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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시간강사다: 스스로 자격을 정할 자격 – 연재 후기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이하 ‘지방시’)의 필자 309동 1201호입니다.

얼마 전 ‘에필로그’를 발행하는 것으로 연재를 마무리 지었지만, 편집장께 부탁해 슬로우 뉴스의 독자들께 전하는 글을 한 편 더 쓰기로 했습니다. ‘지방시’가 연재되는 동안 많은 격려와 응원을 보내 주신 데 대한 감사를 전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독자들께서 보여주신 관심과 격려 덕분에 강의실에서도 연구실에서도 많은 힘을 얻었습니다, 각별한 존경과 애정을 담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에 더해 다양한 반응을 통해 저를 다시 돌아보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지방시 연재와 관련한 이러저러한 이야기들을, 그리고 그간의 감정들을 다소 두서없이 담아내 보려 합니다.

거창한 목적은 없었습니다 

먼저, 지방시가 어떻게 탄생했는가를 간단히 말씀드리려 합니다. 지방시는 어떠한 기획이나 의도 없이, 무척이나 즉흥적으로 탄생했습니다. 애초에 ‘사회 고발’이나 ‘처우 개선 요구’와 같은 거창한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독자들 가운데는 이런 반응이 적지 않았습니다.

“네가 하고 싶은 말이 뭐냐? 대체 어떻게 해달라는 거냐?”

저는 그저 스스로 삶을 어떻게든 규정해 보고자 하는 단순한 욕구에서 글이 출발했습니다. 어느 날 문득, 나는 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회인으로서 노동자로서 존재하고 있는가, 하는 의심이 들었고, 그저 그에 솔직하게 답하고자 했습니다. 내 삶을 뒤돌아보지 않고는 더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겠다 싶었던 어느 날에, 대학원생으로서의 그간의 삶과 시간강사로서의 현재의 삶을 담담히 기록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지방시를 쓰며 저는 저의 삶이 쉽게 규정되지 않는 데 대해 놀라고, 한편으로는 절망했습니다. 연구소, 학과사무실, 강의실, 기숙사 등 상상할 수 있는 대학 공간에서 저는 늘 ‘노동자’이며 ‘학생’으로 존재해 왔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노동자로도 학생으로도 저의 과거와 현재를 규정할 수 없었습니다. 이전까지 대학은 저에게 신성하고 숭고한 공간이었습니다.

강의, 연구, 교수, 학문, 지성, 이러한 단어들의 총체였고, 저에게는 그 일원이라는 자부심이 언제나 있었습니다. 하지만 대학의 맨얼굴과 점차 마주하며, 그러한 환상은 무참히 깨어져 나갔습니다. 나는 그저 대학을 배회하는 유령에 지나지 않았구나, 하는 처연한 자기규정을 하게 됨과 동시에, 무언가 크게 잘못되었음을 깨달았습니다.

내 주변이 실재하는 ‘괴물’의 실체 

무엇이 잘못된 걸까, 저는 우선 주변을 돌아보았습니다. 선후배 연구자와 학과 교수들, 모두가 원망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연재 초기에는 몇 차례 그들에 대한 공격적인 감정들을 쏟아내기도 했습니다. 돌이켜 보면 몹시 부끄럽습니다.

하지만 점차 저를(우리를) 포위한 어떠한 괴물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냈고, 곧 그와 마주했습니다. 그것은 어떠한 개별 주체가 아닌, 대학이 구축한 ‘시스템’ 그 자체였습니다. 대학원생이든, 시간강사든, 교수든, 교직원이든, 그 누구이든, 그 안에서는 온전히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음을 비로소 인식했습니다.

대학의 모든 구성원들은 대학의 신자유주의적 생태계 안에 자연스럽게 편입되어 있습니다. 학부 근로장학생이, 대학원생 조교가, 계약직 교직원이 대학 행정의 한 축을 담당하고, 4개월짜리 계약서를 받아 든 시간강사와 연봉 3천만 원의 강의전담교수들이 강의실을 채웁니다. 대학은 이제 정규직 교직원을 채용하지 않습니다. 얼마 전 30대 교직원과 우연히 밥을 먹다가 들은, 자기 또래 교직원 중 아무도 정규직이 없다는 그의 말에 딱히 놀랄 것도 없었습니다.

