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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에르도안이었나: 1. 오스만 제국의 쇠퇴와 근대화

2018년 6월 24일에 함께 열린 터키 대선과 총선에서 이변은 없었다.

2003년 이래로 터키 총리를, 2014년 이래로 대통령을 맡아온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Recep Tayyip Erdogan, 1954년 2월 26일 ~ )과 그가 속한 당인 정의개발당이 승리를 거둔 것이다.

이제는 '21세기 술탄'으로 불리는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 2015년 모습. (출처: AMISOM Public Information, 공용도메인)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2015) (출처: AMISOM Public Information, 공용도메인)

러시아 차르와 중국 황제… 터키 술탄까지? 

선거 전만 해도 그의 지지율이 과반이 무너졌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보도되기도 했었다. 하지만 에르도안은 약 52%를, 집권 정의개발당과 우당인 민족주의행동당은 각각 42%와 11%를 득표하면서 과반을 사수하는 데 성공했다. 2017년 터키에서 이루어진 개헌 덕분에, 이제 에르도안은 재선된다면 2029년, 혹은 2034년까지 무소불위의 대통령 직위에 앉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사람들은 이제 터키러시아(푸틴)중국(시진핑)처럼 강력한 독재자의 손아귀에 놓이게 되었다고 우려했다. 이것은 전적으로 정당한 우려다.

21세기 차르 푸틴과 21세기 황제 시진핑 (출처: 러시아 대통령실) http://en.kremlin.ru/events/president/news/56046

21세기 ‘차르’ 푸틴과 21세기 ‘황제’ 시진핑 (출처: 러시아 대통령실)

한편으로 에르도안의 터키에 관한 이야기를 찾아볼 때면 우리는 푸틴의 러시아나 시진핑의 중국에 대한 이야기에서 찾아볼 수 없는 우려를 발견한다. 터키의 건국자인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세워놓은 세속주의 원칙이 파괴되면서, 이슬람 세계 근대 최후의 보루였던 터키마저 이슬람주의에 함락되게 생겼다는 불안이 바로 그것이다.

터키공화국의 '국부'로 추앙받는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1936년 모습). 서구에서는 그를 독재자로 보기도 하지만, 그는 사망할 때(1938년)까지 15년 동안 터키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을 역임했고, 세속주의를 주창했으며, 여성인권을 신장했다. 근본주의 이슬람학자는 그의 세속주의를 당연히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터키공화국의 ‘국부’로 추앙받는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1936). 서구에서는 그를 독재자로 보기도 하지만, 그는 사망할 때(1938년)까지 15년 동안 터키공화국 (초대) 대통령을 역임하면서 세속주의(정교분리)를 주창했고, 여성인권을 신장했다. 근본주의 이슬람 세력은 그의 세속주의를 당연히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이 불안도 확실히 정당하다고 할 수 있다. 과거 공공장소에서 금지되었던 히잡은 심심찮게 볼 수 있게 되었다. 주류 판매는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사회, 문화적 보수주의 또한 거세지고 있다. 이슬람의 영향력은 정의개발당이 집권한 지난 15년 동안 전방위적으로 확대되고 있다.

10년의 민주화, 5년의 독재 

그렇지만 나는 이런 우려들이 에르도안에 대해서 전적으로 공정한 평가와는 확실히 거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에르도안의 독재나 터키의 이슬람화를 나는 결코 지지하지 않는다. 하지만 에르도안을 바라보는 외부 논평자들은 늘 한 가지 사실을 간과한다. 바로 2003년부터 2013년까지의 10년 동안 에르도안은 국민들의 절대적 지지를 등에 업고 당선된 터키 현대화와 민주화의 기수였다는 사실이다. 햇수로만 보면 에르도안이 권위주의화의 길을 걸은 지난 5년보다 앞의 10년이 두배는 더 길다.

2013년 터키 시위의 분기점이 되는 '게지 공원 반대 시위'. 경찰의 가스 분사를 온몸으로 맞고 있는 제이다 순구르(Ceyda Sungur, 붉은 옷의 여성)의 모습은 전 세계에 대서특필되면서 2013년 터키 시위를 확산하는 상징적인 이미지가 됐다. 서로 천천지 원수 상이인 라이벌 축구팀 서포터스까지 가세한 2013 터키 시위는 에드도안의 '탈세속주의'를 오히려 더욱 강화하는 계기로 작용한다.

2013년 터키 시위는 처음에는 평범한 재개발 반대 시위(‘게지 공원 반대 시위’)에서 시작했다(5월 27일). 하지만 경찰의 가스 분사를 온몸으로 맞고 있는 제이다 순구르(Ceyda Sungur, 붉은 옷의 여성, 5월 28일)의 모습은 세속주의 성향의 터키 시민을 분노하게 했고, 이 사진은 전 세계로 대서특필되면서 2013년 터키 시위를 확산하는 상징적인 이미지가 됐다. 심지어 라이벌 축구팀(베식타쉬 JK, 페네르바흐체 SK, 갈라타사라이 SK) 서포터스까지 연대해 시위에 가세했다. 하지만 에르도안의 ‘대답’은 강경 무력 진압이었고, 에르도안의 독재와 검열, ‘탈세속주의’를 오히려 더욱 강화하는 계기로 작용한다. (출처: 텔레그래프)

