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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보는 자유당 정권의 최대 착각 중 하나는 유사 5공화국 식으로 정권을 운영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라 생각할 만큼 그들 스스로 시민들의 의식이 성숙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는 점이다. 그들은 보편적 시대정신을 아직도 새마을 정신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쉽게도 더불어민주당 정권에서도 청와대의 메시지나 일부 인사의 행동에서 이러한 착각이 일견 엿보인다. 아직도 남북통일과 민족주의가 대다수 시민에게 2000년대 초반만큼 강하게 소구할 것이라는 믿음이 바로 그것이다.

사실 문 대통령이 삼일절 기념사에서 ‘친일 청산’을 언급한 것에 대해 일각에서 반발이 있긴 했으나 삼일운동 자체가 항일 운동, 반제국주의의 상징과도 같은 일이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과한 수사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경기도의회에서 갑자기 국무총리실이 지난 2012년 지정한 과거 2차 대전기 일본 전범기업의 생산품에 전범기업 딱지를 붙이겠다는 조례안[footnote]황대호 경기도의원 등 27명의 의원이 발의한 ‘경기도교육청 일본 전범 기업 제품 표시에 관한 조례안’에 관해 지난 20일 경기도교육청은 해당 조례안을 수용하기 어렵다는 의견서를 의회에 냈다. 조례안은 29일 열리는 상임위원회를 통과하면 본회의에 상정된다.[/footnote]을 상정하겠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대략 정신이 멍해졌다.

경기도의회가 추진 중인 일본 전범 기업 제품 인식표. (출처: 경기도의회)
경기도의회가 추진 중인 일본 전범 기업 제품 인식표. (출처: 경기도의회)

27명의 경기도의회 의원들이 추진한 ‘전범기업 딱지 조례안’은 소비에 이념을 붙이는, 명백히 전근대적인 행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본 전범기업의 생산품에 대해 21세기에 와서 전범기업 딱지를 붙이고 차별한다면, 당시 일본과 함께 추축국을 구성했던 독일과 이탈리아의 전범기업들 제품도 동일하게 대접해야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 경우 우리는 벤츠, BMW 폭스바겐 자동차에도 모조리 딱지를 붙여야 하고, BASF 바이엘의 화학 제품에도 컨테이너 째로 딱지를 붙여야 하며, 도이치 은행과 거래를 할 때에는 계좌 앞에 전범기업임을 인식할 수 있는 전산 코드를 달아야 할 것이다. 그래야 공평해야지 않겠는가.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다. 베트남 전쟁까지 갈 것도 없이 지난 1980년부터 지난 1988년까지 이란과 이라크는 8년이나 전쟁을 벌여 수십만 명이 목숨을 잃었는데, 우리나라는 당시 산유국들 모두와 우호적인 관계를 원했기 때문에 이라크에 가서는 건설 공사를, 이란에는 무기 부품을 수출했다. 그렇다면 8년의 전쟁간 이란-이라크 양국이 저지른 전쟁범죄에 우리나라는 전혀 책임이 없을까? 한국의 많은 건설회사와 방산·기계 기업들은 양국 모두에게 전범기업이 되어야 마땅한 일이 아닌가.

한국(기업)은 이라크에선 건설공사를 하고, 이란에는 전투기 부품, 차량, KH-179 곡사포 등의 무기 부품을 팔았다. 사진 맨 앞에 보이는 게 KH0179 155mm 견인포.
한국(기업)은 이란-이라크 전쟁 당시 이라크에선 건설공사를 하고, 이란에는 전투기 부품, 차량, KH-179 곡사포 등의 무기 부품을 팔았다. 사진 맨 앞에 보이는 게 KH0179 155mm 견인포.

소비에 윤리가 아닌 이념을 붙이게 되면 이런 딜레마가 발생한다. 물론 일본 전범기업 리스트는 이명박 정권 말기인 2012년 국무총리 소속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와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위원회에서 발표[footnote]위원회는 조선인 강제동원 사실이 있는 일본 기업 1493곳을 조사한 결과, 일본의 3대 재벌인 미쓰비시·미쓰이·스미토모그룹 계열사를 비롯해 닛산, 기린(맥주), 히타치중공업, 파나소닉 등 일본 기업 중 299개가 사업 중이라고 경술국치 120주년인 2012년 8월 29일 밝혔다. (당시 경향, 매일경제 등 관련 보도 참조, 편집자)[/footnote]한 것이고, 해당 기업들 중 일부가 강제동원 등에 대해 사과나 배상을 거부하고 있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은 기업도 있는데 국무총리실 리스트 299개 기업 중 현존하는 284개 기업 모두에 대해 딱지를 붙이겠다는 발상은 황당하기 그지없다. 일본 전범기업 리스트는 한일기본조약 이후 사실상 역사적인 기록물 이외의 의미는 사멸했다고 봐야 한다.

