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공유하기

연구자들이 연구를 하려면 어떤 준비가 필요할까.

연구 = 아이디어 + 연구 인력 + 돈

좋은 아이디어를 내고 연구를 함께할 공간과 인력을 충당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실제로 연구를 ‘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돈이 필요하다. 문제는, 이 돈을 어떻게 받는가 하는 것이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서류를 작성해야 한다. 문제는 서류의 종류가 굉장히 다양하고, 상당한 노력을 요구한다는 점이다.

서류들이 스스로 연구를 해 주지는 않지만, 그저 종이쪼가리뿐인 것도 아니다. 서류에는 연구를 발주하는 주체(한국의 경우에는 대부분 정부)가 연구자들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들이 생각하는 ‘연구’란 무엇인지, 그들이 연구자들에게 바라는 연구 결과는 무엇인지에 대한 메시지가 담겨있다. 결과적으로는 이 양식들이 향후 연구자들이 연구하는 방식을 규정짓고, 이를 심사하고 평가하는 이들에게 ‘권력’을 부여한다.

그 출발은 연구의 시작점이 되는 연구제안요청서(RFP; Request for Proposal)다.

혁신 전구 아이디어
아이디어만으로는 연구할 수 없다

정부와 과학자, 채권자와 채무자? 

정부와 과학자는 어떤 관계일까? 돈을 빌려주고 돌려받는 관계이니 채권자-채무자를 생각하면 될까? 글쎄, 과학자가 빌린 돈을 다시 돈으로 갚는 것은 아니니 부적절한 비유인 것 같다. 게다가 정부는 나름대로 고충이 있으므로 과학자들에게 돈을 투자하는 것이니 단순히 일방적인 관계는 아니다.

물론, 과학자가 정부에게 해줄 수 있는 특별한 일이 있다고 해도 돈을 빌렸다는 사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에 한쪽이 완벽한 우위에 있는 관계라고 정의하기 힘들다. 이 미묘한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 많은 학자가 주인-대리인(Principal-Agent Theory)이라는 가상의 관계를 설정하고는 한다.

가령, 한국에서 전염병이 갑자기 창궐한다고 하자. 정부, 혹은 행정부를 하나의 행위 주체로 가정하면, 정부는 연구기관도 아니고 전문가도 아니므로 발병률이나 피해 상황 등은 알겠지만, 향후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나갈지에 대한 구체적인 실행 방침은 모르는 것이 당연하다.

이때 정부는 어떻게 행동하는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잘 아는 전문가 집단에 일을 맡기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전문가 집단은, 문제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전염병의 예를 들었으니 의사나 의과학자나, 혹은 좀 넓게 범위를 잡아서 과학자들이라고 하자.

퍼블릭 도메인 돈 공유 경제 유로
연구를 하려면 아이디어와 연구인력 외에 ‘돈’이 필요하다

국가는 돈과 권력은 있지만, 과학은 모른다 

국가는 돈과 권력을 가지고 있는 주인(principal)의 입장이지만, 과학을 모르니 과학자, 즉 대리인(agent)에게 연구를 잘 해보라며 가지고 있는 돈을 과학자들에게 준다. 그리고 기다림이 시작된다.

조금 기다리다 보니 뭔가 문제가 있다. 분명 돈을 줬는데, 저 대리인들이 무엇을 하는지 알 길이 없는 것이다. 정보라는 것이 완전히 투명하게 두 집단 사이에 공유되기도 힘들뿐더러 과학이란 것이 고도로 전문화된 영역이기에 정부가 보기에는 대체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고, 이해하기도 힘든 사태가 벌어지는 것이다.

그렇기에 정부는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과학자들을 통제하고, 구속하려 한다.(이렇게 말하니 마치 악질 구남친 같…) 물론, 과학자들에게 이는 (거의) 대부분 방해다.

처지를 바꿔 생각해보자. 연구자 입장에서는 답답한 노릇이다. 정부는 과학이라는 전문분야에 대해서 그들보다 잘 알지 못하는데(그래서 대리인에게 맡긴 것인데) 정부는 과학자들을 가만히 놔두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돈을 투자한 주체에게 그저 좀 기다리라고 무작정 반박하기는 힘든 것 또한 사실이다.

돈 실업
Truthout.org, CC NC SA

그래서 ‘계약’이 등장하는 것 

이렇게 서로서로 잘 믿지 못할 때 내릴 수 있는 좋은 처방이 있다. 바로 ‘계약’이다.

