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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26일 뉴욕에서 열린 첫 번째 대선 후보 토론회는 재미없었다. 다들 트럼프와 클린턴의 대선 토론회를 마치 권투선수 메이웨더와 파퀴아오의 세기의 대결처럼 흥분했는데,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정말로 메이웨더와 파퀴아오의 대결이었다(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아는 사람은 알 거다).

부부싸움 같았던 첫 토론회 

트럼프와 클린턴의 얼굴이 화면에 반반씩 등장하는 토론회를 한 시간 반 동안 들여다보니, 적절한 비유일지는 모르겠지만, 마치 평생을 싸우며 살다가 이혼하기 직전에 부부 상담에 처음 온 나이든 백인 부부를 보는 기분이었다.

두 사람이 과거에 사이가 좋았다는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라(물론 정치인과 기업가는 사이가 좋다. 이 둘이 사이가 나빠진 건 둘 중 하나가 다른 사람의 직업을 가지면서부터다), 두 사람의 대화하는 태도, 정확하게는 대화하지 않는 태도가 꼭 부부 상담에 나와서 싸우는 ‘오래 같이 산 부부’의 매너리즘을 그대로 닮았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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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이 분명히 같은 사건을 이야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처럼 딴 얘기를 하는 거다. 여자가 이야기하면 남자는 사사건건 ‘웃기고 있네, 그런 일 없었어!’ 하며 빈정거리고, 남자가 이야기하면 여자는 ‘나는 너보다는 한 수 위야!’라는 자세로 억지로 웃으면서 고개를 흔든다. 그게 첫 번째 토론회에서의 둘의 모습이었다.

원래 싸움 구경은 불구경 다음으로 재미있다고 하지만, 부부싸움 만은 아무도 재미있어하지 않는 이유는 부부싸움이라는 것이 대개 서로가 다른 현실 속에서 가상의 상대를 만들어놓고 자기 생각에 이기는 경기를 치를 뿐, 상대방은 전혀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일단 팩트부터 공유되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 부부싸움만큼 팩트가 중요하지 않은 싸움이 또 있을까?

토론회의 승자는 누구? 

아이러니한 것은 미국 언론의 대선 보도 팩트 체크(fact check) 수준이 최고도로 발전한 이번 선거가 어쩌면 이제까지 미국 대선들 중에서 팩트가 가장 불필요한 선거일 거라는 사실이다.

단적인 예로, 토론회가 끝난 후 미국 언론이 흔히 하는 ‘토론회의 승자는?’류의 기사가 많는데, 언론, 특히 주류 언론에서는, 일제히 클린턴이 이겼다고 했다. CNN은 클린턴의 압도적인 승리라고 했고, 뉴욕타임스는 한술 더 떠서, “공화당과 민주당의 전문가들이 모두 클린턴이 이겼다고 평가했다”고 보도했다.

우승자 위너 1등

하지만 정작 각 언론사의 웹사이트에 걸려 있는 방문자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는 트럼프가 이겼다는 결과가 훨씬 많이 나왔다. 보수언론들만 그런 것도 아니다. NBC, 타임, 텔레그래프뿐만 아니라, CNBC와이어드 같은 곳에서도 트럼프가 더 잘했다는 투표결과를 보여줬다.

그 문제와 관련해서는 salon.com에서 정확하게 분석하고 있지만, 그 이유는 누구나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열성적인 지지자들이 몰려가서 온라인에서 여러 번 누를 수 있는 여론조사는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둘 중 어느 한쪽이 더 잘했다는 인상을 받지 못했다. 어느 한쪽도 ‘압도적으로’ 잘 했다고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쪽이 잘 했다고 쉽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그쪽을 지지하던 사람일 거로 생각한다.

클린턴의 하락세, 트럼프의 상승세 

오히려 더 관심을 끄는 건, 왜 클린턴 지지자가 트럼프 지지자가 그랬던 것처럼 온라인에 몰려가서 여론조사에 열성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그게 클린턴 진영이 맞닥뜨린 문제다. 트럼프 지지자는 수는 좀 적어도 열성적이지만, 클린턴 지지자는 그 반대다.