대부분 학과 사무실에서 대학원생 조교가 교직원의 역할을 대체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결국, 대학 그 자체가 ‘슈퍼 갑’이며, 모두는 분화된 ‘을’로서 살아갑니다. 저는 그다지 살가운 인간이 아닙니다만, 지금은 모두에게 다정다감함을 보내려, 적어도 그런 마음만이라도 가지며 살아가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제가 지방시를 쓰며 얻은 가장 큰 성찰이 아닌가 합니다.

패스트푸드 노동에 관해 

패스트푸드점 노동에 대해서도 짧게 말하고 싶습니다. 저는 지금도 패스트푸드점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강의가 없는 날 오전에 출근해 물류 하차 작업을 합니다. 건자재, 냉장, 냉동 박스 150여 개를 2층의 창고로 올리는 일입니다. 지금은 조금 익숙해졌지만, 아직도 퇴근하고 나면 1시간 정도를 끙끙 앓고서 다시 연구실로 출근합니다.

패스트푸드점 노동을 그만두지 못하는 것은 지방시에서 한 차례 언급했듯이, ‘건강보험’ 때문입니다. 패스트푸드점은 월 60시간 이상 노동하는 모든 노동자의 4대 보험을 보장합니다. 덕분에 저는 퇴직한 제 부모님을 직장 건강보험의 피부양자로 둘 수 있습니다. 그에 더해 최저 시급, 주휴수당, 휴가수당, 경조사비, 모두가 대학원생과 시간강사에게는 생소한 단어들입니다.

패스트푸드

그런데 ‘노동’에는 사람을 성찰하게 해 주는 힘이 있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타인에 대한 알 수 없는 감정이 솟구쳐 오르기 시작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것은 “또 다른 나를 공감하고 이해하려는 어떤 원초적 욕구”였던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강의실에서, 학생 하나하나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모두 존중할 만한 각자의 ‘삶’을 영위하고 있을 것이라는 어떠한 자각, 이것은 몸을 수고롭게 해 ‘노동’하지 않았다면, 아마 느껴보지 못했을 경험이자 감정입니다.

그에 더해 노동의 시공간은, 인간과 나 자신에 대한 사유를 놀랄 만큼 확장해 주었습니다. 오히려 패스트푸드점에서 정말 많은 논문의 아이디어를 얻었습니다. 가끔은 어떤 문단 내용이 통째로 떠올라 꾹꾹 담아 두었다가 퇴근하자마자 옮겨 적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얼마 전, 다짐을 새롭게 했습니다. 이후 어떠한 삶을 살든, 몸이 허락하는 적당한 ‘육체노동’을 반드시 하며 살고자 마음먹었습니다. 지금의 성찰이 그저 일시적 감정에 그치지 않도록, 값싼 자기만족이나 허울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노동이 얼마나 신성한 것인지, 뒤늦게나마 글이 아닌 몸으로 배울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자격론’이란 꼬리표 

지방시를 연재하는 동안, 저를 계속해서 따라다닌 꼬리표는 ‘자격론’이었습니다. 요약하자면 지방대 출신이 어째서 지금의 처우에 만족하지 못하고 징징대는가, 대학에서 강의하는 자체로 큰 영광이 아닌가, 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슬로우뉴스의 여러 댓글도 ‘파랑새 증후군’이라든가, ‘자신의 능력에 맞지 않는 직업을 선택한 사례’로 저를 비판했습니다.

이미 지방시와 관련한 뉴스 기사가 네이버와 네이트 포털의 각 1면을 장식했던 바 있고, 그래서 웬만한 댓글에는 내성이 되었다 생각했는데, 그래도 한동안 마음이 몹시 힘들었습니다. 지방대 출신인 것은 대학뿐 아니라 한국 사회 그 어느 공간에서 무엇을 하든 약점으로 작용할 것입니다.

어쩌면 좋을까요, 어떻게 자격론을 돌파해야 할까요?

그런데 이것은 사실 극복해야 할 대상이 아닙니다. 맞서 싸우려는 순간 웬만한 방식으로는 이미 그 틀에 묶이는 것이 됩니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선을 그어두고, 그 아래를 모두 ‘루저’, ‘잉여’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지잡대’라는 단어는 이미 지방대를 대신하는 새로운 용어로 자리 잡았습니다.

