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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x type=”note”]친일파 사전에 올라온 이태희 검사. 그는 국가라는 이름으로 무고한 양민을 대규모로 학살한 ‘국민보도연맹’의 최고지도위원이기도 했습니다. 이태희의 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이라는 건 그런 거예요. 언제든지 공평하지 않은 게 인생이라고요. 공평하지 않은 게. 가령, 독립운동 하는 사람들은 왜 가난하게 살고, 친일했던 사람은 잘 살고 그러냐. (중략) 잊어버리고 미래를 생각하는 게 더 나아요. 그런데 지금 문재인 씨는 미래 이야기하는 건 난 들어본 적이 없어요. (중략) 과거 뒤지는 게 전 제일 미워요.”

– 어르신, 그런데 과거도 좋은 미래로 가려면 과거를 정리하는 것도 중요한 거 아닌가요?

“사람의 능력은 한계가 있으니까. 둘 중 하나를 택해야죠. 그래도 막내인 저한테 왔으니까 다행이네요. ( – 왜요?) 저 위 형한테 갔으면 매 맞았을 거예요.”

SBS 그것이 알고 싶다, ‘도둑골의 붉은 유령 – 여양리 뼈 무덤의 비밀’ 중에서 (1089회, 2017. 8. 19. 방영)

수만 수십 만명이 학살당한 보도연맹 사건의 가해자 이태희 검사의 아들은 "인생은 원래 불공평한 것"이라고 말한다.

며칠 전 SBS [그것이 알고 싶다] (이하 ‘그알’)는 ‘보도연맹’ 사건을 다뤘습니다. 이승만은 광복 이후 자신의 빈곤한 지지기반을 채우기 위해 친일파를 다시 등용했고, 친일파는 미국이 후견인 역할을 한 이승만 정권하에서 ‘친미’로 옷을 갈아입었습니다. 항일 독립운동가를 때려잡았던 그 솜씨로 이승만 정권의 ‘잠재적 경쟁자’를 빨갱이로 낙인 찍고, 그들을 때려잡기 위해 나섰습니다.

그 과정에서 무고한 양민이 경찰과 군인에게 학살당했습니다. 전향한 ‘좌익분자’는 물론이고, 국민보도연맹이 뭔지도 모른 채 그저 약간의 보리쌀과 보도연맹원증을 맞바꾼 아무것도 모르는 국민들까지. 왜 죽어야 하는지도 모른 채 수많은 이들이 죽었습니다. 국가에 의한 민간인 대량 학살, 이른바 ‘보도연맹 사건’입니다.

도둑골 유해 발굴 당시의 영상
도둑골 유해 발굴 당시의 영상 중 일부. 이 유해들은 보도연맹 사건 희생자의 것으로 추정된다.

가해자의 후손은 “과거를 뒤지는 게 제일 밉다”면서 미래를 택하라고 훈계합니다. 피해자의 후손은 그저 숨죽인 채 “억울하다”고 눈시울을 적십니다. 지금 2017년 대한민국에서 벌어지는 ‘진행형의 역사’입니다. 과거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교훈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마산 여양리에서 보도연맹 희생자의 죽음은 뼈 무덤이 되어 ‘여양리 학살 사건’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남았습니다. 1999년 경남도민일보 김주완 기자는 그 학살 사건을 최초로 취재해 보도했습니다. 며칠 전 방영된 ‘그알’에서 생생한 취재담을 전하기도 했죠. 오늘 김주완 기자의 1999년 기사를 다시 읽습니다.

여양리 민간인 학살을 취재해 최초로 보도한 김주완 기자.
여양리 민간인 학살을 취재해 최초 보도한 김주완 기자.

기사에 담긴 목소리는 여전히 우리를 질타하는 것 같습니다. 왜 대한민국에 정의를 바로 세우지 못 했느냐고 우리를 나무라는 것 같습니다. 가해자 후손이 훈계하고, 피해자와 그 후손은 숨죽이는 이 야만의 세월을 우리는 여전히 방치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이 잘못 흘러간 역사를 지금이라도 바로 세우려면, 먼저 그 죽음을, 그 기억을 다시 거듭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편집자)[/bo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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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장마 레인

 

“비가 억수로 쏟아졌지. 그때가 아마 음력 6월 중순쯤 됐나 몰라. 그러고 나서 한 달도 채 못돼 여기서도 전투가 벌어졌으니까.”

