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위치:   » 연재 » 나는 시간강사다 » 나는 시간강사다: 어머니와 할머니

나는 시간강사다: 어머니와 할머니

지방시,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

허범욱(HUR) 作, 르네 마그리트 – The Son of Man(1946) 패러디

6. 어머니

나는 집에서 무언가 강요받아 본 기억이 드물다. 내 부모님은 좋게 말하면 ‘신뢰’로, 남들이 보기엔 ‘방임’으로 남매를 키우셨다. 학교에서 받아 온 가정통신문 장래희망란에 무언가 적을 때도 “너 하고 싶은 거 해”라고 말씀하셨고, 부모님 의견란에는 “자녀의 의견을 존중합니다.”라고 쓰셨다.

심지어는 대학에 갈 때도 “어느 대학에 가면 좋을까요?”하고 여쭙자 “네가 가고 싶은 학교와 과를 정하고 우리에게 말해주렴.” 하고 대답하셨다. 그래서 나는 아무 고민 없이 점수에 맞춰 원하는 대학, 원하는 전공을 선택할 수 있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만난 후 공무원 생활을 그만두고 전업주부가 되셨다. 아버지는 많지 않은 외벌이로, 하지만 어머니께 꼬박꼬박 네 식구를 건사할 월급을 가져다주셨다. 내 어머니는 그것을 무척 감사하게 생각했다. 아버지가 월급을 받아 온 날이면 집안에 삼겹살 굽는 냄새나 돈가스 튀기는 냄새가 퍼졌다.

구김살없이 행복한 가정이었다.

“직장 의료보험 되니?” 

어느 날 어머니는 내게 직장 의료보험이 되는지 물으셨다.

퇴임 후 두 분을 내게 피부양자로 등록하기 위함이었다. 당연히 좋은 대답을 드릴 수 없었다. 한평생 한 가정을 훌륭하게 먹여 살린 내 아버지가 퇴임을 앞두고 계신데, 다음 세대인 나는 부모님을 ‘부양’할 아무런 능력이 없다. 나는 서른이 훌쩍 넘어서도 여전히 ‘피부양’ 상태이며, 내 부모의 보호자가 될 수 없다.

어머니는 이런 나를, 점차 측은하게 여기셨다. 그러한 분위기가 감지될 때마다 나는 티를 낼 수는 없었지만, ‘당신에게 태어나서 정말 미안해요’하는 마음이었다. 서로 실망과 죄송스러움을 티 내지 않기 위해 애쓰는, 안쓰러운 배려가 계속되었다.

“휴, 이 할 일 없는 놈” 

자연스레 나는 공부를 핑계로 집에 잘 올라가지 않았다.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박사 2기 크리스마스 때였다. 나는 오래된 친구 몇과 함께 어머니의 집에서 저녁을 먹고 간단히 맥주를 마셨다. 고등학교 시절 천리안의 취미 동호회에서 만나 10년 넘게 모임을 가져오고 있는 친구들이었다.

가끔 밤늦게 이 친구들과 함께 집에 들어가면 어머니는 기꺼이 따뜻한 밥을 지어주시곤 했다. S는 은행 정규직이 되었고, Y는 디자인 회사에서 자리를 잡았으며, T는 벤처 회사에서 계속 살아남았고, D는 사법연수원에 있었다. 내 어머니는 친구들의 권유로 맥주를 몇 잔 드셨다.

어머니는 일어나며 내게 “휴, 이 할 일 없는 놈… 여기서 혼자 할 일 없는 놈” 하셨다. 내 어머니께 나는 “할 일 없는 놈”으로 규정되었다.

점점 더 멀어지는 집

박사 3기에 접어든 나는 명절이나 부모님 생신이 아니면 본가에 잘 들어가지 않았다. 한 번은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서울에 올라왔다가 버스터미널에서 차가 끊겼다. 지하철이 많이 남아 있었기에 충분히 서울 집에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강변역 화장실에 들어가서 앉았다. 7시간 정도만 버티면 터미널에서 첫차를 탈 수 있을 것이었다. 얼마나 지났는지,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때우고 있는데 누군가 문을 두들겼다.

“문 닫습니다, 이제 나오셔야 해요.”