정부는 연구자들과 서류상의 계약을 한다. 요지는 아주 간단하다. “돈을 이만큼 주는 대신 정부가 하고는 싶지만, 지식과 전문성이 부족해서 못하는 걸 연구자가 해줘. 그 대신 돈을 어떻게 쓸지를 내가 100% 믿을 수가 없으니까 계약을 하자!” 라고 하는 것이다. 이 계약을 위해서 정부는 연구자들에게 여러 가지의 서류를 요구하게 되는데, 연구자들의 입장에서 처음 맞닥뜨리는 문서가 바로 RFP이다.

그래서 '계약'이 등장한다. (출처: Flazingo Photos, CC BY SA https://flic.kr/p/nbAu8Y)
그래서 ‘계약’이 등장한다. (출처: Flazingo Photos, CC BY SA)

RFP란 무엇인가. 위키백과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box type=”info” head=”제안요청서란”]
제안요청서(RFP, request for proposal)는 발주자가 특정 과제의 수행에 필요한 요구사항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제시함으로써 제안자가 제안서를 작성하는데 도움을 주려는 문서이다. 제안요청서에는 해당 과제의 제목, 수행 기간, 금액, 참가자격, 제출서류 목록, 요구사항, 제안서 목차, 평가 기준 등의 내용이 포함된다.

제안요청서는 시스템 설계에 사용자의 요구사항을 반영해 나중에 사용자의 제안이 잘 실행되고 있는지 판단하기 쉽게 만든다. 제안요청서를 만들려면 현재 판매 회사의 상황을 잘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출처: 위키백과 – 제안 요청서[/box]

쉽게 말하자면, ‘공모전 안내문’이다. 국가가 연구하고 싶은 큰 연구 주제가 있으니 이와 관련된 연구 아이디어가 있다면 내보십시오~ 하고 공고문을 돌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응급의료 모니터링 시스템 구축을 위한 연구 사업 입찰 공고” 를 통해 직접 읽어 보며 확인을 해보자.

응급의료 모니터링 시스템 구축을 위한 연구 제안신청서 표지

포인트는 RFP의 구성 양식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RFP의 내용보다는 그 구성 양식이다. 모든 계약서에 사인하기 전에 양식을 잘 살펴봐야 하듯이 RFP 역시도 그냥 귀찮은 서류가 아닌 “계약서”라는 관점에서 뜯어보기 시작하면 의아한 부분들을 찾아낼 수 있다. 특히, 연구개요와 연구배경에 대한 서술을 넘어서 추진계획, 연구내용, 연구방법까지 아주 상세하게 요구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연구개요와 연구배경 예시

사실 이 RFP는 “응급의료 모니터링 시스템 구축을 위한 연구 아이디어를 가져오세요.”라기 보다는 “우리가 원하는 종류의 응급의료 모니터링 시스템은 이러이러한 것이다”라는 일종의 가이드라인을 주고 있는 셈이다. 문제라면, 이 가이드라인이 향후 연구의 방향을 지나치게 제약할 수도 있을 정도로 친절할 때가 있다는 점이다.

정도가 지나친 경우, 마치 ‘가보지 않은 길의 지도를 그려오고 이 지도대로 간다는 전제하에 계약하자.’는 상황이 될 수 있다. 확실하게 ‘연구할 것이 무엇인가’를 정해주는 것을 무작정 나쁘다고 몰아갈 일은 아니다. 하지만 연구자의 입장에서는 이것이 바람직한 방향의 ‘계약’일까? 본질적으로 ‘연구’라는 것이 불확실하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다시 한 번쯤 생각해 볼 일이다.

RFP는 “공개 입찰을 통한 계약”이라는 틀을 따르는지라 계약 대상으로 누가 적합한지에 대한 평가 항목 또한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다.

  • 기술능력 평가: 사업의 이해도(10)
  • 기술능력 평가: 수행계획 전반, 수행방식 및 기법 등(20)
  • 기술능력 평가: 조직구성 및 업무분담의 적정성 전문성 등(20)
  • 기술능력 평가: 관련 분야 전문인력 보유현황, 신뢰도 등(30)
  • 입찰가격 평가(20)

기술 평가 항목 및 배점

일단 입찰가격 평가를 한다는 사실 자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래 공식이 조금 복잡해 보이는데, 이는 일종의 눈치 게임을 막기 위한 장치라고 해석할 수 있다. 가격경쟁력으로”만” 평가를 하지는 않겠다는 것이다.

실제로, 비록 얻는 것이 없더라도 프로젝트 수행 경력을 늘리기 위해 적자 수주를 감내하는 중공업 산업과 같은 일이 벌어질 수 있기에 기술 수준 확보와 예산 분배 사이에서 최적점을 찾고자 노력한다. 다만, 현실적으로 연구를 제대로 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예산이 있기 마련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상식적인 수준에서 최저가를 쓰는 경쟁이 된다.