마산시 진전면 여양리 옥방마을의 박 모 씨(68)는 이렇게 49년 전의 기억을 더듬어 냈다. 그의 기억에 따르면 진주가 인민군에게 함락되지 전이었으니까 적어도 음력 6월 17일(양력 7월 31일) 이전이다.

어쨌든 1950년 7월 하순쯤이었던 건 분명한 것 같다. 오전 8시쯤이었다. 진주시 반성면에서 국도를 따라 10여 대의 군용트럭이 흙먼지를 자욱하게 일으키며 발산고개를 넘고 있었다.

2004년 여양리에서 발굴된 피학살자의 유품.
2004년 여양리에서 발굴된 피학살자의 유품.

트럭 적재함에는 모시 한복을 입은 민간인들이 가득 타고 있었고, 그들은 모두 손을 뒤로 한 채 묶여 있었다. 발산고개를 지난 트럭의 행렬은 봉암리를 지나 양촌리 대정마을로 접어들었다.

잠시 차를 멈춘 후 지휘관인 듯한 장교가 내렸다. 차림새로 보아 보통군인은 아닌 것 같았다. 아침 등굣길에 이 모습을 목격한 박 씨는 그들을 헌병이라고 생각했다.

그 장교는 지서를 찾았고, 곧이어 전투복 차림의 지서장과 순경들이 달려왔다. 그러는 동안 트럭에 실린 민간인들은 양 사방에서 총을 겨누고 있던 군인들의 명령에 따라 고개를 푹 숙인 채 죽은 듯이 서 있었다.

“트럭은 적재함 난간을 올려세운 상태였는데, 사람들이 모두 서 있었어. 트럭 한 대에 약 30여 명이 탔으니까 그들이 모두 앉으려면 자리가 비좁았을 거야. 그래서 서 있었던거지.”

지서장과 뭔가 이야기를 나누던 장교는 결심한 듯 다시 차에 올랐다.

“그때 아마 총살할 장소를 물색하고 있었던 것 같아. 마산형무소까지 데려가 봤자 죽이려면 다시 끌고 나와야 할 테고, 어차피 죽여야 할 사람들이니까 번거로움을 피하자는 생각이었는지도 모르지.”

2004년 경남대학교에서 열린 마산 진전 여양리 피학살 민간인 유해 발굴 작업 결과 보고회에서 이상길 교수가‘태인’이라는 이름이 새겨진 도장과 관련 유골·유물을 설명하고 있다./유은상 기자
2004년 경남대학교에서 열린 마산 진전 여양리 피학살 민간인 유해 발굴 작업 결과 보고회에서 이상길 교수가‘태인’이라는 이름이 새겨진 도장과 관련 유골·유물을 설명하고 있다./유은상 기자

학살… 그리고 시체 수습에 동원된 주민 

트럭은 대정마을을 지나 대량·거락·샛담·들담·옥방을 지나 여항산 골짜기로 통하는 둔덕마을 아래 저수지 앞에 정차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이곳은 행정구역상 함안군 여항면 여양리에 속했다. 군인들은 총을 겨눈 채 트럭에 실린 민간인들을 끌어내렸다. 그들은 흰 광목천에 의해 굴비 두름처럼 엮여 있었다.

둔덕마을은 일제강점기 일본인이 경영하던 소화 광산이 있던 곳이었다. 당시 이곳은 구리가 났었는데, 해방 후에도 곳곳에 폐광이 남아있었다. 저수지 옆 작은 골짜기에는 금굴이라는 폐광이 있었다. 군인들은 이곳 금굴 근처의 멧등거리(묘지)로 민간인들을 끌고 갔다. 곧이어 산을 찢어발기는 듯한 총성이 둔덕 골짜기를 가득 메웠다.

“서울 쪽에서 전쟁이 났다고는 하지만 여긴 총소리가 귀할 때였어. 그때까지 이곳에선 전투가 없었거든.”(문 모 씨·71·진전면 양촌리 대정마을)

“그때 우리는 겁이 나서 집안에 처박혀 있었지. 총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지만 누가 나가볼 사람이 있겠어.”(김 모 씨·여·91·진전면 여양리 옥방마을)

총성에 놀랐는지, 갑자기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엄청난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핏물이 개울물에 씻겨 내려오기 시작하더라구. 그때 비가 안 왔다면 피비린내가 더 진동을 했을 거야.”

