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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교과서에는 없는 이야기다. 그렇다고 어떤 민간설화나 음모론은 아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일일 뿐이다.

1940년대, 일본에는 많은 조선인이 살고 있었다. 일부는 강제징용되었고, 일부는 식민지 치하에서 먹고 살 길을 잃고 소위 ‘내지’로 떠났다. 중일 전쟁(1937)이 발발한 다음 해, 일제는 ‘국가 총동원법’을 공포했다. 이어서 1939년에는 국가총동원법에 기초해 ‘국민 징용령’을 실시하고 노동력을 징발하기 시작했다.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약 100만 명의 조선인이 징발되었다. 그들은 전방의 전쟁터와 후방의 작업장으로 끌려갔다. 익히 알려진 나가사키의 미쓰비시 조선소, 히로시마의 야스노 발전소, 오사카의 우토로 마을을 비롯해 일본 본토에서도 많은 조선인이 가혹한 노동환경 속에서 일했다.

1937년 상하이 전투 에서 일본 제국 해군 해병대 (위키미디어 공용) https://ko.wikipedia.org/wiki/%EC%A4%91%EC%9D%BC_%EC%A0%84%EC%9F%81#/media/File:Japanese_Special_Naval_Landing_Forces_in_Battle_of_Shanghai_1937.jpg
1937년 상하이 전투 에서 일본 제국 해군 해병대 (위키미디어 공용)

원폭, 조선인 4만 명이 죽었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되었다. 8월 9일, 나가사키에도 다시 원폭이 투하되었다. 히로시마에는 5만 명, 나가사키에는 2만 명의 조선인이 살았다. 그중 4만여 명이 현장에서 사망했다. 1945년 8월 15일, 일제는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생존자 중 약 2만 3천여 명이 해방 후 귀국한 것으로 추정된다. 대다수 생존자는 원폭 후유증과 빈곤, 사회적 편견에 시달리며 살아야 했다. 원폭 피해자의 자녀들은 학교에서 원폭투하가 정의로운 일이었다고 배우며 자라야 했다. 대다수 원폭 피해자들은 피해 사실을 드러내길 꺼렸고, 현재 원폭피해자협회에 등록된 원폭 피해자 1세들은 2,600명가량에 불과하다.

고국은 그들을 책임지거나 피해 실태 조사조차 하지 않았다. 일본 정부의 침략전쟁과 전쟁범죄를 위해 끌려가거나 불가피하게 고향을 떠나야 했던 사람들은 미국 정부가 떨어뜨린 원폭으로 죽거나 후유증을 대물림 하며 살아왔고, 한국 정부는 자국민을 줄곧 외면해왔다.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폭에서 피어오르고 있는 버섯 구름 (위키미디어 공용) https://ko.wikipedia.org/wiki/%ED%9E%88%EB%A1%9C%EC%8B%9C%EB%A7%88%EC%99%80_%EB%82%98%EA%B0%80%EC%82%AC%ED%82%A4%EC%9D%98_%EC%9B%90%EC%9E%90_%ED%8F%AD%ED%83%84_%ED%88%AC%ED%95%98#/media/File:Nagasakibomb.jpg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폭에서 피어오르고 있는 버섯 구름 (위키미디어 공용)

광복 70년? 철저히 외면받은 원폭 70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 투하 이후 70년이 지났다. 그것은 광복 70주년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광복절을 ‘해방의 날’로 즐겁게 맞이하기에는, 지워진 7만 명의 역사가 꺼림칙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여전히 살아 있으며, 그들의 2세와 3세들이 등장하고 있다. 70년 동안 대한민국은 원폭 피해자에 대한 제대로 된 실태조사도, 구제도 하지 않았다. 한국인 원폭 피해자들은 원폭 피해자에 대한 의료 원호를 받아내기 위해 직접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걸어야만 했다.

원폭 피해자 2세들도 마찬가지였다. 한순간에 자국민 4만여 명이 사망하고 3만여 명이 피폭당한 끔찍한 역사적 사실은 교과서에선 철저히 외면받았다. 29종의 역사교과서 중에서 한국인이 원폭 피해를 당했다는 사실을 언급한 교과서는 단 한 권뿐이다(두산동아 고교한국사). “한국인 사망자가 4만여 명에 달한다”는 단 한 줄이지만 말이다.