논의를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아타튀르크의 후예들인 군부가 세워놓은 유산이었다. 터키 군부는 터키의 서구화와 세속화를 사수하는 사령탑이자 보루였다. 이들은 세속주의를 위협할 어떤 시도도 용납하지 않고 언제나 무력을 통해 대응해왔다. 아타튀르크가 터키 공화국을 건국한 1923년부터 에르도안이 집권할 2003년까지 80년 동안 군부의 권력에는 생채기 하나도 나지 않았다. 군부는 1960년, 1971년, 1980년, 1997년에 개입하여 정국 혼란을 저지한다는 이유로 민선 정부를 몰아냈다.

이제 무소불위가 된 것처럼 보이는 에르도안도 한 번의 쿠데타 음모와 실제 쿠데타를 경험했다.

터키 군부의 쿠데타 시도에 대항에 키질레이 광장에 운집한 터키 시민(2016. 8. 24, 출처: Pivox , CC BY SA 4.0)

터키 군부의 쿠데타 시도에 대항해 키질레이 광장에 운집한 터키 시민들 (2016. 8. 24, 출처: Pivox , CC BY SA 4.0)

하지만 터키의 쿠데타는 다른 나라의 쿠데타와 좀 다른 점도 있었다. 군사 쿠데타가 군사 지도자의 수십년에 걸친 독재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1980년 쿠데타는 예외인데 자세한 이야기는 후술). 이들은 오직 세속주의 원칙을 지키고 터키의 전근대적 퇴행을 막는 선에서만 쿠데타를 일으키는 것이라 공언했고, 실제로 그 약속을 지키기도 한 것이다. 따라서 많은 외부 관찰자들은 잦은 쿠데타에도 불구하고, 오직 군부만이 ‘현대적인 터키’의 수호자였다며 후한 평가를 내려주었다.

따라서 터키 현대사를 좇아가다보면 언제나 한 가지 난제를 맞닥뜨리게 되는 셈이다. 쿠데타를 늘 얻어맞으면서도 터키 국민은 왜 이슬람주의자들을 지지했는가? 터키 국민의 선택은 틀린 선택이었나? 세속주의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민주주의를 잠시 유보하고 쿠데타를 용인해줘도 되는 것일까? 바로 이런 질문에 대해서 어느 정도 답하지 않고서는 에르도안의 복잡한 면모를 알기란 불가능하다. 바로 그 에르도안이 이 난제를 직접 풀어나간, 동시에 또 더 꼬이게 만든 당사자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문제들에 대한 답을 듣기 위해서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야한다. 바로 터키의 역사와 지리다.

오스만 제국의 영광과 쇠락 

터키 공화국의 전신은 600년 역사를 자랑하는 대제국 오스만이었다. 16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오스만 제국은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3개 대륙에 군림하며 주변국을 벌벌 떨게 하는 초강대국이었다. 제국의 수도인 이스탄불(당시 이름으로는 콘스탄티니예)은 서쪽으로는 튀니지, 남쪽으로는 예멘, 북쪽으로는 우크라이나와 헝가리, 동쪽으로는 이라크까지 뻗어나간 교역로가 모이는 곳으로, 세계 각지의 산물이 거래되는 세계의 심장 중 하나였다.

오스만 제국의 시기별 영토

오스만 제국의 시대별 영토 확장 추이

당시에는 유럽의 어느 나라도 그와 같은 거대한 도시를 운영할 역량을 갖추지 못했다. 술탄의 친위대인 예니체리와 티마르 기병대는 어딜 가든 적군을 벌벌 떨게 만들었다. 실제로 이들은 세계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화약무기를 도입한 군대 중 하나였다. 누구도 이슬람의 칼리프이자 튀르크의 술탄이자 유목세계의 칸이자 로마 황제오스만 파디사(Padishah)에 대적할 생각을 감히 품지 못했다. 특히 제국의 관료제는 그간 이슬람 세계에서 운영된 통치 질서 중 가장 정교한 것이어서, 오스만 제국은 다른 국가들은 엄두도 못 낼 엄청난 동원 능력을 자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17세기부터 영원할 것 같던 오스만 제국의 영광은 점점 바래기 시작했다. 우선 유럽 국가들의 군사 혁신이 오스만 제국의 속도를 추월하면서 술탄 친위대 예니체리가 가지던 군사적 우위는 급속하게 상실되었다. 한편 제국이 너무 방대해지면서 관료제나 지방 통치의 기능들에 점점 부하가 걸리기 시작했다. 세금은 이전보다 덜 걷히고 있었지만, 세출은 많았다. 관료제의 직책의 수는 그대로였지만, 관료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은 훨씬 더 많아져서 인사적체가 심각해졌다.

