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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암살]의 몇 가지 역사적 사실에 관하여

[암살]은 독립군의 친일파 암살 이야기를 다룬 영화입니다. 영화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허구지만 다양한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하고 있습니다. 역사적 사실을 통해 상상력을 더해봅니다. 영화를 보지 않은 분들이 우려할 만한 스포일러는 없습니다. (편집자)

1. 손탁 호텔

©㈜케이퍼필름

©㈜케이퍼필름

영화 오프닝에서 데라우치 총독 암살미수 사건(1911년)이 벌어지는 곳은 손탁 호텔로, 지금의 이화여대 100주년 기념관 자리에 있던 곳이다. 그런데 이 호텔은 실제 역사에서도 상당히 의미심장한 장소다. 손탁빈관(孫鐸賓館)이라고도 불렸던 이 호텔은 러시아 공사 베베르의 처형(妻兄)으로 조선 땅을 밟은 독일 여성 손탁이 운영하던 서양식 호텔이다. 요리 솜씨가 뛰어났던 손탁은 명성황후에게 서양 소식과 화장술을 소개해 주는 등의 활동으로 명성황후의 총애를 받았는데, 명성황후 시해(1895) 후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아관파천(1896)에도 손탁이 관여했다는 설이 있을 정도다. 어쨌거나 1898년 환궁한 고종은 손탁에게 땅을 하사하고, 1902년에는 서양식 벽돌건물도 지어 줬다. 이것이 영화에 등장하는 손탁 호텔의 시작이다.

1900년대 손탁 호텔의 모습

1900년대 손탁 호텔의 모습

문제는 그 다음. 대한제국 정부가 고용한 외국인 고문들(일본인 포함)은 손탁 호텔에서 한국 정부 돈으로 마음껏 먹고 마셨다. 손탁 역시 여기에 맞춰서 많은 이익을 보았는데, 당시 고종의 어의로 근무했던 독일인 의사 리하르트 분쉬의 일기에도 손탁이 비용을 부풀려서 많은 돈을 타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훗날 친일파로 변절하게 되는 독립협회 회원들이 사무실처럼 썼던 곳도 손탁 호텔, 을사늑약(1905) 당시 이토 히로부미가 투숙하며 조선 대신들을 협박, 회유한 장소 역시 손탁 호텔이다. 그러니까 저 호텔은 단순한 호텔이 아니라 망해가는 나라의 축소판이었던 것. 손탁은 경술국치(한일병합) 직후 한국 땅을 떠났다.

또 하나, 데라우치 총독을 구하고 신임을 얻는 친일파 강인국은 일본 유학 도중 물에 빠진 이토 히로부미의 부인을 구하고 신임을 얻게 된 친일파 박중양을 연상시킨다.

2. 일본군의 철모

영화 초반에 독립군 저격수 안옥윤(전지현)이 사격 솜씨를 선보이는 장면에도 약간의 배경이 있다. 해당 장면을 유심히 본 사람이라면 일본군 병사들이 철모를 쓰고 있는 걸 보고 조금은 생경한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태평양 전쟁을 다룬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일본군은 군모만 쓰고 있지 철모를 쓰고 있는 장면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잘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일본군도 철모를 쓰긴 했다. 당시 일본의 공업 생산력이 워낙에 안습이라 전군에 지급을 못 하고 해병대를 위주로 지급했기 때문에 사진이 별로 남아 있지 않을 뿐이다. 1937년 중일전쟁 당시 상하이(그렇다, 영화 초반에 나오는 바로 거기!)을 점령하는 일본군 해병대 사진 같은 걸 보면 영화에 나온 그 철모가 그대로 나온다.

출처: ww2incolor.com

출처: ww2incolor.com

만주에 배치된 관동군에게도 철모가 지급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안옥윤의 사격 솜씨를 보이는 데 이만한 소품도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당연하지만, 철모를 쓴 상대를 저격하는 게 안쓴 사람 저격하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1

