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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의 탄생과 변천: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은 어디에서 왔는가

대중문화의 익숙한 아이콘 좀비. 좀비는 과연 어떤 역사적인 배경에서 탄생하고 성장했을까요? 콜럼버스의 아이티 발견에서 대중문화 아이콘으로서의 좀비를 완성한 것으로 평가받는 조지 로메로의 영화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이 탄생하기까지의 과정을 노모뎀 님이 파헤칩니다. (이 시리즈의 첫번째는 잡지 발행된  ‘월간 [그래픽노블]- 워킹데드 편'(피오니북스)을 바탕으로 합니다. -편집자)

1490년대 콜럼버스가 (철저하게 서구인의 관점이지만) 카리브 해역의 아이티를 발견했을 때 그곳에는 이미 적지 않은 토착민이 있었다.

콜럼버스의 지도 (퍼블릭 도메인)

콜럼버스의 지도 (퍼블릭 도메인)

토착민을 몰아닥친 건 스페인 점령군의 잦은 학살이었다. 게다가 전염병마저 해당 지역을 휩쓸었다. 100년 남짓한 사이 아이티 원주민은 그 수가 급격히 줄었다. 당시 스페인은 광활한 신대륙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에는 인력 수급에서 곤란함을 겪고 있었다. 그래서 스페인은 멀리 아프리카 대륙으로부터 수많은 흑인 노예들을 끌고 와 아이티 등의 아메리카 지역에 인위적으로 정착을 시켜나갔다.

이번엔 프랑스였다. 1600년대 후반부터 쇠락하는 스페인의 뒤를 이어 프랑스가 스페인의 식민영토에 발을 들여 놓았다. 이제 아이티의 지배자는 스페인에서 프랑스로 탈바꿈했다.

한편, 스페인, 영국, 네덜란드 등의 강성한 유럽 열강들을 누르며 프랑스 영토를 엄청난 규모로 확장했던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는 100년 동안 프랑스에 종교적인 자유를 허하는 법안이었던 낭트칙령을 1685년에 폐지하고 프랑스의 유일 종교를 가톨릭으로 강제했다. 이는 수많은 종교적인 반발을 불러왔지만, 절대군주의 위엄은 프랑스뿐 아니라 아이티 같은 다른 대륙의 식민지에도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아이티

아이티의 부두교

아이티에 끌려온 서아프리카의 노예들은 아이티에 얼마 남지 않은 토착민들이 갖고 있던 문화보다 아프리카 지역에서 갖고 온 문화를 융합시켜나갔다. 그렇게 많은 민족이 갖고 있던 문화들이 아이티에서 전혀 다른 모양새로 섞여나갔다.

서아프리카에서 끌려온 노예들

서아프리카에서 끌려온 흑인 노예들

서아프리카 민족들의 뒤섞인 문화 중 토속신앙은 초기에 단순하면서도 무속적인 기원과 생활습관과 관련된 미신들로 이뤄져 있었으나 루이 14세의 낭트 칙령 폐지에 따른 강제적인 식민지의 카톨릭 강요 정책은 이에 그 누구도 예기치 못한 결과를 끼치게 되었다. 아이티 땅에서 새로 생겨난 것이나 마찬가지이던 토속신앙에 서아프리카 민족들이 저마다 갖고 있던 민족신화의 개념과 로마 가톨릭의 예배양식들과 결합해 ‘부두'(Vodou)라는 새로운 종교가 탄생한 것이다.

아이티 사람들은 당연히 자신들을 탄압하는 유럽 열강의 지배세력에 상당한 반감을 품고 있었고, 단순한 토속신앙에도 강한 종교적인 탄압을 받게 되자 겉으로는 가톨릭 종교를 받아들여서 약간의 지역화를 거친 모양새를 보이면서도 실제로는 그런 모양새를 문화탄압을 피하기 위한 방패막이 역할로 쓰면서 그들만의 독립적인 종교로서 부두를 계속 발전시켜 나갔다.

아프리카에서 이주한 노예들은 아이티의 토속 문화와 결합해 부두를 발전시킨다. (사진: echophotoagency.com)

아프리카에서 이주한 노예들은 아이티의 토속 문화와 결합해 부두를 발전시킨다. (사진: echophotoagency.com)

부두교 주술로 나타난 좀비

가톨릭 신앙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사제의 예배는 아프리카 특유의 주술문화와 뒤섞여 색다른 철학으로 나타났다. 그중 하나가 바로 좀비다. 좀비는 ‘이미 죽은 사람을 다시 주술사가 되살려 통제를 할 수 있다’는 믿음이었다.