막차가 끊기면 지하철 화장실도 폐쇄된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나는 밖으로 나와 여기저기 갈 곳을 찾지 못하다가 24시간 영업하는 커피숍에 들어가 커피 한 잔을 시키고 눈을 붙였다. 그러면서도 그저 어머니께 죄송한 마음이었다.

“친구 자식들은 다 좋은 기업 가던데…” 

며칠 전 어머니께서 내 자취방에 오셨다. 반찬을 조금 가져오셨고 어떻게 지내는지 묻고 아시안게임을 함께 보았다. 맥주를 한 캔씩 나누며 나는 왜 그랬는지, 이런 말을 꺼냈다.

“요즘 다들 많이 힘들다네요. 주변 친구들도 아직 자리 잡은 친구들이 별로 없고…”

어머니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이렇게 답하셨다.

“아닌데… 엄마 친구 자식들은 다 좋은 기업 가던데…”

정말이지 괜한 말을 했다. 내 어머니는 58년 개띠, 그저 평범한 베이비붐 세대의 한 사람이다. 아들 세대의 대부분이 아프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아프니까 청춘’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어머니께는 아픈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다. 무엇이든 감당하겠지만, 내 어머니를 사회적으로 부양하지 못하는 것은 도저히 견딜 수가 없다.

죄송합니다, 어머니…

어머니는 내가 책에 빠져 살던 어린 시절, 종종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원하면 언제까지나 공부할 수 있게 해줄게. 집을 팔아서라도 그렇게 해줄게. 넌 공부만 하렴.”

나는 지금도 그 목소리를 사랑스럽던 마음, 질감 그대로 기억한다.

하지만 용돈을 못 드릴망정 더 이상의 희생을 강요할 염치는 없어서, 일그러진 얼굴로 “저는 잘살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게 고작이다.

죄송합니다 어머니…

7. 할머니 

내 할머니는 96세까지 사셨다.

나를 예뻐해 나만 보면 사촌 누나들 몰래 용돈을 몇만 원씩 주머니에 욱여넣곤 하셨다. 내가 석사학위를 받아 왔을 때는 이렇게 물으셨다.

“이제 우리  OO가 선상님이 된 거냐, 그런 거냐?”
“저는 아직 학생이에요”

박사과정을 수료했을 때도 할머니는 “언제 선상님이 되는 거냐?” 힘겹게 물으셨다. 나는 “곧 될 거예요.”하고 어렵게 답했다. 할머니는 그런 나를 보고 “너 그러다 늙겠구나…” 하셨다. 그때 이미 귀가 어두워 몇 번이고 크게 반복해 말해야 했다. 그게 내가 기억하는 할머니와의 거의 마지막 대화였다.

마지막 선물 

할머니는 유일하게 예뻐했던 손자에게 용돈 한 번 못 받아 보고 돌아가셨다. 교통사고였다. 나는 병원에서 차게 식은 할머니를 붙들고 “미안해 할머니” 하고 엉엉 울었다. 무엇보다도, ‘선상님’이 되어 만 원짜리 한 장 드린 바가 없는 것이 견딜 수가 없었다.

강의를 시작하기는 했으나 학자금 대출을 갚는 것조차 버거워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기다리시면 저도 손자 노릇할게요.” 했던 것이 너무나 원망스러웠다. 할머니의 첫 성묘를 가는 길에 국화를 사 꽃잎을 뿌려 드렸다.

그것이 내가 할머니께 드린 처음이자 마지막 선물이다. (계속) 

좋은 기사 공유하고 알리기
슬로우뉴스에 커피 한잔의 여유를 후원해주세요. 필자 원고료와 최소한의 경비로 이용됩니다.

필자 소개

309동 1201호
초대필자. 대학강사

지방대 시간강사, 인문학 연구자.

작성 기사 수 : 35개
필자의 페이스북

©슬로우뉴스 | 개인정보취급방침 | 청소년보호정책 | 슬로우뉴스 안내 | 제보/기고하기 | 제휴/광고문의
(유)슬로우미디어 | 전화: 070-4320-3690 | 등록번호: 경기, 아51089 | 등록일자 : 2014. 10. 27 | 제호: 슬로우뉴스 | 발행인: 김상인 | 편집인: 강성모
발행소: 경기 부천시 소사로 700번길 47 1동 506호 (원종동, 삼신) | 발행일자: 2012. 3. 26 | 개인정보관리/청소년보호책임자: 강성모

Scroll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