물론 ‘지거국’(지방거점국립대학)이라든가 몇몇 명문대를 차별화 하는 단어들이 있는 모양입니다만, 지잡은 수도권 이외의 거의 모든 대학을 그 범위로 두고 있습니다. 저는 굳이 출신 대학의 명칭이나 그 수준을 직접 명시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물론 신분이 노출될까 하는 저의 두려움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느 수준의 대학임을 드러내는 순간, 그것은 곧 하위 범주의 모든 대학을 저 스스로 ‘지잡 아래의 지잡’으로 규정해 내는 것이 됩니다.

‘명문’의 좌표에 안착한 이들의 과거와 현재는 존중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렇지만 그 바깥의 모든 인간을 루저로 규정해 내고, 발언권조차 강탈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소통은 언제부터인가 세대, 지역, 자본 등 여러 분화된 ‘자격’의 범주에서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절실한 ‘인권’, ‘생존’, ‘존엄’과 같은 단어조차, 발화할 권리를 가진 이들이 자선을 베풀듯 관심을 가져준 경우에야 비로소 잠시나마 화제가 됩니다.

그리고 ‘자격’의 하한선은 점점 높아지고 있습니다.

선에 들지 못한 이들은 자신을 스스로 루저로 규정하며 자괴감에 빠져들고, 동시에 다시 자신의 밑으로 새로운 자격의 선을 긋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자격이라는 선으로 구획된 사회에 이미 익숙합니다. 이 과정에서 사람은 갑과 을로, 다시 병으로, 정으로, 무한히 수직적으로 분류됩니다.

스스로 자격을 정할 자격

이 글을 쓰는 동안 발행된 김득중 한국비정규교수노조 사무국장의 슬로우뉴스 인터뷰 기사를 인상적으로 읽었습니다. (인터뷰 말미에 제 글을 즐겨 읽었노라고 언급해 주셔서 깜짝 놀랐습니다.) 김득중 사무국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시간강사 평균 연봉은 600만 원 정도로 추산한다. 박사까지 받은 고학력 인재의 평균 연봉 600만 원이 말이 되나. 특별대우를 바라는 게 아니다. 최소한 교육자, 연구자, 노동자로서 연구를 지속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달라는 거다.”

– “비정규직이 청소하고 밥하고 교육하며 학생도 결국 졸업하면 비정규직 된다” – 김득중 한교조 사무국장 인터뷰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인간은 노동을 통해 사회적 존재 근거를 만들어 냅니다. 다시 말해, 노동자이자 사회인으로 이 시대에 ‘동시’하는가, 이에 대해 명확한 자기규정을 내릴 수 없는 인간은, 시대적 존재 근거를 함께 상실하게 됩니다. 노동의 터전인 대학에서도, 그리고 사회 그 어디에서도, 동시성의 비동시성의 절망으로 자신을 유령화 하는 것이, 지금의 시간강사들입니다.

저는 서른을 넘기기까지, 인문학이라는 학문에 오래 매진해 왔습니다. 주목받는 연구자도 아니고 눈에 뜨일만한 업적을 남긴 것도 아니지만, 즐겁게 연구하고, 강의하고 있습니다. 자격론에 대해서는 저 스스로 그 어떠한 선도 더는 만들어 내지 않으며, 주변의 연구자들에게 그러하듯, 모두에게 다정다감한 시선을 보내려 합니다.

자격을 정할 자격은 자신에게 있습니다.

저 역시 강의실에서, 연구실에서, 버티어 내고 당당할 수 있다면, 내일도 대학의 노동자로 살아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한 자존감이 깨어지는 순간에, 아마 모든 것을 내려놓을 테지만, 어제도, 오늘도, 부끄럽지 않게 버티어 냈습니다.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 역시, 자기 삶의 터전에서 그렇게 스스로 존재 근거를 마련해 나가고 계실 것입니다. 당신의 삶에 무한한 존경과 응원을 보냅니다. 에필로그에서 이미 드렸던 말씀이지만, 부디 건투를 빕니다. 저 역시 제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동안 많은 관심과 격려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다음 주부터는 지방시 2편을 연재하려 합니다. 1편에서 다룬 저의 삶과는 별개로, 강의실에서 학생들과 함께 하는 것의 의미에 대해 쓸 작정입니다. 40여 명 학생들은 저의 가장 좋은 지도교수입니다. 그들에게 배운 ‘인문학’을 전하겠습니다. 이번 글은 ‘즐겁게’ 쓰려고 합니다. (‘시즌2’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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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309동 1201호
초대필자. 대학강사

지방대 시간강사, 인문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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