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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남이 만든 나라? 일본 유명 지식인의 역사 해석에 대하여

2015년 6월 5일, 일본 민영방송사 후지TV는 한일 국교 정상화 50주년 특집 프로그램, ‘이케가미 아키라 긴급 스페셜, 알고 있는 것 같지만 모르는 한국의 수수께끼'(知っているようで知らない韓国のナゾ)를 방영했습니다. 이 방송은 한국 여고생의 인터뷰를 ‘날조’했다는 의혹으로 화제가 된 바 있죠(이에 대해선 이케가미가 직접 사과했습니다).

프로그램 진행자 이케가미 아키라(65세)는 NHK 기자 출신의 유명 저널리스트입니다. 일본 내에서 영향력과 신뢰도가 높은 인물로, 일본의 재무장을 강력히 반대하는 비판적 지식인이자 대표적인 ‘지한파’ 지식인으로 평가받습니다.

이케가미가 해당 방송을 통해 다루고자 한 것은 반일 감정의 역사적 기원을 분석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일본 ‘지한파’ 지식인의 역사 해석조차 여전히 우리 국민의 정서로는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이 있었음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 글은 해당 방송을 일방적인 혐한으로 단정하고, 반일을 조장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일본의 대표적인 지한파 지식인의 역사 해석을 쟁점별로 비판하고, 그 비판을 통해 일본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대화의 접점을 마련하는 데 있습니다. 반론과 보론, 비판 기고는 모두에게 열려 있습니다. (편집자) 

우선 이 글이 ‘혐일’을 조장하는 글이 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입니다. 역사를 전공하는 입장에서 많은 일본 학자들의 연구 성과를 접하게 됩니다. 굳이 양심적이다, 한국의 입장을 이해하거나 대변하는 학자가 아니더라도 일본에는 참으로 뛰어난 학자가 많고, 탁월한 연구 성과도 많습니다. 방송에 나온 몇몇 이야기를 가지고 식민사관을 운운하면서 감정적인 부림을 벌이는 것은 옳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가 굳이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은 여전히 한·중·일은 서로 간에 대화가 부족하고, 서로의 생각에 대해 너무 모르지 않나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모르기 때문에 너무 쉽게 상대 역사를 규정하고, 폄하하며 본인들이 편한 데로 기억하려고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1. 임시정부는 일본과 싸우기 위해 만든 정부다?

일본 방송

우선 방송을 진행하는 이케가미 아키라는 임시정부의 설립 목적을 ‘일본과 싸우기 위해서’라고 규정합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닙니다. 3.1운동이 일본의 무단 통치에 대한 저항으로 시작되었고, 임시정부는 그 결과물이기 때문입니다. 전 세계의 한인 독립운동가들이 모여서 정부 수립을 선포했으니 그 속성에 있어서 당연히 ‘독립운동적 요소’가 강하다는 것은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임시정부의 설립 목적을 단순히 일본과 싸우기 위해서였다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 거친 해석입니다. 임시정부가 설립된 경위는 크게 두 가지 흐름 때문입니다.

  • 첫째, 흥선대원군의 개혁부터 시작되는 한국 근대사의 결과.
  • 둘째, 왕조(王朝)에서 민국(民國)으로 전환.

임시정부는 단순한 3.1운동의 결과물이 아닙니다. 3.1운동 자체가 어느날 툭 튀어나온 독립운동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조선왕조가 근본적인 한계를 드러낸 것은 이미 정조 사후 세도정치기였습니다. 효명세자가 개혁을 시도하기도 했고, 김정희 등의 분투도 있었고, 최한기 같은 당대의 지식인을 배출하기도 했지만 단지 거기까지였을 뿐입니다.

일본 방송 후지TV

전통사회의 한계, 봉건적 모순은 나날이 쌓여갔고 어느새 영국은 아편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며 중국의 문호를 개방했고, 미국 역시 함포를 끌고 와서 에도 막부의 문을 열어버렸습니다. 대내외적인 위기는 새로운 사회에 대한 강렬한 기대를 이끌어내었습니다.

흥선대원군에 의한 전통적 개혁과 쇄국정책이 있었고, 고종과 명성황후에 의한 개화정책, 친청-친러 외교정책이 있었습니다. 개화파 인사들은 저마다 당을 이루어 수구파와 싸우며 갑신정변과 갑오개혁을 시도하였고 민중은 동학농민운동과 독립협회를 통해 의지를 구체적으로 드러내었습니다.