3. 안옥윤의 저격총과 속사포의 기관단총

©㈜케이퍼필름

©㈜케이퍼필름

안옥윤이 영화 내내 들고 다니는 저격총은 러시아군의 제식소총인 모신나강(Mosin Nagant; M1891형)이다. 도대체 어쩌다 이 총이 독립군 저격수의 손에 들어간 것일까? 영화에 나오지는 않지만, 짚이는 구석은 있다. 1917년 공산 혁명으로 차르 정부가 전복된 뒤, 정권을 잡은 공산당 정부는 독일과 강화 조약을 맺고 제1차 세계대전에서 물러났다. 그 과정에서 난감한 처지가 된 것은 제정 러시아군에 편성되어 싸우던 체코슬로바키아인 부대, 일명 체코 군단. 당시 체코슬로바키아는 러시아의 적국인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1920년, 시베리아를 돌파해 탈출에 성공한 체코 군단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배를 타고 귀국길에 올랐다.2 더는 쓸모가 없어진 그들의 무기를 인수한 것은 또 다른 나라 없는 군대였다. 대한독립군 북로군정서. 시베리아를 횡단하며 전설을 만든 이 무기들은 1920년, 청산리에서 다시 한 번 전설의 주인공이 됐다.3

©㈜케이퍼필름

©㈜케이퍼필름

속사포가 사용하는 톰슨 기관단총 역시 매우 잘 고른 소품이라는 게 내 생각. 독립군이 쓰기엔 너무 비싼 최신 총이라는 의견도 있지만, 애당초 총알을 시원하게 쏟아내기 위해 만들어진 총인지라 ‘액션’이 잘 나온다는 게 최고의 장점이다. 실제로도 1920년대 미국 마피아를 다룬 영화에 지겹도록 나오는 물건이기도 하고. (참고로 이 총만 들면 애꿎은 사람도 마피아 보스처럼 보인다(…))

4. 덧없는 사랑, 아네모네

영화에서 안옥윤 일당이 자리를 잡고 데라우치 총독 암살작전을 모의하는 바의 이름은 ‘아네모네’다. 봄바람을 타고 잠깐만 꽃을 피우는 이 꽃의 꽃말은 ‘덧없는 사랑’. 그리스 신화의 아프로디테와 아도니스 이야기에서 유래했다.

코넬리스 홀스타인의 그림 (1647년 작)

코넬리스 홀스타인의 그림 (1647년 작)

솔직히 나는 바 이름을 보자마자 안옥윤이 경성 가서 해보고 싶다던 것들이 떠오르면서 대략의 결말을 직감했다. 그 이상은 스포일러니 직접 보고 확인하시라.

전지현은 ‘엽기적인 그녀’ 이후로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또 좋아해 본 적도 없는데 이번 영화 보고 나서 인상이 완전히 달라졌다. 젊었을 때는 심드렁하다가 나이가 들고 나서 열광하게 된 디카프리오를 보는 느낌. 전작인 [베를린]도 기회되면 꼭 봐야겠다.

[타이타닉] 때만 해도 “영화는 좋은데 배우는 별로” 였다가…  나중엔 정말 좋아하는 배우가 됐다. (왼쪽은 [타이타닉], 오른쪽은 [블러드 다이아몬드])

[타이타닉] 때만 해도 “영화는 좋은데 배우는 별로” 였다가… 나중엔 정말 좋아하는 배우가 됐다. (왼쪽은 [타이타닉], 오른쪽은 [블러드 다이아몬드])

5. 예습 필요

한동안 본 영화 중에서 가장 시나리오가 강력한 영화. 반드시 보기를 추천. 다만 등장인물 수가 좀 많으니 영화관 가기 전에 이름하고 얼굴 정도는 예습하고 가시는 걸 권한다.

 

이 글은 필자의 블로그(gorekun.log)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슬로우뉴스 원칙에 따라 원문을 편집해 발행했습니다. (편집자)


  1. 저격수를 소재로 한 영화 [에너미 앳 더 게이트]에도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 주인공 바실리 자이체프가 철모를 쓴 채 포복하려는 독일군 이마를 명중시켜버린다. 자이체프가 쓴 총도 안옥윤과 같은 모신나강 소총. 
  2. 제1차 세계대전은 1918년 이미 끝났고, 패전국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되면서 체코슬로바키아도 독립국이 되었다. 이때 돌아간 체코 군단 병사들 역시 대부분 체코군으로 들어갔다고. 
  3. 산업 시설이 부족했던 러시아 제국은 제 1차 세계대전 동안 모신나강의 제조 대부분을 미국 총기 회사에 외주를 줬는데, 이 때 생산된 75만 정 중 대략 47만 정만 제대로 납품되고 나머지 28만 정은 훗날 공산 정부에 대항하는 세력의 손에 들어갔다. 체코 군단은 그중에서 약 5만 정을 수령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니까 안옥윤이 가지고 있는 총은 미제였을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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