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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교수학습의 ‘습득’ 메타포에 대한 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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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어를 이해하고 사용하는 과정에서 가장 많이 쓰는 동사는 아마도 ‘학습하다’‘습득하다’일 것입니다. (외국어를 학습/습득하다; learn/acquire a foreign language) 이 두 용어는 일상에서 구별 없이 쓰기도 하지만, 영어교육학의 개념에서 보면 다른 함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학습(learning)은 무난한 표현으로 가장 널리 쓰입니다. 학교에서든 이민 상황에서든 언어를 배우는 일을 통칭해 ‘learn’이라는 동사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죠. 이에 비해 ‘습득’은 미묘한 함의를 담고 있어 언어학습에 대한 생태적 접근을 추구하는 학자들에게는 피해야 할 방법론으로 인식되기도 합니다. 왜 그럴까요?

습득 메타포와 언어 생태계

영어교육학에서 습득은 영단어 ‘acquire’의 명사형인 ‘acquisition’의 번역어입니다. 이는 다음과 같은 함의를 지닙니다.

  1. 외부에 취해야 할 대상이 있습니다.
  2. 학습자는 이를 자기 내부로 가지고 들어옵니다.
  3. 외부 대상은 이제 자기 소유가 됩니다.
  4. 따라서 언어 습득은 소유물을 점차 증대시키는 일입니다.

경영학에서의 인수합병(M&A, Mergers & acquisitions)을 생각하시면 ‘습득’에 대한 개념적 이해가 쉬울 겁니다. 더 많은 기업을 합병해야 덩치가 커지고, 그래야 기업의 시장가치가 올라가지요.

Nathaniel Shuman (@Unsplash) 
Nathaniel Shuman @Unsplash

그런데 외부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정보가 개인의 소유가 된다는 관점은 ‘서식처'(habitat)와 ‘행동유도성'(affordance; 어포던스; 어떤 행동을 유도한다는 뜻)를 강조하는 생태적 접근(ecological approach)과 충돌합니다. 언어학습에 대한 생태적 접근은 언어를 취해야 할 자원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상징적 환경으로 봅니다. 언어를 금이나 석유 같은 자원보다는 대자연과 같은 환경에 가깝게 보는 것입니다. 이에 따르면 특정 언어와 학습자는 소유가 아니라 관계(relations)의 관점에서 파악해야 합니다.

우리가 세계를, 산과 나무와 강을 소유할 수 없듯 언어는 소유되는 것이 아니라 누리는 것입니다. ‘누림’이 학습의 중심이 된다면 많이 가지고 적게 가지고는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언어와 내가 엮이는 방식, 내가 그 언어를 통해 하고자 하는 일, 그 언어가 나의 정체성에 미치는 영향입니다. 결국, 내 삶과 해당 언어가 맺는 관계를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참여 메타포와 합창 배우기

언어학습에서 습득 메타포를 비판하며 제시된 대안적 개념으로 참여(participation)가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언어를 소유물로 보고 이를 습득하는 것으로 파악하기보다는 특정 커뮤니티의 일원이 되는 과정으로 파악합니다. 즉, 외국어를 배우는 일은 추상적으로 존재하는 다양한 코드(codes)들을 습득하는 과정이 아니라 특정한 사회문화적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일입니다.

여기에서 공동체가 꼭 원어민 집단을 가리키는 것은 아님에 유의해야 합니다.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면 그게 바로 언어 커뮤니티가 되는 것입니다. 온라인 RPG 게임의 특정 서버에서 만나는 친구들일 수도 있고, 학급 친구들일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자신이 만들어 낸 가상의 캐릭터들의 모임일 수도 있지요. 커뮤니티를 찾아갈 수도 있지만 자신이 뚝딱 만들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합창의 기술을 습득한다’‘합창단의 일원이 되어 활동한다’라는 두 명제를 비교하면 ‘습득 vs 참여’라는 관점의 차이를 느낄 수 있습니다. 전자는 단원이 되기 위해 필요한 테크닉을 하나하나 습득해 나가는 것으로 합창을 파악하지만 후자는 노래를 좋아해서 합창단에 들어가고, 거기에서 만난 이들과 친해지고 교류하며 함께 노래하는 활동을 합창으로 봅니다. 노래에 점수를 매기는 사람은 없습니다.

Ben White @Unsplash
Ben White @Unsplash

‘합창 기술 습득’이 완벽함(mastery)에 방점을 찍는다면 ‘합창단원으로 활동하기’는 되기(becoming)에 방점을 찍습니다. 전자가 언어습득의 목표를 네이티브 스피커로 본다면 후자는 삶의 다양한 활동에 참여하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둡니다.

습득의 중요성은 간과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습득이 지상과제가 되는 언어학습은 앙상합니다. 더 많이 가지려는 욕심은 더 가지지 못한 사람에 대한 멸시, 더 많이 취하지 못한 자신에 대한 원망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삶이 영어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 영어공부는 나를 어떻게 바꾸어 가고 있는지, 나는 영어를 통해 어떤 소통의 생태계를 만들어 가고 있는지를 계속 물어야 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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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위한 영어공부

언젠가 Claire Kramsch 선생님 수업에서 들은 이 한 마디가 여전히 제 심장에 남아있습니다. 너와 나를 가르고, 마음에 상처를 내며, 목을 뻣뻣이 세우는 영어가 아니라 성찰하고, 소통하며, 함께 성장하도록 만드는 영어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삶을 위한 영어공부 ²

  1. 외국어를 배우는 두 가지 목적
  2. 영어는 인풋? – 1. 자막, 넣고 볼까 빼고 볼까 
  3. 영어는 인풋? – 2. 크라센, 인풋 이론을 체계화하다
  4. 영어는 인풋? – 3. ‘학습’하지 말고 ‘습득’하라
  5. 필사, 영작문에 도움이 되나요?
  6. 영어는 인풋? – 4. 외국어 습득엔 ‘순서’가 있다?
  7. 영어 이름, 꼭 따로 필요할까?
  8. 한국식 영어 발음, 꼭 고쳐야 할까요?
  9. 영어교육과 홍익인간의 관계 
  10. 쓰기의 마법: 생각과 글쓰기의 관계
  11. 언어는 습득하는 게 아니라고?
  12. 네이티브 이데올로기 그리고 네이티브의 윤리
  13. 영어는 인풋? – 5. 인풋 가설의 ‘무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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