결국 이 모든 노력이 실패하고 일본에 의해 강제 병합이 되긴 했지만, 1876년 강화도조약으로 문호가 개방된 후 1910년 조선병합 때까지 구한말 한민족의 역사는 참으로 열심이었습니다. 애국계몽운동, 의병운동. 쉽사리 이야기하지만, 미국 선교사들을 통해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였고 사회진화론, 기독교 같은 선진문물을 수용하면서 민족주의 독립운동사의 기초를 마련했고, 경술국치 이후 1910년대 전체는 만주, 연해주, 상하이, 미주 등에 각종 한인자치단체와 독립운동단체를 만드는 시간이었습니다.

물론 일제는 치밀하고 가혹하게 조선을 대하였습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미국과 영국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으며 천우협 등 낭인 단체들의 활동을 조장했고, 일진회 같은 친일파 세력을 지원했으며, 1909년 전후로 강력한 물리적 대응을 통해 의병활동을 근본부터 뿌리 뽑습니다. 경술국치 이후에는 최소한의 기본권마저 억압하면서 아무런 혐의도 없던 신민회를 데라우치 총독 암살미수 사건을 조작하여 해체(105인 사건)시켰으며 모든 신문을 폐간시켰고 갑오개혁 때 사라졌던 태형령까지 부활시키면서 헌병 경찰통치를 자행하였습니다.

105인 사건 관련자들 체포 장면

105인 사건 관련자들 체포 장면

3.1운동 전야의 시간은 이토록 숨 가쁜 ‘노력’의 연속이었습니다. 실패, 실패, 실패. 속상한 단어일지 모르겠지만, 실패라는 단어를 남길 만큼 구체적인 노력이 있었고 한 단계가 무너질 때 더 높은 단계로의 노력이 이어졌습니다. 갑신정변과 동학농민운동은 결국 갑오개혁에 구체적인 개혁 방향을 제시하였고, 민중과 지식인은 만민공동회 활동을 통해 의회를 만들려고 하였습니다.

헌정연구회는 입헌군주제를 본격적으로 연구하였고 입헌군주제적인 시도가 모조리 무력화되던 1907년. 고종이 강제로 퇴위 되던 바로 그 해에 신민회는 최초로 공화정 정부 수립을 주장하면서 본격적인 민족주의 운동의 서막을 엽니다. 1912년에 만들어진 대한광복회 역시 공화정부 수립을 주창하였고, 1915년 중국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이 모여서 발표한 ‘대동단결선언’을 보면 대한제국의 멸망은 황제권의 멸망일 뿐이며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민권(民權)의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선포합니다.

막연히 계속 싸운 것이 아니라 싸우고 또 싸우면서 세계사적인 흐름을 이해하고 수용한 것입니다. 민주공화정이 무엇인지, 서양에서 운영되는 정치 시스템은 어떤 형태를 띠고 있는지를 이해하고 내면화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계속 새로운 시도와 새로운 상상력으로 운동의 질과 양이 커지기 시작했고 결국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의 영향 가운데 3.1운동이 일어난 것입니다.

3.1운동의 결정적 모티브는 민족자결주의입니다. 모든 민족은 자기 나라를 세울 수 있다는 신념. 3.1운동의 직접적 촉발점에 고종의 죽음이 있었다곤 하지만 같은 해 이미 도쿄에서 2.8독립선언서가 발표되었고 독립선언서를 집필한 이들이 유학생 출신이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민족자결주의에 반응한 한민족의 적극적 역량은 간과할 수준이 아닙니다.

더구나 3.1운동으로 갑자기 임시정부가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3.1운동의 연장선에서 인천과 서울에서 국민대회가 열렸고 한성정부가 선포됩니다. 비슷한 시기 연해주에서는 이동휘를 비롯한 무장투쟁론자들 중심으로 대한국민의회가 만들어졌고 상하이에서도 임시정부가 만들어졌습니다. 이 세 조직을 합법적 절차를 통해서 통합한 것이 대한민국임시정부입니다.

임시정부 수립에 중국의 영향 또한 간과할 수 없습니다. 특히 신규식이 쑨원이 이끄는 중국혁명동맹회에 참여하거나 동제사를 만들어서 공화정부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했다는 점은 임시정부 수립에 중요한 바탕이 됩니다. 그러하여 만들어진 정부가 대한민국임시정부입니다. 그래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임시헌장은 구체적인 국가 설립의 이상을 규정합니다.

대한민국 임시헌장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헌장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제 국가로 할 것이며 국가 운영은 ‘의정원의 결의’에 의해 운영이 됩니다. 국민의 기본권을 명확하게 했으며 평등권 또한 분명히 하였습니다. 특히 7조를 보십시오.