2015년 오늘, 원폭 피해자 1세와 2세의 의료지원과 원폭 피해 자료기록관, 원폭 피해자들의 추모행사 등의 내용이 담긴 원폭 피해자 특별법안은 국회의원들의 무관심 속에서 국회 어딘가에 잠자고 있다. 특별법은 17, 18대 국회에서 자동폐기되었듯이, 19대 국회에서도 다뤄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국회

원폭 피해자들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소송도 올해 6월 패소했다. 대한민국이 원폭 피해자 문제 해결을 위해 제대로 노력하고 있지 않다는 주장에 대해, 법원은 “원폭 피해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 정부가 일본을 상대로 외교적인 노력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판결했다.

판결 법원 재판

죽음 앞 둔 ‘가장 오래된 피해자들’ 

이제 평균 나이 80세를 넘어버린 원폭 피해자 1세들은, 자조적으로 입을 모아 말한다.

“우리가 죽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원폭 70년은 곧 핵 산업 70년이다.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투하를 기점으로 시작된 핵 산업은 핵무기에서 핵발전으로 범위를 확장하며 성장해왔지만, 피해자의 역사는 어디에서도 인정되지 않았다. 핵산업이 남긴 그림자는 히로시마, 나가사키만이 아니다. 체르노빌, 후쿠시마 등 세계적인 핵발전 사고만도 아니다.

고리 원전 인근 주민들의 암 발병 급증, 밀양 송전탑 공사 강행으로 죽거나 다친 농민들, 핵 산업의 역사가 끊임없이 발생시켜온 피해자들은 역사의 부작용을 ‘개인적으로’ 떠안은 채 어둠 속에 숨겨져야 했다. 그리고 지금, 역사상 가장 오래된 피해자들은 고국에 대한 한을 안은 채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다.

위험한 ‘히로시마 센티멘털리즘’  

한국이 원폭에 대해 잊은 지금, 혹은 잊기로 결심한 지 오래된 지금, 일본 정부만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평화공원을 조성하고 원폭자료관을 만들어 원폭 피해를 알리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올곧은 평화 의지라고 보기는 어렵다. 과거 일제의 전쟁범죄와 태평양 전쟁의 흔적을 지우고, 오직 원폭의 피해자로, 오직 ‘평화의 나라’로 분장하려는 시도에 가깝다.

원폭에 희생된 ‘일본 국민’만을 추모하며 세계평화를 호소하는 소위 ‘히로시마 센티멘털리즘’의 정치다. 그리고 이런 정치의 작동에는, 자국민 피폭자들에게 무관심한 한국, 중국 등 식민지 피해국들의 태도가 가장 큰 도움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최근 한국에서도 화제가 된 일본의 전쟁법 반대 움직임에서도 – 물론 그 움직임 자체는 고무적이다 – 제거된 기억의 흔적이 드러나고 있다. 전쟁법 반대 행동의 중심에 있는 것으로 알려진 일본 청년 그룹 실즈(SEALDs)는  “평화 헌법을 가지고 있는 유일한 피폭 국가”라는 말로 일본 대중의 자부심을 고양하고 있다. “우리는 피해자이며, 평화를 대변할 수 있는 대표적 국민”이라는 기억 혹은 정서에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새로움? 발랄함? – ‘실즈’에 대한 한 언론의 짝사랑

물론 태평양 전쟁 도발의 문제와 관계없이, 일본의 전쟁범죄와 관계없이, 일본 국민의 원폭 피해가 슬픈 역사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평화 헌법을 등장시킬 수밖에 없었던 배경에 대한 평가를 제거하고, 징용과 식민지 약탈로 강제 이주되었던 피폭자 중 10% 이상을 차지하는 한국인 피폭자들을 지운 채, 평화헌법에 대한 자부심과 피폭에 대한 슬픔만 드러내는 것은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한국 언론은 실즈의 “새로움”과 “발랄함”에 기대를 보낼 뿐이다. 한 매체는 이들의 발랄함을 찬양하면서, “한국의 시위와는 다르게 무척이나 경쾌하다”라며 한국 청년들을 도발하기까지(혹은 꾸짖기까지) 한다.