게다가 당시 일본은 총동원령이 아예 법제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일본의 기업가들은 전쟁에 참여하기 싫더라도 군국주의 정부에 의해 기업을 빼앗기고 ‘비국민’ 취급을 받지 않으려면, 즉 죽기 싫다면 참여를 했었어야 했던 사실도 현대를 사는 우리가 어느 정도는 참작해야만 한다. 정작 우리도 국익 때문에 과거 타국의 전쟁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고 이에 대한 책임을 벗기 어려운 나라가 아니었던가. 민족주의의 최대 맹점은 이렇게 전 세계적인 상호간 연결이 빼곡해진 세계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물론 소비는 윤리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갑질하는 기업의[footnote]대한민국 갑질기업 보고서(ThePR, 박형재, ‘17.9.27.)

갑질 기업 리스트[/footnote]제품(링크1, 링크2, 링크3)을 불매한다거나 저개발국의 군벌이 민간인을 학살하며 생산한 원료를 거부하는 것과 70년 전 일본 제국주의에 부역했던 기업의 제품에 딱지를 붙이는 것은 아예 다른 행동이다. 전자는 보편적 인권에 근거하여 현재 진행형인 악을 거부하는 것인 반면 후자는 과거의 이념에 근거하여 자본주의 사회에서 현재 멀쩡하게 돌아가는 기업에 낙인을 찍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시대정신은 민족주의가 아니라는 점을 이제 인정할 수는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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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황대호 의원, 전범기업제품 표시 조례안 발의 관련 입장

황대호경기도의회 제2교육위원회 황대호 의원(더불어민주당, 수원4, 사진)이 「경기도교육청 일본 전범기업 제품 표시 조례안」에 대하여 조례안 발의취지와 입장을 20일 밝혔다.

황대호 의원이 제출한 조례안은 제정이유에서 ‘일부 일본 기업들이 대일항쟁기 당시 전쟁물자 제공 등의 목적 실현을 위해 우리 국민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노동력을 착취하였으나,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 공식적인 사과나 배상은커녕 역사를 부정하고 미화하고 있어 심각한 문제’라며,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올바른 역사인식 확립과 교직원들의 경각심을 위해 전범기업이 생산한 제품을 명확히 표시하여야 한다’고 밝히고, 조례 제정을 통해 일본 전범기업이 생산한 제품에는 인식표를 부착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조례안에 대해 황대호 의원은 “오늘날 기업은 단순히 생산 및 영업활동만을 하는 곳이 아니라 사회공헌과 지역발전에 대해서도 높은 수준의 사회적 책임을 짊어져야 한다”고 말하고, “그러나 일본 전범기업들은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제국주의를 위해 우리 국민들을 강제 징용하는 반인륜적 행위를 저질렀고, 또 이를 통해 막대한 이익 창출과 인류사에 죄악을 끼쳤지만 여전히 아무런 반성도 보상도 없었다”고 지적하며, “이는 일본정부의 역사 부정과는 또 다른 문제”라고 말했다.

이어 황대호 의원은 “독일의 전범기업들은 나치에 협력한 자신들의 행위에 대해 전 세계인을 향해 처절히 반성했고 보상했기에 우리가 독일 전범기업 제품이라 하더라도 마음 편하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이라고 지적하고, “일본의 전범기업들이 자신들의 과거를 반성하지 않고 오히려 미화하는 행위를 멈추지 않는 이상 소비자는 전범기업을 기억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고 말했다.

또한 황대호 의원은 “조례안은 일본 기업 제품 전부에 인식표를 부착하자는 게 아니라 일본 전범기업이 생산하는 제품을 기억하자는 것이다”고 말하고, “예를 들어 일본의 대표적인 전자기업인 S사는 전범기업이 아니므로 조례안의 적용대상이 당연히 아니며, N사는 전범기업이므로 조례안의 대상으로 인식표를 붙이자는 것”이라며, “이는 기업에게 사회적 책임을 묻는 것이다”고 말했다.

한편 황대호 의원은 “조례안과 관련하여 일각에서 마치 일본제품을 불매운동 한다거나 또는 비이성적으로 접근하여 한일간의 갈등을 조장하는 조례안으로 비춰지고 왜곡될 소지가 있어 우려스럽다”고 말하고, “조례안은 사회적 책임을 다하지 않은 전범기업에 대해 자라나는 학생들이 똑똑히 기억하도록 하는 역사교육의 일환인 것”이라며, “근현대사를 배우는 학생들이 근현대사와 현재가 동떨어지지 않고 연결되어 있음을 알리는 것이고, 전범기업 제품을 쓰더라도 제대로 알고 쓰자는데 목적이 있다”고 말했다.

황대호 의원이 요청하여 경기도교육청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현재 경기도내 각급 학교가 보유하고 있는 주요 교육기자재(빔프로젝터, 캠코더, 카메라, 복사기)중 일본기업이 생산한 제품은 50~70%에 이르고 있으나, 이중 전범기업이 생산한 제품은 품목에 따라 10~20% 정도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출처: 경기도의회, 편집자)[/bo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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