좀비는 본래 영혼과 육체의 영역에 대해 ‘영혼은 오직 신만이 다룰 수 있다’는 숭고한 믿음의 부두 철학에서 나왔다. 이미 죽은 사람을 어떤 주술로 다시 움직이게 만든다 해도 그 영혼은 이미 신의 손에 닿아 있는 것이니 영혼이 다시 돌아오기는 어렵다고 여겨서 만들어진 개념에 관한 비유였다.

한편 1789년 프랑스에서 대혁명이 일어나고 프랑스 인권 선언이 배포되자 이는 곧 아이티 사람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는데, 다수의 아프리카 태생 유색인들은 조직화한 혁명을 일으켜 자신을 점령하고 있던 프랑스뿐 아니라 영국과 스페인의 잔류세력을 몰아내고자 전쟁을 시작했다. 때마침 프랑스 공화파에서 주도한 식민지 노예제도의 폐지에 큰 힘을 입어 마침내 아이티는 1804년 프랑스로부터 독립하는 최초의 북아메리카 국가가 되었다.

아이티인이 독립을 쟁취해 나가는 과정에서 부두는 그들의 민중 종교로서 지대한 역할을 했다. 동시에 그 승리에 신화적인 색깔을 입히는 많은 무용담을 낳았다. 그런 전설 속에서도 ‘사람을 조종하는 주술’은 매력적인 전설로 자리잡혀갔다.

주술사가 살아있는 사람을 영혼이 없는 노예처럼 만들 수 있다거나 완전히 죽은 시체를 다시 움직이게 한다는 괴담들은 그렇게 아이티 부두교가 낳은 대중문화로 그 지역을 떠돌았다. 그 종교적인 ‘무용담’은 1915년 아이티를 무력으로 점령해 1930년대 초반까지 군정을 실시했던 미국인들에게도 퍼졌다.

아이티 혁명 (그림: Battle of Vertières in 1803)

아이티 혁명 (그림: Battle of Vertières in 1803)

영화 속으로 무대를 옮긴 좀비

seabrook1930년대 서아프리카 여행 후 ‘직접 체험한 식인문화’를 글로 소개해서 미국 대중문화를 경악하게 했던 이가 있었다. 저널리스트 윌리엄 시브룩(William Seabrook)이었다. 그는 그보다 앞선 1929년 자신의 실제 체험담이라는 형식으로 아이티의 부두교를 소개하며 주술사의 시술에 빠져 정신이 통제당한 채 노예처럼 일하는 좀비에 관해 언급한다.

‘보커’라고 불리는 어두운 주술사는 살아있는 사람의 영혼을 마술로 빼낸다고 하며 실제 시브룩이 목격한 바로는 약을 써서 사람을 가사 상태에 진입하게 만든 후 그가 다시 일어나면 보커의 말을 듣는 노예가 되는데 이를 좀비가 되었다고 일컫는 것이었다.

이런 유형은 있을 법한 인신매매 혹은 노예 부림에 흑마술의 신비한 요소가 결합한 것이어서 곧 많은 사람의 흥미를 끌었고, 1932년에 [좀비]라는 이름의 연극으로 탄생해 브로드웨이에 올려졌다.

이 연극을 접하고서 큰 흥행 예감을 느낀 배우 출신의 영화감독 빅터 할페린은 동생인 에드워드 할페린이 제작을 맡고 본인이 각본을 쓴 영화 [화이트 좀비]를 같은 해 만들어 호평과 함께 좀비라는 요소를 처음으로 장편영화 속에 등장시켰다.

화이트 좀비 (1932)

화이트 좀비 (1932)

‘좀비’는 1932년 당시 아이티의 흑인들이 구사하는 부두 마술을 뜻하는 분위기였기때문에 단어가 전하는 어감이 문명인이라기보다 비경 속의 유색인종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또 당시의 시대 여건상 유색인이 극장영화에 출연하는 것은 상상도 못 할 상황까지 감안해 제작된 ‘화이트 좀비’는 제목 그대로 백인 주연배우가 아이티에서 겪게 되는 좀비 사건이 주를 이루고 있는데, ‘드라큘라’로 큰 명성을 얻은 벨라 루고시를 전격 기용하여 부두 주술을 부릴 수 있는 주술사로 등장시키고 그 마법사의 술수로 인해 마약을 마시고 좀비가 되는 피해자들이 나오는 내용이었다.