200명은 족히 넘는 민간인들을 이렇게 학살한 군인들은 다시 지서장을 찾았다. 그에게 죽은 사람의 숫자를 말해주고 “혹시 목숨이 붙어있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니까 철저히 확인 사살하라”는 지시를 내린 후 마산 쪽으로 사라졌다.

2004년 여양리에서 발굴된 유골.
2004년 여양리에서 발굴된 유골.

명령을 받은 지서장은 그동안 집 안에서 숨을 죽이고 있는 마을 사람들에게 동원령을 내렸다. 시체를 치우러 나오라는 것이었다. 둔덕과 옥방마을의 20세 이상의 남자는 모두 이 일에 동원됐다. 과연 군인의 예상대로 온몸에 총을 맞고도 그때까지 살아있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그때 시체를 묻어주고 온 시숙이 벌벌 떨면서 ‘목숨이 붙어있던 사람들이 살려달라고 애원을 하더라’면서 엉엉 울더라구. 그런데 경찰이 옆에서 지켜보고 있으니 살려줄 수가 있나. 어휴, 지금도 소름이 끼치네.”(김 모 씨·여·77·진전면 여양리 둔덕마을)

마을 사람들은 시체끼리 엮어 놓은 광목을 낫으로 자른 후 인근 폐광(금굴)으로 옮겼다. 그러나 시체가 워낙 많아 이내 금굴이 가득 찼다. 굴 입구를 돌멩이로 막은 후 다른 곳에 구덩이를 팠다. 거기에 또 수십 구의 시체를 묻고 흙과 돌을 덮었다.

“조심해 이 할망구야” 

“여름이라 시체 썩는 냄새가 워낙 독해 사람들이 코피를 흘릴 정도였다. 시체를 묻은 곳에서는 며칠 동안 허연 김이 피어올랐다. 그래서 참다못한 마을 사람들이 며칠 뒤 다시 흙을 퍼 나르기도 했다.”

당시 2차로 지게에 흙을 져 나르는 작업에 참여했다는 박 모 씨(65·진전면 여양리 옥방마을)는 “요즘도 그들이 묻힌 곳을 지나가려면 꺼림칙한 기분이 든다”고 말했다.

경남도민일보가 1999년 여양리 학살 사건을 보도한 지 3년이 지난 2002년 태풍 루사로 인한 산사태가 나자 이렇게 유골이 떠내려 왔다. @김주완
경남도민일보가 1999년 여양리 학살 사건을 보도한 지 3년이 지난 2002년 태풍 루사로 인한 산사태가 나자 이렇게 유골이 떠내려왔다. @김주완

주민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이곳에서 총살당한 사람들은 진주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보도연맹원들이라고 한다.

이후 생존자 한 명이 사흘간 숲속에 숨어있다가 배가 고파 마을에 내려왔으나 마을사람들은 후환이 두려워 그를 지서에 신고했다. 그는 다시 경찰에 의해 총살됐었다. 이 과정에서 그는 ‘하동 출신의 삼대독자’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이밖에도 당시 군인들이 일러주고 간 숫자가 시체의 숫자와 7~8명 정도 차이가 났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그만큼의 사람들이 살아서 도망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이처럼 둔덕 골짜기의 대학살극은 주민들의 증언에 의해서만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을 뿐 어떤 기록도 남아 있지 않다. 당시의 상황을 기억하고 있는 주민들도 모두 60대 중반 이상의 고령이어서 얼마 지나지 않아 영원히 잊혀버릴 가능성도 없지 않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70대 할머니 한 분은 기자가 당시 학살사건을 묻자 “그때 비도 참 억수로 왔지….” 하면서 얘기를 꺼내려다가 옆에 앉아 있던 다른 할머니가 옆구리를 툭 치니 갑자기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때부턴 아무리 설득을 해도 “우리는 모른다”며 시치미를 뗐다.

포기하고 돌아서는데,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런 말이 들려왔다.

“조심해 이 할망구야. 잡아가면 어쩔려구 그래.”

 

– 1999년 10월 26일 자 경남도민일보 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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