미국 언론들이 흔히 하는 보도는 “만약 내일 선거를 한다면 누가 승리할 것인가?”라는 예측이다. 참고로, 이 글을 쓰는 현재 뉴욕타임스는 70대30으로, 파이브써티에이트(Fivethirtyeight)은 58.2대 41.8로 클린턴의 승리를 점친다. 그런 보도 태도가 좋은 이유는 그건 어디까지나 현재 시점일 뿐 앞으로 몇 주 후의 승리를 예견하는 건 아니라는, 한계의 인정이기 때문이다.

누가 대통령에 당선될까? 힐러리 클린턴 57.5%: 도널드 트럼프 42.5% (출처: fivethirtyeight.com, 캡처 시점: 2016. 9. 29) http://projects.fivethirtyeight.com/2016-election-forecast/
누가 대통령에 당선될까? 힐러리 클린턴 57.5%: 도널드 트럼프 42.5% (출처: fivethirtyeight.com, 캡처 시점: 2016. 9. 29. 08:30)

그런 점에서 볼 때 현재의 승률보다 더 중요한 건, 특정 후보가 ‘상승세,’ 혹은 ‘하락세’에 있느냐이고, 앞으로 어느 쪽이 더 상승할 것인지를 예측하기 위해서는 어느 쪽 지지자들이 더 열성적인지를 알아보는 것도 중요하다.

클린턴에게 지금 필요한 건 ‘열정적인 지지자’ 

그런 점에서 봤을 때 각종 웹사이트에 열성적으로 참여하는 지지자들을 가진 트럼프는 유리한 고지에 있다. 실제로 전당대회 직후 거의 80%에 육박했던 클린턴의 당선 가능성은 꾸준히 떨어지고 있고, 트럼프는 상승세에 있다.

토론회 하루 전 트위터에서 인기를 끌었던 사진이 하나 있다. 클린턴을 배경으로 젊은 여성들이 일제히 등을 돌리고 서서 셀카를 찍는 모습이었다. 처음 보는 순간 클린턴이 외면당한 듯한 느낌을 줘서 재미있는 그 사진은 클린턴 진영에게는 아주 중요한 사진이다.

출처: Victor Ng @victomato (2016. 9. 25) https://twitter.com/victomato/status/780119655423676416
이 사진은 트위터에서 2만회 이상 리트윗됐다. (사진: Barbara Kinney @barb_kinney) 이 사진은 트윗 이용자 @victomato, (2016. 9. 25)이 트윗에 올려 널리 공유됐다.

첫째, 자발적으로 퍼지는 지지자의 입소문(organic reach, viral reach)은 돈이 들지 않을 뿐 아니라 호소력도 강하고, 둘째, 힐러리의 아킬레스건인 젊은 여성들이 힐러리와 사진을 찍고 싶어 한다는 스토리가 나오기 때문이다. 그 사진이 얼마나 현실을 잘 반영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힐러리는 젊은 여성들의 열성적인 지지가 절실하게 필요한 상황이다.

클린턴의 미션, ‘진지한 트럼프를 막아라’ 

다시 토론회로 돌아가 보면, 토론의 전반부까지 봤을 때는 트럼프가 잘했다고 본다. 그의 주장이 팩트에 근거한 훌륭한 주장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의 공격이 그의 지지자들로 하여금 클린턴을 미워하도록 하는 충분한 이유를 제공했고, 중도, 혹은 부동층이 보기에 ‘저 정도면 미국의 대통령이 되어도 쪽팔리지는 않겠다’는 정도의 안정감을 전달했다.