YouTube 동영상

하지만 “엄청난 희생과 회개를 통해 평화주의와 자유민주주의를 확립한 일본이야말로 세계, 특히 동아시아 군축과 민주화를 선도할 책임과 잠재력이 있다”는 실즈(SEALDs)의 입장에 대해 그들은 누구 하나 의문을 표하지 않는다.

그러니 원폭피해자특별법 같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폐기되고 해결(?)되는 문제에 대해 그들이 큰 관심을 가지길 바라는 것은 무리일지도 모른다.

미완의 해방 

그러나 “미완의 해방”은 미완인 채로 완결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피해자의 역사는 교과서에만 없을 뿐 어찌 되었건 계속 흘러간다. 원폭 피해자들과 그 후손들은 여전히 원폭피해자 특별법을 요구하고 있다. 합천 평화의 집에 모셔진 원폭 피해자 위패들도 늘어갈 뿐이지 사라지진 않는다.

합천에서는 올해도 70주기 원폭 희생자 추모제와 비핵평화대회가 열린다. 비핵평화대회의 부제는 “원폭 피해자, 당신을 기억합니다”라는 소박한 소망의 문장이다.

실즈에 참여하는 일본 청년들과 달리 별로 발랄하지도 새롭지도 않은 한국 청년들도 원폭 70주년을 맞아 ‘푸른하늘 기행’이라는 이름으로 프로그램을 진행 중이다. 이들은 대안교재 제작과 청소년 교육운동을 통해 지워진 한국인 원폭 피해자의 기억을 되살리고, 역사 교과서에 한국인 피해자에 대한 언급이 수록되게 만들겠다고 포부를 밝힌다.

푸른하늘 기행
“푸른하늘 기행은 핵산업 피해자들과 환경/생태 분야의 전문가들이 청년들에게, 청년들이 청소년들에게 핵산업의 역사와 현재를 가르치는 대안교육 프로그램”이다. (소셜펀치 모금함 소개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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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댓글

  1. 좋은 글입니다. 그러나 ‘원폭에 희생된 ‘일본 국민’만을 추모하며 세계평화를 호소하는 소위 ‘히로시마 센티멘털리즘’의 정치다.’ 에 전면적으로 동의하기는 힘듭니다. 물론 피해자로서의 일본만을 내세우는 것은 ‘피폭 내셔널리즘’이라 하여 일본내에서도 비판이 있고, 지금의 아베 정권이 평화만을 강조하며 전쟁 책임을 최대한 가리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것은 사실입니다만, 일본 전체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히로시마시에서는 원폭 사망자에 대한 설명에서 조선, 대만, 중국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있었고 이중에 강제징용된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도 밝히고 있습니다. 또한 매년 이날에 히로시마에서 평화선언이 발표되는데, 올해의 선언문 가운데에는 조선, 중국, 동남아시아 사람들과 미군 포로도 희생자였다는 언급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앙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지방 정부 레벨에서는 ‘한국인 피폭자들을 지운 채, 평화헌법에 대한 자부심과 피폭에 대한 슬픔만 드러내는 것’이란 평가는 타당하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엄청난 희생과 회개를 통해 평화주의와 자유민주주의를 확립한 일본이야말로 세계, 특히 동아시아 군축과 민주화를 선도할 책임과 잠재력이 있다”는 실즈(SEALDs)의 입장에 ‘회개’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다는 점에서 이들이 전쟁책임을 외면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물론 만족스럽지 않은 부분도 많습니다만, 이러한 전쟁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한 전후민주주의적인 것들은 모순과 한계가 있긴 하지만 아베 정권과 같은 역사수정주의적인 것들과 함께 묶일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2. ‘원폭에 희생된 ‘일본 국민’만을 추모하며 세계평화를 호소하는 소위 ‘히로시마 센티멘털리즘’의 정치다.’ 에서 가리키는 것은 앞 문장에서 명확하게 지시하고 있듯이, “일본 정부”입니다. 물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지방정부에 대한 평가를 첨언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 글에서는 불필요하다고 생각해 넣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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