황제의 친위대들에게 봉토를 배분해줘야 했지만, 더는 쉽게 정복할 수 있는 거대한 땅은 보이지 않았다. 이제 오스만 제국이 국경을 마주한 국가들은 하나같이 한 가닥 하는 강대국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오스만 황제는 과거와 같은 군사적 용맹과 강인함을 보여주지 못하고 점점 유약해졌고, 예니체리들에 대한 장악력도 상실했다. 이제는 예니체리들이 밥 먹듯이 쿠데타를 일으켜 황제를 시해하거나 교체하는 등, 제국 질서 자체가 해이해졌다.

물론 쇠퇴가 처음부터 갑작스럽게 다가온 것은 아니었다. 17세기의 대부분을 오스만 제국은 그럭저럭 잘 해낼 수 있었다. 하지만 1683년 제2차 빈 포위가 실패한 이래로 오스만 제국이 걷는 내리막길의 경사는 점점 더 가파라져만 갔다. 대신 유럽 국가들은 상업, 출판, 연구, 군사 등 모든 면에 있어서 점차 오스만 제국을 따라잡고 있었다. 18세기가 되었을 때 판세는 뒤집을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오스만 제국의 1700년대는 소위 ‘튤립 시대’로, 비교적 평화가 유지되고 있었으며 유럽식 건축과 미술, 그리고 튤립 재배가 유행하던 문화적 황금기이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것이 폭풍 전의 고요함이었음이 곧 드러나게 된다.

제2차 빈 공성전(1683년 7월 17일 ~ 9월 12일).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기병전. 오스트리아와 폴란드, 독일의 신성동맹은 오스만 제국의 공격을 방어했고, 오스만 군대는 퇴각했다. 오스만 제국의 영향력이 축소한 것은 불문가지다.

제2차 빈 공성전(1683년 7월 17일 ~ 9월 12일).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기병전. 오스트리아와 폴란드, 독일의 신성동맹은 오스만 제국의 공격을 방어했고, 오스만 군대는 퇴각했다. 오스만 제국의 영향력이 축소한 것은 불문가지.

18세기 말에는 오스만 제국이 연쇄적인 군사적 패배를 겪게 된다. 북서쪽에서는 합스부르크 제국이 헝가리와 발칸을 향해 밀고 들어오고 있었다. 북동쪽에서는 표트르 대제의 개혁으로 강대국이 된 러시아가 남하를 시작했다. 연쇄적인 전쟁 패배로 오스만 제국의 영토는 계속해서 줄어들기 시작했다(1787년 퀴췩 카이나르자 조약, 1792년 야시 조약). 여기에 결정타를 날린 것은 1798년에 실시된 나폴레옹의 이집트 공략이었다. 갑작스럽게 영국을 위협하겠다고 이집트로 처들어온 나폴레옹에 맞서 오스만 제국은 또 한 번 참패를 기록하고, 아무 대응도 할 수 없었다. 이 지역은 북방의 변경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중요한 제국의 핵심지역이었는데도 말이다.

동방 문제: 몰락한 제국의 분배 

이후 19세기가 되자 오스만 제국의 몰락은 그냥 당연한 현실이 되었다. 유럽 국가들에게 이제 오스만 제국은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유럽의 병자’였다.

그 대신에 이제 오스만 제국이 후퇴하면서 남기는 콩고물과 찌꺼기들을 어떤 식으로 처리해야 할지에 대한 문제, 즉 동방 문제(Eastern Question)가 부상하게 되었다. 영국, 프랑스, 오스트리아, 러시아 등의 국가들이 자신들이 오스만 제국에서 차지해야할 마땅한 이권을 주장하며 들어오기 시작했다. 각 지역의 통치자는 이스탄불 중앙정부로부터 이탈하려고 하면서 이 위기를 나름대로 헤쳐나가려고 했다. 대표적으로 나폴레옹의 이집트 침공에 자극 받은 메흐메드 알리는 독자적인 이집트 근대화를 추구하면서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추구했고 반란을 일으키기까지 했다.

설상가상으로 나폴레옹으로 인해 유럽 전역에 확산된 민족주의는 오스만 제국에게는 그야말로 재앙이었다. 발칸 반도의 기독교계 소수민족들은 이제 자신을 ‘기독교를 믿는 세르비아 민족’, ‘기독교를 믿는 불가리아 민족’ 등으로 정의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자신이 이슬람 제국의 부속품으로 취급되는 것을 못 견뎌했다.

서구 열강들은 기독교도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오스만 제국에 간섭하며 이들 기독교 주민들의 자치운동이나 독립운동을 부추겼다. 1820년대의 그리스 독립 전쟁이 대표적이었다. 영국과 러시아를 비롯한 주요 열강들이 그리스 측을 지원해 오스만 제국을 압박했던 것이다. 그 결과 단독이었다면 절대 이기지 못했을 그리스인들이 승리하여 그리스 왕국이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떨어져나갔다.

그리스 독립 전쟁( ) 중 카나리스의 화선이 히오스의 투르크 기함을 파괴하는 장면.

그리스 독립 전쟁(1821년 3월 6일~1829년 7월 21일) 중 카나리스의 화선이 히오스의 투르크 기함을 파괴하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

셀림 3세와 마흐무드 2세의 근대화 시도

이 위기에 맞서 오스만 제국도 당연히 나름의 자구책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서구의 강력한 힘에 직면한 모든 비서구 국가들이 그랬듯이 말이다. 그리고 역시 그 모든 비서구 국가들에서 그랬던 것처럼 사회 내의 수많은 세력들이 서로 각기 다른 목소리를 내면서 충돌했다.