억지스럽게 태어난 두 번째 좀비 영화

[화이트 좀비]는 할페린 형제의 독립영화에 가까웠지만 나름대로 ‘새로운 장르의 시작’을 꿈꿨던 기획작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할페린 형제는 [화이트 좀비]를 만들면서 영화의 ‘소재’를 제공한 쪽에 가까웠던 윌리엄 시브룩과 영화의 원작자로서 계약을 맺고 제작진 명단에 표기하였지만, ‘좀비’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서구사회에 알린 장본인이자 해당 단어와 개념을 그대로 갖다 쓴 원작(?) [마술의 섬]에서 벗어나 후속 영화를 만들지는 않았다.

수퍼내추럴 (1933)

슈퍼내추럴 (1933)

그 이유는 그들이 생각한 ‘이 영화 장르의 위치’가 조금 더 넓은 분야에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는데 할페린 형제가 시도했던 새로운 장르가 구체적으로 어떤 느낌이었는지는 이듬해의 후속작 영화제목에 그대로 드러났으니 그 작품은 [슈퍼내추럴] 즉, 초자연이었다.

할페린 형제의 [슈퍼내추럴]은 흥행과 비평 양쪽에서 그들에게 큰 실망을 안긴 작품이었지만, 그 이전까지 고딕 장르의 괴기영화와 괴물영화 사이에서 조금씩 차별점을 보여오던 특성들이 이런 영화들을 통해 ‘오컬트’라는 새로운 공포영화 장르로서 존재감을 나타내기 시작하게 된다.

꽤 실험적인 시도였던 [슈퍼내추럴]의 흥행이 그다지 좋지 않은 결과를 낳는 바람에 할페린 형제에게는 몇 년간 뜻하지 않은 고생길이 열렸고 두 형제는 결국 조금 더 안전한 다음 작품을 만드는 길을 택했다. 비평도 흥행도 좋았던 ‘화이트 좀비’의 후속작을 만들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전작에 이어 4년 만에 만들어진 후속편 [좀비들의 반란]은 졸작이라는 비평을 면치는 못했지만, 금전적으로는 제작사의 숨통을 틔워준 작품이 되었다.

그러나 흥행의 성공과 별개로 ‘좀비들의 반란’은 전작과 비교하면 무척 떨어졌던 완성도 외에도 많은 문젯거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좀비 영화에 대한 법정소동이 마침내 탄생시킨 것

[좀비들의 반란]은 전작 좀비 영화에 출연했던 주연배우 벨라 루고시의 눈동자 주시 장면을 재활용해서 빈축을 사는가 하면 아이티와 아무런 관련이 없어 보이는 캄보디아를 역시 아무런 논리 없이 좀비 주술이 탄생한 근거지로 설정하는 오리엔탈리즘의 무지를 보였으며 전작영화의 기초 텍스트인 ‘마술의 섬’에서 여전히 많은 부분을 끌어왔지만, 전작과 달리 원작자(?) 윌리엄 시브룩의 이름을 거론조차 하지 않는 등 많은 구설에 휘말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흥행은 그럭저럭 이뤄져 갔지만, 그런 부정적인 요소들은 새 발의 피에 지나지 않을 큰 장애물이 제작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전작 [화이트 좀비]의 투자사였던 ‘어뮤즈먼트 시큐리티’ 가 자신들에게 아무런 동의도 얻지 않은 채 제작된 ‘후속작에 대해 ‘좀비라는 이름을 제목으로 쓴 모든 영화의 권리’를 주장하는 큰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좀비들의 반란 (1936)

좀비들의 반란 (1936)

해당 사건을 맡은 뉴욕 대법원의 헨리 호프만 판사는 투자사의 권리 주장에 대해서 다양한 판례와 사례를 심리한 끝에 결국 원고의 손을 들어주며 할페린 형제에게 거액의 배상액을 투자사에 물어내도록 조처했지만, 영화 개봉일을 앞두고 난처한 상황에 빠진 영화 제작사 입장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온건함을 보였다.

대중 예술문화 쪽에 일가견이 있었던 호프만 판사는 ‘좀비라는 이름의 영화 제목에 대해 투자사에 모든 권리가 있다’는 주장을 일축하고, 단지 [좀비들의 반란]이 [화이트 좀비]의 후속작이라는 홍보나 관련 보도만을 금지해 ‘동의 없이 만들어진 후속작의 권리’만을 명쾌하게 지켜주는 판결을 내려준 것이다.

그리하여 할리우드 영화계는 대좀비 시대를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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