제7조 대한민국은 신(神)의 의사에 의해 건국한 정신을 세계에 발휘하고 나아가 인류문화 및 평화에 공헌하기 위해 국제연맹에 가입한다.

독립운동의 결과로, 독립운동을 위해서 만들어진 단체라고 하기에는 그 포부와 품새가 매우 넓지 않습니까. 임시정부가 독립운동 기관이 아니라는 말이 아닙니다. 또한, 3.1운동으로 인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 또한 아닙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임시정부가 만들어지게 되는 역동적인 역사적 배경을 간과하고 함부로 임시정부를 규정한다면 그것은 임시정부를 가능케 했던 한민족의 분투와 힘에 대한 무시이며 동시에 편향되고 협소한 역사 해석일 수밖에 없습니다.

2. 임시정부라는 것은 자칭? 자기 자신들만이 그렇게 불렀다?

일본 방송

그렇지 않습니다. 임시정부는 독립운동의 최고 기관이었다는 사실은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도 일제시대 조선 민중 사이에서도 공인되고 인정되던 역사적 사실입니다. 1945년 해방 직전 여운형에 의해 건국준비위원회가 만들어질 때 우익의 대표 주자였던 송진우가 건국준비위원회 참여 거부를 했던 이유가 바로 ‘임시정부 정통론’입니다. 임시정부가 존재하고 임시정부를 받아들이는 것이 마땅하다는 논지였습니다.

이후 1946년 반탁운동의 열기가 뜨겁던 때 김구는 임정봉대론을 주장하면서 다시 한 번 임시정부를 대한민국의 정부로 만들려고 노력합니다.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실제로 김구는 미 군정을 상대로 쿠데타까지 도모합니다. 임시정부의 권위가 없었다면 어떻게 이런 일들이 가능했겠습니까.

김구

이승만이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 절대적인 권위를 행사할 수 있었던 힘 중에 하나가 초대 임시정부 대통령이었기 때문이고, 북한에 실질적으로 김일성에 의해 정부가 수립된 상태에서도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제헌의회와 이승만 정부가 강조했던 것 역시 임시정부입니다. 심지어 이승만 정부 당시 태평양 전쟁을 처리하기 위해 마련된 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나 한일관계의 복원을 위한 외교 협상에서도 임시정부의 존재가 중요한 외교적 기초였습니다.

이승만 (1956)

이승만 (1956)

물론 임시정부가 분열되었던 적도 있고 미약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1930년대에는 민족혁명당이나 좌우합작활동이 훨씬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고요. 한인 사회주의자들의 활동 영역은 1930년대 이후 민족주의 진영의 독립운동보다 훨씬 막강한 형태로 구현되기도 했었죠. 모두가 임시정부를 떠받들거나 김구처럼 임시정부주의자였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1930년대에는 한인애국단을 편성, 이봉창과 윤봉길의 활약으로 임시정부의 존재감이 드러났고 1940년대에는 명실상부한 독립운동의 대표기관으로 자리매김합니다. 그래서 중국 국민당이 임시정부를 승인하였고, 광복군의 군사작전권을 넘겨주었으며 국제회담에서 임시정부 공인활동을 벌이기도 하였습니다. 김원봉, 김규식, 김두봉 등 임시정부와 거리를 두고 활동했던 인사들이 모조리 임시정부에 합류했던 것이 이때입니다. 영국과 미국이 광복군과 협동 작전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독립운동 기간 내내 존재감을 유지하였고 독립운동사에서 최종적인 주도권을 확보했으며 해방 초부터 대한민국 발전사까지 유감없는 역량을 발휘했던 이 단체를 어떻게 ‘자칭’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드골의 자유프랑스나 레지스탕스 투쟁 역시 자칭이라고 말할 건가요? 훨씬 오랜 기간 여러 방면에서 활약했는데 어떻게 쉽게 이런 말을 할 수 있나요? 이는 역사에 대한 몰상식입니다.

3. 활동자금을 중국으로부터 제공받았다?

일본 방송

맞는 얘기입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랬던가요? 임시정부는 1919년에 수립이 됩니다. 중국에서는 지독한 군벌 정권의 시대입니다. 신해혁명이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위안스카이에 의해 중화민국은 무력화가 되었습니다. 위안스카이의 사망 이후 중국은 갈기갈기 찢겨 수많은 군벌 정권들이 들어섭니다.

쑨원이 중국 남부 광둥에서 재기할 때가 1920년대 초반입니다. 그리고 1924년에야 비로소 국민당은 북벌에 나서게 되고 그것이 미력하게나마 완성되는 것이 1927년 국민혁명의 완성입니다. 방송에서 이야기하는 ‘중국’이 정확히 무엇입니까? 청나라? 국민당? 공산당? 개념조차 모호할뿐더러 실제로 임시정부의 수립과 발전에 있어서 임시정부의 지도기관 역할을 할 수 있는 상황은 전혀 아니었습니다.