최초의 충돌은 먼저 근대화 개혁의 필요성을 인정하느냐, 마느냐를 두고 벌어졌다. 1789년부터 1807년까지 제위했던 셀림 3세는 이제 적폐세력이 된 예니체리를 몰아내고 오스만 제국을 근대화하고자 했다. 하지만 예니체리들은 자신들의 이권을 절대 포기하지 않으려고 했고, 늘 자신들이 해오던 전략을 사용했다. 셀림 3세를 폐위하고 처형해버린 것이다.

이정도로 보수 세력이 격렬히 반발했음에도 개혁을 향한 군주들의 열망은 그치지 않았다. 오스만 제국이 먼저 살아남아야 했기 때문이다. 1808년 즉위한 마흐무드 2세는 셀림 3세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보다 조심스럽게 개혁에 접근했다. 그는 예니체리들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조심했고, 먼저 개혁을 추진하기 위한 확실한 기반을 쌓는데 주력했다.

마흐무드 2세 (재위 기간: 1808년~1839년)

마흐무드 2세 (재위 기간: 1808년~1839년)

그렇게 18년 뒤인 1826년에 마흐무드 2세는 모든 예니체리를 숙청, 처형하면서 권력을 공고히할 수 있었다. 그는 또한 서구식 복장 개혁을 추진했고 근대적 학교와 군대를 창설했다. 기초적이긴 하지만 초등교육 의무화를 선언하기도 했으며 몇몇 인물들을 유럽에 유학 보내기도 하였다. 비로소 오스만 제국의 기나긴, 그리고 고난에 찬 근대화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마흐무드 2세의 근대화는 일정 부분 성과를 내긴 했지만, 오스만 제국의 쇠퇴를 되돌리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왜냐면 그 시대 추진되었던 개혁이 거의 군사 부문에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더는 군대나 무기만 제한적으로 서구화하면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서구식 법, 제도, 개념, 사상, 그리고 경제적 기반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탄지마트(개혁·재조직) 시대 

바로 이것이 1839년에 죽은 마흐무드 2세의 뒤를 이은 황제들, 압뒬메지드(1839~1861)압뒬아지즈(1861~1876)에게 요구된 과제들이기도 했다. 이 두 황제 시기에는 좀 더 법적, 제도적 차원의 개혁들이 많이 진행되었는데 이 시기를 탄지마트(Tanzimat, 개혁 혹은 재조직) 시대라고 한다.

탄지마트를 주도한 이들은 마흐무드 2세에 진행된 서구화의 세례를 받은 이들이었다. 주로 파리를 비롯한 유럽에서 교육을 받거나 외교업무를 맡았던 사람들이 귀국하여 재상을 비롯한 관료제의 핵심 직위로 올라갔다. 이제 개혁 주도세력은 군인에서 세속적인 문민관료, 서기관들에게 넘어갔다.

서구식 문화, 생활양식에 매우 익숙했던 이들은 오스만 제국이 지향해야할 바를 서구라고 생각하면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법 등을 포괄하는 폭넓은 개혁안을 입안하고 실행했다. 그 덕택에 17세기 이래로 해체되어 가던 중앙관료제는 질서를 어느 정도 회복했고 오스만 황제의 권력도 제도적으로 확보될 수 있었다. 1856년에 이스탄불에 새로이 새워진, 화려한 서구식 건축물인 돌마바흐체 궁전은 이 시기를 대표하는 상징 가운데 하나이다.

돌마바흐체 궁전 (위키미디어 공용, CC BY-SA 3.0) https://ko.wikipedia.org/wiki/%EB%8F%8C%EB%A7%88%EB%B0%94%ED%9D%90%EC%B2%B4_%EA%B6%81%EC%A0%84#/media/File:Dolmabah%C3%A7e_Palace_2007.jpg

돌마바흐체 궁전 (위키미디어 공용, CC BY-SA 3.0)

하지만 탄지마트도 오스만 제국이 품고 있던 위기를 해소해주지 못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증폭시켜주었다. 우선 오스만 제국은 아직도 사회를 전면적으로 갈아엎는 근대화 개혁을 시행할 토양이 전혀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근대 개혁을 추진하는 인력은 너무나 부족했고, 또 아직 많이 미숙한 상태였다. 그 대신 사회 각지에 포진한 보수주의자들의 영향력은 여전히 완고했다.