물론 클린턴 진영이 가장 우려하고, 그래서 가장 많은 대비를 한 것이 트럼프 진영의 그러한 ‘진지한 후보 만들기’ 전략이다. 이유는? 이제부터는 부동층[footnote]보라색 주(purple states) 혹은 경합 주(swing states).[/footnote]을 잡는 싸움이기 때문이다.[footnote]여기에 대해서는 다음 업데이트에서 좀 더 자세히 설명해보려고 한다.[/footnote]. 민주당과 공화당 지지자들이 막상막하인 ‘보라색’ 주를 잡기 위해서는 이제 안정감 있는, 대통령다운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2012년 미국 대선의 '보라색 주'(빨강: 롬니가 0~4% 차로 승리한 주, 보라: 오바마가 0~4% 차로 승리한 주, 파랑: 오바마가 4~8% 차이로 승리한 주, 출처: 위키미디어 CC BY SA 3.0) https://en.wikipedia.org/wiki/Swing_state#/media/File:Swing_states_2012.svg
2012년 미국 대선의 ‘보라색 주'(빨강: 롬니가 0~4% 차로 승리한 주, 보라: 오바마가 0~4% 차로 승리한 주, 파랑: 오바마가 4~8% 차이로 승리한 주, 출처: 위키미디어 CC BY SA 3.0)

그걸 막아야 하는 게 첫 번째 토론회에서 클린턴이 부여받은 임무였다.

클린턴이 연단에 올라서자마자 트럼프에게 “도널드, 당신과 함께 해서 좋네요. (Donald, it’s good to be with you)”라고 인사한 것도 그런 전략의 일부였다고들 한다. 평소에 공식적인 타이틀로 불리는 걸 좋아하는 트럼프에게 친근한 척하면서 가볍게 대하는 이름을 사용해서 성질을 살짝 긁은 것이다. 그 말을 들은 트럼프는 “클린턴 국무장관, 그럼요, 참 좋죠?(Secretary Clinton, yes, is that okay?)”하고 공식명칭으로 대꾸한다.

흥미로운 전술이지만 적어도 전반부에서는 먹히지 않았고, 오히려 트럼프가 선전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토론회가 중반을 넘어가면서 트럼프는 본래(?) 모습을 내보이면서 다시 화난 남편의 모습이 되었고, 트럼프 캠페인 진영에서 ‘어, 어, 저러면 안 되는데…’하고 긴장했을 것 같은 장면들도 튀어나왔다.

“억지웃음은 싫어요” 

문제는 그런 트럼프의 “화난 남편” 이미지에서 클린턴이 이득을 보기 위해서는 “빈정거리는 아내”의 이미지를 보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지긋지긋한 싸움을 보기 싫다는 쪽으로 마음이 돌아서기 때문이다.

클린턴이 빈정거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항상 그렇듯 ‘나는 너의 그런 태도에 이렇게 활짝 웃을 수 있어’라는 표정으로 지어낸 웃음을 보여주었다. 미국인들은 한국인과 비교하면 훨씬 잘 웃지만, 억지로 지어낸 뻔한 웃음은 잘 잡아내고, 싫어한다.

대선 미국
출처: PBS, “Watch the full first presidential debate between Hillary Clinton and Donald Trump” (2016. 9. 26)

미국 대선 워런 클린턴이 그런 웃음을 지을 때마다 많은 미국인이 “난 저 여자 싫어(I hate that woman)”이라는 말을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고,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엘리자베스 워런(Elizabeth Warren, 사진) 상원의원을 좋아하는 이유 또한 다르지 않다. 웃는 걸 보고 싶은데, 정말로 웃어야 한다는 것이고, 슬퍼할 때는 진짜로 슬퍼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것이다.

빌 클린턴과 달리 힐러리 클린턴은 그걸 못한다. 오죽했으면 힐러리가 자신이 왜 감정을 드러내기 힘든 사람이 되었는지를 ‘고백’하는 동영상까지 얼마 전에 등장했다. 그 정도로 클린턴에게는 중요한 문제다.

한편으로는 협상이 직업인 정치인에게 그런 솔직함을 요구하는 건, 100미터 달리기로 육상대회에 나온 사람에게 마라톤에서 우승하라는 요구와 비슷하다. 그런 걸 비슷하게라도 할 수 있는 선수가 있을까?

어쨌거나 그걸 제일 잘 하는 선수 하나만 뽑는 경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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