컴퓨터와 인터넷의 확산으로 가정, 기업, 노동은 유연화되고 해체되어 정보의 흐름으로 재편된다. 공동체 정체성을 제공해주던 장소의 공간은 사라지고 정보, 자본, 기술, 사람이 흘러갔다 나가는 유동적인 공간으로 대체된다.

기존에 사람들에게 의미를 제공해주던 가정, 노동조합, 전통종교, 거대정당은 정보화의 파도에 심각한 재편을 겪게될 것이다. 중앙 데스크가 국민에게 통일된 정보를 제공해주던 언론은 파편화되어 모두가 제각각의 정보들만 받아보는 극도로 개인화된 언론으로 바뀔 것이다. 이것이 20년 전에 에스파냐 출신 사회학자 마누엘 카스텔이 그의 ‘정보시대 3부작’ 중 1부인 [네트워크 사회의 도래]에서 전망한 내용이다.

그렇다면 농경시대와 산업시대까지 인간이 발 딛고 살던 모든 게 흔들리는 상황에서 인간은 앞으로 무엇에 의지하게 될 것인가? 그 다음이 2부의 내용으로, 그 제목은 ‘정체성의 힘’이다. 결국, 사람들은 젠더와 민족 등 다양한 정체성에서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으려고 몰려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공론장의 기능이 상실되어 가는 국민국가를 향해 숱한 정체성 그룹들이 뭉쳐서 자신들만의 언론 네트워크를 통해 소리 칠 것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정체성 정치’와 그것을 비판하는 조던 피터슨은 모두 하나의 거대한 사회변동의 산물인 것이다.

여자 사람 누구

피터슨은 임상심리학자로서 수많은 상담을 진행하면서 결국 사람을 구원하는 것은 그 자기 자신의 의지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진리가 담겨있다. 구렁텅이에 만족하는 사람을 타인이 아무리 끌어올리려고 해도 본인의 의지가 없으면 한계가 있다.

하지만 거시적 사회적 변화가 가져올 파급효과는 개인의 의지 차원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과학의 시대에 전통 종교를 되살릴 수 있는가? 여성이 남성보다 더 학력이 높아질 시대에 가정의 모습은 어떻게 될까? 세계화와 기술혁명이 일자리를 끝없이 바꿔나갈 때, 긱 이코노미(Gig Economy) 2가 사회의 보편적 모습이 될 때 의미를 둘만한 직장을 가질 사람은 얼마나 많이 남을까? 모든 사람이 피터슨처럼 강인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는 개인 수양론 차원에서 피터슨의 주장을 거의 다 받아들인다. 요즘 그래서 불교를 비롯한 다른 종교 전통의 지혜들에 관심이 커졌다. 하지만 사회 전체적인 차원에서 바라보자면, 피터슨이 결코 이길 수 없는 싸움에 들어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종종 든다. 그 점에서 나는 기술발전이 인간의 자율성을 집어삼키고 말 것이라는 유나바머의 전망에 훨씬 더 공감이 간다.

조던 피터슨 (CC BY SA)

사회 전체의 차원에서 보면, 조던 피터슨이 결코 이길 수 없는 싸움에 들어선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CC BY SA)

한편 피터슨을 극우 선동가라고 묘사하거나 그저 정체성 정치의 파행으로 인해 반사적 인기를 얻게 된 것이라고 간주하는 사람들은 더 깊은 차원에서 생각해보는 것을 권한다. 당장 눈에 보이는 것은 페미니즘이나 정체성 정치지만, 더 심오한 물질문명의 가차없는 전진이 그 페미니즘을 포함해 피터슨 현상의 근본적 원인이다.

피터슨이 한 말 중에 이런 게 있다. “9.11 테러가 터진 뒤 사람들은 ‘무엇이 무너졌지?’라고 물었지만 그보다는 ‘아직 안 무너지고 남은 것은 무엇이지?’라고 물어야 했다.” 전례없는 기술발전이 공동체를 파헤치고 의미의 근원을 해체하는 상황에서 우리가 물어야하는 질문이 이와 같은 것이 아닐까. 그 점에서 피터슨이 진영을 막론하고 단순히 안티페미니즘의 전사로만 소비되는 것은 안타깝다.

"무너진 것이 아니라 아직 무너지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이 무엇인지 질문해야 한다." (조던 피터슨)

“무너진 것이 아니라 아직 무너지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이 무엇인지 질문해야 한다.” (조던 피터슨)


  1. 인종, 성별, 성적 지향, 종교, 장애, 민족 등 정체성이나 사회적 집단에 기반한 정치

  2. 우버나 에어비앤비와 같은 온라인 중계 플랫폼을 통해 서비스를 제공하는 독립형 일자리를 형성하는 경제 생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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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명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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