그런 와중에 무리한 개혁 추진으로 안 그래도 위태롭던 오스만 제국의 재정 상태는 파탄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유럽 상인들은 오스만 제국의 시장을 장악해 값싼 유럽 상품을 퍼나르면서 오스만 산업의 자생적 발전도 가로막았다. 또한, 권력의 중앙집권화와 제도화는 느슨하게 유지되던 발칸 민족의 자치를 침해했고, 이는 곧바로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서구가 개입할 즐거운 빌미들을 제공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제국의 신민에게 ‘동등한 권리’를 준다는 칙령들은 반대편에 있는 주류 무슬림의 반감도 불러일으켰다. 과거 그들이 피지배 민족에게 갖던 특권이 부정당한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이런 위기 요인들이 중첩되어 폭발한 곳이 바로 발칸 지역의 영토들이었다. 몬테네그로, 세르비아, 불가리아, 루마니아 등에서 반란이 연쇄적으로 일어났고, 18세기 이래로 가장 위협적인 적이 된 러시아가 이 반란을 사주하고 지원했다. 국내적 위기는 지출을 폭증시켰고, 마침내 1875년에 오스만 제국은 파산까지 선언할 정도로 재정이 악화돼 있었다.

거기에 술탄 승계 문제까지 꼬여들어갔다. 1876년에 죽은 압뒬아지즈의 뒤를 이은 술탄인 무라드 5세가 정신질환을 앓고 있던 까닭이다. 결국 무라드 5세는 3개월만 제위하고 물러나게 되었다. 이런 어려운 상황에 황제의 자리를 이어받은 이가 바로 압뒬하미드 2세였다.

헌정 실험, 이슬람, 근대화  

1876년에 압뒬하미드 2세가 제위하자마자 실시한 것은 바로 헌정이었다. 이는 오스만 제국 정치사에 있어서 이정표가 될만한 혁신이었는데, 그 전의 탄지마트가 제도적, 법적 개혁을 어느 정도 추진하긴 했어도 여전히 술탄 전제정에 기반하고 있었다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압뒬하미드 2세는 이 한계를 깨버렸다.

살펴보면 전제적인 요소가 많은 헌법이긴 했어도 어쨌든 그는 오스만 제국 역사상 최초의 헌정을 수립한 황제가 되었다. 헌법 하에서 오스만 제국의 신민들은 모두 공민의 자유와 법적 권리를 갖게 되었으며, 모든 사람들은 제국의 평등한 구성원으로서 대우받을 수 있게 되었다. 동시에 선거로 선출된 최초의 오스만 의회도 설치되었다.

하지만 헌정의 꿈이 오래 이어지지는 못했다. 1878년에 압뒬하미드 2세가 의회를 폐쇄하고 헌정을 종료시켜버린 것이다. 그에게도 나름의 사정이 있었다. 압뒬하미드가 제위하기 고작 몇개월 전에 일어났던 불가리아 반란이 발단이었다. 오스만 제국군은 불가리아 반군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1만 5천명에서 3만명 가까운 인원이 학살당하고 만 것이다. 기독교도의 학살에 유럽 전역의 여론이 오스만 제국에 불리하게 돌아가게 되었고, 특히 슬라브족과 정교회의 보호자를 자처한 러시아는 전쟁 명분까지 만들어냈다. 그동안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해주던 영국마저도 오스만 제국에 등을 돌릴 정도였다. 그 결과 발생한 러시아-튀르크 전쟁은 1878년까지 지속되었는데, 오스만 제국은 이번에도 대패하였다.

압뒬하미드 2세 (제34대 술탄, 99번째 칼리프. 재위 기간: 1876년~1909년)

압뒬하미드 2세 (제34대 술탄, 99번째 칼리프. 재위 기간: 1876년~1909년)

1878년에 전선이 붕괴하면서 러시아군은 마침내 이스탄불 코앞까지 진격해 들어올 수 있었다. 제국의 운명이 백척간두에 서게 된 것이다. 다행히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개입으로 오스만 제국은 어쨌든 생존할 수는 있었다. 불가리아를 비롯한 상당수의 발칸 영토를 상실하긴 했어도 전부 상실하지는 않았다. 압뒬하미드 2세는 이런 상황에 직면하여 치밀하게 계산을 굴리기 시작했다. 그는 평소 굉장히 철저하고 조심스러운 성격이었다고 전해진다. 그가 보기에, 베를린 조약으로 제국이 심대한 타격을 입은 이 상황에서 헌정을 지속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았다.

따라서 긴급조치로 헌정을 중단한 후 술탄의 전제적 권리를 다시금 회복해야만 했다. 그는 단순히 헌정만 중단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권력에 해가 될 모든 요소들을 철저히 관리했다. 반대파를 탄압했고 언론을 검열했으며 비밀경찰을 운영하기도 했다. 이런 억압책에 더해 경제까지 위태로웠으니 민심이 압뒬하미드 2세를 따라올 리가 없었다. 압뒬하미드 입장에서는 국민들의 지지를 끌어모으고 개혁을 위한 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새로운 상징을 동원할 필요가 있었다.

해답은 바로 이슬람이었다. 역설적으로, 베를린 조약이 만들어낸 궤멸적 상황이 압뒬하미드의 이슬람화 정책에는 크나큰 도움이 되었다. 이제 더이상 과거처럼 무슬림과 비무슬림 사이의 갈등이 문제를 일으킬 일은 없었다. 문제가 되는 비무슬림 지역의 대다수가 독립해버렸기 때문이다. 압뒬하미드는 ‘남은 것이라도 잘 지키자’라는 정신으로 사회의 공적 영역에 이슬람 정신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이 정책들은 라마단 기간이 되면 무슬림들에게 몸을 경건히 하라는 지시를 내리는 사소한 것부터 형식적으로만 있던 모든 무슬림들의 지도자인 칼리프 직위를 적극적으로 내세우는 큰 사업까지 모두 포괄했다.