기술능력 평가 항목 역시도 다시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정부의 요청에 응답하는 사람들은 과학자들, 즉 해당 분야의 프로 연구자들이다. 그렇다면, 각 분야에서 최고 수준의 전문가 그룹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위의 RFP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접수된 제안서에 대한 기술평가는 복지부의 별도 계획에 의거 실시되며, 이에 대하여 제안사는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음
  • 제안서 수행능력 평가를 위해 발주기관이 평가위원회를 구성하고, 협상에 의한 계약체결 기준을 준용하여 발주기관이 정한 세부 평가기준에 의거하여 서면평가 실시
  • 제안서 평가결과의 세부내용과 협상결과는 공개하지 않음

RFP의 일반사항 예시

요지는, 어떤 기준으로 제안서를 평가하는지, 어떤 사람들이 위원회에 들어가서 평가를 하는지 공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정부의 목적이 교육은 아니기에 왜 떨어졌는지에 대한 피드백을 일일이 제공할 의무는 없지만 “입찰공고를 통한 계약”이기에 적어도 어떤 이유로 다른 팀보다 낮은 평가를 받아 계약하지 못했는지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공개함이 마땅하다.

게다가 ‘응급의료모니터링 시스템구축’같은 전문분야를 심사할 역량의 전문가들은 한국의 좁은 전문가 사회 특성상 대다수가 ‘동업자들’일 가능성이 크다. 이는 학연, 인맥 등을 통해 “내정자”를 정해놓고 뽑는다는 의심해 볼 만한 스토리를 양산하는 근거가 된다. 선정 과정이 불투명하니 의심을 하고 불만을 표출한다고 해서 그들을 탓할 일은 아니다. 아니 땐 굴뚝에는 연기가 나지 않는 법이다.

“연구비 사이클” 

대학원생들과 연구자들의 이야기를 맛깔나게 풀어내는 PhD Comics가 말하는 “연구비 사이클”(Grant Cycle)을 보자.

이미지 출처: PhD Comics
이미지 출처: PhD Comics

보통 이상적인 연구 사이클이라는 것은 연구비 제안서를 쓰고, 돈을 받아서, 연구하고, 결과를 내는 것이다. 아주 논리적인 사고의 흐름이고, 실제로 이렇게 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실제로는 연구를 하고, 결과를 내기는 했지만, 아직 발표하지 않고 “예비데이터” 같은 것으로 포장한 뒤에, 이미 어느 정도 되어있는 연구에 대해서 연구비 제안서를 쓰는 경우가 많다.

이를 통해 멋진 제안서를 써서 그것으로 돈을 받고 기존 데이터를 바탕으로 연구결과를 발표하는 한편 다른 제안서를 쓸 때 필요한 연구를 미리 어느 정도 수행하는, 일종의 연구 돌려막기 같은 웃픈 일들이 종종 일어나고는 한다. ‘모두가 이렇게 연구를 한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실제 일어나고 있는 일의 일부임은 확실하다.

RFP, 국가기관이 연구자를 보는 관점 

어느 순간인가부터 정부와 연구자 사이의 계약은 쌍방의 합의를 통한 신뢰 구축 수단이 아닌 일방향적인 권력 발휘의 수단이 되어가고 있다. 대체 정부와 연구자가 “왜” 계약을 하고, 이 귀찮은 작업을 통해 쌍방이 무엇을 얻고자 하는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한다.

과학계에서 오랜 문제로 지적되어온 PBS(project based system)가 왜 취지와 다르게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지는 바로 이 “계약”에 대한 그릇된 이해에서 기인한다. 계약이란 서로의 신뢰를 위한 보증서가 되어야 한다. 그저 귀찮기만 한 종이쪼가리도 아니요, 한쪽이 다른 한 쪽에게 권력을 휘두르기 위한 도구 또한 아니다.

물론 이 이야기는 과학이나 공학뿐만 아니라 정부의 돈을 받아 연구를 수행하는 모든 분야의 연구자들에게 해당한다. 결과적으로 RFP는 제안서를 요청하는 간단한 가이드라인이지만 사실 이를 통해 국가기관에서 연구자들을 어떻게 이해하는지를 알 수 있다.

[box type=”note”]이 글은 팟캐스트 [과학기술정책 읽어주는 남자들] 33화 “책 읽어주는 남자들 어게인”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box]

관련 글

첫 댓글

  1. 이제까지 제안서도 많이 써 봤고, 계약으로 프로젝트도 많이 수행했고, 제안서 심사도 해 봤고, 과제 평가도 해 봤는데 이렇게 3자의 글로 보니 못 보던 면이 보이네요.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댓글이 닫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