물론 쑨원이 임시정부의 활동을 지지하며 동아시아 연대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초기 임시정부 경비는 대부분 미주 대한인국민회에서 들어오거나 연통제, 교통국에 의해 국내에서 들어오던 자금이었습니다. 실제로 미주에서 들어오는 자금 문제를 두고 이승만과 임시정부 사이에서 심각한 마찰이 생기기도 했고요.

임시정부가 중국 국민당에 의해 본격적인 지원을 받기 시작하는 것은 1932년 윤봉길 의거 성공 이후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국민당의 지도자 장제스가 주목할 정도로 임시정부가 역량을 발휘했다는 점입니다. 1931년 일본 해군과 국민당 정예군 사이에서 벌어진 치열한 전투에서 중국이 패배하며 상하이를 잃게 되었고(상하이 사변), 상하이 사변 전승 기념식장이었던 훙커우 공원에서 윤봉길 의사의 폭탄 투척이 엄청난 성과를 일구게 됩니다. 1931년에 있었던 도쿄에서의 이봉창 의사의 폭탄 투척 역시 중국인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기도 하였고요. 그래서 국민당이 본격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상하이 사변 (1932) 일본군과 교전하는 중국 헌병

상하이 사변 (1932) 일본군과 교전하는 중국 헌병

양 손에 폭탄을 들고 태극기 앞에서 절명사를 가슴에 붙인 채 촬영한 윤봉길 (1932)

양 손에 폭탄을 들고 태극기 앞에서 절명사를 가슴에 붙인 채 촬영한 윤봉길 (1932)

조금 더 앞으로 가봅시다. 중국 역사의 가장 중요한 분수령이었던 5.4운동이 어떤 배경 가운데 일어났습니까? 3.1운동의 영향이 분명히 있지 않았나요? 한민족은 부족하더라도 자신의 역량으로 이야기를 써내려갔고 중국은 이를 목도했고 영향도 받았고 도움을 주기도 하였습니다.

참으로 자연스럽고 역동적인 역사 아닌가요?

4. 자신의 힘으로 해본 역사가 없다? 그래서 반일감정이 형성되었다?

일본 방송

앞서 서술한 바로도 우리 민족과 대한민국이 자신의 힘으로 무엇을 했는지는 충분히 논증한 듯합니다. 반일감정이 형성된 것은 너무나 명확합니다. 일본이 꾸준히 침략 의지를 발휘했기 때문입니다. 베트남인이나 알제리인들에게 반프랑스 감정이 있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닙니까? 인도네시아 사람들이 어떻게 네덜란드 사람들을 무작정 좋아할 수 있을까요? 본인들이 저지른 역사적 과오에 대한 냉철한 인식과 반성 없이 어디서 함부로 반일감정 운운하는 겁니까.

그러면 반대로 묻겠습니다. 메이지 유신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영국이나 프랑스가 아니라 미국이 개항했고, 미국이 남북전쟁으로 정신이 없었기 때문에 시간을 벌었고 그래서 가능했던 거 아닌가요? 러일전쟁에서의 승리도 러시아가 피의 일요일 사건 등 내부적으로 어수선했기 때문에 가까스로 얻은 성과 아닌가요?

그 무력한 국민당 정부와의 싸움에서 왜 그정도 밖의 승전을 거두지 못했고 왜 중국을 완전히 지배하지도 못했던가요? 동남아시아까지 장악했건만 왜 미국에 패배할 수밖에 없었나요?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미국의 지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국가의 민주화 수준이 그 모양입니까?

지금 든 예들이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서 말하는 것인 줄은 잘 아실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끈하는 것은 이보다 더 복합적이고 깊은 역사적 이야기가 있기 때문 아닌가요? 감정적으로 우리가 하나가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도저히 하나가 될 수 없는 부분도 있을 것이고요.

하지만 그럼에도 소통할 수 있고, 존중할 수 있고, 인정할 수 있고, 공존할 수 있는 거리는 너무나 많습니다. 그 수많은 가능성을 포기하고 너무 쉽게 서로를 할퀴고 상처 주는 일은 이제는 멈춰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일본의 대표적인 ‘지한파’ 지식인 이케가미 아키라의 협소한 역사 해석은 더 깊은 아쉬움을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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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심용환
초대필자. 역사 강사

역사 강사, 대학생 인문학 공동체 '깊은계단' 대표 → 블로그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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