그렇지만 이것이 전근대적인 회귀는 결코 아니었다. 역설적으로 헌정이 중단되고 이슬람화가 가속화되던 압뒬하미드 2세의 30년 통치 시기에 오스만 제국의 근대화는 절정에 달했다. 예를 들어 압뒬하미드 2세를 칭송하고자 작곡된 다음 노래의 가사에는 이런 구절들이 있다(이 노래가 언제 작곡되었는지는 찾지 못했다).

폐하께서는 헤자즈에 철도를 부설하셨고
하미디예 연대를 창설하셨다.
수많은 영혼들이 국경으로 달려갔다.

폐하께서는 할리치에 새로운 조선소를 건설하셨고
대양에는 잠수함을 보내셨다.

지식, 과학, 기술에 있어서 뒤쳐지지 않았고
얼마나 많은 학교와 도로가 그의 손으로 만들어졌던가
그의 시대에 우리는 세계 위에 서는 국가가 될 수 있었다.
영도자 압뒬하미드 한이시여
천국에 술탄 압뒬하미드 한의 자리가 있기를.

Dosetti Hicaz’a demiryolları
Kuruldu Hamidiye alayları
Hudutlara ko?tu onbinlerce can

Halicte yeni bir tersane kurdu
Denizaltıları deryaya vurdu

lim, fende, teknikte kalmadı geri
Nice mektepler, yollar onun eseri
Devrinde olmu?tuk cihan devleti
Serdar-ı Hakan Abdulhamid Han
Cennet Mekan Sultan, Abdulhamid Han

이슬람 근대주의

이 가사에는 철도, 잠수함, 근대적 학교, 과학에 대한 자부심이 가득하다. 이처럼 압뒬하미드 2세는 이슬람화를 추구했지만 그가 이전의 예니체리들이나 울라마와 같은 평범한 보수주의자였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가 근대화를 추구했지만, 탄지마트 시대 관료들처럼 전적인 서구화를 추구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이후 이슬람 세계의 중요한 지적, 정치적 조류로 탄생하게 되는 ‘이슬람 근대주의’를 추구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치세가 시작되었을 때 이스탄불의 신식 초등학교는 단 6개 밖에 없었으나 10년만에 50개로 증가했다. 전국의 신식 초등학교 수는 1877년에 200개도 안 되는 수로 시작하여 1893년에 3,057개, 1906년에 9,347개에 달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학교들의 커리큘럼을 채운 것은 오스만, 이슬람의 전통에 기반한 도덕 윤리들과 근대적 과학기술 교육이었다.

헤자즈 철도 건설은 그의 정책의 성격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상징적인 사업이었다. 헤자즈는 이슬람의 성지가 있는 메카와 메디나 지역을 의미하는데, 사실상 이 지역은 중앙 정부의 통제를 벗어난 반 자치지역이나 다름 없었다. 그리고 치안도 어지러워서 성지 순례를 가는 데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들 수밖에 없었다. 비록 완공을 시키진 못했지만, 압뒬하미드 2세는 다마스커스에서 메카까지 이어지는 철도를 부설하도록 지시함으로써 자신을 이슬람 근대화를 상징하는 군주로 만들었다.

헤자즈 철도 노선도

헤자즈 철도 노선도 (다마스커스에서 성지 메카까지)

압뒬하미드 2세의 이런 전략은 오스만 제국의 외교 노선에 점진적인, 그러나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첫째로 그는 파리와 런던에서 유학하고 온 탄지마트 관료들을 그렇게 선호하지 않았다. 그들이 과도하게 서구화에 집착하여 영국과 프랑스에 간과 쓸개까지 빼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국은 특히 러시아의 강력한 남진정책을 막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동맹국이었다. 영국을 버리는 것은 오스만 제국 입장에서 러시아의 위협에 그대로 노출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이제 압뒬하미드 2세는 후퇴를 할 수가 없었다. 러시아가 정교회의 보호자를 자처하면서 오스만 제국 내의 기독교도들을 동요시켰듯이, 압뒬하미드 2세의 이슬람화 정책도 비슷한 효과를 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는 내부 결집용으로 자신의 칼리프 권한을 내세웠으나, 바깥에서 보는 시각은 전혀 달랐다. 오스만 제국 바깥에 있는, 주로 영국과 프랑스의 지배를 받는 무슬림들이 동요할 조짐을 보였던 것이다. 설령 압뒬하미드 2세의 칼리프권 행사가 실제로 대영제국과 프랑스 제국에 진지한 위협이 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들에게 문제는 여전히 남게 되었다.

바로 독일이 떠오르면서 오스만 제국에게 접근하기 시작한 것이다. 독일은 영국과 프랑스와 달리 지배하는 무슬림 지역이 전혀 없었다. 따라서 독일 입장에서 칼리프권 행사는 오히려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를 흔들 수 있는 카드가 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독일의 새로운 가상 적국으로 부상한 러시아의 무슬림들에게도 마찬가지 효과를 기대할 수 있었다.

한편 오스만 제국은 독일이 부상함에 따라 과거의 라이벌이었던 영국과 러시아가 점점 가까워지는 것에 위기를 느꼈고, 새롭게 동맹을 조정할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렇게 양자의 이해관계가 합치하게 되자, 독일, 오스트리아, 오스만을 잇는 새로운 축이 등장할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물론 이 새로운 협력관계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이었는지는 그 때까지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러니까 10여년 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게 될 때까지는 말이다. (셀림 3세부터 지금까지의 본문 서술은 [쇠망사를 보는 새로운 시각; 19세기 오스만제국의 위기와 ‘이슬람적 근대화’]을 참조했음. – 필자)

1908 쿠데타 ‘청년 튀르크당’ 

30년 간 지속되던 압뒬하미드 2세의 통치는 1908년에 일어난 쿠데타로 갑작스럽게 종식되게 된다. 쿠데타를 일으킨 조직의 이름은 “연합진보위원회(Ittihat ve Terakki)”이었는데, 세간에는 ‘청년 튀르크당’(Young Turks)라는 이름으로 훨씬 더 잘 알려져 있다.

청년 튀르크 혁명 선언 (1908)

청년 튀르크 혁명 선언 (1908)

초창기 청년 튀르크당의 구성원들은 주로 압뒬하미드 2세의 전제적 통치에 반대하며 망명 생활을 시작한 언론인, 정치운동가들을 비롯한 지식인이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국내의 청년장교단들의 입김이 거세지고 있었다. 바로 이 장교단들이 지식인 억압, 군의 낙후성, 수세적인 대외정책에 불만을 품고 압뒬하미드 2세에게 헌정을 복구하라고 요구했던 것이다. 이들은 만약 헌정 회복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이스탄불로 진격해 쿠데타를 일으킬 것이라고 황제를 위협했다.

이 쿠데타가 이전의 반발과는 전혀 다른 성격이었다는 것은 주목할만하다. 즉, 이들이 문제 삼는 것은 개혁의 방향성과 방법론이었다. 과거 탄지마트 시대처럼 개혁과 근대화 프로젝트 자체에 의심을 품는 사람들은 거의 사라졌다. 1909년, 청년 튀르크당 주도 하의 제2차 헌정이 실시되었다. 이 시기에는 자유로운 언론 활동도 보장되었고, 교육도 더 확충되었으며, 여성의 지위도 이전보다 더 향상되었다. 압뒬하미드가 강조했던 오스만주의, 이슬람화는 공식적으로 폐기되지는 않았지만, 이제 2선으로 밀려났다. 다시 서구주의자들이 운전대를 잡게 된 것이다.

그러나 민족주의의 발흥, 열강들의 경쟁은 오스만 제국을 도저히 손에서 놔주질 않았다. 1911년, 리비아의 통제권을 놓고 오스만 제국과 이탈리아의 전쟁이 개시되었다. 1912년에는 불가리아, 세르비아, 그리스 연합군과 오스만 제국이 격돌한 발칸 전쟁이 있었다. 이 두 전쟁에서 오스만 제국은 다시 처참하게 패배했다. 군사적 위업을 등에 업고 등장한 정부였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제 오스만 제국은 발칸 반도에서 이스탄불 주변의 조그만 영토를 제외하고는 모조리 상실하게 되었고, 그 반동으로 군사 강경파가 쿠데타를 일으켜 제국의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이 군사 강경파들은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고 오스만 제국의 생존을 도모하겠다는 판단 하에 공식적으로 독일, 오스트리아 제국에게 접근하였다. 그리고 서구화와 탈종교화, 세속화 드라이브는 이전보다 더욱 가속화되었다. 1916년에는 셰이훌이슬람(Seyhulislam, 이슬람 황제인 파디샤가 직접 임명하는 무슬림 최고 성직자)의 권력도 대폭 축소되었다. 1917년에는 유럽식의 가족법이 공포되었다.

이슬람 대신 ‘튀르크 민족’ 

한편 이들은 이슬람의 빈자리를 채울 새로운 정체성을 국가의 근간으로 내세우게 되는데, 바로 터키어를 쓰는 ‘튀르크 민족 정체성’이었다. 보편 제국을 지향하던 오스만 제국은 점차 민족화되어갔다. 터키어를 쓰는 튀르크인의 제국이 바로 오스만 제국이었다. 과거 시골 촌부나 유목민을 자동적으로 연상시키던 단어인 튀르크는 이제 600년 제국의 영광을 상징하는 말로 탈바꿈했다. 같은 무슬림인 아랍인들에 대해서도 의심과 통제가 시작되었다. 3개 대륙에 걸친 신민을 포용하는 오스만 제국으로의 회귀는 이제 상징 차원에서도 돌아갈 수 없었다.

그렇게 청년 튀르크 정부를 거치면서 현대 터키 공화국의 주요한 요소들이 정착하게 되었다. 현대적 국가를 만들기 위한 서구지향, 사회를 선도하는 군의 역할, 폭력적인 쿠데타의 관행, 종교정체성 대신 강조되는 언어와 민족 정체성이 바로 그것이었다. 물론 1913년에 정권을 잡은 청년 튀르크당 강경파들의 꿈이 실현되는 일은 없었다. 그들이 수호하고자 했던 오스만 제국이 그 다음 해에 기나긴 쇠퇴를 마무리하고 진정 파멸로 가는 발자국을 뗐기 때문이다.

1914년에 영국과 독일 사이에서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이 파멸로 가는 길이었다. 영국은 이번 전쟁에서 독일을 이기기만 하면 오스만 제국의 수도가 포함된 다르다넬스 해협 지대를 러시아에 양도하겠다고 보장해주었다. 러시아는 과거 자신들 문명의 뿌리라고 여긴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를 되찾겠다는 상징적 이유, 그리고 지중해로 나가는 안정적인 통로를 확보하겠다는 전략적 이유 때문에 이스탄불을 언제나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오스만 제국은 생존을 위해서라도 독일편에 합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오스만 제국은 제1차 세계대전에 발을 담갔다.

인간의 기계문명이 최초로 자신에 대한 전 지구적 대량 살을을 가져온 첫 번째 체험, 제1차 세계대전.

인간의 기계문명이 최초로 자신에 대한 전 지구적 대량 살상을 가져온 첫 번째 체험, 제1차 세계대전.

모든 걸 쓸어버린 대홍수, 제1차 세계 대전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러시아는 독일과 맞붙으면서 자신의 전근대적 체제가 얼마나 근대적 총력전에 취약한지 입증해보여주었다. 그렇지만 다른 나라들은 상황이 더 심각했다. 그 러시아군에게도 완전히 깨진 게 오스만 제국군이었기 때문이다. 오스만 제국은 생존을 위해서 동원체제를 세우고 수백만 명을 전시 소집하면서 그동안 놀지만은 않았음을 입증했다. 하지만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전투를 지속하기 위한 보급이 너무나 부족했고, 수많은 병사가 캅카스 산맥에서 죽어나갔다.

또한, 여전히 남아있던 민족 간의 분규가 터져나왔다. 특히 100만 명 이상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아르메니아 학살은 오스만 제국의 근대화된 시스템이 얼마나 조직적으로 폭력을 사용할 수 있는지 보여준 사례가 되었다.

오스만 제국이 소수 민족이나 변두리에 거주하던 기독교계 아르메니아인을 집단적으로 학살한 사건. 특히 제1차 세계 대전 중 강제이주를 시행하면서 수많은 아르메니아인을 학살했다. 현대의 첫 번째 조직적 집단학살사건. 1915년에서 1916년에 걸쳐서 통일과 진보위원회(통칭은 통일파, 이른바 청년 투르크당) 정권에 의해 오래전부터 아르메니아인이 거주한 곳(대 아르메니아)의 남서쪽에서 있던 오스만 제국령 아나톨리아 동부에서 아르메니아인 강제 이주 정책으로 인해 대부분의 아르메니아인이 희생됐다.

아르메니아인 집단학살 사건(1915~1916). 제1차 세계대전 중인 1915년에서 1916년에 걸쳐 ‘청년 투르크당’ 정권에 의해 오래전부터 아르메니아인이 거주한 곳(대 아르메니아)의 남서쪽에서 있던 오스만 제국령 아나톨리아 동부에서 아르메니아인 강제 이주 정책을 시행하면서 아르메니아인을 집단적으로 학살한 사건. 현대의 첫 조직접 집단학살사건(통설). 희생자의 규모는 약 100만 명. 아르메니아 집단학살 사건은 러시아와 영국의 참전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영국은 아랍인들로 하여금 오스만 제국에서 독립하라고 계속 부추겼다. 그렇게 아랍 대반란도 시작되었다. 오스만 제국 정부도 아랍인을 믿지 않았다. 오죽하면 “알라와 아랍인 사이에는 같은 언어를 쓰는 것 말고는 어떠한 공통점도 찾아볼 수 없다”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오스만 제국 입장에서 제1차 세계대전은 모든 것을 쓸어버린 대홍수나 다름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희망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오스만인들은 자신의 국가를 지키기 위해서 분전하고 있었다. 다만 시스템이 따라주지 않았을 따름이었다.

그런데 이스탄불 코앞에 있는 차낙칼레에서 기적이 벌어졌다. 마침내 오스만군이 다르다넬스 해협을 장악하겠다고 차낙칼레에 상륙해온 영국군을 치열한 분전 끝에 격퇴했기 때문이다. 수도의 존립을 지켜낸 전략적으로 진정 값진 승리였다. 그리고 이 승리의 배후에는 지휘관이 하나 있었다. 그 지휘관의 이름은 무스타파였고, 수학을 잘한다고 하여 “완벽하다”는 뜻의 ‘케말’이라는 별명도 갖고 있었다. 그리고 1934년에 터키 국회로부터 주어진 그의 성은 바로 아타튀르크였다.

제1차 세계 대전은 장차 터키공화국의 '국부'가 되는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를 역사로 호명하게 된다.

제1차 세계 대전은 장차 터키공화국의 ‘국부’가 되는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를 터키 역사의 한복판으로 불러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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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임명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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